세상 보기를 물거품같이
부가세신고를 하며
매년 반기때만 되면 부담스러운 것이 하나 있다. 부가세에 관한 것이다. 개인사업자의 경우 일년에 두 번 신고하게끔 되어 있는데, 전반기의 경우 7월 이맘때 쯤이다.
전반기 부가세신고를 마치고 나니 홀가분하다. 그런 부가세신고도 예전과 비교하면 매우 간편해졌다. 모든 것이 전자화 되어 있어서 인터넷으로도 신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의무적으로 인터넷을 이용한 전자계산서발행제도로 인하여 ‘집계’도 가능해져서 부가세신고 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을 준다.
매출과 매입에 대한 부가세 신고를 하면서 지나간 반기 동안을 다시 돌아 볼 수 있었다. 수 많은 계산서를 보면서 하던 일에 대한 기억이 떠 올랐는데,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좋았던 것도 있고 좋지 않았던 것도 있을 수 밖에 없다.
모든 거래는 계산서를작성하여 결재가 완료되면 끝난다. 그 경우 더 이상 돌아 볼 필요도 없고 기억에 남지 않는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클리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결제로 남아 있는 경우 항상‘현재진행형’이다. 더구나 시간만 끌며 언제받을지도 모를 경우 항상 기억을 놓지 않으려 한다. 그러다 아예 결재가 안되고 영원히 미결인체로 끝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항상 기억에 남는다. 또 문득 그 기억이 떠 오를 때 마다 불쾌한 감정을 유발한다. 삶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마음의 응어리와 한(恨)
삶의 과정에 있어서 완결된 것은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는다. 매일 먹는 밥의 반찬이 기억에 남지 않듯이 마음에 부담이 되지 않는 것은 금새 망각된다. 하지만 마음에 꺼림찍하다거나 걸리는 것, 캥기는 것등은 미해결 된 것이기 때문에 현재 진행형으로서 문득 문득 떠 오르게 된다.
더구나 그 강도가 심한 것은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 더 자주 떠 오르게 될 것이다.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거나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더거나 이루지 못한 것이 있다고하였을 때, 이런 응어리들이 마음에 맺히면 ‘한(恨)’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민족은 한이 많은 가 보다. 노래가사에도 한에 대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이 많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불교를 신봉하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한이 많다는 것은 죽어서 좋은 세상에 태어나기 어려운 것으로 본다. 특히 초기불교에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개구리 ‘만두까(Manduka)’이야기
초기불교에서는 죽을 때의 마음가짐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마지막 죽음의 의식이 일어날때 어떤 마음이 떠 오르느냐에 따라 ‘내생(來生)’이 결정된다고 보기 때문이디.
그런데 한이 많은 사람은 그 한이 업이 되어 죽는 순간 ‘표상(image)’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표상이 바로 내생이라는 것이다. 살인을 저지른 자가 마지막 죽는 순간 끔찍한 표상을 보았다면 바로 그 세계로 떨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반면 행복하고 아름답고 멋진 표상이 떠올랐다면 그런 세계에 태어나는 것으로 본다. 좀 극단적인 예이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존께서 각가라의 강변에서 짬빠시의 주민들에게 법을 설하실 때 개구리 한 마리가 세존의 목소리에서 표상을 취했다. 한 목동이 막대기에 기댄 채 그의 머리를 눌리면서 서 있었다. 그는 죽어 곧 바로 삼십삼천의 12유순이나 되는 황금궁전에 태어났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그곳에서 천녀의 무리에 둘로싸여 자신을 발견하고 ‘오, 참으로 내가 여기에 태어나다니! 내가 어떤 업을 지었을까,’ 하고 살펴 보다가 세존의 목소리에 표상을 취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는 곧바로 궁전과 함께 세존께 가서 세존의 발아래 절을 올렸다. 세존께서는 아시면서 물어 보았다.
“이런 신변과 이 만큼의 수행원으로서 광휘를 드날리며 아름다운 안색으로 사방을 비추면서 어떤 자가 나의 발아래 절을 하는가?”
“저는 전생에 물에서 사는 개구리였습니다.
설법을 들을 때 목동이 저를 죽였습니다.”
(청정도론, 제7장 여섯 가지 계속해서 생각함)
청청도론에서 불수념을 설명할 때 나오는 이야기이다. 전생에 개구리이었던 ‘만두까(Manduka)’라는 천신이 ‘삼십삼천’이라는 천상에 태어나게 된 이유에 대한 이야기이다.
죽는 순간의 마음가짐
개구리같은 미물도 천상에 태어 날 수 있을까. 초기불교에서는 가능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죽는 순간 어떤 표상을 취하느냐에 따라 내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내생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살면서 지었던 행위의 회상인 ‘업(kamma)’이 나타날 수 있고, 업과 관련된 주변 조건인 ‘업의 표상(kamma-nimitta)’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구리는 마침 부처님의 설법장소에 있었다. 부처님의 설법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저 듣기 좋아서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지나가던 목동이 꼬챙이로 개구리를 찔러 죽었는데, 충만된 마음으로 인하여 삼십삼천이라는 천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죽는 순간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려 주는 교훈이다.
털어 버리고 가야
그렇다면 살아가면서 한을 남기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설령 가슴에 맺힌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털고 넘어가야 한다. 가슴속에 묻어 두고 자꾸 꺼내 본다면 자신만 손해이다. 상대방에게 해를 끼친 경우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사람들은 가급적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삶의 과정에 있어서 알게 모르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는 적지 않다. 먼 옛날 이야기일지라도 마음속에 항상 남아 있어서 후회하거나 회한에 잠기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아비담마에 있어서 ‘불선(不善)’한 것으로 본다.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참회’하는 것은 문제없지만 가슴에 쌓아 놓고 두고 두고 꺼내 본다는 것은 해로운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한이 서려 있거나 후회하는 마음 역시 좋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털어 버리고 가야 하는데, 이는 마음의 찌꺼기를 남기지 말자는 말과 같다.
세상 보기를 물거품같이
그런 한과 마음의 찌꺼기를 남기지 않았을 때 더 이상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때 죽음의 신이 있다면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이에 대한 게송이 담마빠다(법구경)에 있다.
Yathā pubbulakaṃ passe 야타 뿝불라깡 빳세
yathā passe marīcikaṃ 야타 빳세 마리찌깡
evaṃ lokaṃ avekkantaṃ 에왕 록깡 아웩칸탕
maccurājā na passati 맛쭈라자 나 빳사띠.
만일 누구든지 간에 세상 보기를 물거품같이 보고
자기 마음을 아지랑이 같이 본다면
그의 발자취, 마라도
그 주인을 찾지 못하리.
(담마빠다, 170번 게송, 거해스님역)
여기에서 세상은 오온이고, 마라는 죽음의 왕을 뜻한다. 억수 같이 비가 내릴 때방울은 떨어져 물거품을 남기고 이내 사라지곤한다. 마찬가지로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고 물거품처럼 본다면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게송에서 주인을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무아(無我)임으로 주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왕이 아무리 그를 찾아 데려 가려 해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도대체 고디까는 어디로 갔는가?
또 하나의 가르침이 고디까 비구에 관한 것이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사방팔방으로 찾아보았지만
나는 그를 발견할 수 없으니
도대체 고디까는 어디로 갔는가?”
(상윳따니까야 , S4.23 고디까 경- Godhika Sutta)
고디까경(Godhika sutta SN4.23).docx
역시 죽음의 왕인 마라가 죽은 고디까 비구를 찾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마라는 이곳 저곳으로 죽은 고디까비구를 찾으려 하였으나 실패 하였다. 고디까비구는 ‘열반’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삶의 과정에 있어서 형성된 한이나 마음의 찌꺼기등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죽었을 때 죽음의 왕은 재생연결하는 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재생연결식은 반드시 업이 형성되어야만 그 업에 해당되는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데, 업이 없으니 마음의 찌꺼기를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부가세신고를 하면서 일일이 거래내역을 조회하는 과정에서 아직 미결된 것을 발견하였을 때 두고 두고 마음속에 담아 놓는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도저히 받지 못할 상황이 되었을 때 영원히 미결인체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돈을 받을 수 없는 것은 고사하고 마음의 응어리로 남아 있다는 것은 본인으로 보았을 때 커다란 손해이다. 빨리 털어 버려야 되는데 문득 문득 생각날 때 마다 불쾌한 감정과 함께 욕이 나온다면 점점 불선업을 짓게 되는 것이라 본다.
그럴경우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하고 넘어 가면 되지만 그렇게 잘 되지 않은 것을 보니 아직 수련이 덜 되어서 일 것이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남에게 피해를 주어 가슴에 응어리를 남게 하였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커다란 죄를 짓는 것으로 본다.
2011-07-2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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