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신도가 아닌 수행자로 살기, “출가와 재가의 역할을 찾다”토론회를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1. 7. 21. 12:37

 

 

신도가 아닌 수행자로 살기, “출가와 재가의 역할을 찾다토론회를 보고

 

 

 

 

 

 

 

 

 

 

인터넷의 위력을 실감하는 것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일하면서 생중계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것중의 하나가 조계종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한국불교중흥을 위한 대토론회일 것이다.

 

매월 한 번 열리는 토론회에서 이번달의 주제는 출가와 재가의 역할을 찾다이었다. 평소 관심있게 생각하고 있었던 주제이고, 또 불교계에 있어서 매우 뜨거운 이슈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관심있게 지켜 보았다.

 

잘 나가고 있다”vs 이대로는 안된다

 

이런 토론회가 열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불교가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년 유일신교도에 의한 봉은사 땅밟기 사건이 벌어진 이래 템플스테이 예산의 대폭삭감과 그에 따른 여당정치인의 산문출입금지등 일련의 굵직한 이슈가 있었는데, 이와 같은 모욕을 더 이상 당하지 않기 위한 제도적장치를 마련해 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부 스님들은 아직까지 위기감을 별로 느끼는 것 같지 않다. 토론자 중의 어느 스님은 현재 한국불교는 잘 나가고 있다고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대부분 토론 참가자는 이대로는 안된다라는 것이었다. 시스템과 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조치의 일환으로서 출가와 재가의 역할에 대하여 열띤 토론이 벌어졌는데,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거의 불가능한 일

 

먼저 동국대 조기룡교수는 현재 스님들이 모든 것을 쥐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비판하고, 이에 대한 출가자와 재가자의 역할을 분담할 것을  주장하였다. , 출가자는 수행과 교화에만 몰두하고, 교단 경영은 재가자에게 맡기자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오래 전 부터 제기되어 온 불교계의 숙원사항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출가자들이 이를 순수하게 받아 들여 줄지는 의문이다. 일문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한다. 종회에서 빈 껍데기 같은 내용의 안건도 통과되기 어려운 현실에서 재가자에게 교단 경영을 맡기자는 법안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회를 압박하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불교 NGO등 외곽단체를만들어 힘을 키운 다음 압박을 가하면 들어 줄 가능성이 조금은 있다는 것이다.

 

포교사의 위상은

 

한국불교에 있어서 출가자와 재가자와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한 마디로 종속관계라고 볼 수 있다. 조계종 종헌8조에 종단은 승려와 신도로 구성된다라고 명기 되어 있지만 이는 하나의 선언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포교사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재가자출신의 포교사단장이 말하기를출가자의 권한은 무한대이고, 재가자의 권한은 매우 한정적이다라고 하였다. 그 예로서 포교사의 위상을 예를 들고 있다.

 

현재 조계종단의 포교사가 수천명에 달하지만 이들이 준 성직자로 대우를 받기 보다 출가자의 보조적 활동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스님이 허락한 범주에서 활동이 가능한데, 이론 현상은 종단이 허락한 사찰이나 시설, 단체에서만 활동이 가능하도록 못 박아 놓았기 때문이라 한다.

 

세상물정 모르는 스님들이

 

94년 이전까지만 해도 준성직자로 대우 받던 포교사가 이 정도라면 재가자가 받는 대우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중앙신도부회장은 승가가 재가를 존중해 주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일까 재가자 역시 승가를 진실로존중해 주지 않는다고 또 말하였다. 결국 서로 존중해 주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이는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승가의 위의가 저하된 것이 주된 요인이고, 또 하나는 재가자들이 기복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출가자가 수행과 교화라는 본분에서 벗어나 세간적 삶을 추구하였을 때 당연히 존경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 예가 몇가지 있는데, 그 중 수익사업을 들 수 있다.

 

최근 조계종에 수익사업을 하다 접은 것이 몇가지 있다고 한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납골당사업같은 것이다.

 

세상물정에 대하여 잘 모르는 스님들이 업체의 농간에 놀아나 문제를 일으켜 승가의 위상을 크게 손상하였는데, 이런 사건이 터질 때 마다 승가의 위상은 점차 낮아 지고 재가자는 물론 일반국민으로 부터도 존경받지 못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재가자는 문제 없는 것일까.

 

재가가 출가자로 부터 무시당하는 가장 큰 요인은 기복만을 추구하는 신행태도일 것이다. 이런 재가자들에게 사찰운영과 교단운영권을 넘긴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넌센스라는 것이다.

 

기복에만 매달렸을 때

 

교단이 4부대중으로 이루어져 있고, 승려와 신도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출가와 재가의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로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고 있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스님들이 종단의 모든 권한을 무한대로 향유하고 있고, 재가는 단지 스님을 따르는 신도로서 역할 밖에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주된 이유는 재가자가 입학, 승진, 사업, 치유와 같은 4대 소원성취 기도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기도만 하는 존재, 또는 보시만 하는 존재로서 머문다면 영원히 신도상태를 벗어 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출가와 재가가 평등한 관계로 유지되면서 한국불교의 중흥을 가져 올 수 있을까.

 

이는 출가자가 재가자에게 시혜를 베풀듯이, 우는 아이에게 먼저 젖주는 식으로 찔끔 찔끔 종단의 경영에 참여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재가자가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것 중에 직지심경이 있다. 이는 현존하는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서 구텐베르그의 것보다 80년이 앞선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자랑스런 문화유산일 뿐 혁명적인 발명품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를 혁명적인 발명품으로 보고 있다. 이는 유럽에 있어서 16세기에  종교혁명을 유발하였기 때문이다.

 

중세유럽에 있어서 모든 바이블은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독일이나 영국, 프랑스와 같은 나라의 민중들은 글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사제들은 모든 권한을 무한대로 가지고 있었다.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말이 있듯이 교회권력은 부와 권력을 추구하고,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 타락이 극에 달하였다.

 

이런 때 이와 같은 문제점을 낱낱이 고발하는 방이 붙게 되고 자국어로 된 바이블이 번역되었다. 마침 이때 금속활자가 발명되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자국어 바이블과 개혁을 바라는 문건들이 광범위하게 퍼져서 결국 종교개혁(Reformation)으로 발전하였다. 한국불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역할을 분담하면 되는데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하여 출가와 재가의 역할에 대하여 토론을 하였지만 반영이 되지 않는다면 토론으로 그치고 말 가능성이 농후하다. 설령 토론내용에 공감하여 법안으로 만들기 위한 제도화를 추진할지라도 종회를 통과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한다.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승가에서 사찰이나 교단경영권을 재가에게 넘겨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가와 재가의 역할을 찾다토론의 제목이 모든 답을 다 말해 주고 있다. 이는 역할에 관한 문제이다. 어떤 일을 할 때 각자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역할에 따라 일을 분담하여 하는 것이 매우 효율적이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에 있어서 출가와 재가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 역할을 분담하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따라서 출가와 재가의 역할을 찾다는 주제는 결국 출가와 재가가 역할을 분담한다라고 하면 될 것이다. 즉 출가자는 출가자의 역할을 하면 되고, 재가자는 재가자의 역할을 하면 된다. 이런 분담의 가장 기본이 바로 출가자는 수행과 교화이고, 재가자는 사찰과 교단운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역할에 대하여 출가자가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불교개혁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너무 많이 변한 세상

 

출가자가 모든 권한을 쥐고 있기에는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하였다. 과거 유럽에서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인하여 누구나 자국어로 된 바이블을 접하여 종교혁명이 일어났듯이, 현재 한국불교에서도 그와 같은 혁명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한문으로만 되어 있는 불교경전은 출가자들이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결과 재가자는 어려운 한문으로 된 경전의 내용을 이해 알 수 없어서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과 같은 매우 심플한 명호를 하거나 기복만을 바라는 불교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번역한 경전과 논장, 주석서 그리고 수행방법이 도입된 이 때 더 이상 기복에만 매달리지 않게 되었다. 단지 모든 현상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보통신과 인터넷의 발달로 인하여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담겨 있는 초기불교를 접할 수 있어서, 이는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발명에 따른 자국어 바이블이 보급되는 것 못지 않은 불교혁명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신도가 아닌 재가수행자로 살기

  

스님들이 모든 것을 다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과거에 그렇게 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어서 스님들만으로 종단을 꾸려 가기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재가자와 함께 역할을  분담해야 하는데, 종단의 주요직책을 재가자들에게도 개방하고, 종회에 재가자도 포함시켜야 한다.

 

그리고 사찰운영과 종단의 경영을 재가자들에게 맡기고 스님들은 오로지 수행과 교화하는 것에 힘써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출가와 재가의 역할이고 동시에 역할분담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거의 백프로이기 때문에 재가자가 깨어 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일 단계는 신도라는 칭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신도가 되기 보다 수행자적인 삶을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래서 신도가 아닌 재가수행자가 되었을 때 한국불교는 자동적으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되어 있을 것이다.

 

 

 

2011-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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