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산중승(山中僧)이 생각하는 불교는

담마다사 이병욱 2011. 7. 23. 12:28

 

 

 

산중승(山中僧)이 생각하는 불교는

 

 

 

 

생각이 맞아 떨어졌을 때

 

출가수행자들의 세계에 대하여 잘 모른다. 법우님들끼리 사찰순례를 다니긴 하지만 출가자들의 근처에도 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왜 출가자들은 왜 산중에서만 사는 것일까.

 

글쓰기가 불교와 관련된 것이라서 불교와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비판적인 글을 많이 올렸다. 그런 글 중의 상당수는 왜 도시에 절이 없을까왜 스님들은 산중에만 머물까에 대한 글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출가자들이 세상이 싫어서 산중으로 들어갔고, 산중으로 들어간 이상 더 이상 세상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 바 있다. 그런 생각은 맞아 떨어졌다. 최근 어느 산중승(山中僧)’이 장문의 댓글을 달아 주었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왜 산에만 있냐구요?”

 

스님은 백발의 노승으로서 우리나라 3대 종찰중의 하나인 문중의 사문이라 하였고, 백두대간 깊은 숲속 토막집에서 나무 가꾸고 산야초 캐며 淸貧樂道(청빈락도)생활로 한가한 수행하는 이라 하였다. 스님은 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중들이 왜 산에만 있느냐구요? 본래 세속이 싫어서 머리깎고 산으로 들어온 것이니까 / 그리고 산속이 편하니까.”

 

산으로 들어간 이유는 간단하다. ‘세속이 싫어서이다. 어떤 거창한 생사윤회문제라든가 중생구제를 위해서 입산했다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초기경전에서 보는 랏타빨라비구의 교과서적인 출가이유(출가이유, 랏타빨라 경,Ratthapala Sutta)와 다름을 알 수 있다. 또 법륜스님처럼 재가에서 20년간 법사로 교화활동을 하다 스님이 되어 여전히 교화하는 케이스와도 다름을 알 수 있다.

 

또 산에만 있는 이유에 대하여 산속이 편해서라고 하였다. 그 편한이유는 산속이 청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역으로 도시의 생활은 오염원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편하게 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산속에서만 사는 스님들은 중생교화는 언제하는 것일까.

 

 

산중 스님들이 도시 교화를? 왜요? 무엇때문에

 

 

사실 도시에 사는 불자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스님들이 도시에 나와서 가르침을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유일신교와 경쟁을하여 불교가 널리 퍼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도시에서 사방을 둘러 보아도 십자가천지일 뿐 절은 보이지 않는다. 설령 절이 있다고 할지라도 점집인지 무당집인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영세하고 볼품 없어서 보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그런 도시에서 정법을 펼쳐서 유일신교 못지 않게 지역주민을 위하여 봉사도 하고, 불교세도 넓혀 감으로 불자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해 주는 선지식들을 간절히 바라는지 모른다.

 

하지만 산중승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스님은 도시에서 중생들의 교화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답을 주셨다.

 

 

산중 중들이 도시 교화를? 왜요? 무엇때문에 우리가 죽고 살기로 세속중생들을 교화 해야 합니까? 그럴일 없습니다. 그런건 도시땡중들에게나 시키십시요.”

 

 

산중에 사는 스님들이 중생들을 교화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도시의 중생교화는 도시에서 사는 스님들이 해야할 의무라고 말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스님들도 크게 두가지 부류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부류는 산중에서 수행에만 전념하는 스님들이고, 또 한 부류는 도시에서 사는 스님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산중승과 도시승은 서로 교류가 없는 것 같다.

 

스님의 글을 보면 도시의 절집에서 산중승들에게 하룻밤 묶을 수 있는 방도 내주지 않는 실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돈이 있어 보이는 여신도가 오면 반갑게 맞아 준다는 것이다.

 

그런 도시승과 산중승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스님들이라는것이다. 산중승들은 수행을 하며 청정하게 살아가지만, 도시승들은 포교보다 돈이 되는 것에 더 매달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시의 사찰에서 49재나 영가천도따위나 하는 굿당정도로 보는 것이 산중승들의 생각인 것 같다.

 

나이롱 뽕으로 얻은 도가 아니기에

 

그렇다면 산중승들은 전혀 교화를 하지 않는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제발로 스스로 찾아 오는 사람들에게만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길잃은 중생들이 길을 물어면, 그때서야 길을 가르쳐 주려고' 서있는 겁니다.길을 묻는 답답한 입장이니까
답답한
물어라. , 공손하게 예의를 차리고... . 그러면 답을 가르쳐 주리다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묻기 전에 먼저 설교 따위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물을 찾지 않는 소에게 강제로 물을 먹일 수 없고, 길을 묻지 않는 자에게 길을 말해 줄 수 없는 이치와  같다는 것이다. 그것이 스님들의 계율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쉬운 자가 삼배등을 하면서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고 물어 보았을 때 길을 가르쳐 주는데, 그것이 장광설일 필요는 없고, 단지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머리를 끄덕여 주는 것, 방긋이 미소지어 주는 것으로 족할 때 도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선문답식 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자비행을 베푸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물어 보아야만 길을 가르쳐 주고, 가르쳐 주되 장광설이 아닌 매우 심플한 가르침을 주는 것은 다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한다. 그것은 나이롱 뽕으로 얻은 도가 아니고, 산중에서 수십년간 처절한수행으로 어렵게 깨우친 도이기 때문에 싸구려 물건 팔듯이 아무에게나 대고 외칠만한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인식에 대한 놀라운 사실

 

스님의 글을 읽어 보면 산중승들과 도시승들의 세계가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산중승들은 도시승들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음을 알 수 있고, 도시승들 또한 산중승들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다.

 

문제는 산중승들은 산중에서 나올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고, 도시승들은 정법으로 포교하기 보다 하나의 밥벌이 수단으로 매불행위하는 것으로 비추어 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었을때 한국불교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런 주제에 대하여 여러차례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리고 나름대로 해법도 제시해 보았다. 그런 해법 중의 하나가 산중에 있는 스님들이 도시에 나와서 유일신교와 진검승부를 벌이라는 요구이었다.

 

하지만 스님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수행자들이 왜 그딴 승부를 하느냐고 반문한다. 수행자들에게 이기고 진다는 개념이 없는데, 도토리 키재기 식의 찌질한 장난질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불교가 처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었다.

 

 

만약 불교가 그 인연을 다하여 '말살'을 맞이해야 할 운명이라면 그냥 말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연없는 중생[우빠까]도 붓다를 떠났듯이... 인연없는 세속중생들이 불교를 떠나서 [야훼]한테 가려면 그렇게 하랄수 밖에...”

 

 

산중에서 수십년간 수행을 하고, 그것도 이름있는 문중의 사문이 아무리 댓글이라지만 위와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보통불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실망시켜 줄 것임에 틀림없다. 마치 인도에서 불교가 멸망하는 것을 보는 듯 하다.

 

대체 불자들없는 사문이 존재할 수 있을까. 중생들이 불교를 떠나 모두 야훼를 믿게 되었을 때 승단이 존속할 수 있을까. 하지만 스님은 불교는 말살되지 않는 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주의 진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생이 있건 없건 간에 진리는 항상 상주하기 때문이라 한다.

 

세속에서 불교가 흥하건 망하건

 

그런데 산승들은 왜 위와 같이 세속에서의 불교가 흥하건 망하건 관심이 없는 것일까.

 

산중승이 바라보는 불교는 두 개인 것 같다. 하나는 세속인이 믿는 세속불교이고, 또 하나는 출가수행자들의 수행불교이다. 이처럼 불교를 이원론으로 구분하여 보는 것이 산중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의 생각처럼 보인다.

 

그런 스님에게 있어서 세속불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것 처럼 보인다. 불교가 인연을 다하면 없어질 수도 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세속에서 불교가 사라지는 현상에 대하여 산중승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다음의 글이 핵심을 찔러 준다.

 

 

출가승려'들이야 모두들 세속인연을 다끊고 산중으로 들어와버린 몸인데 세속인연에 연연할 일 없쟎습니까?”

 

출가자들은 세상이 싫어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속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인데 세속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세속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세속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고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이제까지 산중의 스님들이 도시로 나와 교화에 힘써 달라고 한 글을 수 차례 올렸으나 그런 행위가 무용지물이었음을 확인 하는 순간이다.

 

스님은 세속인들에게 불교가 꼭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속중생들의 사정이니까 세속인들끼리 불교가 흥하던 말살되던 알아서 할 일이라 한다.

 

하지만 세속에서 불교가 쇠락하여 망하거나, 말살되어 더 이상 불교를 찾을 수 없어도 산중에 가면 불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목마른 자들이 물을 찾듯이 답답한 중생들이 찾아 오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찾아 오던 말던 중생들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초기불교에 대한 산중승의 인식은

 

도시에서 불교는 보이지 않는다. 산중에 가아만 불교를 볼 수 있는 현실이다.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목말라 하지만 주변에 절이 없다 보니 불교를 만나기 위하여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도 예를 갖추고 물어 보아야 한다.

 

이렇게 접하기 어려운 불교가 정보통신과 인터넷시대를 맞이 하여 누구나 알게 되었다. 그것도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는 불교가 아니라 우리말로 해석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담겨져 있는 경전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비록 많지는 않지만 부처님당시의 수행법을 가르쳐 주는 수행처도 있어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신행이 아닌 수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수행처에서의 가르침은 산중승들과는매우 대조된다.

 

도시에 있어서 수행처는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에 관한 것이다. 이는 테라와다불교의 전통에 있어서 정법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 교학과 수행과 도닦음에 관한 것이다.

 

오염원으로 넘쳐나는 도시에서 재가자들이 수행하는 모습은 전에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재가자도 수행을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것도 한국불교 1700년 역사의 그것과 확연히 다른 불교를 통해서이다. 그런 불교를 일반적으로 초기불교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에 대한 산중승의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다.

 

 

아무런 교리체계도 없던 시절의 초기불교'는 종교적인 수준이 아닌, 샤카무니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대한 견해 일뿐입니다.”

 

 

초기불교에 대하여 부처님의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그리고 종교도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산중승이 생각하는 불교는 어떤 것일까.

 

산중승이 생각하는 불교는

 

우선 초기불교라는 용어에 대하여 부정적임을 알 수 있다. 흔히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원시불교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이는 덜 떨어진, 불완전한 불교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사캬무니라는 개인이 깨친 수준은 매우 원시적이어서 세월에 따라 시대에 따라 불교가 진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대승불교는 사캬무니 개인의 견해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렇게 된 요인으로 수 많은 대승논사들, 히말라야 수행승들, 그리고 중국의 고승들을 들고 있다.

 

이런 논리는 한국의 선종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현상인 것 같다. 불교방송이나 불교tv에서 스님들의 강좌를 들어 보면, 부처님 당시의 불교에 대하여 미완성된 것, 불완전한 것으로 보는 말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어떤 스님은 진리는 문자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오로지 마음과 뜻으로만 전수가능하다고 하여 불립문자를 세웠고, 또 대승불교가 일어난 원인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미흡하여 발생한 것이라 하였다.

 

이 시대의 대강백인 무비스님의 경우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이 시대에 맞지 않아 이를 폐기하고 그 대신 만들어진 것이 대승불교(무비스님의 서장특강 1)라고 불교tv강좌에서 말 하였고, 현 조계종 현응스님은 불교평론에서 초기불교는 허망한 것(불교평론 2010 가을호)”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인간들의 인지의 발달에 따라 또는 시대에 맞게 불교도 진화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현대와 같이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과학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이에 걸맞는 불교가 출현해야 할 것이다. 또 거기에 걸맞는 경전도 새로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를 보면 그와 같은 시도는 불교가 망하는 지름길이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불교가 변형되면 될 수록

 

인도에서 왜 불교가 사라졌을까. 이에 대하여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학자에 따라 어떤 이는 이슬람의 직접적인 타격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불교가 사회적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사라진 것으로도 보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후자에 비중을 더 많이 두고 있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인도에서 불교는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여 왔다. 이를 좋게 말하면불교의 진화이고, 나쁘게 말하면 불교의 타락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불완전한 것이라 여겨서 이를 폐기하고 그 대신 대승불교이념이 자리잡으면서 시작 되었는데, 시대의 요청에따라 또 인지의 발달에 따른 것이라고 대승논자들은 설명한다.

 

그런데 불교가 변형되면 될 수록 점점 불교의 본질과 멀어져 갔다는 사실이다. 처음 대승불교운동으로 부터 시작된 불교는 시대가 바뀜에 따라 힌두이즘을 받아 들여 나중에는 힌두이즘과 구별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것이 불교가 망한 원인중의 하나라고 한다. 불교가 힌두이즘에 흡수되어 힌두이즘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런 과정에 있어서 밀교가 있었다.

 

비밀불교라고 불리우는 밀교는 불교가 타락하면 어디까지 가는지 보여 주는 극명한 사례라 볼 수 있다. 그런 밀교 역시 공사상이 교의의 근본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인도불교사(경서원, 권오민역)에 따르면 밀교는 공성의 인식이 지혜이고, 이러한 지혜를 구하는 마음을 보리심(bodhicitta)이라 하는데, 이런 지혜는 중생구제를 위한 방편(upaya)에 의존한다고 한다. 또 우주의 중심또는 절대자인 신등으로 불리우는 존재와 자기와의 내면적 합일을 얻는 것도 큰 특징이다.

 

이런 불교는 대승불교와도 전혀 다른 모습이어서 말만 불교일 뿐이지 전혀 불교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것중의 하나가 좌도밀교일 것이다.

 

지혜의 어머니와 방편의 아버지가

 

티벳불화를 탕카(thangka, 幀畵)라고 한다. 그런 탕카 중에 자세히 보면 보기에 매우 민망한 그림이 있다. 이를 얍윰(yab-yum)’이라고 한다. 얌윰은 부모라는 뜻이다. 남녀가 서로 교합하고 있는 장면이다.

 

 

 

 

 

 

 

얍윰(yab-yum)

지혜(여성)와 방편(남성)의 합일을 남녀교합상으로 표시

(사진 http://www.tibetshop.com/vs497.html)

 

 

 

하지만 이는 깨닫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 지혜의 어머니와 방편의 아버지가 서로 교합하는 부모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서 D K교수는 부처님법은 남녀가 교합하는 즐거움 보다 더 큰 즐거움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중생들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방편으로 설명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시바(Siva)’와 ‘삭티(Saktl)’의 관계를 불교적으로 지혜와 방편으로 바꾸어 놓았을 뿐 그 바탕을 보면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좌도밀교와 같이 불교가 변형되었을 때 인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일아스님의 아소까에 따르면 브라흐민들은 불교도를 박해 하기 위하여 불전문학을 만들었다고 한다. 거기에서 타락한 불교도들을 비난하였는데. “만일 불교도와 접촉하면..., 그는 목욕부터 해야 한다거나 불교비구를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심지어 꿈속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재수없고 보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기록 되어 있다고 한다. 

 

불교가 변질되어 불교인지 아닌지 모호할 뿐만 아니라 남녀교합상이 나올 정도까지 되었을 때 삭발한 비구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혐오의 대상이 되었음을 산스크리트 문학에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완전한 것

 

이처럼 불교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서 멀어졌을 때 혐오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도들은 부처님당시의 불교에 대하여 미완성이고, 불완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산중승 역시 초기불교에 대하여 사캬무니의 개인적 견해라고 본 것이다. 과연 그럴까.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야말로 완전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근본 가르침에서 빗나간 것을 불교의 타락으로 보았다. 그런 노력의 일환을 청정도론의 해제글에서 볼 수 있다. 해제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들은 소승이라든지 은둔불교라든지 아공법유라든지 부처님 가르침을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다든지 하는 그들을 향한 어떠한 비난이나 도전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부처님이 직접설하신 법을 올바르게 이해(빠리얏띠)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고 바른 도를 실천하여(빠띠빳띠) 괴로움에서 벗어나(빠띠웨다) 부처님이 보이신 해탈열반을 직접 실현하는 것이었으며 이런 출가생활이 이웃이나 불교도들에게 가장 큰 공덕을 가져다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세상의 위없는 복전(福田, puññakkhetta)이 된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셨기 때문이다.

(대림스님, 청정도론 解題,)

 

 

이와 같은 노력이 있어서 오늘 날 전 세계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과 수행법이 주류임이 이를 증명한다.

 

그 동안 품어 왔었던 의문이

 

이번 산중에서 수행하는 스님의 글을 보고 그 동안 품어 왔었던 의문이 한꺼번에 풀린 듯한 느낌이다. 출가자들의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나 이렇게 글을 남겨 주신 덕분에 산중에서 수행중에 있는 스님들의 모든 것을 알아 버린 듯한 느낌이다.

 

모든 산중 스님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글을 남겨준 산중승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 비밀을 다 알아버렸으니 이제 더 이상 산중에서 사는 스님들에게 도시로 나와 교화활동을 하라는 말은 접어야 할 것 같다.

 

그 대신 세속에서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불자들끼리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부처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모색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런 방법이 바로 인터넷을 통하여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글은 누구를 비방하거나 비난하기 위하여 쓴 글이 아니다. 재가불자들이 모르고 있었던 산중승들의 사고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에 공개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스님들이 위와 같은 사고를 가졌으리라고 믿고 싶지 않다. 다만 일부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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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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