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불자로 살기가 너무 힘들어, 조교(祖敎)에서 불교로

담마다사 이병욱 2011. 8. 4. 19:48

 

 

불자로 살기가 너무 힘들어, 조교(祖敎)에서 불교로

 

 

 

 

 

 

 

 

 

대승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불교에는 크게 두 가지 사상이 있다. 하나는 무아사상이고, 또 하나는 여래장사상이다. 그런데 이 두사상이 추구하는 목적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무아사상은 열반으로 귀결되지만, 여래장사상은 진여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출발이 다르다 보니 목적지 또한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다른 것일까.

 

아마도 가장 큰 차이점은 영혼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무아사상의 경우 영혼을 부정하지만, 여래장사상의 경우 영혼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변치 않는 마음이 있어서 이 마음이 세세생생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마치 옷을 갈아 입듯이 몸만 바꾸는 것으로 본다. 그런 자아(영혼)는 최종적으로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것은 본래의 마음인 진여로 합일 하는 것이다. 이를 대승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대승불교의 교리를 가장 설명하고 있는 대승기신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所言覺義者(소언각의자)  謂心體離念(위심체이념)  離念相者(이념상자)

等虛空界(등허공계)  無所不徧(무소불변)  法界一相( 법계일상)
卽是如來(즉시여래  平等法身(평등법신)  依此法身(의차법신)  說名本覺(설명본각)

 

깨달음은 그릇된 생각과 관념이 사라진 마음의 본체를 말한다. 그릇된 생각과 관념이 사라진 마음은 허공처럼 온 우주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우주와 한몸이다.

 

깨달은 마음은 바로 여래의 절대평등한 진리의 몸이다. 또 그와 같은 진리의 몸을 본각이라고 한다.

 

(대승기신론, 3장 깨달음과 무지, 서광스님역)

 

 

대승불교에서 깨달음은 우주와 한몸이 되는 것이다. 이는 불생불멸하는 진여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본마음 또는 참나, 여래장 등으로 불리우는 진여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진여라는 대상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나라는 존재가 없다(무아)’ 말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는 반드시 변치 않는 고정불변한 자아 또는 영혼이 있어야만 참나와 합일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

 

자아와 참나와의 합일이 깨달음이라면 이는 브라만교에서 범아일여 (梵我一如)사상과 매우 유사하다. 브라만교에서 자아를 아뜨만(atman)이라 한다. 이를 개아(個我)라고도 하는데 이와 같은 드러난 세계의 보편적 실재인 나와 세계원리의 브라만과 하나로 되는 것이 최고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브라만교의 진리와 대승불교의 깨달음은 매우 유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은 인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대 중국에서도 있었고, 고대 그리스에서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천의 질서를 리()라 하였고, 인간의 내면속의 성품을 성()이라 하였다. 그래서 성리학이 발달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역시 우주는 대우주 (Macro cosmos)라 하였고, 인간은 소우주 (Micro cosmos)라 하였다.

 

그런데 이런 천인합일사상은 기독교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 주장한 이데아론이 기독교사상에 그대로 접목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독교의 유일신은 항상 있다는 절대유가 되었고, 이는 존재 그 자체를 말한다. 또 진리 그 자체이고, 선 그자체이고, 아름다운 그자체라고 한다.

 

이처럼 항상 어느 곳에서나 충만하고 완전한 존재 그 자체와 가까워 지려 한다는 것이 중세신학이라고 한다. 그런 신은 전지전능한 창조주이고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결코 같아질 수 없지만 비슷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만이 절대진리이고, 절대 선이고, 절대 미이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모두 끊어야 할 대상(絶相對)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인합일사상은 동서양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사상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상들의 특징은 모두 근원에 합일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가 있어야 한다. 나가 없다면 합일할 대상도 필요없을 것이다. 만일 나라는 고정된 자아가 없다면 누구와 합일 할 것인가. 따라서 천인합일사상은 반드시 변치 않는 고정된 나, 자아, 영혼, 아뜨만이 있어야 한다.

 

그런면에 있어서 대승불교나 고대인도의 브라만교나 중국의 성리학나 고대그리스의 우주론이나 기독교의 중세신학 모두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가톨릭에서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익명의 그리스도로 보았다. 이른바 포괄주의를 말한다.

 

그래서 기독교의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모든 종교는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오강남교수와 같은 진보적 신학자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대승불교의 참나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무아일 경우 어떠할까.

 

환생(再肉化, Reincarnation)과 재생(再生, Rebirth)

 

부처님은 무아를 설하였다. 자아나 영혼, 아뜨만을 부정한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의 특징은 브라만교를 비판하며 성립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아뜨만을 부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합일의 경지도 필요없게 된다. 무아이기 때문에 합일 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 없는 것이다. 대신 열반을 설하였다. 그런 열반은 반드시 무아이어야만 성취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무아는 어떤 것일까.

 

무아는 연기법으로 설명된다. 아뜨만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윤회의 주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른 말로 연기적 흐름을 말한다. 이러한 연기적 흐름은 조건에 따라 상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끊어 질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갈애가 극복되어야 한다.

 

브라만교나 힌두교의 윤회는 아뜨만의 전변으로 보지만 불교의 윤회는 갈애를 근본으로 한 다시 태어남을 말한다. 그래서 브라만교나 힌두교의 윤회를 환생(再肉化, Reincarnation)’이라고 말하지만, 불교의 윤회는 재생(再生, Rebirth)’이라 말한다.

 

이처럼 환생과 재생은 다른 것이다. 그 가장 큰 차이점은 유아인가 무아인가에 달려 있다. 환생은 불변하는 아뜨만이 금생의 육신을 버리고 내생의 새로운 육신으로 옮겨 가지만, 재생은  무명 (avijiā)과 갈애 (tahā)를 근본원인으로 하여 다시 태어남을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의 윤회는 특정개체와 무관하다는 말이다.

 

출발이 다르니 목적지도

 

부처님이 설하신 무아사상은 매우 독특하다. 부처님당시 범아일여사상이라는 고도의 철학체계를 부수고 탄생한 불교사상은 역시 고도의 철학체계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철학의 핵심이 바로 무아사상인데, 이는 바로 연기법에 근거하고 있다.

 

지구상 어떤 종교, 어떤 사상에서도 볼 수 없는 무아사상은 천인합일과 같은 근원적 존재를 거부한다. 이는 형성된 모든 것들은 무상하다고 보는 대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변치 않는 근원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그 근원이 인격화 한 것(야훼, 알라, 비로자나, 상제..)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비불교적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과법에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인과법은 연기법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연기법은 조건지워져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조건을 남기고 사라지고, 그 조건을 조건으로 하여 다시 일어나는 연기적 흐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어나고 사라짐이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고정된 마음이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발생되는 마음의 연속이다. 이는 마음이 한 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 역시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흐름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을 무아라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조건이 소멸되어 더 이상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따라서 열반은 마음이 생멸하는 것이어야만 성츼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일 마음이 연결되어 있어서 한마음이라면 어떻게 될까. 결코 열반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이 어디선가 끊어져야 열반에 이를 수 있는데, 마음이 하나의 마음 뿐이라면 끊어지는 곳이 없기 때문에 열반은 있을 수 없고, 그 대신 합일만 있을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은 끊어짐 없이 연속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의 때만 벗겨 내면 본마음과 합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 본마음이 바로 진여이고 참나이다. 따라서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다름 아닌 고정된 나의 자아가 본마음인 진여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나라는 것을 유아로 보느냐 무아로 보느냐에 따라 목적지가 달라지는 것으로 본다.

 

선사의 오도송, 부처님의 오도송

 

우리불자들은 불교에 입문할 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부정하는 것부터 배운다.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수 많은 무()자 행진이 바로 그것이다. 오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조견오온개공이라 하고, 사성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고집멸도라고 한다. 12연기가 모르는 상태에서 무무명진 내지 무노사진이라고 한다. 이처럼 공의 입장에서 그 어떤 성인의 가르침이나 진리도 공한 것이 되고, 그 공한 것 마저 공한 것이 된다. 

 

하지만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의 논리에 따른 여래장 사상의 경우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의 가장 큰 특징인 무아사상과 정반대의 사상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공의 논리로 근본가르침을 부정하여 무아를 유아로 환원시켜 놓고, 유아와 근본 마음과 합일이 곧 깨달음이라 하였는데,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깨달음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따라서 선사들이 깨달았다는 오도송과 부처님이 깨달은 오도송 또한 다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사들의 깨달음에 대한 오도송은 자아와 진여의 합일에 대한 것이라볼 수 있다. 오늘날 선종의 종조로 불리우는 혜능선사는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남겼다.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明鏡亦無臺(명경역무대)

佛性常淸淨(불성상청정)

何處有塵埃(하처유진애)

 

깨달음은 본래 형상이 있는 보리수나무와 같은 것이 아니며

밝은 마음(거울) 또한 경대(鏡臺)와 같은 실제 모양이 없네.

본래마음인 불성은 항상 청정한데

어디에 티끌(번뇌)이 있으리오.

 

(혜능스님, 돈황본 육조법보단경)

 

 

이처럼 선종에서의 깨달음이 진여불성과 합일에 관한 것이라면, 초기불교에서의 깨달음은 이와 다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갈애를 부수어 다시 윤회하지 않은 것에 대한 깨달음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담마빠다(법구경)에 실려있는 부처님의 오도송일 것이다.

 

부처님은 담마빠다에서 다음과 같이 깨달은 순간을 이야기 하였다.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헛되이 치달려왔다.

집짓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집 짓는 자여, 마침내 그대는 보아졌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은 업의 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다.

 

(부처님의 오도송, Dhp.153-154, 마하시사야도 12연기 주석서에서)

 

 

이처럼 부처님은 갈애를 극복함으로서 다시 윤회하지 않게 됨을 노래함으로서 마침내 깨달음을 성취한 것이다.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무명과 갈애를 극복하여 부처님과 똑 같은 경지에 도달했다. 그것은 사성제에 있어서 멸성제에 해당된다.

 

수다원의 깨달음과 아라한의 깨달음

 

그런 깨달음도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사성제를 이해하는 차원의 깨달음이고, 또 하나는 팔정도를 수행하여 탐진치등으로 대표되는 오염원을 소멸하여 재생의 원인이 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을 때 즉, ‘열반을 성취하였을 때 깨달음이라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사성제를 이해하는 차원의 깨달음으로서 팔정도에 있어서 정견과 같은 것으로서 수다원의 깨달음이라 볼 수 있고, 이를 통하여 본격적인 수행이 시작 되는 것으로 본다. 그때 깨달음에 대한 오도송은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모두 소멸한다.”는 진리를 아는 것이다. 이는 여래장사상의 깨달음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래장사상이 믿음의 불교에 관한 것이라면, 무아사상의 불교는 법에 대한 불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의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인 사성제를 이해하는 것으로 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모든 현상은 제행무상의 법칙에 따라 단지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다. 그런 사실을 아는 것이 불교적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예비적인 깨달음이라 볼 수 있다.

 

예비적인 깨달음으로 부터 본격적인 수행을 통하여 마침내 모든 오염원을 소멸하여 열반을 성취하게 되었을 때 이를 아라한의 깨달음이라 하는데, 이때 오도송은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이다.

 

이처럼 선사들의 깨달음과 부처님의 제자들의 깨달음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여래장사상과 무아사상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라 본다.

 

대승기신론의 비발사나(毘鉢舍那)

 

여래장사상에서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하여 주로 삼매라는 수단을 이용한다. 대승기신론에 따르면 이를 멈춤()수행이라 하는데, 다른 말로 사마타수행이라 하고, 간화선도 같은 범주로 본다.

 

이는 움직이는 마음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어나는 생각을 차례로 제거하여 제거한다는 생각마저도 버려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진여삼매에 들어가면 온 우주가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부처와 법신이 중생의 몸과 마음이 평등하여 둘이 아님을 아는 것(대승기신론, 지관수행, 멈춤수행)”이라고 한다.

 

대승기신론에서는 관법에 대해서도 함께 닦을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 관법은 요즘말로 말하면 위빠사나이다. 한자어로 비발사나(毘鉢舍那)’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순간순간 변하고 인연이 다하여 사라진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지관수행을 병행해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대승기신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是止觀二門 共相助成不相捨離 若止觀不具 則無能入菩提之道

(시치관이문 홍상조성불상사리 약지관불구 즉무능입보리지도)

 

이러한 의미이기 때문에 이 지관의 두 문은 공통으로 서로가 돕고 성취하여 서로가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 만일 지관을 갖추지 않는다면 보리의 도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대승기신론)

 

 

지관을 갖추지 않으면 결코 깨달을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관법만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움직이는 대상에 대하여 관찰하는 관법수행은 여실불공의 지혜로 발전되는 것이고, 움직이는 마음작용을 멈추는 수행은 여실공의 지혜로 발전될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관법수행(위빠사나)은 어디까지나 삼매수행을 하기 위한 보조수단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

 

자비심을 닦기에 적합한 수행은

 

삼매수행을 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서 관법수행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대승기신론에서는 관법수행이 자비심을 닦기에 적합한 수행이라고 표현하였다. 이에 대한 경전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復次若人唯修於止 則心沈沒 或起懈怠 不樂衆善 遠離大悲 是故修觀

(부차약인유수어지 즉심침몰 혹기해태 불락중선 원리대비 시고수관)

 

다시 다음에 만약 어떤 사람이 오직 지()만을 닦는다면 곧 마음이 침몰하여지고 혹은 게으름을 일으키어 뭇 착한 행위를 즐겨 행하지 않으므로 대비심을 멀리 여의게 된다. 그러므로 관()을 닦아야만 한다.

(대승기신론)

 

 

오직 사마타수행만 한다면 대비심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빠사나(관법)수행을 닦아야만 자비심이 나올 것이라 한다. 이는 매우 놀라운 표현이다. 이제까지 한국불교에서 이런 말은 들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승기신론에서는 분명히 사마타수행만 하면 나와 너를 분별함이 없이 곧바로 삼매에 들기 때문에 위빠사나처럼 모든 현상을 세밀히 관찰함이 없어서 자비심을 닦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자비심을 닦기 위해서는 필히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고 권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자비심이 생겨날까. 그것은 번뇌를 말려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타수행은 번뇌를 억압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은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를 소멸시키기 때문에 그 자리에 관용, 자애, 지혜로 채워질 것이라는 것이다.

 

조교(祖敎)

 

현재 조계종으로 대표되는 한국불교는 어떤 것일까. 엄밀히 말하면 불교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불교방송의 불교강좌 시간에 현 금강대 총장인 정병조 교수는 라디오 강의에서 조교(祖敎)’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조교란 무엇일까.

 

문자그대로 조사불교를 뜻한다. 육조 혜능스님으로 부터 법맥이 전수된 불교를 말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조계종의 뿌리는 중국의 임제의현선사로 부터 시작 된다.

 

임제의현은 혜능의 법맥으로 따졌을 때 6세대에 해당된다. 계보를 보면 육조혜능(六祖慧能)-남악회양(南嶽懷讓)- 마조도일(馬祖-道一)- 백장회해((百丈懷海)- 황벽희운(黃檗希運)- 임제의현(臨濟義玄)순으로 법의 맥이 전수 되어왔기 때문이다.

 

임제의현스님이 간화선을 최상승선으로 하여 선풍을 크게 일으킨 것이 임제종이다. 따라서 한국선종의 뿌리는 임제종으로 부터 기원되는데, 조계종을 비롯한 태고종등 모든 스님들은 임제스님의 자손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한국불교를 조사스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여 조교(祖敎)’라고 한다.

 

조교는 출가자들이 강원에서 배운다. 그런 강원에서는 조사스님의 가르침만 있을 뿐, 부처님의 일생이라든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와 같은 교육이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수백년간 지속되어 왔다. 또 수행방법도 다르고 당연히 깨달음에 대한 내용도 다를 수 밖에 없다.

 

불교와 조교 비교표

 

조교와 불교는 서로 다른 가르침에 틀림없다. 또 서로 다른 종교임에 틀림없다.조교가 선불교라고도 하지만, 조사스님의 가르침만 있을 뿐 부처님의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반야심경에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부정되고, 불자가 되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배우는 것 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는 것 부터 배우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우리나라 불교가 조사스님들의 불교라는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이처럼 모든 면에서 불교와 조교는 다르다. 이에 대한 차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불교와 조교 비교표

No

구 분

불교(佛敎)

조교(祖敎)

1

사상

무아사상

여래장사상

2

신행

법의 불교

신앙의 불교

3

부처님

석가모니부처님

아미타부처님

4

깨달음

열반을 증득

진여와 합일

5

마음

무아(상속된 마음)

유아(일심, 아뢰야식)

6

요약어

알아차림

일체유심조

7

윤회

재생(再生, Rebirth)

환생(再肉化, Reincarnation)

8

중유

불인정(재생연결식에 따른 순간상속)

인정(49재 및 천도재의 근거)

9

주수행

위빠사나(칠청정과 16단계지혜개발)

사마타(간화선)

10

돈점

점진적 깨달음(점수)

즉각적 깨달음(돈수)

11

교학

교학(온처계근제연)과 수행(37조도품)과 열반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

12

세상

51218계의 세상, 주관적 존재

기세간, 종속적 존재

13

스승

석가모니부처님

임제의현등 조사스님들

14

경전

빠알리 삼장(BC3세기, 3차결집에서 공인)

조사어록, 대승경전

15

종단

테라와다불교

조계종, 태고종등 한국불교

16

기반

생활불교

산중불교(스님불교)

17

지역

전세계적

한국, 일본(임제종)

진흙속의연꽃, 2011-08-04

 

 

 

 

불자로 살기가 너무 힘들어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 이 기사는 논쟁중이라는 글이 있다. ‘미주에서 바라 한국불교라는 기사에서이다. 미국의 LA 에서의 한국불교에 대한 것이다.

 

미국 LA의 경우 60만에 이르는 대부분의 교포가 기독교신자라 한다. 70%정도 되는데, 문제는 불자로 살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 주된 이유는 절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있다고 하더라도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젊은층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리포트는 여려차례 불교관련 매체를 통하여 발표 되었다.

 

일아스님도 LA 불교현황에 대하여 매우 실감나게 발표 하였는데, 위 기사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특히 스님의 글 중에 한인 사회의 큰 행사는 대개는 교회에서 기독교식으로 이루어집니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말은 무슨 뜻일까.

 

만일 한인 행사에 불교도가 참석하였다면 대다수가 기독교인 마당에 누군가 우리 다함께 기도합시다라고 말하면 꼼짝없이 고개숙이고 기도하는 척 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바로 이와같은 현상이 불교인으로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LA 에서만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내도 LA와 비슷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특히 국민의 반이 몰려사는 서울과 수도권이 그렇다는 것이다이력서나 경력서에 종교란에 불교라고 써 넣으면 불이익을 당할까 보아 아예 무종교라고 써 놓은 경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사회에서 기독교의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사회에서 기독교의 의사결정권자가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다. 불교 NGO활동을 하는 윤남진씨의 글( 출ㆍ재가 역할 문제는 ‘교단 재구축(restructuring)’ 차원의 문제 / 윤남진) 을 읽어 보면 관리전문직종의 경우 불교가 7.1%인데 비하여 개신교는 무려 35.3%에 이른다.

 

이처럼 우리사회에서 오피니언리더와 의사결정권자가 기독교인 월등하게 많다 보니 점점 불교인으로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이다.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없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에서 사는 스님들은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평생 산에서만 살다보니 불자들이 얼마나 차별대우 받고, 소외받고 사는지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출가수행자들은 오로지 깨달음을 위한 삶을 살아 갈 뿐 중생의 아픔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다.

 

더 근본적으로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없어서라고 볼 수 있다.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없다면 도시로 나와 포교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자비심이 없을까. 그것은 아마도 간화선 영향때문일 것이라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간화선 수행을 하면 마치 맹수처럼 보인다고 한다. 화두를 들고 있기 때문에 화두를 깨치기 위해서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나면 단칼에 베어버릴 자세를 취한다고 한다. 또 문자와 언어를 거부하는 반문자주의’와 그로 인한 로서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에 반지성주의’의 수행법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산중에서 간화선 수행자자들은 자비심과 거리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대승기신론에서도 사마타 수행자들은 분별함이 없이 삼매에 들기 때문에 자비심을 닦기 힘들다고 표현 되어 있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산중에서 수행하는 한국불교의 스님들은 진여합일이라는 깨달음을 위하여 10, 20, 30년을 상구보리로 보내다 보니 하화중생은 거의 못하는 실정이고, 설령 하화중생한다고 할지라도 반문자주의와 반지성주의로 인하여 교리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어서 제대로 포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평생 사마타 수행만 하다 보니 자비심을 닦을 수 없어서 역시 포교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이와 같은 선방승에 대하여 일아스님은 포교의 열정도 없을뿐더러 부처님이나 불교 교리도 잘 모르고, 설법도 못하고, 강의도 못하고, 어린이, 학생들, 청년 지도도 할 줄 모르고, 포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거기다 선방만 다녔기 때문에 염불을 못한다고 말합니다.”라고 말하였다. 한마디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무능력자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한국불교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제도가 유지되는 한 한국불교는 현재와 같은 답보상태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 불자들은 불자로 살아가기가 점점 힘들어 질 것이다. 이런 악순환을 끊어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교에서 불교로

 

현재의 조교로는 한국불교의 중흥을 말하기 힘들다고 본다. 그렇다면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스님들이 깨달음을  위하여 평생 산에서 사는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이는 깨달음에 대한 방법을 바꾸는 것이다. 그것은 조사스님의 가르침에 따른 깨달음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깨달음으로 바꾸는 것이다. 조교에서 불교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진여와 합일을 목표로 평생 산에 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 수행방법이 사마타에서 위빠사나로 바뀌기 때문에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생겨서 자연스럽게 포교에 나서게 될 것이다.

 

종단과 스님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불자로 살아가기가 앞으로 갈수록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불자들은 온 갖 차별과 수모를 당하고 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이 산중에서 오로지 깨달음 하나를 위하여 평생을 보낸다면 이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근본적으로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수행자들은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라 조사스님들의 제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2011-08-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