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한국불교가 영향력이 없는 이유, 하안거 해제날에

담마다사 이병욱 2011. 8. 13. 12:01

 

 

한국불교가 영향력이 없는 이유, 하안거 해제날에

 

 

 

 

해제날에

 

내일이면 해제날이라 한다. 음력으로 7월 보름이기 때문이다. 지난 3개월 간  여름한철 정진하던 스님들의 방학날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때를 기념하여 불교에서는 커다란 행사가 열리는데, 이를 우란분절이라 한다.

 

우란분절은 우란분회라고도 하는데 인터넷 백과사전에 따르면 이날 승려들을 접대하고 공양하며 , 그 쌓은 공덕을 조상에게 돌림으로써 조상의 혼령이 고통스러운 사후세계로부터 구제되기를 불교행사라고 한다.

 

또 이 날을 백중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민간풍습이었다고 한다. 역시 돌아가신 조상의 혼을 위로 하기 위하여 음식과 술을 차려 놓고 제를 지내는가 하면 이날 하루 만큼은 쉬는 날로 하여 일손을 놓았다고 한다.

 

이처럼 예로 7월 대보름은 불가에서나 민가에서나 매우 의미있는 날이었으나 현재는 우란분절외에 잘 지켜지고 있지 않는다고 한다.

 

 

 

 

 

사진 http://olpost.com/v/285093

 

 

 

지루한 해제법어

 

음력 7월 보름날 불가에서만 지켜지고 있는 불교명절을 즈음하여 언제나 발표되는 것이 해제법어이다. 일반인들은 관심조차 갖지 않는 법어이지만 일부 관심있는 불자들은 어떤 말을 하는지 궁금해 한다. 올해 하안거 해제 법어도 예외없이 발표 되었다. 그 법어의 내용은 무엇일까.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종정스님의 해제법어는 사자후인지 여우목소리인지 스스로 점검하라이다. 이에 대한 설명문을 보면 납자가 법을 제대로 알아차리고 들을 수 있다면 헛소리도 사자후가 될 것이요, 납자가 탐욕에 물든 견해로써 법을 듣는다면 설사 사자후라고 할지라도 여우 울음소리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법어대하여 비판적인 목소리도 있다.

 

어느 블로그에서 종정스님의 법어에 대한 느낌을 글(지루한 해제법어)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안거제도에 대한 문제점과 점검해야 될 점을 말하였다. 그런 것중에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해제비에 대하여

 

첫째 안거기간동안 수행자들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이는 안거를 해 본적이 없는 재가불자들은 모르는 사항이다. 글을 통하여 제기된 문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수행자들에 관한 것이다.

 

 

-자신이 머문 선방에서 자신은 동료수행자들과 어떻게 지냈는지?

-다른 대중을 위하여 어떤 배려를 하였고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

-소욕지족으로 살아가는 수행자로서 어떤 물건을 청구해서 사용했는지?

-해제비에 마음을 쓰느라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핸드폰등 전자기기를 선방에서 사용하지 않았는지?

-공부이야기를 주고 받는 도반이 한명이라도 있었는지?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 따르면 금년 하안거 결제기간 중에 전국의 선원에서 수행정진한 스님의 숫자는 조계종의 경우 총 2,187명 이었다고 한다. 이는 총림5곳을 포함하여 비구선원 54, 비구니 선원 36곳이었다고 한다. 또 비구는 1,186명이었고, 비구니는 813명, 총림은 188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3개월 동안 수행을 한다면 당연히 핸드폰과 같은 사적인 통신수단은 지참하지 않아야 할 텐데, 이를 걱정하는 것을 보니 잘 지켜지고 않은 것 같다. 또 언어 사용문제라든가, 사용하는 물품, 해제비등에 대해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현시대에 맞는 새로운 청규가 도입되어야 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를 제기한 것 중에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 해제비에 대한 것이다. 해제를 하게 되면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인터넷검색을 해 보았다.

 

해제비라는 명칭은 3개월간 수행정진한 댓가로 지불된 형식이라 한다. 하지만 이런 명칭이 부정적인 느낌을 주어서 수행복지비로 명칭을 변경하여 부르고 있다고 한다. 그런 비용은 얼마나 될까. 일반적으로 한 달에 30만원 가량하여 한철을 나고 나면 대략 백만원정도라고 한다. 이런 금액은 해제때의 교통비나 개인의 생활용품 구입및, 병원비등 품위유지는 물론 장래 노후를 대비한 복지비의 성격이 짙다고 한다.

 

왜 점검을 해야 하는가

 

한국불교가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것중의 하나가 안거제도라고 한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안거제도는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대규모적인 것이라 한다. 문제는 무려 2000명이 넘는 스님들이 한 철을 공동체생활하면서 깨닫기 위한 치열한 정진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한 점검이 그다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염려에 대한 글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었다. 특히 방장스님의 입장에서 점검해야 될 사항에 대한 것이다.

 

 

-이번 철에 방부드린 대중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대중들이 각각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는지를 한번이라도 점검을 하셨는지?

-대중들이 간식꺼리로 무엇을 사다가 먹는지?

-대중의 공부점검을 위해서 선원에 몇 번이나 다녀 가셨는지?

-하루의 이번 철 대중이 해제비를 얼마나 타가는 가를 알고 계신지?

-대중들이 그 해제비 때문에 대중들이 공부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지?

 

 

이 문구에서는 공부에 대한 점검이 키워드이다. 한 철을 수행하면서 얼마나 깨달았느지에 관한 것이다. 그런 깨달음의 경지를 알 수 있으려면 대화를 통한 점검인데, 과연 이런 제도가 얼마나 충실히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단지 한 철을 살기 위한 수단으로서 또는 해제비를 타가기 위해서 모였는지에 대한 점검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문에 대하여 방장스님이 점검해야 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총림에 관한 것이다. 2,187명중에 총림에서 정진한 수행자는 고작 188명에 지나지 않는다.

 

총림에서 한 철을 나는 수행자들에 대한 염려가 이정도라면 나머지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사는 선원에서의 의문사항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TV로 생중계를

 

스님들이 여름 한 철, 겨울 한 철 하여 두 개의 철을 선방에서 정진하며 일년 중의 반을 보낸다. 하지만 깨우쳤다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 한다. 이는 누군가 수행의 진척상황을 점검해 줄 수 있는 스승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방장스님이 해제법어를 내릴 것이 아니라 수행자들과 인터뷰를 통하여 해제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터뷰제도는 수행을 점검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라 한다. 하다 못해 도시에서 재가자들이 위빠사나 수행센터에서 좌선수행을 한다음 면담을 하고 있는 마당에 전문적으로 한 철을 나고 난 다음 해제날이 되었을 때 인터뷰가 없이 해제법어만 내리는 것은 개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음력 7월 보름날 해제날을 맞이 하여 선원에서 수행하던 모든 수행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자신의 수행중에 느꼈던 바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수행경력이 높은 스승이 이를 듣고 한 말씀 해 주는 것이다. 이런 전통을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특히 5대 총림과 같은 큰 절에서 벌어지는 인터뷰에 대하여 불교TV로 생중계 하는 것은 어떠냐는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 나태함이 없이 더욱 더 수행정진 할 수 있고 불자들은 물론 국민들의 관심도 증폭 될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한 인터뷰제도가 부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해제날 수행점검에 대한 행사없이 단지 해제비만 타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서 작성된 글로 볼 수 있다.

 

영향력이 없는 종교

 

한 철을 살고, 두 철을 살고, 여러 철을 살았으면 깨달은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래서 그 깨달은 결과를 회향해야 한다. 그 방법은 도시로 나와서 교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불교의 현실은 수천명이 매년 두 차례씩 안거에 들어 가지만 어찌 된 일인지 깨달은 사람들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매년 안거철에 산중의 선원에서 살고, 그런 과정이 10, 20, 30년을 지나 평생 선방에 있게 된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깨닫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을 찾아 선방에서 평생을 보내게 되었을 때 한국불교의 현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불교는 영향력이 없는 종교이다. 이는 한국사회의 여러분야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불교가 영향력이 없다보니 불자가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실인지 모른다. 불자로서 대우는 커녕 불자로서 사는 것이 불편할 정도이다.

 

이쯤 되면 재가불자가 종단이나 스님들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것 또한 매우 많을  수 밖에 없다. 왜 불자들이 인터넷의 카페나 블로그, 게시판등을 통하여 불교의 개혁에 대하여 이야기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평생 절집에서만 보내는 스님들은 불자들이 받는 불평등한 대우와 불편함, 소외감등을 알지 못한다. 이유는 절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생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절 밖을 조금만 벗어나도 세상은 불교의 이념이나 사상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금새 알 수 있다.

 

도시의 하늘은 온통 십자가 천지이고, 그들을 믿지 않는 자들은 거리마저 걷는 것 조차 불편하다. 자꾸 길거리에서 차림새를 보면서 믿으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일교 사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불자로 사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가 영향력이 없는 종교가 되었다는 좋은 예일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가 왜 영향력이 없는 종교가 되었을까. 그 이유에 대한 것을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서 볼 수 있었다.

 

일개 국장만도 못한 양향력

 

한양대 이도흠교수가 법보신문에 파사현정을 바라면서 연재를 시작한 글에서 오늘 날 한국불교가 영향력이 없는 종교가 된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불교가 영향력이 없는 이유

No

구분

기독교

불교

1

영향력

기독교가 200여년 만에 불교를 압도하고 주력 종교로 부상함

종단 전체의 힘은 국장급 공무원 수준에도 미치지 못함

2

합리성

기독교가 주술의 정원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와 결합하고 합리성을 추구하여 현대 종교로 탈바꿈함

불교는 2천여년 전의 교리를 그대로 우려먹는 데 급급함

3

인재양성

가독교가 현대 학교를 짓고 이곳에 투자하여 인재를 선점함

불교는 팔짱만 끼고 있었고 애써서 강원을 나온 스님들조차 대우하지 않았음

4

민주화

기독교가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서 민주화 투쟁에 나서며 대중들의 박수를 받음

불교는 호국불교를 고집하다가 정권과 함께 지탄을 받았음

5

복지화

기독교가 활발하게 인권, 평등, 복지 등 사회적 담론을 생산함

불교는 절집 안에서만 큰소리를 질러댔음

6

대중구제

기독교가 빈민과 소수자를 구제하며 그들과 이에 감동한 대중들을 하나님 품으로 입도선매함

불교는 말로만 대승이지 암자나 선방에서 나홀로 수행하며 고립을 자초함

 

7

대중교화

기독교가 도시 가운데 교회당을 짓고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아프리카 오지에까지 선교사를 파견함

불교는 산중에서 고고하게 염불만 하였음

8

자기개발

신부와 목사들이 열심히 현대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공부함

스님들은 화두에만 집착하거나 한문 공부에만 시간을 허비함

9

정치권력

기독교가 대통령, ·차관, 판검사, 언론사 국장 등 최상층 엘리트들을 독점하며 강한 권력을 행사함

불교는 절집 안의 권력다툼에만 연연함

출처 ; 이도흠 교수의 1. 연재를 시작하며 한국불교 자성·쇄신 없인 소수종교 전락
각 분야 진단하고 구체적 대안 모색할 것

 

 

 

이 표에서 가장 충격적인 내용이 첫 번째 항목인 영향력에 관한 것이다. 불교의 영향력이 국장급 공무원의 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특히 장로정권이 들어선 이후 심화 되었는데, 고소영내각이라는 말이 있듯이 특정종교와 특정교회의 인맥이 좌지우지 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거기에 불교는 일종의 구색맞추기 용으로서 밖에 인재가 활용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으로 본다.

 

이는 전적으로 종단과 스님들의 인식에 대한 문제로 돌릴 수 있다. 물론 재가불자들의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문제도 지적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불교지도자로 불리우는 스님들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불교인재를 육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 두가지가 아니라 복합적이라 볼 수 있는데, 그에 대한 것을 비교표에서 볼 수 있다.

 

자업자득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과 다양하게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어느 사람은 수명이 짧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느 사람은 수명이 길어 오래 사는 사람도 있다. 어느 사람은 병약해서 괴로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느 사람은 씩씩하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용모가 추한 사람도 있고, 용모가 아름다워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늘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도 있고,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걱정없이 사는 사람도 있다. 신분이 낮아서 부림을 당하는 사람도 있고, 남을 부리는 사람도 있다. 이와 같은 요인이 왜 생기는 것일까.

 

그렇게 된 이유는 자신에게 있다. 스스로 그런 업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는 행위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행위에 따라 과보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행위에 따라 브라만도 되고, 기술자도 되고, 도둑놈도 된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한국불교가 처해 있는 현실 또한 과거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본다.

 

한국불교가 영향력이 없는 종교로 전락한 것도 자업자득으로 본다. 지금까지의 행태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보잘 것 없는 유치원 동화같은 교리를 가지고도 근대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종교로 탈바꿈 하여 오늘 날 한국에서 보는 것과 같은 기적을 일구어 냈지만, 한국불교는 우수한 고등교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천년전의 이야기를 답습하여 전근대적인 것으로 낙인찍혀 이제 소수종교로 몰락될 위기에 처해 것도 자업자득이다

 

기독교가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지어서 적극적으로 선교 할 때, 절의 스님들은 산중에서 화두참구만 하거나 절집의 권력다툼에 집착한 결과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이 영향력 없는 종교로 전락 된 것도 자업자득이다.

 

불자로 살기가 불편해서

 

이렇게 소수종교화 되고, 영향력이 없는 종교로 전락된 것은 남의 탓이 아니라 내탓이라는 것이다.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공무원 국장 보다 못한 것도, 불자들이 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도 불교를 이끌어 가는 종단과 스님들의 책임이 크다. 이를 불자탓으로 돌릴 수 도 있을 수 있지만 종단의 지도자들의 탓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재가불자들이 인터넷등을 통하여 의사 표현을 하면 스님들과 보수적인 불자들은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아는 체를 한다든가 심지어 아상이 높고 자만심이 강하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늘어 놓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렇게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불자로 살기가 불편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길거리를 걸어 가는 것도 눈치를 보아야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불교가 영향력이 있는 종교로 바뀌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불교지도자와 스님들의 대의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중의 하나가 스님의 도시진출에 대한 것이다. 일년의 반을 산중에서 보낼 것이 아니라 도시로 나와 불교를 영향력있는 종교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깨달음과 자비는 둘이 아니라는데

 

깨달음과 자비는 둘이 아니라 한다. 깨닫게 되면 탐진치가 소멸되고, 대신 그 자리에 관용, 자애, 지혜가 들어가게 되어 자비로워 진다고 한다. 그래서 탐진치에 절어 사는 중생을 보면 불쌍하여 견딜 수 없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해서 중생교화에 나서게 되는데, 우리나라 스님들을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이유는 결국 깨닫지 못해서일까. 평생 선방에서만 산다면 평생 도시로 나올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평생선방에만 있다는 것은 평생가도 깨달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보시할 때 돈이 많아야만 보시 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마찬가로 중생교화 역시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만약 돈이 많아야 보시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재벌이 되기 전에 한 푼도 보시하지 못할 것이다. 같은 이치로 깨달아야만 교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깨닫기 전에 결코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보시나 교화는 현재 지금 여기 이 상태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능력이나 그릇이 작으면 작은대로 보시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면 되고, 더 큰 능력이나 더 큰 그릇이라며 거기에 걸 맞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선방에서 여름한철을  보낸 수행자들의 해제날이 내일이다. 동시에 우란분절이고 백중이라고 한다. 이날을 맞이하여 불자들은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기도 하는데, 대만의 경우 공승제라 하여 대규모로 행사가 치루어진다고 한다.

 

 

 

 

대만국제공승대회

2010829日國際供佛齋僧

대만은 불교신자가 다수인 불교국가이다

 

 

 

불교의 영향력이 형편없이 추락한 현실에서 지난 3개월간 수행정진한 스님들이 한국에서 불자들에게 공양을 받고 세상으로 나올 것이다. 세상으로 나와  만행하면서 불자들이 겪고 있는 차별이나 불편함등 불자로서 살아가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1-08-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