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들은 물과 같아서, 반야심경에서 담마짝까경으로
비오는 날의 우란분절
알고 지내는 법우님의 초청으로 어느 사찰에서 열리는 ‘우란분절’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비오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행사가 열리는 절에는 수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법당안이 가득차고 밖에서 법회를 지켜보고 있는 불자도 다수 있었다. 아마 육칠십명가까이 되는 것 같다.
도착하였을 때 법회가 진행중에 있었는데, 진행방식은 어느 절과 다를 바 없다. 천수경과 각종진언, 그리고 마지막으로 반야심경을 끝으로 마무리 되었다. 다음으로 주지스님의 법문이 있었는데, 법문의 내용은 그다지 기억에 남을만한 것은 아니었다.
일상적인 이야기 부터 시작하여 불자들의 주요관심사와 고민들에 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우란분절을 맞이 하여 영가천도의 회향하는 날이라 조상에 대한 제사를 강조하였고, 또 혼과 백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그런 주지스님의 법문은 끝날 듯 하며 계속이어졌다.
그러기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법문이 언제 끝날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었다. 준비된 법문이라기 보다 ‘즉흥적으로’ ‘생각나는대로’ 법문이 더 맞을 듯 싶다. 두서 없이 이말 저말 하는 중에 가끔 비어, 속어도 섞어가며 이야기 하였지만 신도들은 웃음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이었다.
교회는 되고 절은 안되는 것
그 절은 성남에 있었다. 성남중에서도 구 도심에 속하는 곳이고 바로 남한산성 도립공원이 시작 되는 골짜기 초입에 있었다. 칠팔년전 어느 스님의 원력으로 만들어진 개인사찰성격의 절이라는데, 스님은 해인사에서 공부하였다 하고, 사찰은 조계종 소속으로 되어 있었다.
법당이나 요사채 건물 모두 일반 주택처럼 보여서 흔히 보는 절의 모습과는 판이 하게 달랐다. 그런 절에서도 불교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음을 보았다.
절은 겉으로 보기에도 매우 초라해 보였다. 그러다보니 신도들의 행색 또한 그렇게 보였다. 더구나 주지스님의 법문 또한 그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이런 절의 모습은 오는 도중에 보았던 성당이나 교회와 비교하면 비교 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민망한 것이었다.
도중에 보았던 성당은 ‘위풍당당’하였다. 주변의 건물을 압도할 정도로 종마루가 높았고, 더구나 거기에는 두 팔을 활짝 벌린 하얀 ‘예수상’이 대로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교회 또한 무수히 많이 볼 수 있었다. 그 중에 대로변의 커다란 교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흑백으로 벽에 그려진 커다란 예수그림이 페인트로 그려져 있었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로 시작되는 벽면 가득히 채워져 있었다.
이처럼 위풍당당한 성당과 거대하고 웅장한 교회는 볼 수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도심에서 사찰은 볼 수 없었다. 설령 사찰이 있었다할지라도 옥상에 불상을 세워놓는다거나 벽에 불상그림을 그려 놓았을 때 용인될 수 있을까.
하지만 성당이나 교회에서 만든 예수상은 용인되는 것이 현실이다. 도심에 있는 절의 일주문 형식의 대문에 단청만 칠하여도 데모하는 것이 현실인데, 교회의 예수그림에 대하여 문제삼지 않은 것이 서울과 수도권도시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 현실이다.
도심사찰의 일주문
단청때문에 일주문건립 반대현수막이 붙어 있다.
그래서일까 절은 산중에나 있어야 되는 것으로 인식 되었고, 절이 도시에 있더라도 산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 절도 마찬가지로 산의 초입에서 약 200미터 정도에 위치 하고 있었는데 사람사는 곳에서 완전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곳에서 북과 징을 사용하여 우란분절행사가 열리고 있었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들었다면 무속인들의 굿소리라고 의심하였음에 틀림없다.
불자들은 물과 같아서
그런 오지에서도 불교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불교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다. 단지 불교라는 이름만 있을 뿐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없었던 것이다.
불교는 불교인데 그 속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다면 이를 어떤 불교로 보아야 할까. 겉으로 보기에 불교처럼 보이지만 내용은 전혀 불교적이지 않다면 그런 불교를 믿고 따르는 신자들 역시 불자라고 볼 수 있을까.
불자들은 법사들이 하기에 달려 있다. 법사들이 불자들에게 대승불교 교리를 설하면 대승불교의 불자가 된다. 마찬가지로 법사들이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알려 주면 초기불교의 불자가 된다. 또 법사들이 방편과 기복에만 의존한다면 불자들 역시 기복적으로 될 수 밖에 없다.
불자들은 법사들이 이끄는대로 따라만 갈 뿐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법상에 선자들의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법상에서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여러가지 이름의 불자로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어느 스님이 불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법문을 할 때 마다 응답의 표시로서 “나무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다 보니 유일신교의 “아멘”이나 “할렐루야”와 같은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졸지에 유일신교 따라하기 불교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어느 교수님은 법회에서 유일신교와 비교하여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알려 주었을 때 불자들은 가슴에 뿌듯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처럼 법사의 말에 따라 불자들은 좌우된다. 불자들은 마치 물과 같아서 어떤 용기에 넣느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 볼 수 있다.
최고의 법문은 무엇일까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불자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는 법문이 최고라 생각한다. 이는 선사들의 이해하기 어려운 법문과 여러모로 비교된다. 어려운 한자어를 사용하여 현실과 동떨어진 법문을 하였을 때 불자들은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기는 커녕 잔뜩 주눅들어 보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불자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을 때 불자임을 자랑스러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리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부처님의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관한 것이다.
이런 교리를 확실히 알게 되었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이 훌륭함을 알게 되고 이를 전파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가 된다. 하지만 교리를 모른다면 기복이나 방편에만 매달리게 되어 불교가 자신의 종교임을 떳떳하게 말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불자들이 자신의 종교가 불교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내 놓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불자들이 왜 교리에 대하여 무지할까. 그것은 절에서 교리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미천한 불자일지라도 교리를 말하면 알아듣는다. 옛날 100년전, 천년전, 이천년전과 달리 불자들은 기본적으로 읽고 쓰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리를 가르치면 모두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언제나 보시하고 지계하면 생천한다는 가르침에만 머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절에서는 불자들의 좀처럼 근본교리를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그런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반야심경의 영향일 것이다.
왜 사성제를 말하지 않는가
반야심경은 대승경전의 정수이다. 그래서 아침과 저녁의 예불은 물론 각종법회나 행사에 있어서 빠짐없이 독송하는 것이 반야심경이다. 그런데 반야심경의 내용을 보면 근본가르침을 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바로 ‘무고집멸도’와 같이 ‘무(無)’자가 붙었기 때문이다.
이런 무자는 사성제 뿐만아니라 십이연기도 그렇고 오온 12처, 18계도 모두 무자가 붙어 있다. 이와 같은 무자는 “없는 것이다” 또는 “아니다”라는 부정의 뜻이다. 무고집멸도라고 하였을 때 이는 “사성제가 없다”라는 뜻이다. 단 조건이 붙는다.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사성제가 없다”는 뜻이다. 이를 역설적으로 본다하여 사성제가 긍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긍정을 하려면 무자 다음에 또 무자가 붙어야 할 것이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의 입장이란 무엇일까. 바로 그것이 대승의 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는 오온, 12처, 18계,사성제, 십이연기등과 같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공의 논리로 비판하고 있는데, 이런 비판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하지 않은 것’ 또는 ‘불완전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이유에서일까 스님들이 법문할 때 사성제나 팔정도, 십이연기에 대하여 법문하는 것은 극히 드믄일이다. 그런 결과 불자들 역시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에 대하여 무지하게 되고, 이는 결국 기복과 방편에 의존하게 되어 불자임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 결과가 되었다. 그렇다면 불자임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하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후대 대승논사들은
당연히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접하게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대인도에서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성립한 종교이다. 브라만교는 요즘의 기독교와 비슷한 것이어서 창조주인 브라흐마가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믿었다. 그런 논리에 대하여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부수어 버렸다. 있지도 않은 신을 믿게 하는 것은 커다란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일신교 논리를 비판하고 성립한 것이기에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접하면 현재 유일신교가 득세하는 한국적 상황에서 불자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 대승논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의 논리로 비판하여 부수어 버린 것이다.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 간 것으로 본다. 그런 결과 우란분절에서 듣는 법문에서와 같이 영혼을 이야기하고 혼과 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불자들이 불자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리 만무하다. 따라서 불자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전에 먼저 해야할 일은 반야심경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는것이다.
반야심경이 시대에 맞지 않는 이유
반야심경은 지난 천여년간 불자들의 입에서 불리워져 왔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현실과 맞지 않는 경이 되었다. 이미 초기불교가 도입되고 있는 마당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경을 독송한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더구나 초기불교를 전파한다는 선원에서 조차 반야심경을 독송한다하니 넌센스의 극치를 보는 것 같다.
반야심경이 시대에 맞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최근 강원에서의 교과과정개편 때문이다. 지난 수백년간 지속되었던 서당식 한문경전과 중국스님들이 지은 교재로 공부하여 왔으나 전면개정되어 부처님의 일생, 청정도론, 아비담마와 같은 초기불교 교과과정위주로 전면 개편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교과과정을 보면 초기불교에 대한 가르침이 특징이다. 최근 개편된 강원의 교과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승가대학 교과과정 개편안
학년 |
현승가대학 교육과정 |
개편안 | |||
과목 |
내용 |
과목 |
내용 | ||
1 학년 |
치문과 |
치문 |
중국의 역대 선지식들의 유문을 편집한 책 |
초기&아비달마 불교 |
부처님 생애, 초기불교교리, 아비달마개론 |
禪 |
禪學 개론, 禪 사상사 | ||||
계율과 불교윤리 |
계율학 개론, 사미(니) 율의 | ||||
불교사 |
세계불교의 역사와 현황Ⅰ | ||||
교양 |
컴퓨터 실습, 문학 및 작문 연습 | ||||
2 학년 |
사집과 |
서장 |
대혜종고 스님이 선의 질문에 답한 편지글 |
아비달마&대승불교의 이해 |
구사론, 청정도론, 대승불교 개론, 중관, 유식 |
도서 |
중국 규봉 종밀스님의 중국 선 사상의 형성 |
禪 |
禪典 개설, 禪 수행론 | ||
선요 |
중국 고봉 원묘 스님의 선법의 요의를 적은 책 |
계율과 불교윤리 |
초기승단의 불교윤리, 초기 승단의 생활 규범 | ||
절요 |
보조국사 지눌의 선의 정혜쌍수를 말한 책 |
불교사 |
세계불교의 역사와 현황 Ⅱ | ||
어학 |
불교한문, 영어 | ||||
3 학년 |
사교과 |
능엄경 |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에 의거한 공관을 성립 |
대승불교의 이해 |
중관, 유식, 정토, 화엄 외 기타 |
기신론 |
대승경의 공통된 교리를 말함 |
禪 |
禪語錄 강독, 한국 禪 사상사 | ||
금강경 |
공, 무아를 설함. 집착을 경계함 |
계율과 불교윤리 |
대승보살계, 불교제도사 | ||
원각경 |
마음의 본 성품을 관함 |
불교사 |
한국불교사(조계종사, 종헌 종법의 이해 등) | ||
염불 의례 |
불공, 천도의식 및 기타(환자 방문, 영안실 집전, 영결식 집전 등) | ||||
어학 |
영어, 일어․중국어(선택) | ||||
교양 |
불교 문화(불교 문화재) | ||||
4 학년 |
대교과 |
화엄경 |
대승불교의 수행체계의 정립, 보살행과 깨달음 |
불교와 현대사회 |
불교와 사회(사회과학 일반), 포교의 이론과 실제, 불교상담, 비교종교학, 철학 개론 |
禪 |
禪과 현대사회, 參禪 지도 방법론 | ||||
계율과 불교윤리 |
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 현대사회의 실천불교 윤리 | ||||
어학 |
영어, 일어․중국어(선택) |
출처 ; 1.일아스님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
2, 사찰 승가대학 교과과정 뜯어고친다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38
이런 이유로 해서 반야심경은 더 이상 21세기 한국불교와 맞지 않는 경이 되었다. 그렇다면 반야심경을 대체할 수 있는 경은 무엇일까.
담마짝까경(Dhammacakka Sutta, 초전법륜경)
그것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가장 잘 담고 있는 ‘담마짝까경(Dhammacakka Sutta, 초전법륜경)’이다. 담마짝까경의 원래이름은 ‘담마짝깝빠왓따나숫따(Dhammacakkappavattana Sutta)’이다. 법의 바퀴를 굴리는 경이라는 뜻이다. 줄여서 보통 담마짝까경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 경의 내용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부처님이 막 깨닫고 난 후에 부처님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다섯명의 수행자에게 자신이 깨달은 바를 설하였다. 부처님은 그들에게 세속적인 감각적 즐거움이나 고통스런 고행에 대한 주의를 주었다. 그와 같은 두 극단을 피하고 중도(中道, majjhimā patipadā, Middlw Way)를 언급 한 것이다.
부처님을 깨달음으로 이끈 중도란 팔정도(ariyo atthangiko maggo, Noble Eightfold Path)를 추구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팔정도는 '바른(正, sammā, right)'이라는 말이 들어가는데 정견 (正見 sammā-diṭṭhi, Right view) 정사유(正思(惟, samma sankappa, Right intention), 정어(正語, sammā-vācā, Right speech), 정업(正業, sammā-kammanta, Right action). 정명(正命 , sammā-ājīva, Right livelihood) 정정진 (正精進, sammā-vāyāma, Right effort), 정념(正念 sammā-sati, Right mindfulness, 정정(正定, sammā-samādhi, Right concentration)를 말한다. 그 길이 비젼, 지식, 평화, 깨달음, 닙바나로 이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어서 사성제를 강조 하였다. 고통(dukkha, suffering)은 늙음, 병들음, 죽음과 같은 것등을 말하지만, 불만족 스러운 것, 즐거움이 오래 가지 않는 것, 원하는 것을 못 얻는 것등과 같이 우리 몸에 달라 붙어 떨어지지 않는 오취온(pancupādānakkhandhā, five aggregates)을 말하고 이어서 사성제를 강조 하였다. 그렇다면 왜 담마짝까경이중요할까.
왜 담마짝까경이중요한가
그것은 불교의 핵심사상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부처님의 핵심사상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경전으로서 담마짝까경과 마하빠리닙바나경(대반열반경)을 들 수 있다. 처음 깨달음을 얻어서 설한 경과 열반에 들기 전에 설한 경에서 강조한 사항이 동일 하기 때문이다.
그런 핵심사상이 바로 사성제와 팔정도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팔만사천가지나 되는 모든 가르침은 모두 사성제와 팔정도안에 다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코끼리의 발 안에 모든 동물의 발이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라 볼 수 있다.
그런 담마짝까경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담마짝까경
(Dhammacakka Sutta 또는 Dhammacakkappavattana Sutta, 初轉法輪經, SN 56:11)
이렇게 나는 들었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와라나시 근처의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 계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따라서는 안되는 두 가지 극단이 있다. 그것은 저열하고 통속적이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이며,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따르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팔정도(八正道)로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집중[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참으로 이 중도를 통하여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을 얻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요, 늙음도 괴로움이요, 죽음도 괴로움이다.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요,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데 오취온(五取蘊)이 바로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이다. 그것은 성스러운 팔정도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집중[正定]이다.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진리는 철저하게 알아져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는 버려졌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聖諦]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실현되어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실현되었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道聖諦]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의 진리는 닦아져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와같이 세 가지 양상과 열두 가지 형태를 갖추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게 되지 못하였다면 나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하였다고 천인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과 천인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서 스스로 천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 양상과 열두 가지 형태를 갖추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했다고 천인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과 천인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서 스스로 천명하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며, 이제 더 이상의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지견(智見)이 일어났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섯 비구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 설명이 설해졌을 때 꼰단냐 존자에게 ‘일어난 법은 그 무엇이든 모두 사라지게 되어있다’라는 티 없고 때 묻지 않은 법의 눈[法眼]이 생겼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법륜을 굴리시자, 땅의 신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나니,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수 없도다.’라고
땅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사대왕천의 신들도 한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나니,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없도다.’라고
사대왕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삼십삼천의 신들이, 야마천의 신들이, 도솔천의 신들이, 화락천의 신들이, 타화자재천의 신들이, 범신천의 신들이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나니,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수 없도다.’라고
삽십삼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야마천의 신들도 한 목소리로 외첬다…
야마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도솔천의 신들도 한 목소리로 외첬다…
도솔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기쁨에 넘쳐 한 목소리로 외첬다…
기쁨에 넘쳐 외치는 신들의 소리를 듣고, 그 신들은 또 다른 신들에게 알리고…
기쁨에 넘쳐 외치는 신들의 소리를 듣고, 브라흐마들도 한 목소리로 외치고…
이처럼 그 찰나, 그 짧은 순간, 그 순간에 범천의 세상에 이르기까지 그 소리는 퍼져나갔다. 그리고 일만세계는 흔들렸고 강하게 요동쳤으며, 한량없는 찬란한 빛이 나타났나니 그것은 천인들의 광채를 능가하였다.
그때 세존께서는 감탄을 하셨다. “참으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다. 실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다. 이로 인해 꼰단냐는 안냐시 꼰단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담마짝까경(初轉法輪經).docx 담마짝까경_初轉法輪經.pdf
이와 같은 담마짝까경을 독송하였을 때 불자들은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불자가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담마짝까경으로
수도권의 도시가 다 그렇듯이 교회와 성당건물은 크고 웅장하고 당당하게 서 있다. 더구나 예수상이 서 있는가 하면 벽의 한 면 전체에 예수그림까지 그려져 있어서 마치 온 도시가 기독교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 와중에 산중에서 불교는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불교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불교는 불교인데 겉무뉘만 불교인것 처럼 보였다. 더구나 북과 징소리를 내며 제사지내는 것을 보면 무속행위를 하는 것인지 잘 구별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대승경전의 정수인 반야심경이 봉독되고 있어서 이곳이 절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런 반야심경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인 오온, 사성제, 십이연기등을 공의 논리로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선사들은 법문할 때 사성제나 팔정도, 12연기와 같은 근본가르침에 대한 법문을 하지 않는다. 대신 어려운 한자용어를 써가며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거나 개인적인 이야기위주의 법문을 한다. 이런 법문을 듣고 불자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한 법문을 들으면 불자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일으킬 뿐만아니라 인식의 대전환을 일으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현대인들에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전달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문제점을 들추어내야 한다.
도심에서 밀려나 산중에서만 볼 수 있는 초라한 불교가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이는 현재의 불교방식으로 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사람들의 마음을 잡는데 실패하였음을 말한다. 그런 불교의 중심에 반야심경이 있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면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21세기에 맞는 불교로 바꾸는 것이다. 그 첫번째 단계가 예불문에 사용되는 경을 바꾸는 것이다. 지난 천여년의 것을 답습하는 것 보다 시대에 맞는 경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런 취지의 첫 번째 해야 할 일이 반야심경에서 담마짝까경으로 바꾸는 것이 아닐까.
2011-08-14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을 마음으로 관찰하며”심념처와 객관명상 (0) | 2011.08.22 |
---|---|
“그들은 우리와 종자가 달라요”조남호의 자만과 한진중공업청문회 (0) | 2011.08.18 |
한국불교가 영향력이 없는 이유, 하안거 해제날에 (0) | 2011.08.13 |
K팝처럼 한류열풍을 기대한다고, 총무원의 사찰음식 대중화 (0) | 2011.08.09 |
불자로 살기가 너무 힘들어, 조교(祖敎)에서 불교로 (1) | 2011.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