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연꽃 없는 부용지와 애련지, 비원의 추억과 창덕궁 후원

담마다사 이병욱 2011. 8. 23. 15:21

 

 

연꽃 없는 부용지와 애련지, 비원의 추억과 창덕궁 후원

 

 

 

일요일 오전 창덕궁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장마가 끝난 하늘은 맑고 청명하였지만 햇살은 매우 강렬하다. 하지만 습도가 높지않아 그늘에 들어가면 서늘한 전형적인 여름 땡볕날씨이다.

 

창덕궁에 가기 위해서 먼저 종묘를 통하여 들어가려 하였다. 하지만 단체관람으로 바뀌었고, 창경궁으로 통하는 문도 폐쇄되었다고 한다. 작년 5월 부터 이러한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창덕궁까지 걸어가기로 하였다. 종묘돌담길을 따라 걷다가 인상적인 절지붕을 발견하였다.

 

대각사를 발견하고

 

불자라면 절을 발견하면 들어가고 싶어한다. 그래서 삼배라도 하고 나와야 불자로서 의무를 다 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 절은 말로만 듣던 대각사이었다.

 

 

 

 

 

 

대각사

1923년 용성스님이 창건하였고, 종로3가에 위치하고 있다.

 

 

 

대각사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3층건물이다. 주택가 가운데 오로지 건물한동만 서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법당은 3층에 있었다. 그런데 아무 인적이 없다. 마치 빈집처럼 느껴졌다. 더구나 종무소도 문이 잠겨 있다.

 

일요일 점심무렵이라면 일요법회라도 있을 법한데 사람구경을 할 수 없으니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다. 절 입구의 석판을 보니 이곳이 용성스님 거주터라고 표기 되어 있다.

 

석판에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의 한분으로 불교혁신운동을 펼친 백용성(1864-1940)스님이 활동하던 곳이라고 쓰여있다.

 

대각사는 백용성스님에 의하여 만들어진 절이다. 1921년 용성스님의 주도하에 대중포교운동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런 대각운동은 인도불교부흥운동을 주도 하였던 스리랑카의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 1964- 1933)와 맥을 같이 한다. 다르마팔라가 인도불교부흥을 위하여 만든단체가 대각회(大覺會, Mahābodhi Society)이었기 때문이다.

 

신불교운동의 시작

 

그래서 용성스님이 다르마팔라의 영향을 받아서 불교중흥운동을 전개한 것이 한국에서 대각운동이라고 한다. 이렇게 대중을 포교하고 불교중흥을 위하여 노력한 용성스님의 발원은 50년이 지나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는데, 1970년대 중반에 일어난 신불교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현재의 불광사를 창립한 광덕스님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 때 당시 법회장소로 사용된 곳이 현재의 대각사라고 한다.

 

 

 

 

대각사에서 불광회 모습

1970년대 중반이후 이곳에서 불광운동이 일어나 불광사로 이어졌다.

광덕스님이 법회를 하고 있다.

출처 ; 불교신문

 

 

 

 

이처럼 대각사는 불광사가 탄생되는데 있어서 장소가 제공이 된 공간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법당을 들어가 보았다. 하지만 일요일 점심무렵의 법당안은 적막하였다. 꽤 너른 공간이지만 법회가 열리지 않는 공간은 산중에 있는 절과 마찬가지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광덕스님이 법회를 보았을 때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성황이었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교법사님

 

그때 당시 대각사의 불광법회에 참석하였던 법우님이 있다. 불교교양대학에서 만난 법우님이다. 20대 처녀시절부터 불광법회에 참여한 법우님은 불광사창립멤버로서 모든 과정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법우님과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 C교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C교수님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중학교시절 교법사이었다.

 

다니던 중학교는 조계종 종립중학교이었다. 그 때 당시 종로5가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불교학교라서 불교선생님이라 부르는 교법사선생님이 있었다. 그때 당시 30전후로 보였는데 언행이나 생긴모습이 마치부처님처럼 보이던 분이었다. 그런데 언젠가 불교TV사이트에서 아함경(생활속의 아함경)에 대한 강의를 하는 것을 보고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D대 불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그 법우님에게 알려 주었더니 그 법우님도 C교수님을 알고 있다고 하였다. 광덕스님이 대각사에서 법회할 당시 사회를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때 당시 C교수님의 모습을 우연하게 불교신문사이트(종단 발전 앞장선 스님들 ‘새로운 길’ 걷다)에서 발견하였다.

 

 

 

 

 

대각회법회

종단 행정을 접고 1970년대 중반부터 서울 대각사에서 불광운동을 펼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광덕스님 모습.

사진: 불교신문

 

 

 

사진에서 앞줄 오른쪽의 반곱슬머리를 한 분이 중학교시절 교법사님이다. 아마도 그때 당시 교법사님은 교사로 재직하면서 불광회 창립을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전통문화밸트 창덕궁

 

대각사를 참배하고 다시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외국인이 눈에 많이 뜨인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외국으로 관광을 가면 찾는 곳이 궁전이듯이 외국인들 역시 가장 큰 볼거리이어서 찾아 온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창덕궁은 부근의 인사동, 조계사, 경복궁과 가까이 있어서 하나의 전통문화벨트를 형성하고 있는데, 모두 걸어서 다닐 수 있는 부담없는 거리에 있다.

 

창덕궁은 매우 오래전에 왔었다. 중학교시절 미술대회때이다. 학교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일까 일년에 두차례씩 그 때 당시 비원에서 전교생 미술대회를 실시한 것이다. 그런 기억을 되살려 창덕궁에 들어 갔다.

 

 

 

 

 

창덕궁 돈화문

창덕궁정문이다.

 

 

 

창덕궁의 모습은 변한 것이 없다. 옛날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매우 오래 되어 보이는 나무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볼 때 마다 새로운 느낌이다. 특히 궁궐의 모습이 그렇다.

 

 

 

 

 

 

 

 

 

 

 

 

 

 

 

 

 

 

 

 

 

 

 

 

 

 

 

 

 

 

 

 

 

 

 

 

 

 

 

 

 

 

 

 

 

창덕궁을 찾은 까닭은

 

창덕궁을 찾아 간 목적은 비원을 보기 위해서이었다. 비원에서 미술대회를 하였기 때문이다. 아련하게 기억속에 남아 있는 그 때 그 시절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때 당시와 달리 지금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가이드가 낀 단체관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비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별도의 입장료를 내야한다. 그런 비원으로 통하는 길은 철책으로 굳게 닫혀 있다.

 

 

 

 

 

후원(비원)으로 가는 길

매표소의 우측문은 창경궁으로 들어가는 곳이고, 좌측의 철책이 비원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시간이 되자 국내단체관람객들이 모여 들었다. 전문가이드의 인솔에 따라 약 1시간 반 정도 관람하도록 되어 있다.

 

 

 

 

 

 

창덕궁 후원 전문가이드

내국인과 외국인으로 구별하여 단체관람을 할 수 있다.

관람은 전문가이드의 안내에 따른다.

 

 

 

 

전문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을 후원이라고 하였다. 나이든 세대에게는 비원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난 후 부터 창덕궁 후원(後苑)’이 정식명칭이라 한다. 이런 후원은 창덕궁내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9만평 가량 되는데, 이는 창덕궁 전체면적의 2/3에 해당한다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창덕궁 후원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 되어 있고,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의 아름다운 정원형태를 보여 주고 있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었는데, 이러한 세계유산은 우리나라에서 10곳으로서 전세계문화유산 1,000곳 가운데 1%에 해당된다고 한다. 참고로 일본은 10, 중국은 25곳이라 한다.

 

우리나라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은 석굴암,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창덕궁, 수원화성,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인돌유적, 조선왕릉, 고구려고분군 이렇게 10곳이다.

 

 

기다리고 고대하던 후원에

 

가이드의 인솔에 따라 기다리고 고대하던 후원에 들어갔다. 모퉁이를 돌아 내려가자 마침내 부용정이 있는 연못에 도착하였다. 바로 위에는 옛날 규장각이 보이고 오른편에는 시문대회를 열었다는 너른마당이 보인다. 미술대회가 열렸던 그때 당시의 모습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었다.

 

 

 

 

 

부용지와 부용정

 

 

 

 

창덕궁 후원의 주요 네 구역

 

사실 옛날에 비원구경은 이곳 부용정이 있는 연못주변에 한정 되었던 곳으로 기억한다.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 가이드의 인솔에 따른 단체관람객들에게 더욱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런 비원은 크게 네 구역으로 나누어진다고 인터넷 백과사전에 소개 되어 있다. 그 네 구역은 다음과 같다.

 

 

창덕궁 후원의 네 구역

No

중심지역

부속건물

1

부용지를 중심으로 한 지역

부용정·주합루·영화당(暎花堂)·사정기비각·서향각(書香閣)·희우정·제월광풍관(薺月光風觀)

2

애련지를 중심으로 한 지역

기오헌(寄傲軒)·기두각(奇斗閣)·애련지(愛蓮池)·애련정·연경당

3

관람정을 중심으로 한 지역

관람정(觀纜亭)·존덕정(尊德亭)·승재정·폄우사(砭愚榭)

4

옥류천을 중심으로 한 지역

취한정(翠寒亭)·소요정·어정(御井)·청의정·태극정

 

 

 

흙탕물의 부용지(芙蓉池)와 애련지(愛蓮池)

 

이중 부용지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부용지 (芙蓉池)는 원래 연꽃이 있었던 곳이다. 하지만 그 어떤 연꽃도 볼 수 없다. 그 대신 흙탕물에 연잎 몇 조각이 떠 있을 뿐이다.

 

 

 

 

 

 

 

 

 

 

 

흙탕물의 부용지

원래 연꽃이 피는 곳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작년까지 연꽃이 있었으나 모두 거두어 냈다고 한다. 그래서 부용지에는 연꽃이 없는 흙탕물만 보여서 옛날의 아름답던 부용지의 모습과 영 딴판이 되어 버렸다.

 

 

참고로 이웃블로그에서 발견한 2006년도 부용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2006년도 부용지

물이 깨끗하고 연꽃이 연못에 가득 피어 있다.

사진 ; http://blog.daum.net/hyeanj/3196991

 

 

 

 

그런데 부용지뿐만이 아니다. 두 번째 중심구역이라고 볼 수 있는 애련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애련지(愛蓮池)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연꽃이 만발해 있어야 할 곳에 연꽃은 보이지 않고 누런 흙탕물만 보일 뿐이다.

 

 

 

 

 

흙탕물의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

연꽃과 관련 있는 지명이지만 연꽃은 보이지 않는다.

 

 

 

연못에는 연꽃이 있어야 제격이고 제멋이다. 그래서 연못이 만들어진 곳을 보면 연꽃을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어찌된 일인지 연꽃을 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 많던 연꽃은 어디로 갔을까

 

지난 6월 경복궁 경회루를 보았을 때 역시 연꽃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경회루에 연못에 연꽃이 만발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가 부터 연꽃이 보이지 않게 되고 현재의 경회루는 물만 보이는 호수와 같은 모습으로 변하였다.

 

 

 

 

 

경복궁 경회루

연꽃을 볼 수 없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창덕궁 후원에서 연꽃이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 많던 연꽃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최근 부용지 관련 기사를 보았다. “창덕궁 연못 부용지 탁해졌나”라는 내용의 기사이다.

 

기사에 따르면 부용지에서 나오는 지하수가 고갈 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지하수가 흘러나와야 물이 맑아지는데, 지하수가 고갈되다 보니 물이 흐려지고 탁해 졌다는 것이다. 이는 부용지 뿐만아니라 다른 연못도 마찬가지인데, 이런 현상이 일어난 원인을 주변의 개발로 탓으로 보고 있다.

 

비가 오면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 들어 지하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수구를 통하여 모두 한강으로 흘러들어 가기 때문이라 한다. 또 청계천을 개발한 것도 하나의 요인이라 한다.

 

이처럼 도시를 콘크리트로 싼 결과 지금과 같은 환경재앙을 맞이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연꽃이 피어나기를

 

세상은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특히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변화무쌍하다. 어느 날 와서 보면 길다란 고층건물이 서 있는가 하면 눈에 익은 건물들이 사라지고 없다. 종로5가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던 중학교도 흔적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고층빌딩이 세워져 있는데 유일신교와 관련이 있는 건물이다. 하지만 그때 당시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비원에서 열리는 전학년 미술대회는 매우 소중한 추억이다. 초록의 신록이 시작되는 봄날과 단풍이 든 비원의 풍경은 그림그리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더구나 고풍스러운 정자와 전각들은 더 없기 좋은 소재이다. 그런 중심에 항상 부용지와 부용정이 있었다. 그곳을 다시 보니 옛날 그대로 고스란히 하나도 변화없이 남아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부용지나 애련지에서 연꽃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부용지와 애련지는 흙탕물로서 한국을 찾는 관광객이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이다. 그런 곳에 연꽃을 심어 연꽃이 피게 한다면 예전의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후원에서 연꽃이 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옥류천

 

 

 

 

 

 

 

 

 

 

 

 

 

 

 

 

 

 

 

 

 

 

 

 

 

 

 

 

 

 

 

 

 

 

 

 

 

 

 

2011-08-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