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도학사의 기독교와 불교통합시도? 21세기 아쇼카 선언을 보고
인터넷포털 뉴스를 보다가 눈에 띄는 기사의 제목을 발견하였다. 모 보수신문에 ‘불교에만 진리 있는 것 아니다…조계종, 21세기 아소카 선언’와 크리스천투데이에서는 ‘조계종,이웃 종교에도 진리 있음을 인정한다’라는 기사이다. 라는 제목이다. 또 불교신문에서는 “전법의 목적이 개종이 아니다”라는 제목을 뽑았다.
21세기 아쇼카 선언
이와 같은 기사는 조계종의 ‘자성과 쇄신 결사추진본부’로 부터 나왔다. 8월 23일 이 결사추진본부의 화쟁위원회 도법스님이 템플스테이 통합정보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이선언문의 골자는 크게 다섯가지로 요약된다.
1)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열린 진리관’
2)내 종교가 소숭한 만큼 다른 사람의 종교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종교다양성의 존중’
3)실천적 활동을 통해 내 믿음의 참됨을 보여주는 ‘전법과 전교의 원칙’
4)정교분리와 종교선택의 권리 보장, 자신의 믿음을 전하기 위해 공적 지위나 권력 이용 금지
5)갈등의 평화적 해결
이러한 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아마도 MB정권이 들어선 이래 개신교의 공격적 선교행태와 이로인한 공직자들의 무분별한 종교편향행위가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땅밟기등으로 인하여 안마당을 넘어 안방까지 들어와 선교하는 행태는 이미 불교를 말살시키겠다는 의미로 받아 들여져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종단의 판단이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선언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 두 가지를 들라면 열린진리관, 종교의 다양성존중에 관한 선언일 것이다. 이 두 가지 사항이 결국 네번째의 개신교의 공격적 선교행태와 공직자의 무분별한 종교편향행위를 막아보자는 전제조건으로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종교평화라는 목적을 위하여 열린진리관과 종교의 다양성을 먼저 언급하였는데, 과연 상대방은 이를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이 초안을 만들기 위하여 무려 8개월에 걸쳐 스님과 학자들이 만들었다는데, 이런 초안이 과연 불교인들의 전체의견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진리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첫째, 열린진리관에 대한 것이다. 이웃종교에서 진리가 있음을 불교스스로가 인정한 것이다. 이는 기독교측에 종교평화선언을 이끌어내기 위한 대전제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의 경우 배타적구원과 독선적진리관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사 기독교 이외의 종교는 구원이 있을 수 없고, 어느 성인의 말씀이라도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거짓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불교측에서 스스로 타종교에도 진리가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종교평화라는 목표를 위하여 타종교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불교의 자비와 평화의 종교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나 이를 달리 생각하면 진리를 정치적으로 활용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는 정치와 다르다. 정치는 차선을 추구하지만, 종교는 최선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말을 바꾸어 말하면 정치는 타협의 산물이지만, 종교는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정치는 여와 야가 있어서 정책에 대하여 협상을 함으로서 최선이 아닌 차선책을 내어 놓지만, 종교는 결코 차선책이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진리는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계종에서는 종교평화를 이끌어 낸다는 명목으로 타종교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라는 대전제를 단 것은 일종의 정치적 의도가 깔린 타협책으로 오해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하는 것으로도 오해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타종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라고 선언한 것은 기독교측으로 부터도똑 같은 선언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적 기독교가 처한 현실에서 그와 같은 답을 받아내리라는 것은 희망사항에 불과 할 것이다. 기독교측에서 결코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하는 순간 기독교는 붕괴되고 말기 때문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이처럼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타종교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라고 먼저 선언한 것은 대승불교적 관점에서 맞을 수도 있지만, 초기불교적 관점으로 본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리란 무엇일까. 진리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진리란, 사실이 분명하게 맞아 떨어지는 명제, 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참된 이치나 법칙을 뜻한다”
진리란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적이고 불변한 이치와 법칙을 말한다. 그런 진리는 어떤 것일까. 불교라면 당연히 사성제(四聖諦, cattari-ariya-saccani)을 말한다. 그것도 성스런 네 가지의 진리를 말한다. 이런 사성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참된 법칙이다.
지금 고통 받고 있을 때 부처님이 “이것이 고통이다”라고 하였을 때 이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여덟가지 괴로움 즉, ➀ 태어남(jāti), ➁ 늙음(jarā), ➂ 죽음(maraṇa), ➃ 슬픔(soka), ➄ 비탄(parideva), ➅ 육체적인 고통(dukkha), ➆ 정신적인 고통(domanassa), ➇ 절망(upāyāsa), ➈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appiyasampayoga), ➉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piyavippayoga), ⑪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icchitālābha), ⑫ 집착하는 무더기(upādāna-kkhandha).를 설하였을 때 이러한 괴로움에 대하여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리인 것이다.
그런 진리는 괴로움의 진리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는 나머지 세 가지 진리도 있어서 모두 네 가지의 진리가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일반적으로 사성제를 말한다.
진리를 빠알리어로 삿짜(sacca)라 한다. 사성제는 빠알리어로 짯따리 아리야 삿짜니(cattari-ariya-saccani)라 한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진리가 명백히 사성제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타종교에도 사성제와 같은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다른 종교에 진리는 없다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타종교에는 진리가 있을 수 없다. 삿된 견해만 있을 뿐이다. 그런 대표적 삿된 견해가 ‘상견’이다. 어떤 변치 않는 영혼이 있어서 이 세상의 근원이 여겨지는 궁극적 실재와 합일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ṇhā)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와 같은 견해가 잘 못된 견해임을 밝혀 내고 오온으로 분해하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무아를 설하였다.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육신은 무아이다. 만일 육신이 [영원한] 자아가 있다면 몸이 병들지도 않을 것이고, 육신에게 ‘이렇게 돼라’ 또는 ‘이렇게 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육신은 무아이기 때문에 병들게 되고 육신에게 ‘이렇게 돼라’ 또는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없다.
(상윳따니까야22 칸다상윳따59, 율장 마하왁가 1편 6,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은 우리의 육신을 예를 들어 육신이 나의 것이라면 마음대로 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처럼 몸이 무아인 것처럼, 느낌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지각, 형성,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오온으로 이루어진 이 몸과 마음은 나의 것, 나의 자아, 나의 영혼이라고 부를 수 없고 단지 조건에 따라 형성된 것이고 또 무상한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은 모두 사성제로 귀결되는데 사리뿟따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움직이는 모든 생명들의 발자국들은 모두 코끼리 발자국에 포괄되고 코끼리 발자국이야말로 그 크기로서 최상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어떤 유익한 법이던 그것들은 모두 사성제에 포괄됩니다. 무엇이 넷인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맛지마니까야 마하핫티빠도빠마경, Mahāhatthipadopama-sutta, 상적유대경, M28)
이처럼 사성제는 불교의 초석이라 볼 수 있고, 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바로 이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스스로 “나는 알아야 할 바를 알았고, 닦아야 할 바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노라.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부처, 즉 깨달은 사람이노라.”(Sn.558)라고 말씀하셨다.
이런면으로 보았을 때 사성제가 진리이고, 다른 종교에 사성제가 없다면 진리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의 다양성을 존중해 달라는데
두번째로 ‘종교의 다양성의 존중’에 관한 것이다. 조계종에서는 이에 대하여 내 종교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종교도 소중함을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 역시 종교평화를 염두에 두고 나온 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다양성에 대한 주장은 자칫 종교다원주의자들에게 먹잇감이 되기 쉽다. 그래서일까 조계종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양성은 곧 ‘차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차이’를 무시한 채 결국 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종교의 관점으로 수렴해버리는 것은 이웃종교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대승불교에 ‘불이사상’이 있다. 진리는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히 불이사상을 문자적으로 해석사면 너와 나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진리는 둘이 아니어서 모든 종교는 모두 다 똑 같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결사추진본부에서는 이를 부정한다. 불이사상은 같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것이라고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모든 종교는 다 같은 것이라는 견해에 동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다르고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기독교와 불교의 통합분위기로 나아 가는 것 같다. 그런 것중의 하나로 ‘심도학사’를 수 있다.
길희성교수의 심도학사
심도학사는 기독교 신학자 길희성교수가 만든 것이다. 진보적 신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길희성 교수는 ‘보살예수’라는 책을 지은 저자로서 불교에 대하여 잘 아는 학자로서 스스로 불교를 좋아 한다고 하였다. 또 종교다원주의자로서 길교수는 불교에 대한 사랑도 각별하여 기독교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불교관련 저술을 하였다.
그런 그가 최근 강화도에 심도학사라는 고전을 공부하고 명상하는 집을 마련해 놓고 개원식을 열었다고 한다. 개원식에서 길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슬람의 한 수피(Sufi) 영성가는 말하기를 처음 카바(Kaaba) - 메카에 있는 검은 돌이 안치되어 있는 곳으로서, 무슬림 순례자들이 반드시 참배해야 하는 성소 - 를 방문했을 때는 카바만 보고 하느님은 만나지 못했고, 그 다음에 갔을 때는 카바와 함께 하느님을 보았으며, 마지막 세 번째 방문에서는 카바는 사라지고 하느님만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이슬람뿐 아니라 모든 종교의 신앙생활과 영성의 핵심을 드러내주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나아가서 인류 종교사의 향방을 말해주는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길희성, 초종교적 영성을 지향하며, 심도학사 개원식에서 2011년 6월 18일)
종교다원주의자 길희성교수가 생각하는 궁극적인 진리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믿는 하느님은 모든 종교를 초월해 있다는 것이다.또 인간은 하느님이 ‘육화’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동서양의 모든 종교가 한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예로서 등산에 비유하고 있다.
산을 올라가는 길은 여럿이지만 우리는 정상에서 만날 것이라 한다. 그런데 산의 정상에 올라가보면 궁극적 실재로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 한다. 따라서 종교다원주의자로서 길희성 교수가 주장하는 종교는 결국 한 곳에서 하느님을 만날 것이기 때문에 같은 것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예로서 선불교에서 말하는 “달은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본다”라는 말도 달이 바로 하느님을 가리키는 것이고, 도덕경에서 말하는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역시 초월적 존재로서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라 한다.
기독교와 불교의 통합작업
이처럼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진여나 참나, 본마음등으로 표현 되는 궁극적 실재를 하느님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면으로 보았을때 불교나 기독교는 모두 같은 것이라 한다. 이른바 기독교와 불교의 통합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길희성 교수의 심도학사 개원식에 불교의 스님들이 다수 모였다. 그리고 어느 스님은 축사까지 하는 사진이 카페에 실렸다. 모든 종교는 하나이고 궁극적 실재는 바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개원식에서 그 스님은 어떤 축사를 하였을까.
심도학사에서 축사하는 스님
사진 : http://cafe.daum.net/simdohaksa/lI7e/6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불교와 기독교는 통합될 수 없다. 서로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 출발점도 다르다. 따라서 대승불교처럼 기독교의 멋잇감이 될 염려가 전혀 없다. 이는 불교가 브라만교를 비판하며 성립한 이유도 있다.
부처님 당시의 브라만교는 요즘의 유일신교와 매우 유사하였다. 창조주가 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피조물인 인간은 변치 않는 아뜨만이 있어서 창조주와 합일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그것이 거짓임을 증명하였다. 따라서 초기불교와 기독교는 결코 통합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비판 하며 성립된 대승불교는 합일사상에 바탕에 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타켓이 되고 있다. 기독교신한자인 오강남교수가 “참나와 하느님은 같은 것”이라든가, 역시 기독교신학자인 이찬수교수의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것”이라는 발언이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측의 불교통합에 대처하려면
초기불교에서는 고정 불변하는 영혼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궁극적 실재로서의 하느님도 ‘토끼의 뿔’과 같이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 하기 때문에 융합될 수 없다. 따라서 불교와 기독교는 다른 종교인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 실재로서 본마음, 참나, 진여, 불성등을 추구하는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서로 같음을 주장하는 기독교의 주장에 대하여 불쾌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 종교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종교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종교다양성의 존중’을 요구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비판하고 성립된 대승불교의 태생적 한계라 여겨진다. 기독교측의 불교통합에 대처하려면 초기불교의 가르침으로 되돌아 가야 할 것이다.
2011-08-2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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