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죄의식, 병주고 약주는 종교인들의 구라
‘개종’이야기를 들으면
종종 ‘개종’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주로 인터넷게시판이나 토론사이트 또는 댓글을 통해서이다. 그것도 나이드신 분들이다. 평생 절에 다니다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불교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처럼 보인다. 나이 드신 노보살님들이 믿는 불교는 다름아닌 ‘기복불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불자들 대부분은 ‘기복불자’들이다. 절에 가면 나와 내 가족을 위하여 기도한다. 일반적으로 합격, 승진, 사업번창, 병치유과 같은 ‘4대 기도’이다.
이런 기도로 평생 보내다가 나이 들어 무릎이 아파 더 이상 산에 오를 힘이 없어졌을 때 집 가까이 있는 교회나 성당에 다니게 된다고 한다. 복을 주는데 있어서 ‘불보살님’이나 ‘하나님’이나 그게 그것인것 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에
우리나라 국민치고 누구나 교회에 한 번 가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주변에 교회는 넘쳐나고 공격적인 선교행위로 인하여 어렸을 적 부터 한 번쯤 교회경험이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세상물정에 대하여 모를 때 교회에 간 적이 있었다. 조무래기들만 모아 놓고 찬송가를 가르쳐 주었는데 내용이 너무‘무시무시’ 하였다. 하나님을 믿다 안믿으면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에 빠진다는 내용의 노래이었다.
그런 하나님은 어린나이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벌을 받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항상 나를 노려 보고 감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체험한 교회에서의 두려움과 공포감은 초등학교 기간 내내 마음을 지배하였고 스트레스를 주었다. 어느 정도 세상물정을 알게 된 중고등학교 시절에 두려움은 덜 하게 되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믿다가 믿지 않으면 지옥..”운운하는 것은 정서적으로 상처를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중학교는 조계종 ‘종립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는 미국의 선교사가 세웠다는 ‘미션스쿨’을 다녔다. 이미 중학교에서 불교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 고 난 상태에서 미션스쿨의 강제종교 교육은 매우 많은 ‘정신적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교목은 끊임 없이 하나님을 받아 들이라는 설교를 하였지만, 마음속으로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받아들이는 순간 나의 모든 것을 빼앗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종속되어 평생동안 빠져 나오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체험한 기독교는 두려움의 종교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생각을 나만이 가진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갖는 두려움과 공포는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가슴 한 구석에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품고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대체 그런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크리스천 친구가 있는데
크리스천 친구가 있다. 사회에서 일 때문에 자주 만나다 보니 친구가 되었다. 그런 그는 ‘열린 기독교인’이다.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각자 자신의 종교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불자로서 기독교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던 것에 대하여 알 수 있었다. 또 기독교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불교에 대하여 설명해 줄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그는 일곱살 때 부터 교회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사업을 하다 망해서 평생을 갚아도 갚지 못할 빚을 지고 살아 간다. 그래서일까 돈이 없는 그는 교회에 나가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믿는 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형제종교라고 볼 수 있는 천주교를 기웃거리는 것이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개종(改宗)을 생각 하는 친구에게)를 블로그에 올렸더니 메인뉴스에 올라가서 수 많은 조회와 댓글이 달리게 되었다. 부담없이 가볍게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메인에 올린 것을 보니 다음 사이트의 담당자 마음에 따라 결정됨을 알았다.
900여개의 댓글중에
종교에 대한 글을 매우 민감한 주제이다. 그래서일까 900여개의 댓글을 보면 마치 넷상에서 ‘종교전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댓글중에 매우 솔직하게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표현한 것도 있었는데, 그런 것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인상적이었다.
“주일을 빠지면 큰일난다 교회를 안가면 지옥간다 , 이런거 솔직히 별로 안좋아 하거든요 믿음은 자기 마음에 우러러 나오는것 ...”
(산초하, ‘개종(改宗)을 생각 하는 친구에게’에서)
“정말 가슴에 와닿네요.
저의 아내는 매주 의무적으로 교회 갑니다. 안가면 화를 입을 까봐...누가 그랫는지는 모르지요.”
(보석상자, ‘개종(改宗)을 생각 하는 친구에게’에서)
“어떤 종교든 마음이 움직여야 가는 것이지..누구처럼 안다니면 뭔가 벌을 받을거 같은 마음에”
(야수, ‘개종(改宗)을 생각 하는 친구에게’에서)
댓글을 보면 두려움과 공포가 신앙생활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를 나가다 안나가면 지옥갈 것 같고, 화를 입을것 같고 또 벌을 받을 것 같아서 ‘의무적으로’ 다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류의 이야기는 일부신자들에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를 다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예를 또 하나 발견하였다.
아침에 즐겨듣는 프로에서
아침에 즐겨듣는 프로가 있다. bbs불교방송에서 진행하는 ‘불교강좌’시간이다. 혜문스님의 ‘알기쉬운 불교이야기’인데, 이제까지 다른 진행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딱딱한 법문위주가 아니라 생생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런 이야기중에 어느 목사가 지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녹취하였다. 그 책이름은 ‘우리아이 절대 교회 보내지 마라!’이다.
현직에 있는 ‘송상호목사’가 지은 책으로서 이런 책이 나올 정도라면 기독교도 이제 자신감이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경우 잘 못된 것에 대한 내부적 비판에 대한 책이나 사이트를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불교계는 잘 못된 것에 대한 비판을 하면 매우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자꾸 좋은 면만 부각하고 문제되는 것을 감추려 하다 보니 종종 일반공중파 방송을 타기도 한다. 그런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려면 불교계 내부적으로 비판이 있어야 하고 이를 수용할 용기도 있어야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송상호목사가 말하는 두려움이라 무엇일까. 그것은 어렸을 적 교회에서 들은 것이나 댓글에 표현된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현직목사가 목회하면서 말한 두려움은 크게 두가지이다. 하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또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먼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도 천국과 지옥이 있고 없음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는 없다. 증명할 수 없는 불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에 더욱 더 힘이 실린다. 이건 참으로 종교에서만 벌어지는 아이러니이다.”
(송상호목사, ‘우리아이 절대 교회 보내지 마라!’에서)
아무도 죽어서 다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다. 그래서 죽음이후에 대하여 잘 모른다. 다만 죽음이후에 벌어질 사항에 대하여 경전으로 또는 구전되어 왔을 뿐 이에 대하여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이후에 대하여 불확실하다 보니 온갖 상상력을 다 동원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미끼로 한 하나의 ‘종교장사’로 보는 것이다.
신을 두려워 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은 있다고 증명되지도 않았고 또 익숙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막연히 있을 것이란 생각만 할 뿐 아무도 신을 보았다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귀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구도 귀신을 본 적이 없지만 막연하게 두려워 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사람들은 꾸역꾸역 평소 보다 잘 차려 입고 교회에 모여든다는 것이다.
종교인의 구라1
사람들이 교회나 절, 또는 기도처를 찾는 이유는 알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그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싶고, 목사나 스님들로 부터 위로 받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두려움을 이용하여 종교장사를 한다는 것이다. 두려움을 해결해 줄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예를 송상호 목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이글을 읽는 독자중에 개신교인이 있다면 목사로서 구라를 쳐 볼까 한다. 교회다니는 당신이 교회를 멀리한다면 3년 후에는 당신의 딸이 하나님의 벌을 받을 것이다. 결국 당신의 사업은 5년 후면 망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이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하더라도 교회를 그만 둘 수 없을 것이다.”
(송상호목사, ‘우리아이 절대 교회 보내지 마라!’에서)
존경하고 믿고 따르는 목사로 부터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교회에 나가지 않을 ‘강심장’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말도 안되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아무리 많이 배우고, 교양있고, 지위와 권세가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교회에 꾸역 꾸역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인들에게 보이지도 않고 검증되지도 않는 신을 대상으로 한 두려움 심어주기의 전형이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구라’가 과연 기독교에만 있을까. 혜문스님의 이야기를 빌어 말하면 다음과 같다.
종교인의 구라2
도시에서 보이는 것은 교회십자가만 있는 것 같다. 그 어디에도 절은 보이지 않는다. 있긴 있지만 산중에 꼭꼭 숨어 있는 것처럼 보여서 도시에서 사찰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것중의 하나가 ‘점집’이나 사주관상을 봐주는 ‘철학관’이다.
이런 집들의 특징은 불교로 포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卍)자가 붙은 심볼과 함께 ‘암(庵)’자가 붙은 상호를 쓰고 있어서 마치 절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또 보살이라는 칭호를 쓰기도 하여 겉으로 보기에 불교처럼 보이게 한다. 또 안에 들어가면 불상이 있어서 틀림 없는 불교인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불교로 포장한 점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대운이 좋지 않고, 삼재가 들었으며, 아마도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요. 조상천도재를 지내 주거나 삼재풀이를 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부적이라도 사서 지녀야 집안의 불운을 피해 갈 것입니다.”
(혜문스님, bbs불교방송 ‘알기쉬운 불교이야기’에서)
만일 이런 이야기를 점집에서 하지 않고 여법한 사찰에서 주지스님이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면 신도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앞서 교회의 목사가 신자들에게 구라를 쳐 두려움을 조장하여 교회에 나올 수 밖에 없게 하듯이, 스님의 말을 무시할 강심장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불안과 공포에 짓눌려 돈 보따리를 들고와 애원하다시피 무당푸닥거리라도 하려고 달려들 것이다.
죽어서 낭패볼까봐
종교인들의 구라를 보면 죽음과 죽음이후에 대하여 주로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도 죽어서 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죽음이후에 대하여 상상의 나래를 펴는데 가장 많이 써먹는 말이 천국과 지옥에 관한 것이다. 그런 천국과 지옥은 실재하는 것일까.
만일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믿는 이가 죽었다고 하자. 진짜 그의 말대로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을 때 그와 같은 믿음은 손해볼 것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목사의 말대로 천국이나 지옥이 실재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는 죽어서 낭패 볼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이유로 해서 교회에 다니면 일종의 보험효과도 있다는 것이다. 믿어서 손해볼 것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생각이 들면 일요일 교회에 나가지 않고는 못 배긴다.
만일 교회에 나가지 않고 집에 앉아 있다면 죄를 짓는 것 같아 안절부절 못할 것이다. 또 십일조를 다 내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을 때 하나님의 돈을 도적질했다는 죄책감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이쯤 되면 종교는 마음의 위안과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심한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주기 딱 알맞다. 그런 종교는 약일까 독일까.
병주고 약주고
어느 의사가 있었다. 그의 아들이 의과대학을 마치고 자신의 병원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들은 동네 어르신의 병을 단 한 번에 고쳣다. 이를 자랑스럽게 말하자 아버지는 “ 그분은 우리병원의 단골손님이란다”라고 말하였다. 그 단골손님으로 인하여 아들이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이 알 수 없는 죽음과 죽음이후에 대하여 구라를 침으로서 두려움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죄를 짓고 벌을 받을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나 가난한 자나, 많이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똑똑한 자나 아둔한 자나 모두 바이블을 옆구리에 끼고 평소 때 보다 잘 차려 입고 교회에 꾸역꾸역 몰려 가는 것이다.
그렇게 교회에가면 목사의 원맨쇼를 보아야 한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그의 연설을 참고 들어야 한다. 원맨쇼가 재미있든 없든 그들은 진지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애써 표현한다. 그리고 그의 지시에 따라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한다. 울고 불고 하는 통성기도, 부흥회와 같은 특별난 기도가 있긴 하지만 오십보백보이다. 이런 교회풍경은 지구상 어디에 가든 비슷한 것이라고 송상호목사는 말한다.
이렇게 이해가지 않을 정도로 지루하고 재미없는 예배에 목매다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죽음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를 ‘병주고 약주고’ 라고 말하는 것이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두려움과 공포심을 조장하여 매달리게 만드는 방법은 ‘병주고 약주고’ 방식의 전형이고, 동시에 교묘한 ‘수금’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전세계 어느 종교에서나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죽음과 죽음이후를 알 수 없고 죽어서 돌아 온자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따르는 초기불교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 다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성제와 팔정도, 연기법등으로 요약된다. 그런 가르침에 어떤 변치 않는 영혼은 있을 수 없다. 무상함속에서 ‘조건에 따른 연기적 흐름’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고정되고 불변하는 영혼이 없기 때문에 죽음과 죽음이후에 대한 것도 유일신교나 대승불교와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중유(中有)’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중유는 죽은 다음 일정기간 머무는 것을 말한다. 대승불교식으로 말하면 49일동안 머물다 심판을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는 다는 개념을 말한다. 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죽은 다음에 곧바로 새로운 존재로 나게 되는데, 거의 순간적이라 한다. 마치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눈깜짝 할 사이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과 죽음이후에 벌어지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자신이 삶의 과정에서 지은업과 업의 표상 또는 태어날 것의 표상을 죽기직전에 보는 것이다. 그래서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는 것으로 본다. 그런 세상은 욕계, 색계, 무색계를 포함하여 모두 31개의 세상이다. 그 중에 인간세상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에서는 어떤 두려움을 느낄까.
너무 오래 살다보니
초기경전 니까야에 바까브리흐마(Baka Brahma, 바까대범천)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바까는 스스로 전지전능하다고 여기는 신으로서 오늘 날 ‘유일신’과 비슷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바까는 수 많은 겁에 걸쳐 살았는데, 너무 오래 살아서 자신의 전생을 잊어버리고 늙음이나 죽음이 없는 자신의 불멸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의 전도된 인식을 없애주고자 바까브라흐마의 거처에 갔다.
바까는 부처님의 방문을 확인하고 자신의 영원한 삶을 자랑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바까의 무명은 무상, 늙음,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끔찍한’ 것이라고 말씀 하였다. 부처님은 바까가 선업을 쌓아 오래 살게 된 것이라 말하고, 너무도 오래살다보니 자기전생을 잊어 버리고 자신이 불멸한다는 전도된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이라 말하였다.
이말을 듣자 바까브라흐마는 자신의 전능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까브라흐마는 여전히 교만하였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부처님과 다른 브라흐마들 앞에서 사라지고자 하는 신통을 부렸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부처님의 신통으로 바까범천은 여전히 모습을 나타낸채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시었다.
나는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노라
존재하지 않음을 구하는 자들에서 존재를 보노라.
어떤 존재도 나는 환영하지 않고
즐김을 움켜쥐지도 않는다.
(Bhavevāham bhayam disvā bhavan ja vibhavesinam bhavam nābhivadim kiñci nandincana upādiyim, M.i.330)
**이 바까(Baka) 범천의 이야기는 상윳따니까야의 ‘바까범천경(Bakabrahma Sutta, SN.i.142) ‘과 맛지마니까야의 ‘범천초대경(Brahmanimantanika Sutta, M.i.330)에서 나온다.
부처님은 존재에서 두려움을 본 것이다. 형성된 모든 것들은 무상하여 일어나면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지전능한 바까브라흐마는 너무 오래살다보니 자신을 영원불멸의 존재로 착각한 것이다. 부처님은 바까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며 게송을 읊은 것이다.
천국은 정말 행복한 곳일까
이 세상의 대부분의 종교는 영원을 추구한다. 그래서 영원에 대한 집착을 하게 된다. 어떤 변치 않는 영혼이 있어서 천국에 태어나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런 영원에 대한 집착은 지옥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믿지 않는 자, 보기 싫은 자들은 지옥에 쳐 넣고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천국과 지옥은 죽음이 없다. 그래서 한번 천국이면 영원한 천국이고, 한 번 지옥이면 영원한 지옥이다. 그런 천국은 정말 행복한 곳일까. 죽음이 없이 영원히 행복한 생활을 한다면 행복이 행복인줄 모를 것이다. 불행이 있음으로 해서 행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오로지 행복만 있다면 행복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런 행복이 영원한 것이라면, 지금 열심히 하프를 켜며 아름다운 선율을 내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영원히 하프를 켜며 살아갈 것이다. 과연 이것을 행복이라고 볼 수 있을까. 어떤 이는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하여 ‘닫힌 지옥’과도 같다고 하였다. 매일 진수성찬으로 밥을 먹으면 식상한데, 그 진수성찬을 영원히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게송에서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노라”라고 말했을 것이다.
한편 지옥에 빠진 자들의 고통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매우 가혹한 것은 영원히 지옥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지옥은 믿지 않는 자들이 떨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유일신을 믿고 찬양하고 갖은 아양을 다 떨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도 가기 힘든 곳이 천국이라 한다. 천국에 가는 티켓은 한정 되어 있기 때문이라한다.
이렇게 전부아니면 전무식의 이분법적 논리가 적용되다 보니 죽음과 죽음이후의 세계에 두려워하고, 종교인들은 ‘구라’를 쳐서 ‘수금’을 하는 것이다. 유일신교에 이와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초기불교에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무엇일까.
왜 빅쿠( bhikkhu, 비구)라 할까
종종 오랜만에 보는 친지들을 보았을 때 형편 없이 늙은 모습을 보았을 때 존재의 두려움을 느낀다. 어느 누구 하나 제행무상의 법칙을 거슬러가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생노병사의 순환과정을 거쳐 한 존재가 사라지고 또 다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 끊임없이 삼사라를 윤회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두려운 것이다. 이런 두려움은 죽음이후에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유일신교 신자들이 겪는 두려움과 다른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두려움은 존재에 대한 두려움으로서 결국 ‘윤회에 대한 두려움’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게송에서 “어떤 존재로 나는 것도 바라지 않고 즐김도 움켜쥐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말은 존재하기 위하여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갈애를 일으키지 않으면 쌓아 놓은 업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태어날 곳이 없게 된다. 그것을 ‘닙바나(열반)’이라 한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기도가 없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갈애를 일으키고 ‘자의식’만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기도를 하는 종교는 죽음과 죽음이후에 대한 두려움울 가지고 살아가지만, 기도를 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릴 것을 강조하는 초기불교에서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킨다. 그리고 존재하게 하는 윤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런 사람들을 무엇이라 부를까. ‘위숫디막가(Visuddhi Magga,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윤회에서(saṁsāre) 두려움을(bhayaṁ) 보기(ikkhati) 때문에 비구(bhikkhu)라 한다.”
[위숫디막가( Visuddhi Magga 청정도론), 제1장 7절, Vis.Ⅰ.7]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가 비구라 하였다. 삼계에 안주 할 곳이 없어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두려운 것이라면 하루 빨리 두려움에서 탈출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도하지 마라!
초기불교에 바라는 기도는 없다. 그리고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도 바라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한다. 바라는 기도를 하면 삼사라를 윤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라는 기도를 하는 종교는 ‘사실상 같은 종교’라고 볼 수 있다.
바라지 않고 알아차리기만 하였을 때 윤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는데,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담마빠다(법구경)에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한량없는 세월의 생사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둑카였네.
아, 집을 짓는 자여! 나는 이제 너를 보았노라!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
이제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이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닙바나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파괴되어 버렸느니라.
[담마빠다( 법구경) 153-154]
2011-08-29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교와 기독교는 결국 같은 것? 추인하는‘21세기 아쇼카 선언’ (0) | 2011.08.31 |
---|---|
“삽베삿따 바완뚜 수키땃따(모든존재가 행복하기를!)”독송용 까라니야멧따경(자애경) (0) | 2011.08.30 |
도(道)는 세상속에, 세상속의 도인들 (0) | 2011.08.26 |
심도학사의 기독교와 불교통합시도? 21세기 아쇼카 선언을 보고 (0) | 2011.08.24 |
연꽃 없는 부용지와 애련지, 비원의 추억과 창덕궁 후원 (0) | 2011.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