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베삿따 바완뚜 수키땃따(모든존재가 행복하기를!)”독송용 까라니야멧따경(자애경)
자꾸 소승이라 하는데
즐겨보는 사이트가 몇 개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불교TV사이트’이다. 사이트에 매우 다양한 프로그램이 올려져 있는데, 현재 방영중인 것도 있고 종영된 것도 있다. 이들 프로그램중에 매우 아끼는 프로가 없을 수 없다. 주로 교수나 전문가들이 강의한 내용들이다.
그에 반하여 프로그램의 대부분을 차지 하는 스님들의 법문이나 강의는 전문성이 떨어지지만 재가불자들이 몰랐던 승가의 일면을 알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런 프로중에 ‘선승에게 길을 묻다’라는 프로가 있다. 그 프로에서 어느 스님은 ‘소승’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초기불교를 신봉하는 불자들은 ‘소승’이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미 그러한 용어는 사용하지 않기로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진 마당에 서슴없이 꺼낸 말에 강한 거부감을 갖는다.
소승이라는 말은 대승이라는 용어가 생겨 났기 때문에 사용되는 말이다. 부처님 가르침 중에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후대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면서 자신들과 차별화 시키기 위하여 사용한 용어가 소승이다.
TV프로에서 스님은 소승에 대하여 “자신만을 위하여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간단히 말하였다. 그리고 대승은 “중생구제를 위한 보살정신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또한 간단히 말하였다.
용어상으로만 본다면 소승은 매우 편협한 불교이고, 대승은 자비심이 넘치는 불교이다. 하지만 대승불교를 표방하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대승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사는 곳에 불교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깊은 산중에 들어가야 불교를 만날 수 있다. 그것도 누가 찾아 올까봐 보이지 않는 곳에 꼭꼭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깊은 산중에 사는 스님들의 이야기
깊은 산중에 숨어 살듯이 사는 스님들의 이야기가 회자된 적이 있다. 그런 스님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책으로 나오기 전에 스님들의 홈페이지를 통하여 이미 알고 있었다. 인터넷에 글을 쓰다 보면 수 많은 검색이 이루어지는데, 검색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다.
스님들의 글솜씨는 인기작가를 뺨칠정도로 감칠맛이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새로운 글이 올라오지 않는 것이었다. 블로그의 즐겨찾기에 올려 놓고 새로운 글이 올라오기를 기다렸으나 한달이가도 소식이 없고, 두달이 가도 글이 올라 올지 몰랐다. 그렇게 서너달이 지나가자 즐겨찾기로서 의미가 없어서 내려 놓았다.
그런데 7개월이 흐른뒤 스님들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누군가 불교관련 유명 카페에 도배하다시피 책을 선전하였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1년 수개월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그 사이트를 검색으로 찾아 방문하였다. 예전과 달리 달을 건너는 공백기간 없이 글은 뜨믄 뜨믄 올려져 있었다. 하지만 한 달에 고작 한 두건에 불과 하였다.
그런데 올려진 글이 특이하였다. 스님들의 사이트라면 ‘담마’에 대한 글이 있어야 하나 엉뚱하게도 ‘요리’에 관한 것이었다. 대체 깊은 산골에서 수행에 전념하는 스님들과 요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홈페이지에 올려진 요리관련 글은 다음과 같다.
-닦으면 닦을수록 빛나는 것이 있다!(스텐발우 이야기)
-스님, 이 밥 현미 맞습니까?
-ㅇㅇㅇ 공양간의 양념
-간단하지만 풍부한 토마토 상추 샐러드
-수박이 남았을 땐 수박국수
-입맛 돋구어 주는 감자조림
-매콤한 호박왁자
홈페이지에는 공중파방송에서 부처님오신날 특집으로 방영된 프로가 유튜브화면에 담겨 올려져 있었다. 지리산 깊은 산 골짜기에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아가는 수행자들의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소통하지 않으려하는
불자들은 스님들의 이야기를 좋아 한다. 재가자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가르침을 배우고 싶어하는 것이 공통된 심경일 것이다. 그래서 스님이 운영하는 사이트를 발견하면 새로운 이야기 거리나 법문, 가르침등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넷상에 스님들이 정성을 들여 매일 글을 쓰는 경우는 매우 희귀하다. 스님들이 만든 블로그나 카페가 있긴 하지만 읽을 만한 글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것도 뜨문 뜨문 올려져 있거나 몇달동안 새로운 글이 올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산중에 살면서 불자들과 소통하려 않은 것처럼 역시 넷상에서도 소통하지 않으려하는 인상을 받는다.
잔뜩 기대하고 방문한 스님들의 홈페이지가 법담대신 음식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을 때 깊은 산중에서 과연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음식에 대한 이야기로 또 한 번 책을 내려 하는지 모르지만 불자들 입장에서 보았을 때 ‘현실도피’적 삶을 사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불교는 산중에 가야 접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도시에 불교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도시에 사찰이 있긴 하지만 그 수가 워낙 적어서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이고, 설령있다고 할지라도 점집과 그다지 구분이 가지 않는 기복과 방편에 의지 하는 불교라는 것이다. 따라서 산중에 가야 불교를 접할 수 있는데, 깊은 산중에 있는 불교가 자비의 보살정신을 구현하는 대승불교라고 볼 수 있을까.
자비사상은 대승의 전유물일까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당시의 불교를 ‘원시불교’라고 부른다. 초기불교라는 용어가 정착되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시불교라는 용어를 고집하는 것은 아직 덜 된 미완성의 가르침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당시의 불교전통을 계승한 동남아 불교 즉, 테라와다불교를 소승이라 부르고 자비의 대승보살사상과 구별하여 설명한다. 그렇다면 자비정신은 대승불교에만 있는 것이고, 소위 소승이라고 불리우는 불교에는 자비사상이 없는 것일까.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중의 하나가 ‘자애사상’이다. 대승에서 말하는 소승불교는 ‘비구가 자기자신의 해탈과 열반만을 위하여 수행하는 종교’로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을 알고 보니 대승불교 못지 않은 자애사상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대승불교 못지 않은 자비사상이 초기불교에 있는 것을 선사들이 안다면 지금 부터 소승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또 자비사상은 대승불교의 전유물이라고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초기불교와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테라와다불교에 있어서 자애사상은 어떤 것일까.
“삽베삿따 바완뚜 수키땃따”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대승불교에 보살사상이 있다면, 초기불교에는 자애사상이 있다. 그것도 경전과 주석서에 매우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다. 이런 자애사상은 40가지 사마타 명상주제중의 하나이다. 즉 자애수행을 함으로서 ‘마음의 해탈’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을 ‘자심해탈’이라 한다. 이렇게 명상주제중의 하나로서 자애수행은 청정도론에 매우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런 자애수행의 핵심은 무엇일까.
자애수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 만들어진 수행방법이라 볼 수 있다. 가장 고층이라고 알려져 있는 숫따니빠따에 부처님의 말씀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까라니야멧따경(Karaniya Metta Sutta, 자애경, Sn1.8)’이다.
까라니야멧따경의 핵심구절은 “삽베삿따 바완뚜 수키땃따(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이다. 우리말로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 한 구절에 부처님의 중생에 대한 자애의 마음이 다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모든 비구가 이와같이 서원한다면 이는 다름아닌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사상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자애의 마음은 어떻게 내야할까.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경에서는 “마따 야타니양 뿟땅 아유사에깝뿟땅 아누락케(Mātā yathā niyaṃ puttaṃ āyusā ekaputtam anurakkhe)” 라 하였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하는 것이라 하였다. 전세계의 어느 경전에서도 볼 수 없는 간절한 표현이다.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데, 어머니가 하나 뿐인 아들에 대하여 목숨바쳐 구하듯 모든 중생들에게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내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런 자애의 마음을 낸다면 굳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과 보살사상이 따로 필요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런 자애사상이 들어가 있는 까라니야멧따경은 테라와다 불교전통에 있어서 예불문중의 하나이고 독송용으로 사용되는 경이다.
빠알리 예불문및 독송경
참고로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 사용되는 예불문과 독송용 경은 다음과 같다.
빠알리 예불문및 독송경
No |
빠알리 이름 |
영문이름 |
Mp3파일 |
1 |
Buddhabhivadana |
Salutation to the Budd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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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Tri-Sarana(삼귀의) |
The Three Refug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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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Panca Sila |
The Five Precep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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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Buddha Vandana |
Homage to the Budd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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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Dhamma Vandana |
Homage to the Doctr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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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Sangha Vandana |
Homage to the Disciples of the Budd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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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Cetiya Vandana |
Salutation to the Pagod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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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Bodhi Vandana |
Salutation to the Bodhi Tree. |
|
9 |
Padipa Puja |
Offering of Ligh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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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Sugandha Puja |
Offering of Incen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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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Puppha Puja |
Offering of Flowe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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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Anumodana |
Transference of Merits to all Celestial Being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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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Patti Dana |
Transference of Merits to Departed Relativ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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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Patthana |
Aspir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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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Khamayacana |
Forgiveness of Faul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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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Mangala Sutta (행복경) |
The Discourse on Blessings |
|
17 |
Ratana Sutta (보배경) |
The Discourse on Jewel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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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Metta Sutta (자애경) |
The Discourse on Loving-kindness |
|
19 |
Maha Jayamangala Gatha (길상승리게) |
Great Verses of Joyous Victory |
출처; 붓다넷(Buddhanet)
예불은 부처님께 예배드리는 것으로서 믿음의 문을 여는 출발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내용을 담은 것이 예불문인데, 아침 저녁으로 예불을 올릴 때 또는 불공을 올릴때 사용되는 예배의식의 글이다.
예불문은 주로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스런 상가에 대한 것이 주된 것이지만 초기경전 중 중요하다고 여기는 경을 선정하여 예불문으로 사용한다. 그런 경이 16~18번에 있는 망갈라경(Mangala Sutta, 행복경), 라따나경( Ratana Sutta, 보배경), 멧따경(Metta Sutta, 자애경)인데 모두 숫따니빠따에 있는 경들이다. 모두 부처님의 음성이 실려 있는 근본가르침에 대한 경이다.
이들 세 개의 경과 자야망갈라가타(19)를 포함하여 네 개의 경이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현재 라따나경과 자야망갈라가타 경은 이미 다 외웠다.
이처럼 까라니야멧따경은 예불문이자 독송용 경으로서 매우 중요시 되고 있는 경이다. 특히 부처님의 중생에 대한 자애정신을 가장 잘 표현 한 경으로서 자애수행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독송용 까라니야멧따경
독송용 까라니야멧따경을 만들었다. 우리말 해석에 대해서 전재성님이 번역한 것을 적용하였는데, 빠알리어 원문에 가장 가까운 번역이기 때문이다. 독송용 까라니야멧따경의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까라니야멧따경
(Karaniya Metta Sutta, Sn1.8, 자애경, 전재성님역)
1.
Karanīyam atthakusalena 까라니-얌 앗따꾸살레나
yan taṃ santaṃ padaṃ abhisamecca: 얀 땅 산땅 빠당 아비사멧짜
Sakko ujū ca sūjū ca 삭꼬 우주- 짜 수-주- 짜
suvaco c'assa mudu anatimānī, 수와쪼 짯사 무두 아나띠마-니.
널리 이로운 일에 능숙하여서
평정의 경지를 성취하고자 하는 님은
유능하고 정직하고 고결하고 상냥하고 온유하고 교만하지 말지이다.
2.
Santussako ca subharo ca 산뚯사꼬 짜 수바로 짜
appakicco ca sallahukavutti 압빠낏쪼 짜 살라후까웃띠
Santidriyo ca nipako ca 산띠드리요 짜 니빠꼬 짜
appagabbho kulesu ananugiddho, 압빠갑보 꿀레수 아나누깃도
만족할 줄 알아서 남이 공양하기 쉬워야 하며,
분주하지 않고 생활이 간소하며, 몸과 마음 고요하고 슬기로우니,
가정에서 무모하거나 집착하지 말지이다.
3.
Na ca khuddaṃ samācare kiñci 나 짜 쿡당 사마-짜레 낀찌
yena viññū pare upavadeyyuṃ 예나 윈뉴 빠레 우빠와데이융
Sukhino vā khemino hontu 수키노 와 케미노 혼뚜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
다른 양식있는 님들의 비난을 살만한 어떠한 사소한 행동이라도 삼가 하오니,
안락하고 평화로워서,
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
4.
Ye keci pāṇabhūt' atthi 예 께찌 빠-나-부-땃티-
tasā vā thāvarā vā anavasesā 따사- 와- 타-와라- 와- 아나와세사-
Dīgha vā ye mahantā vā 디-가 와- 예 마한따- 와-
majjhimā rassakā aṇukathūlā 맛지마- 랏사-까 아누까툴-라-
살아있는 생명이건 어떤 것이나,
동물이나 식물이거나 남김없이,
길다랗거나 커다란 것이거나,
중간 것이거나 짧은 것이거나,
미세하거나 거친 것이거나,
5.
Diṭṭhā vā ye vā addiṭṭhā 딧타- 와- 예 와- 아딧타-
ye ca dūre vasanti avidūre 예 짜 두-레 와산띠 아위두-레
Bhūtā vā sambhavesī vā 부-따- 와- 삼바웨시- 와-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삽베 삿따- 바완뚜 수끼땃따-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거나,
멀리 사는 것이나 가까이 사는 것이나,
이미 생겨난 것이나 생겨날 것이나,
모든 님들은 행복하여지이다.
6.
Na paro paraṃ nikubbetha 나 빠로 빠랑 니꿉베타
nâtimaññetha katthacinaṃ kañci 나-띠만녜타 깟타찌낭 깐찌
Vyārosanā paṭighasaññā 위야-로사나- 빠띠가산냐-
nāññamaññassa dukkham iccheyya 난냐만냣사 둑카밋체이야.
서로가 서로를 헐뜯지도 말지니,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본노 때문이든 증오 때문이든
서로에게 고통을 바라지 않나이다.
7.
Mātā yathā niyaṃ puttaṃ 마-따- 야타- 니양 뿟땅
āyusā ekaputtam anurakkhe 아-유사- 에까뿟당 아누락케
Evam pi sabbabhūtesu 에왐 삐 삽바부-때수
mānasam bhāvaye aparimāṇaṃ 마-나삼 바-와예 아빠리마-낭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이와같이 모든 님들을 위하여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
8.
Mettañ ca sabbalokasmiṃ 멧딴 짜 삽바-로까스밍
mānasam bhāvaye aparimāṇaṃ 마-나삼 바-와예 아빠리마낭
Uddhaṃ adho ca tiriyañ ca 웃당 아도 짜 띠리얀 짜
asambādhaṃ averaṃ asapattaṃ 아삼바-당 아왜랑 아사빳땅
그리하여 일체의 세계에 대하여,
높은 곳으로 깊은 곳으로 넓은 곳으로
장애 없이, 원한 없이, 적의없이,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
9.
Tiṭṭhaṃ caraṃ nisinno vā 띳탕짜랑 니신노 와-
sayāno vā yāvat' assa vigatamiddho 사야-노 와- 야-와땃사 위가따밋도
Etaṃ satiṃ adhiṭṭheyya 에땅 사띵 아딧테이야
brahmam etaṃ vihāraṃ idha mahu 브라흐맘 에땅 위하-랑 이다 마-후
서있거나 가거나 앉아있거나 누워있거나 깨어있는 한,
자애의 마음이 굳게 새겨지이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청정한 삶이옵니다.
10.
Diṭṭiñ ca anupagamma 딧띤 짜 아누빠감마
sīlavā dassanena sampanno 실라와- 닷사네나 삼빤노
Kāmesu vineyya gedhaṃ 까-메수 위네이야 게당
na hi jātu gabbhaseyyaṃ punaretī 나 히 자-뚜 갑바세이양 뿌나레띠
삿된 견해에 의존하지 않고 계행을 갖추고,
통찰을 갖추어 감각적인 욕망을 다스리면,
결코 다시 윤회에 들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미우이(Imee Ooi, 黃慧音)의 까라니야멧따경(Karaniya Metta Sutta)
자비사상은 대승불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줄 다 안다. 하지만 반드시 있어야 할 곳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한국불교에 있어서 대승보살사상이 그렇다.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한국불교에서 자비로 상징되는 보살사상은 보이지 않는다. 큰 수레를 지칭하는 대승이라는 말도 중생구제를 목표로한 보살사상으로 부터 비롯된 것인데, 불교가 산중 깊은 곳곳에 꼭꼭 숨어서 사회와 국민과 불자와 소통하려 않기 때문에 보살사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선사들이 법문에서 그토록 소승이라고 폄하하는 동남아불교 즉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는 보살사상의 원조라 불리우는 자애사상이 있다. 그것도 아침 저녁으로 독송하는 예불문이다. 그것은 까라니야멧따경이다.
까라니야멧따경에서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도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모든 중생에 대하여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런 자애의 마음이 대승보살사상에 있어서 자비의 마음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자비사상은 대승불교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2011-08-3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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