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담마에 의한 정복을..”슬픔없는 아소까(Asoka)

담마다사 이병욱 2011. 9. 1. 14:29

 

 

 

담마에 의한 정복을..”슬픔없는 아소까(Asoka)

 

 

 

병원에 가면 아픈 사람들만 있는 것 같다. 대학교에 가면 젊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마찬가지로 절에서만 사는 스님들은 세상이  온통 불국토로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정반대이다.

 

낙관론과 비관론

 

불교TV사이트에서 어느 스님은 한국불교가 전망이 밝다고 하였다. 목살이 쪄서 마치 포대화상처럼 보이는 스님의 자태는 근심걱정이 없는 듯 보였다. 과연 스님의 말대로 한국불교는 잘 나가고 있을까.

 

한국불교가 처한 현실에 대하여 어떤 이는 낙관적으로 보고, 또 어떤 이는 매우 비관적으로 본다. 낙관론자들은 지금이 불교가 중흥을 이루어 또 한번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동양의 우수한 정신문화가 서양을 압도하여 서구에 불교바람이 부는 것을 예로 들면서 근거없는 낙관론을 펼치기도 한다.

 

반면 어떤 이는 한국불교가 중병에 걸렸다고 진단한다. 링겔을 맞아가면서 하루 하루 버텨가는 중환자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불교는 이미 자정능력을 상실하였다고 말한다.

 

이처럼 낙관론과 비관론이 교차하는 것이 한국불교를 바라보는 눈이다. 그렇다면 객관적인 자료로 본 한국불교의 위상은 어떤 것일까.

 

도시에서는

 

절집에서만 평생사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도시에서 불교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보이는 것은 구멍가게 보다 더 많다는 교회로서 거의 한집 걸러 하나씩 있다. 도시의 하늘에 보이는 것은 십자가로서 절 구경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선거도 교회에서 하고 주민총회도 교회에서 한다. 떡집광고를 보면 학교나 회사, 단체등과 더불어 교회가 단골고객임을 알 수 있다. 아이들 동화책이나 읽을 거리에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도 교회를 중심으로 한 생활공동체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시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공동체가 확산되다 보니 불자들은 설자리가 없다. 이런 소외감은 사회전분야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정치권을 보면 불자출신이 현저하게 적다. 이는 표를 의식한 결과때문이라 보여진다.

 

도시가 유일신교 일색이다 보니 그 표밭을 향하여 뛰는 정친인들 역시 유일신교 신자가 많은 것은 어쪄면 당연한 현상이다. 그런 결과이어서 일까 국회의원 비율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개헌선을 확보하고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은 299명이다. 18대 국회의원의 종교분포상황을 살펴보면,  299명 중 기독교 신자는 118명으로 39%이고, 천주교 신자는 78명으로 26%이고, 불교신자는 54명으로 18%이다. 이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종교비율과 비교해 보면 매우 기형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 종교분포는 전국민대비 불교는 22.8%이고, 개신교가 18.3%, 천주교가 10.9%로서 어느 종교도 다수를 차지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의 종교분포를 보면 개신교가 39%를 차지하는 다수이다. 더구나 같은 유일신을 믿는 천주교까지 합하면 그 수는 196명이다.

 

196명이라는 숫자는 65%에 해당하는 수치로서 개헌선인 66%(2/3)에 약 1%에 부족한 숫자이다. 하지만 무종교인 몇명만 추가하면 개헌선을 돌파하여 헌법까지 바꿀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우리나라를 기독교국가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국교로 한 기독입헌제개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힘이다.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전체 국회의원 299명 중 기독교인 국회의원이 196명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여와 야를 떠나 뭉친다면 우리나라는 기독교이념을 중심으로 한 기독입헌제 국가가 될 수 있다. 설령 기독입헌제가 지금 당장 시행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과반수를 훨씬 상회하는 숫자이므로 각종 법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일요일 예배에 방해되는 각종시험을 토요일 보게 한다든가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는 법 같은 것도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우상숭배금지법을 만들어 불상에 절하는 것을 금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권에서 기독교가 다수인 상황에서 한국불교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천주교 의원보다 적은 3등 종교인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한국불교가 잘 나가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암담하다 못해 참담한

 

기독교의 힘은 정치권 뿐만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교육등 전 분야에 있어서 다수이다. 그 중 교육분야를 보면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암담하다 못해 참담한 지경이다. 초등학교 부터 대학까지 종교사립학교 비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종교사학 비율

종 교

초등

중학교

고등학교

전문대

대학교

전체학교

5,646

2,935

2,095

158

191

불교

1

11(0.37%)

10(0.47%)

-

2

개신교

10

123(4.2%)

165(7.8%)

17

34

천주교

6

27(0.91%)

38(1.8%)

2

9

원불교

6(0.2%)

7(0.3%)

2

3

 

 

 

고등학교를  보면 개신교의 경우 165개로서 전체고등학교 숫자에서 차지 하는 비율이 7.8%에 이른다. 반면 불교는 고작 10개로서 0.47%이다. 이는 천주교의 38 1.85보다 적은 숫자이다. 원불교의 7 0.3%와 비슷하다.

 

이처럼 교육분야에서 조차 불교는 소수이고 천주교에 이어서 역시 3등이다. 그렇다면 한국불교를 이끌어 가는 종단과 스님들은 대체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한잠 푹자고 났더니

 

최근 범불교도대회 3주년을 맞아 세미나가 열렸다고 한다. 불교신문에 따르면 토론자중의 한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는어떤 스님이 한 잠 잘 자고 일어났더니 기독교 국가가 되어 있더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늘어지게 주무신 결과라며현 상황은 장로 대통령 때문에 일어난 문제만이 아니다고 밝혔다.

(불교신문, 뿌리는 불교, 줄기는 사회문제 이야기해야” 박광서 종자연 대표, 27 범불교도대회 3주년 기념 세미나서 주장)

 

 

한국불교가 처한 현실에 대하여 어느 스님이 한잠 푹자고 났더니 기독교국가로 되어 있더라라는 매우 의미있는 말을 하였다. 산중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절집에서만 세월만 보내다 세상에 나와 보니 도시는 온통 시뻘건 십자가 뿐이더라라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불교방송에서 들었다.

 

아침에 방송하는 불교강좌에서 혜문스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데, 20살에 출가하여 10년간 지게지고 빨래하고 밥을 지으며 은사스님을 시봉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10년은 선방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20년 동안 세상과 등진채 생활하다가 세상밖으로 나와보니 온통 기독교세상이 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는 한국불교의 현 상황이 장로대통령의 출현때문이 아니라 불교계 내부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중생에 대한 자비구현 없이 산중에서 무사안일하게 잠만 잔 한국불교를 비꼬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정치적이거나 낭만적이거나

 

불교와 기독의 힘의 비교는 이뿐만이 아니다. 인구대비 종교비율을 보면 막상막하일지 모르지만 현실적인 통계는  1/10정도로 열세이다. 불교에 비하여 기독교는 덩치가 10배이상 큰 것이다. 이는 거두어 들이는 수입에서도 열배이상 차이가 나고, 사찰대 교회의 비율에 있어서도 10배 가량 차이가 난다. 하지만 체감하는 비율은 그 이상이다.

 

사회전반적으로 불교는 기독교에 비하여 1/10수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는 ‘21세기 아쇼카선언이라는 종교평화선언을 하였다. 열린 진리관, 종교다양성의 존중, 전법과 전교의 원칙, 공적 영역에서의 종교활동, 평화를 통한 실천 등을 골자로 한다.

 

하지만 이런 선언은 매우 정치적이거나 아니면 낭만적 선언이다. 왜냐하면 늘 얻어터지는 자가 선언하는 것이나 같기 때문이다.

 

약자에 의한 선언

 

현실사회에 있어서 기독교는 불교보다 덩치가 10배나 큰 골리앗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처럼 힘도 세고 부자이고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기독교가 자신보다 훨씬 작고 사회적 영향력도 별 볼일 없는 불교를 이제까지 수도 없이 괴롭혀 왔다.

 

사찰이 무너져라고 기도하는가 하면 불교계를 대표하는 스님이 수난을 당하는등 그 도가 지나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힘이 없는 불교로 보아서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3년전 열렸던 범불교도대회이었다.

 

불교도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불교와 가까운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범불교도대회는 단군이래 최초로 열린 대규모 집회로서 불교계의 축적된 역량을 과시하기에 충분하였다. 하지만 그 때 뿐이었다. 현실은 나아진 것 없이 이제 안마당을 건너 안방에 들어와 기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종교평화선언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선언은 강자가 선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매 번 얻어터지기만 하던 약자가 선언하였다는 데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세계에서 있어서 기독교는 골리앗과도 같은 강자이다. 국회에서 54명의 불자의원과 118명의 개신교의원의 힘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열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체감하는 열세는 1/10이하로서 싸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에서는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을 발표 하였다.

 

매번 얻어터지기만 하는 자가 너의 말이 맞다”.  너가 생각하는 다양성을 인정한다라고 화해의 말을 하였을 때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직까지 기독교측으로 어떤 반응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속으로 놀고 있네라고 말할지 모른다.

 

설령 기독교측이 이 선언문의 진정성을 인식하고 자신들도 불교에서 선언하는 것과 똑 같은 내용인 열린 진리관, 종교다양성의 존중, 전법과 전교의 원칙, 공적 영역에서의 종교활동, 평화를 통한 실천을 천명한다면 그 즉시 기독교는 붕괴되고 말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이번 21세기 아쇼카선언은 다분히 정치적의도를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진리는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정치협상하듯이 주고 받으려 하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는 것이다.

 

불교적 이상사회를 꿈꾸던 아소까(Asoka)

 

이처럼 선언이 정치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 낭만적이라는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선언으로 그치고 말 것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세상에 보여주려한 의도는 불교와 기독교의 세가 막상막하라고 인식해서 일 것이다. 아니 그 이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불교가 기독교 보다 신자도 많고 1700년의 유구한 역사도 갖고 있기 때문에 맏형 입장에서 스스로 화해의 제스처를 보여 주었다고도 이해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고대 인도에 있어서 불교적 이상사회를 꿈꾸던 아쇼카라는 인물을 선정하여 선언문의 제목으로 삼았다. 선언문에서  아쇼카에 대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저 아쇼카왕은 모든 종교의 신자들, 그들이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모두를 존경합니다. 각 종교마다 기본 교리는 다를 수 있으며,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어떤 의도에서이건 자신의 종교에 오히려 더 큰 해악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조화가 최선입니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자신의 종교도 발전하게 되고 진리도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21세기 아쇼카 선언-)

 

 

아쇼카는 산스크트어 표기이다 용어 하나만으로 파악 하였을 때 이 선언문이 대승불교의 교리를 기본으로 하여 선언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산스크리트어 아쇼카는 빠알리로 아소까(Asoka)’라 한다.  아소까(asoka)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슬픔이 없는(sorrowless)이라는 말이다. ‘슬프다라는 소까(soka)’에 부정 접두어 (a)’가 붙은 것이다. 그래서 한역경전에서는 무우왕(無憂王)’으로 번역되었다. 또 아소까는 꽃나무의 이름이기도 한데, 마야부인이 아소까나무(無憂樹)를 붙잡고 부처님을 출산하였다고 한다.

 

 

 

 

 

 

아소까나무(無憂樹)의 꽃다발

Blossoms of Ashoka , The Ashoka tree

 

 

 

 

 

 

아소까나무(無憂樹)와 마야부인

룸비니동산에서 마야부인이 아소까나무를 붙들고 출산하였다.

사진: Birth Story Of Lord Buddha

 

 

 

 

전쟁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슬픔이 없는 아소까는 고대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3대황제이다. 그 역시 다른 정복왕들처럼 살육전을 벌였다. 나중에 전쟁의 비참함을 알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된다.

 

그런 아소까 통치시절에 불교는 주류종교이었다. 황제와 국가로 부터 보호받는 주류종교이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종교평화선언문에 있는 내용처럼 열린 진리관, 종교다양성의 존중, 전법과 전교의 원칙, 공적 영역에서의 종교활동, 평화를 통한 실천 등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아소까당시의 불교와 지금의 한국불교를 동일시 하고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마치 현시점이 아소까당시처럼 불교가 이 사회의 주류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아소까의 종교평화부문만 부각한 것은 아소까의 종교정책의 일부만 도입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소까는 전쟁없는 시대를 만들기 위하여 강력한 담마정책을 폈다. 그것이 담마에 의한 세계의 정복이다. 무력을 사용하는 대신 담마로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담마정책을 펴는데 있어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산물로 보인다. 왜냐하면 타국가에서 침략해 오는 것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주변국가를 불교의 이념으로 통치하는 국가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그 때 당시 전세계에 담마사절단과 장로비구 사절단을 파견 하였는데, 멀리 이집트까지 이르렀다. 이는 전쟁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답은 나온다.

 

‘21세기 아쇼카선언전법선언으로 바뀌어야

 

이번 선언은 단지 열린 진리관, 종교다양성의 존중, 전법과 전교의 원칙, 공적 영역에서의 종교활동, 평화를 통한 실천 등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담마에 의한 정복선언’으로 바뀌어야 한다.  아쇼카선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면 이는 담마에 의한 정복을 뜻하기 때문에  전법선언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으로 아쇼카정신을 이어 받을 수 있다고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선언 즉 21세기 아쇼카선언은 강자의 입장에서 약자를 향하여 화해의 손을 내미는 형식을 취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오히려 기독교측이 강자이고 불교측은 약자이다. 그것도 게임의 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약체이다. 1/10수준의 영향력밖에 되지 않은 불교가 골리앗과도 같은 거대한 힘을 가진 집단에게 화해의 메세지를 보내는 모습이 되었다.

 

아직까지 상대방에서 공식적인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로 부터 열린 진리관, 종교다양성의 존중, 전법과 전교의 원칙, 공적 영역에서의 종교활동, 평화를 통한 실천 등의 선언을 받아내기는 난망할 것이라 예상된다.

 

진정한 종교평화를 얻어 내려면 전국민을 불교인으로 만드는 것이 낫다. 아소까가 그랬던 것처럼 전세계에 담마가 퍼지면 전쟁없는 평화가 이룩될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아소까는 담마에 의한 전세계의 정복을 천명하였다.

 

그렇다면 ‘21세기 아쇼카선언전법선언으로 바뀌어야 한다. 오직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이땅에 평화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핍박받는종교

 

불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종교이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15억명이 신봉하는 세계최대의 종교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득세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불교는 핍박받는종교이다. 마치 골리앗처럼 거대한 힘을 가진 기독교는 자신들의 신을 믿는 자들 외에 공존을 하려고 하지 않은 것 같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거인 골리앗을 상대로 하는 힘없는 불교가 종교평화하는 키워드로 화해의 제스처를 보였다. 하지만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실컷 두들겨 맞다가 화해를 청하는 모양새도 좋아 보이지 않을 뿐만아니라 또 다른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는 정치적 의도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이번 선언은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종단의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내지 시민운동적차원에서 선언 했어야 했다. 대신 종단 차원에서 해야 할일은 부처님의 담마를 널리 알리는 전법선언을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가장 평화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가 증명한다.

 

담마에 의한 정복을

 

전세계적으로 불교가 전파될 때 단 한 번도 전쟁이 났다거나 피를 흘리지 않았다. 이는 유일신을 숭배하는 종교가 한손에 칼을, 또 한손에 코란을 들고 정복전쟁에 나섯던 것과 대조 된다.

 

부처님의 담마가 퍼져 나갔을 때 전쟁이 없고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래서 아소까대왕은 전쟁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담마에 의한 세상의 정복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슬픔없는 아소까(Asoka)가 꿈꾸던 세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이 바위각문에 표현된 내용이 잘 말해 주고 있다.

 

 

나 자신의 자녀가 복지와 행복을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얻기를 염원하는 것과 똑같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복지와 행복을 얻기를 염원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들을 위한 나의 염원이다.

(아소까 바위각문16, 일아스님의 아소까에서)

 

 

유일신교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종단과 스님과 불자들이 해야 할 일은 담마를 널리 퍼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싸움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담마가 널리 퍼지면 퍼질수록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 때문에 담마에 의한 정복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담마는 법구경에서도 잘 표현되어 있다.

 

 

Susukha vata jīāama                수수깡 와따 지와마

verinesu averino                        웨리네수 아웨리노

verinesu manussesu                   웨니네수 마누셋수

viharāma averino.                       위하라마 아웨리노

 

우리 진정 행복하게 살아가자.

증오 속에서도 증오 없이

미워해야 할 사람 속에서도 미움을 버리고

우리 자유롭게 살아가자.

(법구경 197)

 

 

 

2011-09-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