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불교와 기독교는 결국 같은 것? 추인하는‘21세기 아쇼카 선언’

담마다사 이병욱 2011. 8. 31. 18:36

 

 

불교와 기독교는 결국 같은 것? 추인하는‘21세기 아쇼카 선언’

 

 

 

 

 

 

 

 

조계종에서 ‘21세기 아쇼카선언을 발표한 이래 약 일주일 가량 지난 시점에서 아직까지 그 여진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는 불자들 모두가 공감하는 것은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일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일부 스님들과 불교관련 인터넷매체의 기자들은 이에 대하여 심각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한 마디로 ‘21세기 아쇼카 선언훼불행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수의 불교관련인터넷 매체에서는 침묵하고 있다. 또 이와 같은 선언이 훼불행위임을 알면서도 스님들이나 교수, 언론인들이 침묵하는 것은 조직에 속해 있기 때문에 발언을 함으로서 얻게 되는 불이익때문일 것이다.

 

 

누가 작성한 것일까

 

그렇다면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은 누가 작성한 것일까.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사이트를 검색하여 보니 초안자는 명법스님,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성태용 건국대 철학과 교수, 박경준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로 되어 있다. 발표는 화쟁위원장 도법스님이 발표 하였다. 초안자 대부분이 교수들임을 알 수 있다. 그 중에 조성택교수를 주목한다.

 

 

 

 

'21세기 아쇼카 선언' 초안 발표

지난 8 23 '21세기 아쇼카 선언' 초안을 발표하고 있는 도법스님.

가장 우측이 조성택교수이다.

사진 ;

 

 

 

발표 당일 기사를 보면 초안을 만들게 된 계기에 대하여 조성택교수가 설명하였다. 또 하나 주목하는 것은 그가 조선일보에 시론('종교평화 선언', 사회적 대통합 기반 돼야, 2011 8 28일자)을 발표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연세대학교등 기독재단을 가지고 있고 보수 기득권층을 독자층으로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최대신문으로서 매일 수백만부가 발행되고 있다.

 

종교평화선언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것은 조성택 교수인 것 처럼 보인다. 그런 그가 조선일보에서 역시 종교평화선언에 대한 당위성을 강조하였는데, 평화선언에서 보는 것처럼 심각학 훼불행위로 보여지는 듯한 내용이 반복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종교다원주의진리에 관한 것이다.

 

더 큰 진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먼저 진리에 관한 것이다. 조교수는 조선일보 시론에서 진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조계종은 지금까지 종교가 우리 사회에서 상생과 공존이라는 평화의 메시지를 구현하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 사람들의 걱정이 되어 온 현실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했다. '나의 진리'는 더 큰 진리의 한 조각이라는 대승(大乘)불교의 '열린 진리' 정신을 다시금 상기하면서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차원을 넘어 이웃종교의 가르침에도 귀를 기울이고 배우겠다고 하였다. 이웃종교를 경쟁적 관계가 아니라 진리를 향한 동반적 관계로, 사회적 공동선을 실현하는 동지적 관계로 보겠다는 것이다.

(조성택교수,  종교평화 선언’, 사회적 대통합 기반 돼야, 조선일보 2011 8 28일자)

 

 

시론에서 그는 “'나의 진리'는 더 큰 진리의 한 조각이라고 하였다. 그 나의 진리는 어떤 것일까. 문맥상 나의 진리는 명백히 불교를 말하고 있는데, 그 불교는 큰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큰 진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는 시론에서 대승불교는 큰 진리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고, 열린 대승의 마음으로 인정하자고 말한다. 그 이웃종교는 다름아닌 유일신교이다. 유일신교의 교리를 진리로서 인정하자는 것이다. 유일신교의 교리인 창조론, 원죄론, 대속론, 구원론, 종말론등에 귀를 기울이고, 심지어 배우는 자세가 열린 대승불교의 열린 진리 정신이라고 말한다.

 

기독학자들의 주장을 보면

 

문장을 읽어 보면 대승불교는 더 큰 진리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웃종교인 기독교에 대해서는 더 큰진리의 일부분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웃종교는 더 큰 진리이고 불교는 그 속에 속해 있는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불행하게도 기독교의 신학자들은 그렇게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인 길희성교수, 오강남교수, 김경재교수, 이찬수 교수, 김진교수등이다. 이들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불교와 기독교는 근원을 따져 가다 보면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몇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캐나다 리자이나대 신학자 오강남 교수는 불교평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 하였다.

 

 

무엇보다 종교를 자기중심적인 나를 비우고 내 속에 있는 참 나를 찾는 길로 받드는 것이다. 내 속에 있는 참 나는 결국 절대자이기에, 그 절대자와 내가 하나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오강남교수, 불교평론, 《도마복음》: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가교(架橋))

 

 

오강남교수는 영지주의를 지향한 도마복음문서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심층종교의 특징은 결국 다 똑같다는 이야기이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참나는 곧 절대자와 같다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깨닫고 나면 참나와 하나가 되는데 그 ‘참나가 곧 절대자’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자란 하나님을 말한다. 결국 기독교와 대승불교는 같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신학자 김경재 목사는 같은 호의 불교평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종교적 언어가 은유적이고 상징적임을 잘 아는 틸리히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초월적 인격자이시다”라는 표현들이 은유적이고 상징적임을 강조한다. 그에 비하여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시다”라는 표현은 가장 직접적이고 비매개적 표현이라고 본다.

(김경재목사, 불교평론,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과 불교)

 

 

김경재목사는 폴 틸리히의 말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개념을 ‘존재 자체’로 보았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기독교의 초월적 인격자로서의 하나님의 개념과는 다른 견해를 내어 놓은 것이다. 이어서 말하기를 “하느님은 진리 자체(verum ipsum)·선 자체(bonum ipsum)·존재 자체(esse ipsum)로서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하여 하느님 물음을 묻기 전에도 하나님이셨다.” 라고 말한다.

 

이 말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실재라는 공이나 진여가 폴 틸리히가 말하는 하나님과 동일 개념이라는 이야기이다. 결국 오강남 교수나 김경재 교수 모두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참나’ ‘진여’ ‘’ ‘주인공’ ‘본마음등으로 불리우는 궁극적 실재가  존재 그 자체로서의 하나님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강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포용하라고 다그쳐

 

신학자 이찬수 교수 역시 다음과 같이 불교평론에서 주장하였다.

 

 

원효가 21세기에 다시 태어난다면 아마도 그리스도교를 화쟁 대상으로 삼았으리라.

의상이 오늘날 태어났다면 ‘일승’이라는 우주적 구원의 진리 안에 그리스도교를 자연스럽게 포섭했으리라.

(이찬수교수, 불교평론, [열린논단] 어느 불교적 기독교인이 불교)

 

 

이찬수교수는 그리스도교를 포용하라고 주장한다. 자신이 보기엔 불교가 깊고 넓은 종교라는 자긍심만을 가졌을 뿐, 정작 다른 종교나 사상을 실제로 포용할 만큼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교가 정말로 깊고 넓다면 ‘밖’의 것을 소화해 받아들핼 태도로는 능력을 보여주어야한다.

(이찬수교수, 불교평론, [열린논단] 어느 불교적 기독교인이 불교)

 

 

기독교에서는 불교를 연구 하는 신학자는 많지만, 불교의 경우 기독교를 연구 하는 불교학자가 드믈다고 지적 하면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대를 알고 받아들이려는 적극적인 자세 없이는 언제까지고 자신의 ‘우물’에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찬수교수, 불교평론, [열린논단] 어느 불교적 기독교인이 불교)

 

 

이찬수 교수의 요지는 한국불교가 자만에 빠지지 말고, 불교의 교리가 모든 사상을 포괄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교 사상도 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을 보여 달라고 다그친다. 그런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논단에서 서두에 언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려서부터 개신교 안에서 자란 터라 개신교 문화에 가장 익숙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으나, 내가 보건대 이들 종단 간에는 그저 외형적 혹은 문화적 차이가 존재할 뿐, 교리나 사상, 더 나아가 종교 체험의 정도에는 별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찬수교수, 불교평론, [열린논단] 어느 불교적 기독교인이 불교)

 

 

이찬수 교수 자신이 보기에 불교나 기독교나 겉으로 보기에 다른 것처럼 보이나, 교리나 사상 특히 종교적체험을 보면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불교와 기독교는 사실상 같은 종교라고 보는 것이다.

 

위와 같이 다그쳐서일까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 기독교의 사상을 포용하는 아량을 베푼것 같다. 불자들이 유치원동화정도로 치부하는 창조론, 원죄론, 대속론, 구원론, 종말론등이 진리라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더 큰 진리가 무엇인지 명백히 밝혀야

 

위와 같이 불교를 연구하는 신학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기독교와 불교는 궁극적으로 한 곳에서 만나기 때문에 사실상 같은 종교라는 것이다. 거기에 화합이라도 하듯이 이번 선언에서 유일신교에도 진리가 있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 선언문으로 인하여 기독측에서는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런 선언을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조성택교수의 ‘더 큰진리’란 결국 기독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실재에 대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조성택교수는 대승불교를 포함하고 있는 더 큰 진리가 무엇인지 명백히 밝혀야 할 것이다.

 

조성택교수는 종교다원주의자인가

 

다음으로 조성택교수는 시론에서 종교다원주의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조선일보 시론에 표현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념적 갈등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갈등은 해결이 쉽지 않다. 옳고 그름에 대한 배타적 독점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의 진리가 옳은 만큼 '저들'의 진리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절대적 진리가 다수라는 종교다원주의는 관념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하지만 '절대가 다수'라는 이 형용모순의 현실 속에서 상생과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조성택교수,  교평화 선언’, 사회적 대통합 기반 돼야, 조선일보 2011 8 28일자)

 

 

 

글에서 조성택교수는 절대적 진리가 다수라는 종교다원주의는 관념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라고 표현 하였다. 이 말은 종교다원주의를 인정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나의 진리가 옳은만큼 상대방의 진리도 옳다는 것을 대전제로 한다.

 

그런데 그는 절대적 진리가 다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는 진리가 여려개 있다는 말이다. 불교에도 진리가 있고, 기독교에도 기독교나름의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길희성교수가 말하는 진리란

 

하지만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현시대에 있어서 종교다원주의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길희성 교수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논문에서 말하였다.

 

 

제가 종교다원주의자라고 말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종교다원주의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길희성교수, 그리스도교와 이웃종교들)

 

그리스도교와 이웃종교들-길희성.docx

 

 

그는 자신이 종교다원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런데 그는 하느님이 종교다원주의자라고 한다. 이 세상의 여러 종교의 성인과 성자들이 체험하는 종교의 궁국적인 경지는 결국 하느님의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 설명한다. 모든 진리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산에 올라가는 길은 여럿이지만 산의 정상에 올라가 보면 결국 하느님과 만난다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

 

이것이 종교다원주의자인 길희성 교수가 생각하는 진리관이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진리는 하나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진리관에 화답이라도 해 주듯이 불교계에서 역시 이와 유사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서광스님은 자신의 저서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에서 當知無明能生一切染法以一切染法皆是不覺相故(당지무능생일체염법이일체법개시불각상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같은 개가 짓는 소리를 한국사람은 멍멍으로 듣고, 미국사람은 워프로 듣는다. 하나의 진리를 두고 기독교는 여호와라 하고, 이슬람은 알라라 한다. 또 불교는 부처라 한다. 또 동일한 눈을 가리키면서 한국사람은 이라 하고, 미국사람은 스노우라고 한다. 이름이 다르다고 진실로 뜻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눈이나 개는 신, 알라, 부처와 같은 심상과는 달리 실제로 마음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 이름이 달라도 같은 대상을 뜻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고 받아 들인다.

(서광스님,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 불광출판사)

 

 

한 가지 사실을 두고 나라마다 언어가 다르다 보니 다른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리 역시 궁극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 궁극적 실재를 불교에서는 부처라 말하고, 기독교에서는 여호와라는 식이다.

 

이런류의 주장은 전형적인 종교다원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앞서 언급한 길희성 교수가 말하는 논리와 똑 같다. 그런데 서광스님이 예를 들어 들어 설명한 것은 대승기신론이다.

 

대승기신론은 여래장과 유식사상을 기반으로한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이론서라 볼 수 있다. 대승불교의 논리를 대표하는 진리관이 기독교신학자가 주장하는 진리관과 거의 동일함을 알 수 있다.

 

한마음이 하나님이라는데

 

대승기신론의 핵심은 일심사상이다. 한마음사상이라고 하는 일심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진여, 본마음, 참나, 주인공과 같은 궁극적 실재로 본다. 이 한마음을 체득하는것이야말로 선불교에서 깨달음으로 보는데, 그 한마음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불자들은 수긍할 수 있을까. 이화여대 한자경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조상들은 한울에다 존칭인 님을 붙여서 한울님, 하눌님, 하느님이라 불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한마음이고, 부처님 마음이고, 하늘이고, 유교식으로 하면 태극이고, 기독교의 하늘의 주, 천주도 모두 한마음 속에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고 천주님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이 한마음, 부처님의 마음을 통해서 다 하나로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자경 교수, 불교tv, 제8 윤회와 무아의 대적 의미 2)

 

 

이 강의를 처음 들었을 때 한자경교수는 불자가 아닐 것으로 생각하였다. 대승기신론의 핵심사상인 한마음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검색을 해 보았는데, 그녀는 불자이었다. 여성불자 108인에 선정된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조성택교수의 훼불행위

 

종교평화선언의 근본취지는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조성택교수로 대표되는초안을 보면 불교이외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다라고 인정하고 있고, 더구나 나의 진리는 더 큰 진리의 한 조각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와 같은 선언을 함으로서 불교의 정체성은 크게 훼손되었다. 결국 모든 진리는 같은 것이고 모든 종교는 다같다는 결론에 이르게 만든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커다란 훼불행위라는 것이다.

 

종교통합 논의는 가속화 될 것

 

이번 선언으로 인하여 종교통합 논의는 가속화 될 것이다. 모든 종교는 같은 것이라는 논의는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학자들이 꾸준히 제기하여 왔는데, 불교 내부에서도 그런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승불교의 이론서라 볼 수 있는 대승기신론의 일심(한마음)에 대한 설명에서 스님과 불교학자는 이구동성으로 그 한마음이 인격화한 것이 부처이고, 알라이고, 여호와라고 말한 것이다.

 

이런식의 주장은 불교와 기독교는 사실상 같은것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기독교 학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주장과 별도로 불자들의 신행을 보면 기독교화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영혼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천도재를 들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일정기간 머물렀다가 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49재나 천도재등 각종 재는 한국불교가 영혼을 인정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일 것이다. 이처럼 영혼을 인정하고 더구나 궁극적 실재라고 불리우는 존재까지 같은 것이라면 서로 구분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불교포기선언인가

 

이런 상황에서 소위 21세기 아쇼카 선언이라는 종교평화 선언이 발표 되었는데, 이제까지 한국불교는 영혼은 인정하여도 창조주는 인정하지 않았으나, 발표문에 따르면 모든 종교의 진리를 인정한다고 하였으므로 창조론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영혼이 존재하고 거기에다 궁극적 실재까지 같은 것으로 본다면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의 진리로 통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것과 같다. 이는 결국 불교가 불교이기를 포기하는 선언과 같다.

 

한국불교는 여래장 사상을 기반으로 한 대승불교이며 동시에 선불교이다. 그런 한국불교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크게 벗어나 있어서 무아사상 대신 영혼을 인정하고 있다. 또 부처님이 그토록 경계하였던 궁극적인 실재가 존재한다는 상견을 믿고 있다.

 

한국불교의 업보

 

이들 사상은 부처님과 가르침과 반대되는 사상으로서 오히려 유일신교 사상과 가깝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는 절집마다 기도라는 말이 대유행하고 있다.

 

이처럼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인 신앙으로 인하여 불교는 기복화 되었고, 불자들 또한 합격, 승진, 사업, 치유와 같은 기복만을 바라는 기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기복만을 바라는 불교로 변질 되었을 때 피할 수 없는 것이 노보살들의 개종이다.

 

한 평생 기도만 해온 노보살들이 무릎이 아파 더 이상 가파른 산길을 걷지 못하게 되었을때, 집 가까운 교회를 찾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복을 바라는 것이라면 불보살이든 하나님이든 기도하였을 때 복만 받으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기복과 방편으로 일관한 한국불교의 업보이다. 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으로 회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을 인정하고 궁극적실재가 있다고 믿는 종교를 불교로 볼 수 있을까.

 

 

불교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방법

 

불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잣대가 있다. 삼법인(三法印)이라는 잣대를 사용하면 단숨에 판가름난다. 그 삼법인은 상식이 있는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 이 세가지를 말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삼법인이라는 용어는 빨리 경이나 상좌부 아비담마나 주석서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삼법인은설일체유부의 율장과 아비달마법온족론과 같은 설일체유부 논장에서 제일 먼저 사용한 술어이며 이것이 반야부의 대지도론등에서도 채용되었고 후대의 많은 중국 주석가들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라 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삼법인이라는 말 보다 삼특상(ti-lakkhana)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삼특상은 무상(anicca)’(dhkkha)’무아(anatta)’를 특징으로 한다.

 

이 잣대를 들이대서 유일신교를 재단하면,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실재가 인격화 되었다고 보는 하나님과 영원불변한다는 천국은 부정된다. 왜냐하면 모든 유위법(sakhata-dhamma)은 변화하고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죽어서 간다는 영원한 천국이나 궁극적 실재로서의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이는 상견에 떨어진 것으로 본다.

 

상견은 자아와 이세상이 영원한 것이라고 보는 사견(邪見)을 말한다. 그래서 변치 않고 영원한 궁극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견으로서 진리가 아닌 것이다. 한번 형성된 모든 것들은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영원히 변치 않는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다음으로 영혼은 고정불변하다고 여기는 견해는 무아사상에 위배된다. 왜냐하면 영원한 자아는 없고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부품들이 모였을 때

수레라는 단어가 있듯이

무더기()들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일상적인 말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S.i.135)

 

 

부처님의 가르침은 명쾌하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나와 세상을 만든 창조주는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물질과 정신으로 구성된 인습적으로 부르는 나가 있을 뿐인데, 이는 부품들이 결합된 자동차라고 불리우는 이름과 같다는 것이다.

 

나 또는 나의 것, 나의 자아는 부품들이 결합되어 자동차로 불리우듯이 이름과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일 뿐이다.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이름과 명칭으로만 불리우는 개념으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무상, , 무아라는 세 가지 특상에 유일신교를 재단하였을 때 유일신교는 불교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유일신교는 진리가 아닌 것이다.

 

 

 

 

2011-08-31

진흙속의연꽃

 

그리스도교와 이웃종교들-길희성.docx
0.03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