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진리는 양보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아쇼카선언은 정치적 차선책

담마다사 이병욱 2011. 9. 16. 00:07

 

 

진리는 양보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아쇼카선언은 정치적 차선책

 

 

 

또 하나의 세계 가상공간은 이제 생활의 일부이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현실과 사이버공간을 들락거리는 현대인들은 때로는 현실세계보다 가상공간에서 더 오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세상을 들여다 보는 창이 인터넷이다. 인터넷을 통하여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서 두개의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하였다. 모두 최근 불교계에서 핫이슈로 떠 오른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에 관한 것이다.

 

두 개의 기사를 보면 선언에 대하여 찬성하는 글이다. 하나는 이번 선언의 주역이라 볼 수 있는 조성택교수의 글이고, 또 하나는 유명한 불교학자인 한형조교수의 글이다. 그런데 글의 제목이 가슴을 찌른다. 조성택교수는 기독교 비판하면서 닮아가자는 건가라고 하여 매우 도발적인제목을 붙였고, 한형조 교수는 불교밖에도 불교가 있다라는 의미심장한타이틀을 달았다. 먼저 한형조 교수의 글이다.

 

왜 이리 내용이 똑같을까

 

한형조교수의 글을 알게 된 것은 수 년전 모 인터넷신문을 통해서이다. 그때 당시 한교수는 금강경에 대한 해설을 연재하였는데 매우 공감하였다. 초기불교를 접하기 전에 본 금강경에 대한 해설은 매우 독특하여 한교수의 해박한 지식에 경탄하였다.

 

그런 한교수가 인터넷신문에 기고한 내용은 놀라웁게도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것이었다. 21세기 아쇼카선언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등산로를 통해 산봉우리에 오른다. 중턱쯤에서는 풍경의 전모가 보이지 않고, 자신이 올라온 등성이의시야만 보인다. 정상에서 서로 다른 길들은 만날 것이며, 그리고 풍경 전체를 한 눈에 조망할 것이다. 서로 다른 길에서 출발했으되, 우리는 서로 같은 곳을 향해 왔다는 것을 알고 악수하고 부둥켜 안을 것이다.

 

(한형조교수, 불교 밖에도 불교가 있다, 불교신문 2011-09-15)

 

 

불교 밖에도 불교가 있다-한형조.docx  불교 밖에도 불교가 있다-한형조.pdf

 

 

 

위 문구를 보고 깜짝놀랐다. 많이 보던 문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이자 종교다원주의자인 길희성 교수의 글과 거의 같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가까운 길로, 어떤 사람은 먼 길로, 어떤 종교는 힘들고 험준한 길로, 어떤 종교는 평탄하고 쉬운 길로 산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산을 오르고 있으며, 마침내 모두가 한 정상에서 만나 기쁨을 나눌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그 때 우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볼 것이며(visio dei) 궁극적 실재 자체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경지에 푹 잠겨 무한한 행복을 맛 볼 것이다.

 

(길희성교수, 종교 달라도 우리는 같은 산을 오르고 있다, 휴심정 2011-09-11)

 

  종교 달라도 우리는 같은 산을 오르고 있다-.docx

 

 

 

이글은 한겨레신문 조현기자가 운영하는 휴심정이라는 사이트에 고정필진으로 글을 쓰는 길희성교수가 최근 작성한 글이다. 그런데 한형조 교수의 글과 길희성교수의 글은 거의 유사하다.

 

산에 대한 글을 보면 산에 올라가는데 있어서 길은 다르지만 정상에 가면 진리가 모두가 하나임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것을 길희성 교수는 하느님이라 하였고, 한교수는 진리또는 진실이라 하였다.

 

더구나 문구중에 한교수는 악수하고 부둥켜 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길교수는 한 정상에서 만나 기쁨을 나눌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라 하였는데, 모두 정상에서 하나의 진리또는 하느님이라 불리우는 궁극적실재또는 만물의 근원에 대한 기쁨과 환희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런면으로 보았을 때 한형조교수 역시 종교다원주의자임에 틀림없다. 다음으로 조성택교수의 글이다.

 

빼도 박도 못한 처지에 놓인 한국불교

 

조성택교수는 이번 21세기 아쇼카선언에 대한 실질적인 주도자로 보여진다. 이 선언에 대하여 도법스님이 발표 하였을 때 그가 부연설명을 하였고,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있다는 조선일보에 기고까지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일보에 기고한 내용을 보면 그 역시 종교다원주의자임에 틀림없다.

 

그는 조선일보에서 나의 진리'는 더 큰 진리의 한 조각이라는 대승(大乘)불교의 '열린 진리' 정신을 다시금 상기하면서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차원을 넘어 이웃종교의 가르침에도 귀를 기울이고 배우겠다고 하였다 ( 종교평화 선언’, 사회적 대통합 기반 돼야, 조선일보 2011 8 28일자)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큰 진리는 무엇을 말하는지 매우 궁금하다. 

 

이처럼 아쇼카선언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조성택교수가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법보신문에 글을 올렸는데, 이는 마성스님이 올린 글 아쇼카 선언, 법호지·파사현정 정신 퇴색(법보신문, 2011-09-11)” 에 대한 반론성격이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열린진리관전법의 원칙에 대하여 해명과 반론을 하였는데, 한마디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이 불교를 연구하는 교수에게 꽉 물린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종교다원주의자에게 물렸는데, 이제 한국불교는 빼도 박도 못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음을 직감하였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손아귀에

 

지난 8 23일 도법스님에 의한 아쇼카선언으로 인하여 한국불교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들어 갔다. 이제 그들이 하자는 대로 끌려가는 일만 남았다. 한 번 선언한 것을 철회하기는 쉽지 않다. 이미 매스컴에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이름을 걸고 발표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선언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뜬금없이 발표하였다고 비판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조교수는 다음과 같이 해명하였다.

 

 

아쉬운 일이지만 불교계가 이런 종류의 일처리에 미숙한 것도 사실이다. 자신을 타자화 하고 자신을 설명하기보다 공감과 유대감을 전제하는 전통적인식구의식이 종단의 일반적인 정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선언의 경우 종단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타종교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고 대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처리 방식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늦었지만 향후 대중공사의 과정을 통해 선언의 전후맥락과 배경에 관한 충분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선은 이번 선언문초안의 작성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서 그 배경과 전후의 맥락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마성 스님이뜬금없다고 느끼시는 점에 대해 해명하고자 한다.

 

(조성택교수, 기독교 비판하면서 닮아가자는 건가, 법보신문 2011-09-15)

 

  기독교 비판하면서 닮아가자는 건가-조성택.docx  기독교 비판하면서 닮아가자는 건가-조성택.pdf

 

 

 

불자들과 충분히 대화함이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발표한 것에 대한 해명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변명에 더 가깝다.

 

뜬금없다는 주장에 대한 해명으로서 불교계의 일처리 미숙의 탓으로 돌리는데 이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인터넷신문에 발표된 법응스님의 글에 따르면,  법응스님은 초안을 발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초안을 보여 줄 것을 요구 하였고, 대덕스님과 불자들과의 충분한 논의를 거쳐 발표하자고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이를 묵살하고 어느 날 전격적으로 발표해 버렸다는 것이다.

 

아쇼카선언은 일종의 쿠데타

 

그런데 조교수는 이를 종단에서 미숙한 일처리로 돌리고 이미 발표된 내용은 대 사회적 메세지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어떻게 해서든지 먼저 발표함으로 인하여 상황을 빼고 박도 못하게 만들어 버린 것과 다름없다. 일종의 쿠데타와 같은 것이다.

 

 

 

 

 

 

아쇼카선언의 주역들

사진 : http://well.hani.co.kr/46063

 

 

 

94년과 98년의 종단사태 당시 청사만 점거하면 성공한 쿠데타로 보는 인식이 있었으나 이제 쿠데타도 진화하여 대사회 선언을 함으로서 자신들에게 매우 유리하게 국면을 만들어 성공한 쿠데타로 만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선언에 대하여 일부 스님이나 의식있는 불자들은 훼불행위라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스님들이나 학자 또는 각종불교단체, 의식있는 불자들은 침묵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침묵할까.

 

못 마땅해도 침묵할 수 밖에 없는 이유

 

그것은 아쇼카선언문이 명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듯이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선언한 아쇼카선언문은 충분한 명분을 가지고 있다.  그런 것중의 하나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이번 선언은 종단 내적으로 보면자성과 쇄신이라는 결사의 기조 하에서 불교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실천이다. 이번 종교평화선언의 핵심내용은 말 그대로 종교 간의 평화이지만 이 선언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은 우리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갖가지 갈등과 분쟁을 극복하고 사회적 대통합을 이루는 불교적 처방과 모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조성택교수, 기독교 비판하면서 닮아가자는 건가, 법보신문 2011-09-15)

 

 

아쇼카선언은 우리사회의 갈등과 분쟁을 극복하고 사회적 대통합을 이루자는 불교적 모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불교는 그 어떤 다른 종교보다도 관용적이고 평화화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기 때문에 불교가 피해자라는 생각을 접고 분쟁과 갈등의 해결에 불교가 앞장서자는 것이다.

 

이런 좋은 취지에 대하여 그 어느 누구도 대 놓고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대덕스님들이나 의식 있는 불자들이 아쇼카선언이 못 마땅해도 침묵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위와 같은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왜 아쇼카선언은 정치적인가

 

아쇼카선언 추진자들은 어떤 의식의 소유자들일까. 한편으로 생각하면 매우 나이브하기도 하다. 약자인 우리가 먼저 선언했으니까 너희들도 따라서 해주기를 바라는 순진함같은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으로 보면 매우 정치적이다. 그런 정치적 행보는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대내적이고 또 하나는 대외적이다.

 

먼저 대내적으로 본다면 불교계 내부를 향하여 꼼짝 못하게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최근 초기불교의 유행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즉 열린진리관이나 전법의 원칙에 대하여 누군가 반박하는 주장을 하면 이를 근본주의자로 몰아 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기독교의 배타주의와 동일하게 취급하여 눌러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조교수는 글의 제목을 기독교 비판하면서 닮아가자는건가라고 이름 붙였을 것이다.

 

또 한가지 딱지를 붙인 예로서 한형조 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역사를 통틀어 배타로 성채를 쌓은 기업이나 국가는 쪼그라들거나 망했다.”라고 주장하였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대로 살아가자고 말하면 기독교 근본주의자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아쇼카선언을 발표함으로서 불교계 내부의 불만세력을 불교근본주의자로 딱지 붙여 고립시키기 위한 고도의 정치행위로 보는 것이다. 다음의 대외적인 것이다.

 

7대 종단 공동 종교평화선언은 언제 가능할까

 

이번 선언이 정치적인 이유는 불교계 밖의 종교세력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와 같다. 매번 얻어 터지기만 하는 불교계가 스스로 타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개종시키려는 전법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상대방의 종교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언론플레이와 다름없다.

 

그렇다면 상대방의 종교 즉 유일신교의 반응은 어떠할까. 아쉽게도 선언이 나오고 난뒤 그 어떤 발표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선언의 실질적 책임자인 조성택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편 이번 선언은 일회성의 단막극이 아니다. 이번 선언을 계기로 7대 종단 공동의종교평화선언을 위한 준비 작업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중장기적으로는 관념적 선언의 차원이 아니라 법적 제도적 차원에서 종교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법안청원 작업도 준비하고 있다. 이번 선언은 이러한 일련의 계획 속에서 시작된 일이다. 종교평화선언은 우리의 짝사랑이거나넋두리가 아니라 불교계의 대사회적 아젠다의 선점이며 갈등과 분쟁을 극복하고 상생과 공존의 사회를 위한 불교정신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성택교수, 기독교 비판하면서 닮아가자는 건가, 법보신문 2011-09-15)

 

 

조교수는 이번 아쇼카선언으로 인하여 언젠가 7개 종교단체의 선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시한은 없다. 다만 중장기적이라 한다. 그 기간이 10년후가 될지, 50년 후가 될지, 100년 후가 될지 구체적으로 명기 되어 있지 않다. 모든 종교단체들이 모여서 소위 종교평화선언을 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 되었지만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개신교에서 불교에서 선언한 것과 같이 불교에도 진리가 있고, 개종을 위하여 선교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고 가정하였을 때 개신교는 어떻게 될까.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겠지만 진짜로 선언한다면 그 순간 개신교는 붕괴될 것이다.

 

이처럼 안되는 것인줄 뻔히 알면서도 선언을 한다는 것은 매우 정치적인 행위이며 언론플레이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최측은 타 종교단체에서 동참하지 않아도 크게 게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계가 종교평화선언을 함으로 해서 분쟁과 갈등을 극복하는 이니셔티브를 잡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만 보아도 이번 선언이 얼마나 정치적인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진리는 양보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이번 아쇼카선언을 한 초안자들은 마치 쿠데타세력같다. 일방적으로 평화선언을 발표하고 이에 대하여 반발하면 근본주의자로 몰아 세우는가 하면, 타종교에도 동일한 선언을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잃은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진리전법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번 선언으로 불교가 관용의 종교이고 평화의 종교임을 선포하였기 때문에, 그런 원칙에 충실한다면 상대방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창조론도 진리가 되고, 원죄론, 대속론, 구원론, 종말론등 인과법칙을 무시한 유일신교의 모든 교리가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진리를 하나의 타협의 산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 크게 양보한 것은 이제 전법에 대한 것이다.

 

이제 전법도 가려서 해야 한다. 상대방이 유일신교를 믿으면 전법해서는 안되는것이다.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마당에 불교에서 솔선수범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교인수를 늘이기 위하여 전법하는 것도 해서는 안된다. 이에 대하여 조교수는 종교는 상품을 파는 행위가 아니다”라고 자신의 글에서 이야기 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아쇼카 선언으로 인하여 진리도 양보하는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최선책과 차선책

 

이번 아쇼카선언이 대내외적으로 매우 정치적인 행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진리를 타협과 양보의 산물로보았다는 것이다. 타협과 양보는 전형적인 정치행위이다.

 

정치는 여와 야가 있어서 상대방과 타협과 양보로서 차선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는 결코 타협과 양보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진리는 항상 최선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쿠데타세력으로 볼 수 있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타협과 양보를 함으로서 스스로 정치인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마치 정치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종교를 의식하여 열린진리관을 주장하여 진리를 ‘양보의 대상으로 삼았고, 타종교인에게는 개종을 권유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선언함으로서 진리에 대하여 ‘타협의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이는 상대방이 있음을 인정하고 상대방과 양보와 타협을 하여 차선책을 추구함으로서 명백히 정치행위를 한 것이다.

 

그들의 진짜의도는

 

지금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종교다원주의자에 의하여 접수 되었다. 이제 그들이 하자는 대로 종단은 끌려 갈 것이다. 마치 쿠데타세력과 같은 그들은 진리에 대하여 최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정치를 하는 것처럼 타협과 양보를 함으로서 차선책을 추구 하고 있다. 이에 반발하거나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배타적인 불교근본주으자로 몰아 세우고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길희성교수등이 주장하는 기독교근본주의자들과 하나가 되려 하는지 모른다. 다음과 같은 글이 불교다원주의자들의 생각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번 종교평화 선언은 한편으로는 종교근본주의자들의열린 태도각성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쩌면 더 중요한 것으로, 진보적이며 열려있는 종교인들 간의 대화를 열기 위한 것이다.

 

(조성택교수, 기독교 비판하면서 닮아가자는 건가, 법보신문 2011-09-15)

 

 

바로 위와 같은 문구가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종교근본주의자들에게 각성을 촉구하고, 진짜 중요한 것은 진보적이고 열려있는 종교인들과의 대화라고 하였는데, 이는 불교이든 기독교인이든 산의 정상에서 만나면 하나의 진리, 하느님을 알게 될 종교다원주의자들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

 

선언은 한번으로 족하다. 이미 그런 선언은 발표 되었다. 지난 2007년 불교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봉암사에 사부대중 1만여명이 모여 부처님 법대로 살자고 결의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 3대 실천지침은 일체의 명리를 버리고 본분에 충실하며 수행을 생활화.사회화하고 주어진 직분에 충실할 것을 결의 하였다. 이는 다름아닌 부처님 가르침대로생활하자는 것이다.

 

부처님 법대로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달리 선언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봉암사 결사 60주년 대법회

200710 19일 사부대중 만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사진: 1 대로 자!”

 

 

 

 

2011-09-15

진흙속의연꽃

 

종교 달라도 우리는 같은 산을 오르고 있다-.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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