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종교다원주의에 먹힌 한국불교, 21세기 아쇼카선언의 초안자들

담마다사 이병욱 2011. 9. 10. 20:50

 

 

종교다원주의에 먹힌 한국불교, 21세기 아쇼카선언의 초안자들  

 

 

 

종교관련 사이트를 발견하고

 

최근 종교관련 사이트를 발견하였다. 한겨레신문 조현기자가 운영하는 휴심정이라는 사이트이다. 이 사이트에는 국내 종교관련 글이 컬럼형식으로 올려져 있는데 스님부터 목사, 신부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필진을 가지고 있다.

 

즐겨찾기로 등록하여 놓고 종종 들어가 보는 사이트는 읽을만한 글로 가득하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의 글이 골고루 펼쳐져 있어서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대체로 기성종교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그런 필진중에 길희성교수의 글이 눈에 띄었다.

 

종교다원주의와 ‘21세기 아쇼카선언’, 우연의 일치일까

 

길희성교수의 글 중에 가장 최근에 올려진 종교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르고 있다라는 글을 보면 이글이 최근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 발표한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의 일부 내용과 매우 유사하여 깜짝 놀랐다.

 

길희성교수가 불교를 좋아하는 기독교신학자로서 종교다원주이자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의 글을 읽어 보면 비슷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아무리 많은 글을 써도 글의 공통적인 흐름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길희성 교수의 이번 글에서도 역시 종교다원주의에 대하여 장문의 글로 심도 있게 설명하였는데, 21세 아쇼카 선언에서 열린진리관과 내용이 비슷한 부분을 발견하였다.

 

먼저 길희성교수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신비주의자들의 신비적 합일의 체험에 관한 언사가 하나라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언사로 표출된, 혹은 표출되기 이전의, 순수한 신비적 경험 자체가 하나라는 주장이다. 진리 주장을 하는 종교들의 다양한 교리와 교설을 넘어서 불가언적 신비경험 그 자체에서 종교들의 일치를 보려는 견해이다.

(길희성, 종교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르고 있다)

 

  종교 달라도 우리는 같은 산을 오르고 있다-.docx  종교 달라도 우리는 같은 산을 오르고 있다-.pdf

 

 

길교수는 이글에서 언어는 달라도 신비적경험이라는 진리는 같다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주의는 하나가 되는 경지 즉, 궁극적 실재와 합일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와 매우 유사한 문장이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21세기 아쇼카선언에 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진리란 특정 종교나 믿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모든 믿음에 다 열려 있습니다.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21세기 아쇼카선언,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docx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pdf

 

 

아쇼카 선언에서도 진리를 표현하는 문자가 달라서 그렇지 진리는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서로 비슷한 이유는 우연의 일치일까.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길희성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고등종교가 단 하나의 원인인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이름으로 표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크게 두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는데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길희성교수가 주장하는 궁극적 실재

구분

 

교 파

인격신

궁극적 실재로서 우주를 창조하고 주관함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힌두교(쉬바, 비쉬누)

일원론

이름도 형태도 없는 원초적/원천적 실재로부터 전개되어 나옴

서양의 신풀라톤주의

인도 우파니샤드의 사상

도가의 도 사상이

신유가의 태극/무극 사상

일원론적 사상의 불교(여래장)

출처: 길희성, 종교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르고 있다

 

 

 

위 표에서 궁극적실재가 인격화한 것이 유일신이다. 이는 따로 원인을 가지지 않으며 그 자체가 원인이라 볼 수 있다. 셈족의 종교에서 IL을 공통어로 하는 유일신이 포함되어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일(IL), 유태교의 엘로힘(Elohim), 기독교의 야훼(Yahweh), 이슬람의 알라(Alilah)이다. 또 히두교의 쉬바와 비쉬누도 창조주로서 유일신에 포함된다.

 

천인합일사상

 

일원론은 사막의 종교가 아닌 동양에서 발생한 종교를 말하는데 주로 천인합일에 대한 것이다. 즉 만물이 존재하는 근원이 있고, 그 근원으로 부터 생겨난 현상으로 설명되는데 궁극적으로 근원에 합일하는 것을 말한다.

 

고대인도에서 범아일여사상의 우빠니샤드사상이 있고, 중국의 유가에서 보는 것과 같은 성리학사상이다. 한편 서양에서는 이데아 사상이 기독교와 접목된 신플라톤주의가 있다.

 

이들 사상의 특징은 천과 인의 합일이다. 반드시 천으로 대표되는 존재의 근원에 합일 된다는 것이다. 그 존재의 근원이 모든 원인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일원론으로 본다.

 

불교도 일원론으로 볼 수 있을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길희성 교수가 불교에 대해서 엉거주춤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를 일원론으로 집어 넣는 것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불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형이상학적 일원론은 아니지만 다양한 현상계를 하나의 원리로 파악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일원론적 사상 계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길희성, 종교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르고 있다)

 

 

처음에 불교는 일원론이 아니라고 했다가 결국 일원론사상으로 볼 수 있다고 여운을 남겼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담긴 초기불교는 창조론을 비판하고 성립되었기 때문에 결코 일원론이라 볼 수 없다. 하지만 후대 대승불교에서 다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비판하며 성립한 것이 대승불교인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대승불교는 여래장사상계열의 불교이다. 따라서 길교수가 말하는 불교는 여래장사상의 대승불교이다. 그렇다면 여래장사상은 과연 불교로 볼 수 있일까.

 

 

한국불교는 여래장사상계열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창시한 종교이다. 부처님 당시에 지금의 힌두교의 전신이라 볼 수 있는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성립한 종교이다. 그 때 당시 유일신교로서 창조론으로 설명되는 브라만교를 부처님은 대망어죄(큰 거짓말)’를 짓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런 비판은 초기경전인 디가니까야의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 D1)에서 62가지 삿된견해에 잘 언급되어 있다.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삿된 견해를 연기법으로 부순 것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초기불교는 일원론에 속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길교수는 불교가 일원론은 아니지만 일원론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슬쩍 일원론에 끼워 넣었다. 그 일원론은 현재 한국불교에서 볼 수 있는 여래장과 불성사상을 기반으로 한 대승불교를 말한다.

 

그렇다면 왜 여래장사상이 전형적인 일원론일까. 그것은 일본불교학자 마쓰모토 시로교수의 논문 여래장과 본각사상을 보면 명확하다.

 

마쓰모토 시로교수는 여래장사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기체와 초기체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원론이란 무엇인가

 

여래장을 산스크리트어로 따타가따가르바( tatha-gata-garbha)라 한다. 이는 인도의 대승불교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이 명칭이 중국에 건너오면 불성이 된다. 불성은 부처와 성품의 결합어이지만 산스크리트어로 ‘붓다다뚜(buddha-dhatu, 불성)’라 한다.

 

여기서 ‘다뚜(dhatu)라는 말은 마쓰모토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놓는 장소’ 곧 기체(locus)라 하고 영문[L]로 하였다. 즉 땅과 같이 기본이 되는 것으로서 궁극적 실재를 말한다. 그 기반위에 다르마(dharma)가 있는데 이를 ‘유지되는 것’이라 설명하고 초기체(super-locus)라 하고 영문[S]라 표시하였다. 그래서 기체(궁극적실재, L)와 초기체(dharma, S)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나타 낼 수 있다.

 

 

L S의 기체이다.
따라서 L S를 생기게 하는 [원인이다].
L은 단일이지만, S는 다수이다.
L은 실재이며, S는 비실재이다.
L S의 본질(atman)이다.
S는 비실재이지만, L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L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실재성을 가진다. 또는 실재성의 근거를 갖는다

(마쓰모토 시로, 여래장과 본각사상)

 

  여래장_사상과_본각사상.docx  여래장_사상과_본각사상.pdf

 

 

위 순서는 여래장사상에 대한 설명이다. 대지의 땅과 같은 개념은 기체(L)  모든 존재(S)가 나오는 근거가 된다. 그런 L은 오로지 ‘하나’인 것이고, ‘실재’하는 것이고 더구나 ‘S의 본질(아뜨만)’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여래장사상의 특징은 존재의 근원으로서 궁극적실재를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모든 현상이 궁극적 실재를 근원으로 하기 때문에 여래장사상을 일원론으로 본다.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라는데

 

그런데 이와 같은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라고 일본불교학자 마쓰모토 시로 교수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유아의 아뜨만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삼법인에 따라 무아와 연기를 특징으로 하는데, 여래장사상은 존재론적 실재를 주장하여 제행무상에 어긋나고 제법무아에도 어긋나 불교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마쓰모토 교수에 따르면 여래장사상은 인도에서 힌두교가 습합된 힌두교의 불교버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여래장사상은 불교의 본류인 초기불교, 그리고 초기불교를 계승한 테라와다불교전통과 다른 하나의 지류로서 동아시아에서만 볼 수 있고, 이 여래장사상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논서가 대승기신론이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길교수가 말하는 일원론으로서의 불교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인 초기불교가 아니라 현재 동아시아불교에서 불성을 바탕으로 한 여래장사상계열이라는 것이다.

 

궁극적실재는 하느님이라는데

 

그런데 길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표에서 언급된 궁국적 실재로서의 인격신과 원천적 근원으로서의 일원론을 동일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언어와 문자의 차이로 인하여 이름만 다를 뿐 실제로 같은 것이라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였다.

 

 

여하튼 중요한 점은 이들 사상이 인류를 포함하여 모든 존재가 단 하나의 궁극적 실재에 의해서 존재한다고 보는 일원적 사고를 공유한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고 둘이 아니며,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실재 내지 원리 또한 하나이지 여럿이 아니다. 만물은 이 궁극적 실재에서 하나로 통하고 통일된다.

(길희성, 종교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르고 있다)

 

 

길교수는 인격신과 일원론을 동일시하면서 그것을 궁극적실재라고 하였는데, 놀라웁게도 위 글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그것을 하느님이라 하였다.

 

 

 

 

 

 

길희성교수와 스님들

길희성교수와 해인사 승가대학장이신 법진스님은 스승과 제자사이라 한다.

길교수가 스승이고, 스님이 제자이다.

출처 : 길희성박사님과 해인사

 

 

 

 

야훼여호와로 불러 주어야

 

종교다원주의자로서 길교수가 생각하는 궁극적 실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길교수의 글을 읽어 보면 하나의 특징이 있다. 기독교를 반드시 그리스도교로 칭한다는 것이다. 이는 고유명사를 원어로 불러준다는 법칙에 따르면 매우 바람직스럽다.

 

하지만 궁극적 실재로서 인격신을 지칭할 때는 반드시 하느님이라 칭하고 있다. 이런 호칭은 맞지 않는다. 남의 아버지 이름을 자기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처럼 어색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나라 고유의 초월적존재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를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듯이 마찬가지로 우리말 하느님은 기독교의 원래 이름인 야훼여호와로 불러 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정상에 가서 보면 야훼를

 

종교다원주의자인 길교수가 생각하는 궁극적 실재는 기독교의 야훼를 말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글에서 야훼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사람은 가까운 길로, 어떤 사람은 먼 길로, 어떤 종교는 힘들고 험준한 길로, 어떤 종교는 평탄하고 쉬운 길로 산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산을 오르고 있으며, 마침내 모두가 한 정상에서 만나 기쁨을 나눌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그 때 우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볼 것이며(visio dei) 궁극적 실재 자체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경지에 푹 잠겨 무한한 행복을 맛 볼 것이다.

(길희성, 종교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르고 있다)

 

 

이것이 종교다원주의자인 길교수가 바라는 종교통합의 목표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모든 종교는 한 곳에서 만나는데, 마치 산으로 올라갈 때 올라가는 길은 다르지만 정상에 가서 보면 하느님이라는 야훼를 만나게 될 것이라 한다. 그 야훼와 합일하였을 때 무한한 행복을 맛 볼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길희성교수가 알고 있는 불교는

 

종교다원주의자로서 길희성교수가 생각하는 불교는 어떤 것일까. 그가 남긴 논문과 책을 읽어보면 대승불교에 관한 것이다. 그의 대표작이라 볼 수 있는 보살예수도 대승불교에 관한 것으로서, 대승불교의 보살사상과 대승사상을 기독교에 접목하여 기독교를 더욱 더 풍성하게 하자는 것이다.

 

불교학연구회 회원으로서 불교학자로서도 잘 알려져 있는 길교수는 불교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는 언제나 기독교인이다. 그가 말하는 궁극적 실재는 야훼(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는 초기불교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인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근본교리가  자신이 생각하는 궁극적실재 또는 일원론과 너무나도 다른 것이 때문이다.

 

부처님은 모든 현상을 해체하여 보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으로 보았다. 이렇게 해체 하여 보면 궁극적실재라고 이름 붙여진 모든 것들 즉, 야훼, 비로자나, 알라, 동자님등이 개념으로서 마음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일까 그의 글에사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담겨 있는 초기불교에 대해서 언급이 없다. 그런 예로서 최근 그가 개원한 심도학사의 프로그램에 불교에 관한 것이 있는데, 그 강좌의 내용을 보면 금강경, 반야심경과 같은 대승경전으로서 모두 대승불교에 관한 것이다.

 

그가 진실로 불교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인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의 사상이 담겨 있는 니까야와 같은 경장, ‘아비담마논장, 주석서인 청정도론을 집어 넣어야 될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이들 빠알리삼장의 내용은 모두 무상, , 무아에 관한 설명으로서, 길교수가 말하는 궁극적실재나 일원론등 오로지 이름과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진리임을 선포하는 격

 

그렇다면 여래장사상으로 분류되는 한국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깨달음 역시 야훼와 합일한다는 말과 같은 것일까. 종교다원주의자 길교수의 설명대로라면 그렇다라고 볼 수 있다.

 

이를 뒷받침이라고 하듯이 조계종에서 발표한 종교평화선언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에서 진리관에서 밝혔듯이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라는 내용을 발표함으로서 결국 같은 진리임을 선포하는 격이 되고 말았다.

 

초안의 총괄책임자 조성택교수

 

이와 같은 선언문은 누가 만들었을까. 최근 보도된 기사에 따르면 초안의 총괄책임자가 조성택교수라 한다. 조성택교수에 대하여 검색을 하여 보면 오강남교수나 길희성 교수와 같이 종교다원주의 성향이 매우 강함을 알 수 있었다.

 

 

 

 

 

 

21세기 아쇼카선언 초안자들

왼쪽부터 명법스님, 지홍스님, 법안스님, 도법스님, 원택스님, 혜일스님, 조성택 교수

사진 : ‘21세기아쇼카선언’ 초안발표

 

 

 

 

2004년 불교신문(2009, 2 27일자)에 따르면 불교연구회 발기인에 조성택교수와 길희성 교수가 함께 참여 하였다.  오강남 교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불교 이야기형식의 책을 써서 그 원고를 고려대학교 철학과 조성택 교수에게 보내 일독을 부탁하고 그의 조언을 청한사실이 있고, 또 조성택 교수는 오강남교수에게 ‘‘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형식의 글을 써서 불교평론에 연재하라고 부탁하여 불교평론에 연재된 바 있다.

 

이처럼 조성택교수는 불교를 연구하는 종교다원주의자로서의 기독교 신학자들과 빈번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법스님은 종교다원주의자?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조성택교수가 주도하고 도법스님이 발표한 21세기 아쇼카선언에 나오는 진리관등 반 불교적이고 훼불적 성격의 선언문이 나온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 글을 쓰는 과정에 있어서 이번 선언문을 발표한 도법스님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입장의 기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크리스천투데이 2008 10 16일자 기사에 따르면,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우리신학연구소 부설 아시아신학연대센터 주최로 열린지금 여기, 구원은 어떻게라는 주제로 열린 종교다원시대에 대한 토론에서  베트남 출신 카톨릭 신학자 피터 C. (Peter C. Phan) 신부와 정양모 신부(천주교), 이현주 목사(개신교)가 참석한 자리에서  도법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종교이기 때문에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종교를 가장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가르침으로 이해한다면 종교간 벽은 있을 수 없다

(도법스님, 종교간 대화, 다원주의자들끼리만 통할까?)

 

 

 

 

 

종교다원주의에 대하여 토론하는 도법스님

왼쪽부터 판 신부, 도법 스님, 길희성 서강대 교수(사회), 정양모 신부, 이현주 목사.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2008 10 16일자, 종교간 대화, 다원주의자들끼리만 통할까?)

 

 

 

이 토론회에서 도법스님은 불교를 대표하는 종교다원주의자로서 참석하였는데, 종교가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가르침으로 이해한다면 종교간의 벽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21세기 아쇼카선언에서의 열린진리관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외 달리

 

길희성교수와 조성택교수의 글을 읽어 보면 두 사람 모두 종교다원주의자로 보이고 진리관도 비슷해 보여서 결국 진리는 하나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길교수가 보는 궁극적 실재는 야훼인데, 조성택교수가 보는 궁극적 실재는 무엇일까. 언어와 문자의 차이로 인하여 비로자나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의 사실을 두고 기독교에서는 야훼라하고, 불교에서는 비로자나’. 이슬람에서는 알라’, 힌두교에서는 시바’,.중국에서는 상제’., 무당들은 동자님이라 부르는 것일까.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와 같은 이름은 모두 개념이라 한다.

 

궁극적 실재는 일어나고 사라지면서(공상) 동시에 고유한 성질(자상)을 가지고 있는 82법이라 본다. 따라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외 달리 없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실재하는 것일 뿐 지금 여기를 떠나 과거나 미래에 생각이 가 있는 것은 오로지 이름과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일 뿐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실체도 없다고 하였다.

 

개념놀음에서 벗어나기를!

 

그런 개념놀음에서 벗어서 지금여기에서 알아차리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길희성 교수는 자신의 글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은 멘트를 날렸다.

 

 

우리 산행의 종착점, 우리 인생의 최종 운명(destiny, destination)은 죽음이 가져다주는 단멸의 허무가 아니라 절대적 생명에 동참하는 것이리라.

(길희성, 종교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르고 있다)

 

 

이는 명백히 초기불교를 겨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단멸론으로 보고 허무로 간주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일 것이다. 대게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학자들은 기독교의 궁극적실재개념과 유사한 여래장계열의 불교를 연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초기불교를 연구하면 연구할 수록 기독교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창조론을 비판하며 성립되었기 때문에 양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로 지금 여기 (here and now, dittheva dhamme, 現法)’를 떠나 거론 하는 모든 것은 개념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2011-09-1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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