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주는 사람이 가장 예쁘다”까까쭈빠마경(톱에 대한 비유의 경)

담마다사 이병욱 2011. 9. 8. 16:50

 

 

주는 사람이 가장 예쁘다까까쭈빠마경(톱에 대한 비유의 경)

 

 

 

 

왜 자주 화를 낼까

 

재산과 지위와 명예와 권력을 가진 잘난자들은 그 보다 못한자들을 무시하고 멸시하기 일쑤이다. 그것은 대게 화로 표출된다. 격노하였다든가, 진노하였든가 하는 따위의 말들은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일종의 자기과시와 같다. 화를 냄으로서 모두 벌벌 떠는 모습을 봄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는 잘난자들의 전유물과도 같은 것이다. 언제어디서나 행사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와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 때나 전가의 보도를 휘두를 수 없을 것이다.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 그것은 대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이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았을 때 화로 표출된다. 불만을 표출한다든가 야단친다든가 마무성질을 내는 것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자신의 화를 받아 주지 않는다면 더욱 더 성을 내게 되고 심지어 육체적 폭력까지 불사한다. 그런 화는 잘난자만 내는 것일까.

 

자존심을 건드렸을 때

 

일반적으로 잘난자들이 화를 잘 내는 경향이 있지만 못난자도 화가 없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자존심을 건드렸을 때이다. 이런 자존심은 철저하게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나 인격이 침해당했다고 생각하였을 때 이에 대한 방어차원에서 화를 내게 된다. 이런 경우 상대방으로 부터 무시당하였다고 생각하였을 때 예외없이 반응하게 되는데, 특히 자신보다 못한자나 원한 맺힌자로 부터 싫은 소리를 들었을 때 격하게 반응한다.

 

화가 발생하는 요인

 

불자들은 화내는 것이 얼마나 중죄를 짓는 것인지 잘 안다. 천수경에도 십악참회라 하여 진애중죄금일참회가 있듯이 화내는 것은 악처에 떨어지는 요인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불교를 모르는 사람들은 화내는 것이 얼마나 큰 죄를 짓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구 화를 내는데, 그런 모습은 보기도 좋지 않을 뿐만아니라 심한 정신적고통을 야기 한다는 것이다. 그런 화는 대체 어떤 경우에 발생될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요인이 발생될때 화가 난다고 하였다.

 

 

첫째, 불만족한 느낌에 반감이 결합되어 자극받은 마음

둘째, 불만족한 느낌에 반감이 결합되어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화는 불만족스러울 때 나는 것이다. 이는 싫은 것, 미운 것과도 관계가 있다. 이런 화의 특징은 밀쳐내는 것이다. 좋으면 가지려는 탐욕의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는 대상을 거머쥐려는특징이 있다. 반대로 싫으면 화가 나는데 이는 대상을 밀쳐내려는특징이 있다. 이처럼 탐욕과 성냄은 서로 반대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동시에 발생되는 일은 없다. 반드시 따로 따로 발생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으면 사랑스럽고 가지고 싶어한다. 반대로 싫은 대상을 만나면 반감이 나거 뿌리치고 싶다. 이렇게 성냄은 불만족한 느낌과 반감이 결합되어 나타나는데 자극받느냐 받지 않느냐에 따라 두가지로 나누어진다.

 

사람이 천박해 보일 때

 

살아가면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서 부터 일로 만난사람들까지 만남의 연속인데 그들과 생활하다 보면 어느 정도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은연중에 나타나는 행위를 통해서이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물론 얼굴표정이나 생김새, 차림새등으로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지만 내면에 숨어 있는 본마음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에 본마음이 드러난다.

 

흔히 말하는 운전중에 운전하는 습관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점잖게 보이는 사람도 운전중에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 나오는 따위의 이야기들이다. 또 매우 도덕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어느 날 스캔들에 휘말리는 것도 그럴만한 조건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평소에는 알 수 없으나 어떤 특정한 상황과 조건이 맞아 떨어지면 본 바탕이 드러나는데,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화내는 것이다. 그런 화내는 모습은 그 사람이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고 명예가 있다고 할지라도 천박해 보인다. 화내는 모습하나면 보면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상시에 인격자로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화내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절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탐진치 3독중에 성냄이 가장 천박하여서 아무때나 일어나고 잘 제어 되지 않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약을 올리듯 자극하면

 

성내는 모습은 천박하다. 아무리 그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화를 냄으로서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어 있는데, 천박한지 그렇지 않은지 평소에는 알 수 없다. 자극을 받아야 나타나기 때문이다. 맛지마니까야의 까까쭈빠마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당시 사왓띠에 베데히까라고 부르는 장자의 부인이 살았는데, 그 부인은 매우 겸손하고 정숙하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그 집에 깔리라 불리우는 하녀가 살았는데 영리하고 일도 잘 하였다. 어느날 하녀 깔리는 장자의 부인 베데히까를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일부로 늦게 일어났다.

 

그랫더니 그 정숙하다고 소문난 베데히까는 속으로 삭이며노려보았다. 이에 더 테스트 해 보기 우하여 다음 날도 늦게 일어 났더니 이번에 욕지거리를 해 대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테스트하기 위하여 해가 중천에 떳을 때 일어났더니 나무못을 머리에 던져하녀의 머리가 깨졌다. 이렇게 자극을 주어 약을 올리니 처음에 노려 보았다가 욕지거리로 발전하고 마침내 폭력을 행사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보통사람들의 행태이다. 많이 배웠건 못 배웠건, 어른이나 아이나 모두 약을 올리듯 자극하면본성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본성은 가장 천박하다고 말하는 화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세속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일까.

 

까까쭈빠마경(Kakacupamasutta, 톱에 대한 비유의 경)에서

 

부처님은 수행자라도 불쾌한 자극을 받지 않는 한 지극히 친절한 자이고, 지극히 겸손한 자이고, 지극히 정숙한 자라고 하였다. 하지만 불쾌한 자극을 받았을 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양쪽에 손잡이가 있는 톱으로 도적들이 잔인하게 그대들의 사지를 조각조각 절단하더라도, 그 때 만약 마음에 분노를 일으킨다면, 그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될 수 없다.

(까까쭈빠마경-Kakacupamasutta-톱에 대한 비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2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사지를 절단내기 위하여 톱으로 자르더라고 화를 내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부처님은 왜 화를 내어서는 안된다고 하였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성냄의 특징때문이다.

 

 

첫째, 성냄은 불만족의 느낌과 함께 한다.

둘째, 성냄은 오랜 공덕을 파괴 한다.

셋째, 성냄의 뿌리는 어리석음이다.

 

 

이 중 두 번째의 성냄은 오랜 공덕을 파괴한다가 화를 내지 말아야 할 결정적인 이유이다.

 

성냄은 오랜 공덕을 파괴 한다

 

일을 하다보면 짜증이 나는 경우가 있다. 했던일을 반복하는 경우이다. 고객이 일을 주었는데 거의 다 될 무렵 다시 하라는 경우가 있다. 그것도 고객측에서 잘 못으로 인하여 다시 하게 되었을 때 시간과 정력의 낭비요인이 된다. 더구나 시간이 돈인 세상에서 다시하라고 요구하였을 때 아무리 중요한 고객이라도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미래를 위하여 꾹 참고 다시 일을 하고 있는데, 또 거의 다 마무리 될 무렵 다시하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이때 고객에 대하여 짜증을 낸다거나 다른 곳을 알아보라고 말하면 그 일은 거기에서 끝나게 된다. 더이상 일을 맡기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시간이 지나면 후회하게 된다. “그 때 좀 더 참으면 좋았을 걸하며 후회가 되지만 그 때 그 당시의 상황과 조건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한 번 마음이 상한 고객은 아무리 붙들고 매달려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화를 냄으로 인하여 공덕을 파괴하는 좋은 예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정이나 직장에서 화를 냄으로서 인간관계가 서먹해지고 급기야 파탄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경우 역시 자신이 쌓아 놓은 공덕을 한 순간에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예수보다 먼저 실천한원수를 사랑하라

 

그래서 부처님은 사지가 톱으로 절단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화를 내서는 안된다고 초기경에서 말씀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화를 내지 않고 어떻게 행동해애 할까.

 

부처님은 사지가 절단 나는 한이 있더라도 마음속으로부터 분노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여기에서도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배워야한다. ‘나의 마음은 그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고, 추악한 말을 뱉지 않을 것이고,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고, 미워하지 않고 안녕을 기원하며 불쌍히 여길 것이다. 그래서 자애로운 마음으로 이 사람을 채우리라. 이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세상을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무량하게,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채우리라.’라고 수행승들이여, 이와같이 그대들은 배워야 한다.

(까까쭈빠마경-Kakacupamasutta-톱에 대한 비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2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자애를 강조하였다. 사지를 절단내는 원수에 대해서도 미워하지 말고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자애를 광대무변한 우주에 가득채울 것을 말씀 하셨다. 그런 자애는 어떤 것일까.

 

흔히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 사랑은 연인이나 부부간의 사랑에 더 많이 쓰인다. 그런데 이성간의 사랑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빠알리어로 멧따(metta)’로 불리우는 자애는 한정되어 있지 않은 사랑이다. 그래서 멧따를 다른 말로 우정이라고 한다. 우정은 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원수도 사랑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이는 예수가 나오기 훨씬 이전 부터 부처님이 사용하던 말이다.  그런 멧따는 성냄을 제거하는 역도 한다.

 

성냄을 제거 하는 방법

 

자애와 성냄은 서로 반대개념이다. 자애가 가득한 사람에게 성냄이 있을 수 없고, 반대로 성냄이 마음속을 가득히 지배하고 있다면 자애는 눈꼽만치도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성냄을 제거하기만 하면 그 자리에 자애가 자리잡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성냄을 어떻게 제거할까. 청정도론에 성냄을 제거 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아홉가지로 설명하였다.

 

 

성냄을 제거하는 방법

첫째, 화를 화로써 앙갚음 하지 않는다.

둘째, 연민을 통해 적개심을 가라 않는다.

셋째, 자신을 훈계하여야 한다.

넷째, 업이 각자 자기의 주인임을 반조한다.

다섯째, 부처님이 전생에 인욕수행한 덕을 반조해야 한다

여섯째, 일체중생에 대하여 나를 한번쯤 낳아준 어머니로 생각한다.

일곱째, 자애수행의 열한가지 이익에 대하여 생각한다

여덟째, 존재를 나()나 나의 것이 아닌 오온, 12, 18계의 요소로 본다.

아홉째, 보시를 통하여 성냄을 제거 한다.

(청정도론)

 

 

누구나 원수가 있다. 가정에서도 있고, 직장에서도 있다. 부부간의 불화, 부모와 자식간에의 갈등, 직장상사와의 긴장관계가 있어서 가정과 직장은 때로는 피터지게싸우는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마치 원수를 보는 것처럼 싸우는 것은 화가 나기 때문이다. 그 화는 자애의 마음이 없기 때문에 발생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불자라면 위 아홉까지 사항을 단계적으로 실천해 볼 수 있다.

 

자애를 방사하여도 소용없을 때

 

화를 화로서 앙갚음 하려 하는 것은 더욱 더 화만 나게 할 뿐이다. 화는 화를 부르는 것이다. 가장 좋지 않은 방법이다. 다음으로 연민을 마음을 내면 화가 누그러 질 수 있다. 지금 나에게 화내는 사람은 그 화로 인하여 정신적고통(도마나사)’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 과보로 인하여 악처에 떨어져 고통받을 것을 생각하면 연민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섯번째의 부처님의 인욕수행을 반조하는 것은 사지가 절단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라는 초기경전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된다. 그런 원수도 언젠가 한량없는 윤회과정에 있어서 나를 한 번 쯤 어머니이었을 것으로 생각하면 분노가 누그러진다. 하지만 이는 모두 생각일 뿐이다.

 

내가 아무리 원한맺힌 자를 향하여 자애를 방사하여도 상대방이 이를 받아들일 마음이 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시도하는 것이 직접적인 접촉이다. 만나서 무언가를 주는 것이다. 이 주는 것이야말로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주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 주는 것을 다른 말로 보시한다고 한다.

 

주는 사람이 가장 예쁜이유

 

보시에 대한 좋은 예가 있다. 불교tv 사이트에서 본 무비스님의 서장 강의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당 현종하고 아주 유명한 재상하고 왕비하고 세 사람이, 국가에 아무일이 없고 아주 잘 돌아갈 때 편안한 자리에서 만났습니다. “우리 셋이 이렇게 나를 반석위에 올려 놓았는데, 우리 인간으로 돌아가서 정말 솔직한 이야기 한 마디씩 합시다라고 하였습니다. 왕은 그야말로 보천지하(普天之下)  막비왕토(幕悲王土)라 하였는데, 이는 온 천하가 왕의 국토 아닌 것이 없고, 전부 왕의 물건 아닌 것이 없고, 왕의 백성 아닌 것이 없고, 왕의 신하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왕이 필요하면 말 한마디에만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고 손가락으로 가지고 싶은 것을 지적하면 뭐든지 다 가져다 주는 시대에 저 시골 노인이 고구마를 캐서 다 떨어진 보자기에 싸서 들고 와서 왕에게 우리마을에서 난 고구마인데 참 좋은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을 때, 그 말을 하는 그 노인네가 가장 예쁘더라는 것입니다. 왕이 무슨 고구마를 먹겠습니까? 천하가 내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져다 주는 그 사람이 예쁘더라는 것입니다.

(무비스님, 불교tv 강 14’)

 

 

 

 

 

 

 

사진 ; http://day1of1.files.wordpress.com/2011/07/gift.jpg

 

 

 

 

당현종은 당나라 시대의 제6대 황제이다. 그가 통치한 시대를 개원의 치라 하여 당태종의 정관의 치와 함께 태평성대를 일구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런 당현종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골 노인의 고구마를 받고 감동한다는 내용이다. 비록 보잘것 없고 하찮은 것일지라도 주는 그 마음이 예쁘고 사랑스럽고 아름답다는 말이다.

 

주는 것을 싫어 하는 사람은 없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삼독이라 한다. 이중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성냄이다.그런데 그런 성냄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가장 천박하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성냄을 자비의 방편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성내는 그 자체는 불교식으로 말하면 중죄를 짓는 것이다. 불행하고 비참하고 처참한 곳에 태어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천박하고 악처에 태어나는 요인이 되는 성냄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제까지 일구어놓은 모든 공덕을 파괴해 버릴 수 있다는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상대방으로부터 사지가 절단나는 한이 있더라도 화을 내서는 안된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었다면 그는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고 까까쭈빠마경에서 단언 하였다. 이런 점 하나만 보아도 화를 내지 말아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나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성냄을 제거 하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최후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주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는 것을 싫어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천하를 가진 황제도 시골 할머니가 준 고구마를 보고 그 마음이 가장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하였다. 이처럼 주는 것은 원수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는 마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1-09-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