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윤회를 믿으면 자살하지 않는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1. 9. 10. 11:14

 

 

윤회를 믿으면 자살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중의 하나가 죽고싶다이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하는 말도 죽겠다이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우리나라를 OECD국가 중에 자살률 1위로 만들어 놓았다. 참고로 지난해 자살에 의한 사망자수는 15,566명이라 한다. 하루 평균 42.6명꼴로 나타나는 자살은 계속 증가 추세에 있고, 특히 70대의 자살률이 크게 높아졌다고 한다.

 

자살충동을 느낄때

 

누구나 한 번 쯤 자살충동을 느낄때가 있다. 막현한 죽음에 대한 동경이다.  주로 청소년기에 해당된다. 하지만 죽을고생을 하고 나면 그런 낭만적인 생각은 쑥 들어가 버린다. 남자의 경우 군대에 들어가서 거친 훈련을 받고 나면 다시는 자살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사라진다. 그 대신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겠다고 커다란 인식의 전환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진짜 죽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부딪쳤을 때 마지막 탈출구로 생각하는 것이 자살이다. 그런 자살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 할 수도 있다. 정신과 전문의 전현수박사가 진행하는 불교TV사이트 강의에 따르면 자살하다 미수에 그친 환자들이 하는 말중의 하나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죠 뭐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뚜렷한 답을 내 놓지 못한다고 한다.

 

죽어서 되돌아온 사람이 없기에

 

죽는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막연히 자살을 동경하고 아무 근거 없이 죽으면 끝난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은 다음 생에 대하여 믿지 못한다. 아직까지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회에 대하여 믿지 못한다.  

 

보통사람들이 윤회를 믿기힘들다. 죽어서 돌아온 사람들이 없듯이 윤회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행을 많이 해서 전생을 볼 수 있는 숙명통과 같은 신통이 생기지 않는 한 모른다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합리적으로 접근해 볼 수 있다. 그런 방법이 초기경전에 나와 있다. 맛지마니까야에서 볼 수 있는 아빤나까경(Apannaka Sutta, MN060)’이다. 전재성박사는 이 경에 대하여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이라고 긴 이름을 붙였다. 영문판을 보면 타닛사로(Thanissaro)비구는 A Safe Bet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를 해석하면 안전한 내기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경은 한역 아함경에서 볼 수 없는 경이라 한다. 오로지 맛지마니까야에서만 볼 수 있는 이 경은 경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죽음이후에 벌어질 상황에 대한 것이다 

 

목사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많은 댓글을 받는데, 그 중 어느 기독교인은 자신이 교회에 나가는 이유에 대하여 죽어서 낭패보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되는 대로 살다가 막상 죽었을 때 지옥이 실재한다면 낭패보기 쉽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목사들도 자주 하는 말이다. 그 중 내아이 절대 교회에 보내지 마라의 저자인 송상호 목사는 만일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믿는 이가 죽었을 때 진짜의 그의 말대로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다면 손해 볼 일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천국이나 지옥이 실재한다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임에 틀림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와같은 말은 처음부터 기독교에서 나온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맛지마니까야에 이와 매우 유사한 말이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이 예수 보다 600년 먼저 태어 났으니 불교에서 유래된 말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내용은 어떤 것일까.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

 

부처님이 꼬살라국을 유행할 때 어느 바라문 마을에 머물렀는데, 그 마을은 수 많은 외도들의 사상이 난무 하였다. 육사외도들이 자신들의 사상이 진리라고 주장하여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장자들은 마침 부처님이 마을에 오자 물어 본 것이다. 그 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면, 그것은 그대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빤나까경-Apannaka Sutta-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MN060, 전재성님역)

 

 

여기서 마음에 드는 스승은 육사외도의 교주를 가리킨다. 부처님당시 육사외도들은 자신들의 스승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주장하였는데, 특히 죽음이후에 벌어지는 저 세상에 대한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 주장에 대하여 부처님은 삿된견해로 간주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부술 수 있는 가르침을 편 것이 바로 아빤나까경이라 볼 수 있다.

 

불교내계 내부에서 조차

 

죽음과 죽음이후에 벌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사람들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두려워 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는 단멸론적인 시각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종교인들은 온 갖 상상의 나래를 펴서 자신들의 논리를 주징한다.

 

하지만 증명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더 기승을 부리는데 주로 단멸론자들은 저 세상은 없다는 논리이다. 이는 윤회를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오늘 날에도 윤회를 믿지 못하겠다거나 부정하는 자들도 많은데, 심지어 일부 불자들과 일부 스님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오로지 사념처 수행에 관한 가르침인 염처경이나 대념처경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불교내부에서 조차 윤회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부처님은 윤회를 주장한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경전의 도처에 윤회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아빤나경도 저 세상(윤회)’을 부정하는 자들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부수어 버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절반의 성공을 위하여?

 

그런데 진짜 저 세상이 없고 죽으면 끝이라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인간의 몸이 파괴된 뒤에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아빤나까경-Apannaka Sutta-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MN06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저 세상에 대하여 말하였다. 저 세상은 내세를 말한다. 죽은 다음에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죽으면 끝이다라는 전도된 인식을 가진 자가 되는 대로 살아 악행을 많이 저질렀을 때, 자신이 믿는 대로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악행에 대한 과보를 받지 않기 때문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반반의 가능성이다. 만일 죽음이후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면 그 때는 어떠할까. 당연히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야 할 것이다. 악행을 많이 하였다면 지옥이 유력할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비난받아 마땅한

 

이처럼 부처님은 사후의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고 더구나 지옥까지 언급함으로 윤회가 있다고 명확히 말씀 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계속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그러한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비난받는다.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비난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실천하여 한 쪽만을 충족시키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버리고 있다.

(아빤나까경-Apannaka Sutta-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MN060, 전재성님역)

 

 

죽으면 끝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비도덕적으로 흐르기 쉽다. 그런 그들이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보시도 없다” “제사도 없다””선악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다 저 세상도 없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못 된 짓을 서슴치 않고 저지르기 쉬운데, 설령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들의 행위는 지금 여기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저 세상이 있었을 경우 불행한 곳, 처참한 곳, 비참한 곳인 지옥에 태어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도덕적으로 살며 악행을 저지른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비난받고, 저 세상에 가면 지옥행이 뻔할 것이기 때문에 양쪽세상 모두에서 불행을 겪을 것이라는 말이다.

 

도덕부정론자, 뿌라나 깟사빠(Purana Kassapa)

 

자살한 자들이 죽었을 때 그들이 생각한 대로 저 세상이 없다면 절반의 성공으로 본다. 하지만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낭패보기 쉽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반의 성공을 위하여 내기를 걸 수 있을까.

 

현자들이 말하기를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 하였다. 하지만 죽어서 되돌아온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죽음이후에 벌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알 수 없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저 세상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죽으면 끝난다는 단멸론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절반의 성공이 되기 싑다는 것이다.

 

단멸론자들은 그 어떤 비도덕적 행위를 서슴치 않고 행하는데, 그런 것중의 하나가 공덕에 대한 과보를 부정하는 것이다. 보시를 하여 공덕을 쌓아 다음 생에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사상가가 부처님당시 육사외도중의 하나이었던 뿌라나 깟사빠(Purana Kassapa)’이었다.

 

뿌라나 깟사빠를 도덕부정론자라고 부른다. 그의 이론은 비결정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를 다른 말로 우연론또는 무인론이라 한다. 그런데 뿌라나 깟사빠의 우연론은 단지 일상적론인 우연론이 아니라 부처님이 주장한 연기사상을 통째로 부정한 것에 있다는 것이다.

 

모든 원인과 결과는 무에서 유가 나오는 것처럼 초월적이고 완전히 우연적이어서 절대적으로 예측가능하지도 않고, 무원칙하게 변하므로 인과관계는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과적 연속성을 담보할 수 없으므로 허무주의에 속한다. 따라서 인간이 하는 행위에 있어서 그 어떤 도덕적 책임감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법을 부정하고 인과를 부정하고 허무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도덕부정론자들은 막행막식이 되기 쉽다.

 

모든 것이 공한 것이여

 

뿌라나 깟사빠의 우연론은 요즘말로 공병걸린 자들과 유사해 보인다. 그 어떤 진리나 성인의 가르침도 모두 공한 것으로 보고 또 공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는 진공묘유는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듯이 보일 뿐만 아니라 때때로 모든 것이 공한 것이여라고 말하는 허무주의자들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자들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이 세상을 라 보며서 죽으면 끝이다라고 보는 자가 있고, 반면에 영원히 변치 않는 저 세상을 동경하는 자들도 있다. 이 때 전자를 단멸론자로서 단견(斷見)’에 빠졌다고 볼 수 있고, 후자는 영속론자들로서 상견(常見)’에 빠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단견과 상견에 빠진 자들을 잘 못된 수행의 결과로 보았다.

 

세상은 죽으면 끝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원히 변치 않는 세상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다만 자신이 몸과 말고 마음으로 지은 업이 남아 있는 한 그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 끝 없는 태어남과 죽음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와 같은 한량없는 윤회를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윤회하는 여행에 지쳤을 때

 

윤회하는 것을 여행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런데 여행을 하다 보면 지칠 수 있다. 그래서 여행을 끝내고 싶어 한다. 윤회라는 여행을 끝내게 해주는 방법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방법중의 하나가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를 소멸하여 더 이상 업을 짓지 않아 다음 생에 태어날 근거를 남기지 않는 것인데,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열가지 족쇄를 푸는 것이라 하였다.

 

열가지 중에 처음 세 가지를 풀었을 때 윤회라는 여행을 끝내는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고 하는데, 그 세가지 족쇄를 유신견(有身見,sakkāya-diṭṭhi)’ ‘의심(vicikicchā)’ ‘계금취(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라 한다. 이중 계금취를 잘못된 수행으로 본다.

 

단견과 상견에 빠진 브라만교와 육사외도의 수행방식을 부처님은 잘못된 수행방식이라 하였다. 잘못된 수행방식을 고집하는 한 결코 윤회에서 벗어 날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10가지 족쇄에 포함시켰고, 이 족쇄에서 풀려 나야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네 종류의 인간이 있는데

 

이러한 잘못된  수행방식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네 종류의 인간으로 분류하였다.

 

 

장자들이여, 세상에서 네 종류의 인간을 보게 됩니다. 어떠한 것이 네종류입니까?

 

첫째, 장자들이여,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괴롭히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수행을 실천합니다.

 

둘째, 장자들이여,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사람을 괴롭히고 다른사람을 괴롭히는 수행을 실천합니다.

 

셋째, 장자들이여,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괴롭히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수행을 실천하고, 다른사람을 괴롭히고 다른사람을 괴롭히는 수행을 실천합니다.

 

넷셋째, 장자들이여,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 수행을 실천하고, 다른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다른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수행을 실천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않아서 지금 여기에서 탐욕이 없고 열반에 들어서 청량하고 행복을 경험하고 거룩한 존재로서 스스로 지냅니다.

(아빤나까경-Apannaka Sutta-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MN060,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네 가지의 종류가 있음을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빗자루로 쓸고 다니는

 

첫 번째의 경우 고행수행자를 말한다. 이런 고행수행은 부처님이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기 전에 오비구와 함께 수행하던 방식이다. 그런데 자신의 몸을 학대하여 수행하는 방식으로 결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역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행이라는 잘못된 수행방식이 여전히 있음을 경에서 말씀 하신 것이다.

 

경에서 구체적으로 벌거벗고, 편의를 거부하고, 손가락을 빨고, 초대를 거부하고등의 방식으로 고행을 하는 수행자들을 말하는데, 이는 부처님 당시의 자이나교도들을 빗대어 한 말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tv의 다큐프로에서 본 자이나 교도들의 수행방식은 독특하였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기 위하여 빗자루를 들고 다니며 쓸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이외 경에서 본 자이나교도들은 찬물도 들이키지 않는데, 이는 찬물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모두 잘못된 수생방법이다. 이런 수행방법으로 결코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여 윤회를 끝낼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죄없는 자들을 족쳐서

 

다음으로 두 번째 항목인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수행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는 가축이나 짐승의 도살자. 죄를 심문하는 처형관이나 옥졸등 잔인한 일을 도 맡아 하는 자들을 말하데, 이런 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수행을 실천하는 자라고 경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이런 자들도 자신을 학대하는 자 못지 않게 죄업을 짓고 있는데 윤회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요즘말로 하면 권력층에 있으면서 죄없는 자들을 족쳐서 없는 죄도 만들어 내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

 

머리에 관정을 한 사제

 

세 번째의 자기자신을 학대하면서 동시에 남들도 괴롭히는 수행에 관한 것인데, 경에서는 머리에 관정을 한 고귀한 왕이거나 잘 사는 사제라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나타내는 옷이나 관을 쓰고 동물을 희생시켜 제사지내는 부처님 당시의 브라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요즘의 경우 호의호식하는 종교인들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네 번째의 자신을 학대하지 않고 동시에 남도 괴롭히지 않는 수행을 말하는데, 바로 이런 수행이 부처님이 바라던 것이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고 팔정도수행을 하여 모든 번뇌를 소멸하였을 때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는 일이 없다라고 선언 하는 것이다. 이런 수행은 죽음이후의 저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거룩한 존재로서 스스로 지내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경에서 말씀 하셨다.

 

네 가지 종류의 수행을 보면 네 번째를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는 모두 잘못된 수행방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수행의 특징은 죽으면 끝이다라는 단견과 죽음 이후에 영속적인 삶이 계속될 것이라는 상견인데 이는 모두 잘 못된 수행의 결과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브라만교의 영속주의와 육사외도의 우연론, 숙명론등의 잘못된 수행방법을 비판하고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섯개의 기차가 준비되어 있는데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설령 절반의 성공을 믿고 비도덕적으로 산다든가 자살을 시도하였을 때 이는 이 세상에서 비난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정당화내지 합리화, 일반화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죽음이후에 저 세상이 있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이야기가 기독교의 목사들의 설교에서 교회에 나오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데, 사실 이와같은 이야기는 이미 초기불교 경전에서 부처님이 매우 상세하게 설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절반의 성공을 위하여 내기하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 없다. 내기 하다 잘 못 되었을 경우 어떻게 될까.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여섯개의 기차가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마치 은하철도999’같이 여섯종류의 기차가 준비 되어 있는데, 그 중 천상이나 인간세계로 가는 기차의 좌석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지옥이나 축생, 아귀, 아수라로 가는 열차의 차량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다고 한다.

 

 

 

 

 

사진 ; 은하철도999 미지

  

 

 

사악도는 고향과도 같은 곳

 

이처럼 죽는 다는 것은 대부분 악처로 가는 열차에 타기 쉽다고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태어남이라 함은 악처에 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지구상에서 인간보다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땅을 한 삽 파면 그 안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생명들이 살고 있는데, 바로 태어남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이어서 생명있는 존재에 있어서 악처는고향과도 같은 것이라 한다. 사악도에서 떠 돌다 어쩌다 한 번 인간으로 오는 것으로 본다. 인생이 고통의 바다와 같은 것인데, 그 가운데 잠시 행복을 느끼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삼계를 돌고 도는 것이 윤회인데, 이런 윤회를 알면 열심히 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윤회라는 여행을 마치기 위해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다른 수행방법 즉 창조론, 우연론, 숙명론등은 결코 윤회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는 잘못된 수행방법으로 보는 것이다.

 

윤회를 믿으면 자살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우리의 삶이 끝나 죽음이후에 대하여 저 세상에 대하여 말씀 하셔서 죽으면 끝이다와 같은 도덕부정론자들을 경계하였다. 그래서 죽으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다고 하였는데, 자살을 하는 자들이 가는 세상은 악처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윤회를 믿게 되면 함부로 삶을 살아가지 않게 되는데 불교tv사이트(전현수박사의 마음테라피 , 제37 윤회는 불교의 핵심인가2) 에서 전현수박사는 다음과 같이 윤회를 믿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윤회를 믿으면

 

첫째, 자살을 하지 않는다.

둘째,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셋째, 불교수행을 열심히 하게 되고 예류과를 얻기 위해 열심히 한다.

넷째, 다음생을 준비하게 된다.

다섯째, 불만이 없고 행복해진다.

여섯째, 현재상태를 받아들이게 된다.

일곱째, 죽는 순간까지 열심히 한다.

여덟째,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긴다.

아홉째, 남에게 해를 끼지지 않고 남을 돕는다.

열째, 보시를 열심히 한다.

열한째, 절 운영에 걱정이 없다.

열두째, 불법승 삼보를 믿게 된다.

열세째, 나날이 의미가 있고 새롭게 된다.

열넷째,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게 된다.

열다섯째, 마음이 든든하다.

 

 

우리사회에 자살이 많다는 것은 불교가 제 역할을 하지 않아서이다. 실제로 불교국가인 미얀마나 스리랑카등은 자살률이 세계평균보다 현저하게 낮다고 한다. 고향과도 같은 악처에 있다가 어렵게 사람몸을 받았는데 쉽게 자살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불교적 가치관을 심어 줄 때 우리사회의 자살률은 많이 낮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2011-09-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