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불자공동체’는 요원한가, ‘지역불자회’의 부활을 꿈꾸며

담마다사 이병욱 2011. 9. 13. 16:59

 

불자공동체는 요원한가, ‘지역불자회의 부활을 꿈꾸며

 

 

 

 

명절때가 되면 보게 되는 것

 

명절때가 되면 항상 놀라게 되는 것이 주변의 변화를 실감하는 것이다. 친지나 친척집을 방문하면서 보게 되는 것은 주변의 경관이다. 오랜 만에 방문할 때 마다 느끼는 것은 도시의 스카이라인이다. 오밀조밀하게 따닥따닥 붙은 달동네는 깨끗이 정리되어 고층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옛모습을 찾을 수 가 없고 전에 보지 못하던 빌딩들이 서 있어서 랜드마크역할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사람일 것이다.

 

나이 드신 어른들의 옛 모습은 간데 없이 형편없이 늙어있고, 자라나는 새로운 세대들은 볼 때 마다 그 모습이 달라 마치 비가 개고나서 죽순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변함없는 것은 저 멀리 보이는 산이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변하든 말든, 사람의 얼굴이 쭈그러지든 말든 항상 그 자리에 변함없이 서 있는 것 같다. 그런 산도 언젠가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세월에 장사 없다고 생겨난 것은 언젠가 반드시 멸하고 마는 제행무상의 법칙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한사람의 기독교인의 출현으로 인하여

 

올 추석모임에서도 늘상 그렇듯이 제사문제로 인하여 논란이 치열하였다. 나이 드신 노인들이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에서 제사문제에 대하여 이슈를 선점한 것은 벌써 수십년째이다. 매년 되풀이 되는 문제이지만 좀처럼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은 장손이 기독인이기 때문이다.

 

나이차이가 옛날식으로 따졌을 때 부모와 자식간의 차이가 나는 백부의 큰 아들 즉  장손이신 형님이 기독교를 믿는다. 그러다 보니 조상제사를 모시지 않아 형제들끼리 갈등은 물론 살아계신 어른들로 부터도 좋은 소리를 못듣는다. 그렇다면 그 큰 형님은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을까.

 

사촌 큰형님은 농촌에 살 때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농촌을 떠나 우리나라 제2도시라 불리우는 곳으로, 그것도 아무 연고도 없는 곳으로 정착하면서 외롭고 힘겹게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들리는말로는 형수가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시작 되었다고 한다. 형수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 하면서 차례로 전 가족이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한사람의 기독교인의 출현으로 인하여 그곳에 정착한 모든 친척과 친지들을 모두 교회에 다니게 만든 것이다. 그에 따라 제사참석도 거부하여 명절때만 되면 늘 비난과 비판의 화살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사촌 큰 형님댁은 새로운 신앙을 가짐으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되었다고 믿고 있다. 타지에서 외롭과 힘든 생활을 할 때 교회를 다님으로 인하여 외로움응 극복할 수 있었고 또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맺은 인연을 혈족의 인연보다 더 깊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이농그룹에 대한 도시형 교회공동체라 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기독교가 득세하고 있는 이유중의 하나가 이처럼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공동체가 성립하였기 때문이다.

 

이농과 교회공동체의 성립

 

도시에서 교회공동체가 성립된 것은 이농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농촌에서 서로 돕고 살아가는 모습을 도시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재현한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혈족에서 신자들로 바뀐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이 부모가 교회공동체 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자식들에게 까지 자연스럽게 신앙을 갖게 되었고, 또 배우자까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져 이제 완전히 딴나라 사람들처럼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하여 한양대학교 이도흠교수는 법보신문 컬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도들을 구역별로 나누어 조직화하고 이들을 교회 안에서 통합한다. 교회 단위로 목회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며, 신도끼리 서로 연대를 형성한다. 특정 교회의 신도끼리 애경사의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고 공동으로 물품도 구입하고 나눈다.

(이도흠교수, 3. 200 기독교가 1700 불교를 압도한 연유 <중>, 법보신문 2011-08-22)

 

 

공동체를 지향하는 한국인의 독특한 문화와 교회가 결합하여 교회공동체라는 독특한 문화가 만들어 진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한번 교회에 발을 디디면, 교회는마누라 바꾸기보다 교회 바꾸기가 힘들다.”고 할 정도로 연고주의와 다양한 조직의 틀로 묶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원인으로 이농민들의 농촌공동체에 대한 그리움때문이다.

 

이농현상으로 인하여 남부여대한 빈민들이 대거 도시의 빈민촌으로 모여들었을 때, 그들은 농촌에서 공동체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며 그리워 하였는데 이를 교회가 대신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로 달려갔고, 관혼상제 뿐만아나라 신도들이 큰병이나 경제적인 고통에 처해 있을 때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신도들이 그들을 위로해 준 것이다.

 

이처럼 교회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생활은 피를 나눈 형제들 보다 더 가깝게 지내면서 각종 애경사를 함께 한것이다. 더구나 등산이나 독서등 각종 취미모임등도 교인들끼리 어울리다 보니 그들 나름대로 끈끈한 유대관계가 형성된 것으로 본다. 바로 이런 점이 오늘날 도시의 밤하늘에 십자가 천지를 이룬 요인이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같이 도시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형성되어 견고한 유대관계를 만들었을 때 한국불교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포교에 손을  놓고 있는 종단과 스님들

 

최근 불교관련 인터넷뉴스사이트에서 두 가지 사항을 목격하였다. 하나는 수도권포교 공동화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사설사암에 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안은 한국불교가 처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의 절반이 모여 산다는 서울과 수도권에 절이 보이지 않는다.그 중에서도 인천과 성남, 안양등 신도시가 몰려 있는 경기남부 지역이 심한데, 이들 지역에서 절을 찾아 보기란 쉽지 않다. 특히 최근 건립된 신도시나 뉴타운 지역에서 현저한데, 이에 반하여 교회나 성당은 절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계획적으로 건립되고 있다고 한다.

 

 

 

 

 

 

신도시에서 보는  교회와 성당

 

 

 

이런 현상에 대하여 불교미래사회연구소(서장 퇴휴)’에서 지난 2011 4월 부터 5개월간 중앙종회 무차회와 공동으로 진행해온 수도권 포교전략과 공동화의 현황과 대처방안이라는 자료를 보면 한국불교의 종단과 스님들이 포교에 대하여 손을  놓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있는 것 마저 찾아 먹지 못하는

 

서울과 경기지역에서는 매년 대규모 택지개발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신도시나 뉴타운이 건립된다. 이때 종교용지를 불하 받을 수 있는데, 있는 것 마저 찾아 먹지 못하여 사찰이라고는 구경을 할 수 없는데, 이를 시각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수도권 포교 공동화의 현황과 대처방안.docx 

수도권 포교 공동화의 현황과 대처방안.pdf

 

 

 

위 지도는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새롭게 건설된 뉴타운이나 신도시에 있어서 종교별 용지현황에 대한 것이다.

 

지도를 보면 동그라미의 크기는 종교용지를 받은 건수와 용지의 규모를 나타낸 것이다. 불교는 세 건에 동그라미가 그다지 크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개신교의 경우 동그라미의 크기도 클 뿐더러 무수하게 많이 찍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인구가 밀집한 지역일 수록 매우 심하다. 천주교의 경우 불교보다 훨씬 많을 뿐만아니라 지역마다 골고루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천주교가 매우 계획적으로 성당을 건립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단 한 건도 확보하지 못한 불교

 

이런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한 예로서 수도권 택지개발지구에서 다음과 같은 도표를 볼 수 있다.

 

 

 

수도권 택지개발지구 종교용지의 종교별 점유율

불교는 단 한 곳도 없다.

사진: 불교포커스, 개신교·천주교 각축 불교는 무대응

 

 

 

수도권에서는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끊임없이 들어서고 있다. LH공사 자료에 따르면 서울경기인천 택지개발지구와 신도시 등을 모두 포괄하는 수도권 내의 개발지역에서 지난 5년간 공급된 종교용지는 총 192필지로, 그 중 개신교계 대상자가 공급받은 종교용지는 74곳이며 천주교계 대상자가 받은 용지는 15, 원불교계와 유교 대상자가 공급받은 토지는 각각 1곳이라 한다. 그런데 불교의 경우는 0%로서 단 한 곳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단과 스님들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사설사암은 증가하고

 

최근 이와같은 서울과 수도권지역의 포교공동화기사와 함께 거의 동시에 발표된 기사가 있다. 그것은 곳곳 빈절인데 사설사암 계속증가라는 기사이다.

 

 

  곳곳 빈 절인데 사설사암 계속 증가.docx  곳곳 빈 절인데 사설사암 계속 증가.pdf

 

 

조계종에 등록된 사찰은 총 2,787개라 한다. 이중 사설사암은 전체의 66% 1,541개라 한다. 이처럼 대부분을 차지 하는 사설사암은 매년 36개씩 증가하고 있는고 한다. 그런데 전체사찰 중 26%는 주지임명도 되지 않은 사찰이라고 한다. 1/4은 주지스님이 없어서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사설사암은해마다 계속늘어 이제 전체사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사찰은 매년 새롭게 건립되고 있다. 문제는 서울과 신도시, 그리고 뉴타운, 아파트단지와 같이 사람이 많이 사는 곳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산중에 만들어지고 있고, 그것도 스님의 개인사찰형식이라는 것이다.

 

더욱더 심각한 문제는 주지가 있는  곳 가까운 곳에 사설사암을 창건해 가존 전통사찰에는 신도가 줄어들고 사설사암으로 신도들이 들어가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는 조계종이 실시하고 있는 종단출연령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본다.

 

종단출연령은 스님이 입적한 후 개인명의로 되어 있던 재산이 속가로 상속되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마련된 규정이다.  그런데 사찰이 종단에 소속 되어 있으면 분담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분담금을 피하기 위하여 개인사찰을 만드는 것이 대유행인데, 이와 같은 사설사암에 대하여 사찰령을 만들어 적용하려 하자 이번에는 개인토굴을 만들려 한다는 것이다. 개인토굴도 매우 다양한 데, 아파트 토굴도 있는가 하면 사찰과 다름없는 모양을 한 토굴도 있다고 한다. 과연 이런 모습이 출가자의 본래 모습일까.

 

노후를 위하여

 

사설사암이나 토굴이 개개스님들의 원력과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고, 불교와 종단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도 있을 수 있지만, 그 사찰이 개인소유라는 것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출가자의 본분을 잃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의 사설사암에 대한 애착은 놀라울 정도라고 한다. 오히려 종단출연령과 사찰령에 반대하는 스님들은 사찰을 일구는데 종단에서 도움하나 준 것 없으면서 종단이 관리하려 든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이는 스님들의 노후와 매우 관계가 깊다. 세속에서 세속인이 미래를 위하여 노후대책을 세워 놓는것과 똑 같이 스님들도 미래를 위하여 노후를 위하여 소유하려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세속의 잣대로는 맞지만, 출세간의 잣대로는 맞지 않는 행위이다. 스님은 출가수수행자이기 때문이다.

 

금과 은을 가진다면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비구들이 금이나 은을 가지지 말라고 하였다. 이를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소유하지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일 금과 은이 허용된다면 그들에게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도 함께 허용될 것입니다. 만일 다섯가지 감각적 쾌락이 허용된다면, 그런 사람은 분명히 사문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며, 사꺄 아들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42  가마니상윳따,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만일 비구가 소유하게 되면 오욕락에 떨어질 것이라 경고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오욕락은 식욕, 성욕, 안락욕, 재욕, 명예욕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금과 은을 받는 자는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의 스님들은 노후를 위하여 개인사찰을 만들고 많은 재산을 소유하려 한다.

 

혜민스님의 블로그에서

 

한국불교가 처한 상황에서 스님이 개인사찰을 소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원칙은 지켜야 할 것이다. 그것은 혜민스님의 블로그에서 본 한국불교를 살리는 10가지 생각이라는 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내용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2. 스님 본인이 좋다고 도심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다 무리하게 돈을 많이 들여서 불사를 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도심에서 떨어진 사찰은 그대로 두고 분원으로 도심안에다 포교당을 내시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특히 공찰 주지 스님일수록 사람들 오지 않는 산골에다 절 건물 많이 지어봤자 다음번 주지 하시는 스님 건물 유지비 충당하는데 허리가 휠수가 있습니다. 작더라도 시내로 나가야 합니다.

(혜민스님, 한국불교를 살리는 열가지 생각)

 

 

혜민스님의 한국불교를 살리는 10가지 생각.docx 

혜민스님의 한국불교를 살리는 10가지 생각.pdf

 

 

혜민스님은 하버드대학원 출신으로서 현재 미국 햄프셔대학의 종교학 교수로 있다. 지난 6월 할리우드의 불자배우 리차드기어가 방한 하였을 때 통역을 맡기도 하였다. 그런 혜민스님의 글은 개인적으로도 좋아 해서 블로그을 처음 만들당시인 2005년 법보신문 세심청정이라는 컬럼에 연재된 스님의 글을 블로그에 옮겨 싣기도 하였다.

 

포교당을 만들어 불교공동체를

 

스님들이 절을 지을 때는 공찰이든 개인사찰이든 간에 도심에 지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스님들은 절을 지을 때 도심에서 떨어진 산중에 짓는다. 이는 스님의 취향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스님이 살기 편하고 수행하기 좋아서 외딴 곳에 대궐같은 집을 짓는 것이다.

 

그런 집은 절집을 짓는 건축전문가 법우님의 의견에 따르면 평당 건축비가 1600만원 가량 들어간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신도들을 위한 공간은 배려 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찰이 스님들이 사는 공간이자 수행공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절을 지어도 산속에만 짓는다면 불자들은 설자리가 없다. 더구나 기복과 방편에만 한다면 불자들은 머지 않아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교회로 발길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절을 지을 때는 반드시 도시에 포교당을 내자는 것이다.

 

포교당은 반드시 기와지붕에 단청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건축비가 평당 1600만원에 달하는 전통양식의 건물이 아니라 불자들을 위한 충분한 공간이 배려된 공간을 확보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유치원에서 부터, 청소년공부방, 노년층을 위한 경노대학등을 만들어 지역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역의 주민을 위하여 봉사하였을 때 사원을 중심으로 한 불교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다.

 

산속에서만 생활한 결과

 

추석날 제사문제로 늘 어른들의 혈압이 올라가고 있다. 종손이 기독교인이라 제사를 지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원인을 보면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 인한 영향이 지대함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농을 하여 마땅히 벌어 먹고 살기 힘든 때 아무런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농촌공동체의 그리움을 떠 올리면서 택한 것이 바로 옆에 있는 교회를 통한 공동체의 복원이었다. 그런데 그 공동체는 농촌에서와 같이 혈연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맺어진 것이었는데,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서 오히려 혈연보다 더 가까운 형제 자매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사람사는 곳 가까이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만일 그 때 그 장소에 사원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사원을 중심으로 한 불교공동체가 설립되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언제 돌어가실지 모르는 어른들의 제사문제는 애초에 발생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이 모두가 한국불교의 종단과 스님들이 현실을 도외시하고 산속에서만 생활한 결과로 본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무시받고 제3의 소수종교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것도 자업자득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스님들은 노후대책용으로서 사설사암이나 토굴의 소유에 몰두 할 것이 아니라 도시에 나와 포교하여야 한다. 사설사암을 건립하는 것에 대하여 백번양보하여 건립해도 좋다고 하자. 그런데 건립을 하긴  하되 혜민스님의 말처럼 도심에 포교당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스님편하자고 산중에 절을 만들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일요법회를

 

스님들이 도시로 나오지 않는 이유중의 하나는 세상에 대한 자비심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자비심을 가졌다면 사람사는 곳으로 사원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사원을 중심으로 한 불교공동체를 만들어 부처님의 정법을 알려야 한다. 그런 다음 어떻게 해야할까. 혜민스님의 글 한국불교를 살리는 10가지 생각중에 두 개를 더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반드시 일요법회를 해야 합니다. 초하루 법회 위주로 하다보면 직장인이나 학생들은 

절에 나올 일이 없습니다. 절에가면 나이드신 보살님만 보인다라는 말이 바로 일요법회의 부재에서 나온 말입니다.

 

 

3. 스님들 법문을 하실때 되도록이면 쉽고 듣는 사람이 잘 알아 들을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셔야 됩니다. 일반인들이 못 알아듯는 선어록 언어는 불교가 어렵다라는 생각만 가중시켜 줄수가 있습니다. 이와 함께 교양대학은 필수 입니다. 불교에 대해 잘 모르면 점치는 것이 불교인줄 혼동합니다

(혜민스님, 한국불교를 살리는 열가지 생각)

 

 

반드시 일요법회를 하자고 한다. 음력으로 된 초하루법를 하면 직장인들이나 학생들이 절에 나올 일이 없다는 것이다. 또 법문을 하되 선어록처럼 현실과 괴리된 법문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 불자들이 삶의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어려움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따뜻한 법문을 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니까야와 같은 초기불교경전을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다양하다. 수행에 관한 가르침도 있지만 그것 못지 않게 자비실천에 대한 가르침도 있고, 청소년에게는 우정에 관 한 법문, 아픈자를 위한 법문, 남녀 평등에 대한 법문등 84천가지나 되어 매우 다양하다.

 

이는 유일신교에서 보는 것처럼 보잘 것 없는 교리와 매우 짧은 문구로 우려 먹는 것과 달리 부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넓고도 깊은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성인들의 가르침이 부처님의 손바닥안에 있는 것과 같다.

 

마음 내키는 대로

 

종단이나 스님들이 하고자 하는 열의만 있으면 지금당장이라도 실천가능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에서 포교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은 정처없이 떠 돌아다니는 운수납자의 행태에 기인한 영향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전국의 모든 사찰을 모두 자신의 집이라고 보는 스님들은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걸망을 꾸린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속담에 절이 싫으면 스님이 떠나면 된다라거나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행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는 포교에 있어서 치명적이라 생각된다. 원력을 세워 어느 지역을 포교하던 스님이 경제적 문제인간적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여 어느날 걸망을 매고 훌쩍 사라졌을 때 더 이상 부처님의 가르침은 전달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사이버세상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이버세상에서도

 

종종 스님들이 개설한 블로그를 볼 수 있다. 한 동안 글이 올라 오다 어느 날 부터 전혀 글이 올라 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블로그를 방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걸망을 메고 훌쩍 떠 버리듯이 사이버상에서 역시 마음내키는대로 사라지는 것이다.

 

어느 스님의 경우 떠난다고 글에 남기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어느 사원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불자들을 지도 하다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외국으로 몇년간 수행하러 간다며 떠난 것이다.

 

이처럼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자주 떠 돌아다니다 보니 도시에 포교당을 만들어도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죽기살기로 지역에 뿌리내려야 겠다는 오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돌아가는 곳은 항상 산중이다. 따라서 도시에서 사찰을 보기 힘든 이유는 이처럼 마음내키는 대로 떠나버리는 스님들의 자유로운 삶에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단청한다고 데모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찰을 소유하고 있는 스님들은 스님들이 살기에 편한 산중에 노후대책용으로 생각되는 사설사암을 소유하고 있는데, 이는 도시의 사는 불자들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을 위하여 아무것도 봉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불교는 사람들의 관심으로 부터 점차 멀어져 기독교나 천주교 보다 더 익숙하지 않고 어색하게 보이는 종교가 되었다.

 

오늘날 도심에서 단청한 일주문 건립을 반대하는 데모가 벌어지고 있는 것도 정서적으로 이미 불교와 멀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반면 교회의 담벼락에 커다란 예수의 그림이나 성당의 예수 조형물이 서 있어도 전혀 문제 삼지 않은 사회가 된 것이다. 이 모두가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불교탓이다. 그 이면에는 스님위주의 불교의 영향도 매우크다.

 

글을 쓰면서 현실을 살아가는 재가불자들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하여 고민해 보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어느 법우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화두아닌 화두를 품고 있었는데, 결국 생각한 것은 지역불자모음의 활성화이다.

 

우리나라 불교는 전국구

 

매년 몇 차례씩 순례법회를 떠난다. 그때마다 느끼는 점은 우리나라 불교는 전국구라는 것이다. 마치 국회에 지역기반이 없는 전국구 국회의원이 있듯이 우리나라 사찰 역시 지역적 기반이 없는 전국구사찰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 전통사찰이나 이름있는 사찰들은 전국의 불자들을 상대로 한다. 그런 광경중의 하나가 불사팀을 보는 것이다.

 

관광버스에 불자들을 가득실은 대규모 순례단이 도착하면 해당사찰에서는 불사를 담당하는 팀들이 절의 입구에서 부터 단단히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전국의 불자들을 상대로 하다보니 일년내내 불사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순례법회팀을 맞는 사찰의 불사팀

우리나라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하지만 지역을 기반으로 유지 되는 사찰은 보기 드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사찰이 모두 산중에 있기 때문이다. 사찰이 지역을 기반을 하지 않고 전국의 불자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불교가 매우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지역기반을 둔 국회의원들이 죽기살기로 지역관리를 하면서 선거에 당선 되기 위하여 노력하듯이, 지역에 기반을 둔 교회들 역시 지역민을 위하여 봉사하고 그들을 선교하기위하여 죽기살기로 노력한다. 하지만 전국구 국회의원들은 지역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다음선거가 기약이 없다. 마찬가지로 지역적 기반을 갖지 못한 한국불교는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지역불자회를 조직하여야

 

사람이 사는 곳에 사찰이 없다. 모두 산중에 있기 때문에 지역민과 가까워 질 수 없다. 그런면에 있어서 한국불교는 매우 취약하다. 그렇다고 해서 종단과 스님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아니다.

 

세속을 떠나 출가한 스님들이 다시 세상으로 나오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것은 지역에 살고 있는 불자들이 해결 할 수 밖에 없다. 종단과 스님들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기다릴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지역에 삼보는 없어도 이보만으로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계속 될 수 있다. 그것은 지역불자회를 조직하는 것이다.

 

지역불자회는 해당 지역에 사는 불자들이 스스로 모임을 만들어 일종의 불교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지역민들에게 가입을 권고하고, 지역을 위하여 봉사하고,  회원의 애경사를 챙겨 주는 것이다.

 

이런 지역불자회는 어느 특정 종단이나 사찰의 소속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불자들의 모임으로 만들어야 한다. 종단이나 스님들이 도무지 사람사는 곳으로 나오려 하지 않기 때문에 지역에사는 불자들이 자생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단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조직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싸울만한 충분한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에

 

지역불자회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순수한 불자들의 모음으로 해야 한다. 그런 불자회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역량있는 불교엘리트들의 힘에 의존해야 한다. 역량있는 소수의 힘은 때로 대단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최근 영화 (Che, 2008)’를 보았다. 아르헨티나 출신 쿠바혁명가인 체 게바라(Che Guevara)의 일생을 다룬 영화이다. 영화에서 체 게바라는 소수의 힘으로 그 때 당시 친미정권인 바티스타 정권을 게릴라전으로 무너뜨린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쟁과 평화에서 톨스토토이는 군사과학에서는 더 많은 병사를 가진 군대가 더 큰 공격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어요, 반면에 막연하게나마 알았어요. 전투를 할 때 군의 최종적인 공격력은 알 수 없는 변수에 의해 배가 된다는 것을...

 

한가지 알 수 없는 변수.... 그것은 다름아닌 병사들의 사기로서 위험에 맞서 싸우려는 열망이 얼마나 큰지에 달려 있지요. 기꺼이 싸우려는 사람은 싸우는 이유를 잘 압니다. 상대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지휘관이 전술의 천재이든, 평범한 지식의 소유자이든, 상대방의 무기가 방망이든, 분당 30발이 나가는 기관총이든 병사들은 최선의 포지션을 찾을 것이고 전투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체 게바라, 영화 에서)

 

 

 

 

사진 : 영화 에서

 

 

 

체 게바라는 소수가 다수를 무너뜨리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사기를 들었다. 병사들의 사기만 있으면 비록 소총하나만 가지고 있는 게릴라일지라도 막강한 화력을 가진 상대방이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병사들은 싸울만한 충분한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제 포지션을 찾아 간다는 것이다.

 

1%의 엘리트와 10%의 회원으로

 

우리사회에서는 1%의 엘리트들이 이끌어 간다. 마찬가지로 지역에서도 1%의 불교엘리트들이 있을 것이다. 인격과 학식과 덕망을 갖추고 더구나 경제력까지 있는 1%라면 지역사회의 불자를 충분히 이끌어 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구 10만명의 소도시라면 불자인구를 최소 15%로 보았을 때 1,5000명이다. 이 중 1% 150명이다. 인구 10만명의 도시에서 150명의 엘리트 불자들이 지역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불자중의 10%를 회원으로 하면 1,500명이 된다.

 

이처럼 1%의 엘리트와 10%의 회원이 전국의 시와 군과 구에 조직되었을 때 한국불교는 탄탄한 지역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재단을 만들고, 불교문화회관을 건립하고, 스님들이나 법사를 초청하여 일요법회를 갖고 지역사회를 위하여 봉사한다면 불교가 지역에 완전히 뿌리내릴 것이다.

 

지역불자회는 오래 전에 있었다

 

그런데 이런 지역불자회가 오래 전에 있었다고 한다. 지난 7월 한국불교중흥을 위한 대토론회를 인터넷으로 본 적이 있다. 7월의 주제가 출가와 재가의 역할을 찾다에 관한 것이었는데, 조계종 중앙신도회 부회장이 말하기를 60년대와 70년대에 전국에 걸쳐 지역별로 신도회가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와 같은 지역불자회는 사찰소속이 아닌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불자들 조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80년대 이후 지역신도회가 모두 해체되고 종단으로 모두 귀속되었다는 것이다. 그결과 현재와 같이 지역적 기반이 없는 불교로 전락하였는데, 예전처럼 지역불자회가 반드시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었다.

 

또 중앙신도회부회장은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를 종속관계라 말하고, 현재 조계종 종헌에 따르면 출가와 재가의 평등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지만 이는 선언에 불과할 뿐, 승려의 권한은 무한정이고 재가의 권한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승려의 권한은 무한이고 모든 것이 사찰위주로 돌아가는 현실에서 재가불자들은 설 곳이 없다는 것이다.

 

이보(二寶)만 있는 세상에서

 

인구의 절반이 몰려 사는 서울과 수도권에서 최근 5년간 택지개발지구에서 개신교가 74필지이고, 천주교가 15필지임에 반하여 불교의 경우 단 한 곳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종단과 스님들은 사실상 포교를 포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아파트단지로 특징지워지는 도시에서 불교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Buddha)’과 부처님의 가르침(Dhamma)’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도시에 상가(Sangha)’가 없다고 할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공부하는불자들이 있다고 한다면 불교의 명맥은 이어져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실은 온통 교회공동체투성이일지라도 또 다른 세계 즉 사이버세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파 되고 있다면 이는 붓다와 담마가 살아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현실에서 상가는 없지만 사이버상에서나마 부처님과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들이 있다면 삼보는 없어도 이보(二寶)’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이보만 있는 현실일지라도 불교가 지역적인 기반으로 하여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역불자회가 조직되어야 한다. 그런 불자회는 종단이나 사찰을 초월해서 오로지 부처님의 정법을 위주로 해당지역의 불자들만으로 조직되었을 때, 지역을 기반으로 한 불자공동체도 가능할 것이다.

 

 

 

2011-09-1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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