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언제까지 산속에만 계시렵니까?” 혜문스님의 피를 토하는 듯한 호소

담마다사 이병욱 2011. 9. 5. 14:29

 

 

언제까지 산속에만 계시렵니까?” 혜문스님의 피를 토하는 듯한 호소

 

 

 

재가불자로서 할 수 있는 일

 

재가불자로서 불교의 발전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보시등 많은 것이 있겠지만 인터넷일 통하여 담마를 알리는 것도 커다란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수 년 전 부터 꾸준히 글을 써 왔다.

 

글을 쓰는데 있어서 돈이 들어가는 일은 없다. 단지 시간투자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다 열정만 가미하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기분이 좋거나 좋지 않거나를 가리지 않고 흔적을 남길 수 있다.

 

이처럼 인터넷에 글쓰기의 장점은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익혀 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감동적인 글을 써야 한다. 누구나 공감하는  글이다. 그런 첫째 조건은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내용을 담아야 한다.

 

산중스님으로 부터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서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하여 비판을 많이 하였다. 이런 비판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매우 불편해 하고 때로는 불쾌하게 생각한다. 특히 스님들의 경우가 더 그런 것 같다.

 

초기에 관심을 보였던 스님들도 언젠가 부터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음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국불교 비판에 있어서 스님들의 역할에 대하여 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 말의 핵심은 스님들이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산에만 있지말고 사람사는 곳으로 내려와 중생교화를 해야 된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그런 취지의 글을 여러 차례 올렸는데 최근 산중에 산다는 스님(山中僧)’으로 부터 다음과 같은 댓글을 받았다.

 

 

중들이 왜 산에만 있느냐구요? 본래 세속이 싫어서 머리깎고 산으로 들어온 것이니까 / 그리고 산속이 편하니까.
왜 편하냐고요? 세속의 때가 없는 청정한 곳이니까요. 그리고 답답한 자들은 지발로 찾아와서 길을 물어라는 것일까욤? ㅎㅎㅎ
(산중승의 댓글에서)

 

산중승(山中僧).docx

 

 

올린 글은 조손(祖孫)가정의 아이와 같은 불자(佛子)이었다. 한국의 불자들은 마치 할머니와 같이 사는 아이들과도 같은 존재라는 뜻으로 작성한 글이었다. 집나간 부모가 돌아 오지 않은 것처럼 한국불교의 스님들도 출가하여 세상에 되돌아 오지 않음을 질타한 글이었다.

 

이 글에 대한 댓글을 산중에 산다는 스님이 장문으로 남겨 주었는데, 보통불자들이 생각하는 스님의 이미지를 단번에 깨어 버리는 것이었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3대 삼보사찰중의 사문출신으로서 수십년간 수행을 하였다는 스님은 자신의  중생교화에 대한 입장도 다음과 같이 밝히는 것이었다.

 

 

산중 중들이 도시 교화를? 왜요? 무엇때문에 우리가 죽고 살기로 세속중생들을 교화 해야 합니까? 그럴일 없습니다.

(산중승의 댓글에서)

 

 

산중에 사는 스님들은 세속에 나갈일 없다는 것이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출가하였는데 다시 세상에 연연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또 그런 것이 산중에 사는 스님들의 사는 방식이라고 말하였다. 세속에서 불교가 흥하던 말던 그것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로서 불교가 인연이 다하면 어쩔 수 없고, 그렇게 되는 것도 제행무상의 법칙이 아니겠는가라고 표현 하였다.

 

혜문스님의 법문에서

 

이러한 산중승의 글을 접하고 이제까지 산중에 사는 스님들, 특히 선방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에 대한 기대를 접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최근 불교방송을 듣고 산중승과 같은 스님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bbs불교방송의 불교강좌에서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혜문스님은 스님들이 산에서 내려와야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혜문스님도 20년까까이 세상과 단절된 채 산중에만 있었다고 한다.

 

20살에 출가하여 처음 10년간은 은사스님을 시봉한다고 산속에서 지게지고, 밥짓고, 빨래하는 세월을 보냈고, 나중 10년은 전국의 제방 선원에서 참선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20년 세월을 산중에서 보내다 세상에 나와 보니 사람사는 곳은 온통 기독교세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산속에만 계시렵니까?

 

그래서 그 이후 사람사는 곳으로 내려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 하고 있는데, 들어본 라디오 강의는 주로 아함경을 위주로 한 초기불교의 가르침이었다. 그런 스님의 강의중에 산중에 계시는 스님을 향하여 피를 토하는 듯한절절한 호소문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호소문을 녹취하였다.

 

 

 

스님들은 속히 산에서 내려 오셔야 합니다. 산사의 수행처를 비우고 내려 오시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여지껏 배우고, 수행하고, 익히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려 내려 오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일부러 저잣거리에 스스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꾸만 산속으로 숨어 들어서는 안됩니다. 산속으로 출가한 스님의 세월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물론 산속에서도 세상을 맑히고 교화하는 힘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대다수의 민중들은 저잣가리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정기적으로 산으로 불러 모아서 불법을 전하기에는 너무나 조건이 열악합니다.

 

산으로 오는 도중에 모든 외도들에게 모두 감화를 받고 귀의를 당해 버리고 맙니다. 마냥 앉아서 기다릴 수 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외도들의 활동이 너무 적극적이지 않습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전해 들으면 그들의 논리가 얼마나 허황한지 단박에 알 수 있을 터 인데, 우리 불교계의 스님들은 산속에서 개인의 도만 닦고 계시는지, 왜 밖을 내다 보시는 것이 지난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스님들이 빨리 밖으로 나오셔서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그리고 그들을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대화하고, 웃고, 떠들면서 교류해야 합니다. 스님들은 마냥 신비한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손만 벌리면 곧 옷소매가 잡히고 부르면 목소리로 응답을 해야 합니다. 왜 스님들은 숨어서 살려고만 하십니까. 아직 공부가 덜 익었습니까. 출가 하신지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지요. 언제까지 산속에만 계시렵니까?

 

 

 

 

 

 

 

(혜문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1 93일자)

 

 

 

참으로 감동적인 목소리이다. 이제까지 글을 쓰면서 수 많은 자료를 접하고 수 많은 검색이 이루어졌지만 이와 같은 목소리는 처음 접하였다. 한국불교가 처한 현실에 대하여 개탄하는 목소리는 많았지만 이처럼 산속에서 도만 닦고 있는 스님들을 향하여 전국의 불자들을 대상으로 한 라디오 방송으로 질타하는 것은 처음 들었다.

 

산중에서 도만 닦고 있을 동안

 

스님들이 산중에서 도만 닦고 있을 동안 도시의 하늘은 십자가가 점령하였다. 어느 토론회에서 토론자가 말하기를 어느 스님이 산중에서 한잠 푹 자고 났더니 세상은 온통 기독교로 바뀌어져 있더라라는 말을 예로 들었듯이, 도시의 일요일은 평소보다 잘 차려 입은 유일신교 신자들이 바이블을 옆구리에 끼고 가족 단위로 교회에 가는 것은 이제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중에 사는 스님들은 자신들과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댓글을 남긴 산중승의 말을 빌면 목마른 중생들이 답답하면 산중으로 찾아오던지 말던지..”라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설령 불자들이 산중에 찾아 간다고 하더라도 스님들을 만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일년에 몇 차례씩 순례법회를 다닌지도 7년이 되었다. 그 때 마다 느끼는 사실은 스님들을 만나 보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순례법회를 다니다 보면 가장 먼저 방문하는 절의 경우 사시불공에 맞추어 가기 때문에 스님보는 것이 가능하지만, 두 번째나 간혹 세 번째 들르는 절의 경우 스님들을 만나기 힘들다. 설령 만다다고 해도 불사와 관련하여 특별히 법문하는 경우이다.

 

스님들을 만나기 힘들다

 

휴일일 맞아 절에 불자들 뿐만 아니라 등산객도 많이 방문하여 절 구경을 하지만 스님들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스님들이 저젓거리로 찾아 가는 것이 어렵다면 스스로 제발로 걸어 들어온 사람들을 맞이 해 주고 간단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도 전달해 주면 큰 도움이 될 텐데, 어찌 된일지 스님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큰절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혜문스님의 라디오 법문에 따르면 해인사나 불국사와 같이 큰 절에는 수십명의 스님들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자와 등산객과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도량에 이들을 맞이하는 스님들을 보지 못하였다고 개탄하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절도 있었다. 해남 땅끝마을 미황사가 그것이다. 순례법회를 갔었을 때 주지스님은 항상 마당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방문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스님의 말에 따르면 가족단위로 방문하면 다실로 데리고 가 차를 대접하면서 아버지의 위상을 높여 주기도 한다고 했다. 그렇게 차를 마시다 보니 하루에 80잔 정도 된다고 하였다.

 

 

 

 

불자들과 담소하고 있는 스님들(미황사, 20095)

  

 

 

시은(施恩, 시주의 은혜)의 무서움

 

산중에서 스님들이 사는 도량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모두 불자들의 시주에 의해서 만들진 것이다. 스님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그리고 상구보리가 원만하게 성취 될 수 있도록 모든 보시공양을 정성껏 바친 불자들의 노고에 대한 결과일 것이다.

 

이런 공양을 받은 출가스님들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법을 베풀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산중에서 대궐같은 기와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면서 하화중생은커녕 상구보리의 길을 등한시한다면 반드시 그에 따른 과보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자경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고 한다.

 

 

금생 미명심(未明心)하면 적수(適水) 야난소(也難消)니라

(초발심자경문)

 

 

 

이 말의 뜻은 혜문스님의 강의에 따르면 이 생에 출가하여 시주의 은혜민 잔뜩 입고 배불리 먹는 생활만 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몇 구절만이라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시주의 은혜를 갑는일에 물 한 방울의 갚음도 못한 일이 되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시은(施恩, 시주의 은혜)의 무서움에 대한 것이다. 보통불자들은 생활인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벌어 먹고 살지만, 산중에 사는 스님들은 불자들의 시주와 공양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공양하는 이유는 상구보리 하여서 하화중생하라는 말과 같다.

 

목탁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여 시은에 보답하지 못한다면 커다란 과보를 받는데, 그런 과보에 대한 이야기가 목탁이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옛날 어느 절에 게으른 스님이 살았는데,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시은만 받다가 일찍 죽게 되었는데, 물고기로 태어나는 과보를 받았다고 한다. 어느 날 스승이 배를 타고 가다 물고기가 된 제자의 등에서 자라난 나무를 발견하였는데, 그 나무를 잘라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 막대기로 쳐 주어 제도해 주었다고 한다.

 

 

 

 

 

 

목어(경기 안성 석남사)

 

 

 

절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물고기 문양을 쳐 주어 게으른 스님들을 경책하는데 사용한다다고 한다. 그런 물고기 모양은 나중에 목탁모양으로 바뀌었고 이를 법당에서 매일 치는 중요한 도구로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목탁은 아무나 잡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승가에 대하여 잘 알지 모르지만 목탁을 잡는 스님은 따로 있는 것 같다. 소위 선방승이라 불리우는 산중승은 목탁을 잡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글을 통하여 알 수 있었다.

 

불단도 안모시고 예불도 안하고

 

최근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사이트에서 어느 전법사이트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인터넷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법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사이트가 경영난에 처하여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이트를 운영하는 스님은 기사의 댓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불단도 안모시고 예불도 안하고, 죽비치는 것으로 대신하는 선방이 있는 절에게...”

(불교닷컴, 재정난에 폐쇄 직면한 불교경전사이트 ‘세존’)

 

 

댓글에서 스님은 선방이 있는 절에 대하여 불단도 모시지 않고, 심지어 예불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신 죽비치는 것으로 일과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말이 사실인지 보통불자는 알 수 없으나 정말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산중승의 댓글이 이해가 되었다.

 

산중승은 댓글에서 도시 사판승과 山中 修行僧/은 서로 많이 다릅니당~ ㅎㅎㅎ라고 하였고 또 도시사찰 은 도시 중들의 사찰이고, 산중사찰은 산중수행승들이 살고있는 절집이지요. 그걸 모르남요?”라고 하였다.

 

더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무런 교리체계도 없던 시절의 초기불교는 종교적인 수준이 아닌, 샤카무니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대한 견해 일뿐입니다라고 폄하 하였다.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이 모두가 불단도 모시지 않고 예불도 하지 않은 결과이어서 발생한 것일까. 이처럼 산중승들이 세상에 나왔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와 같다는 이야기는 일아스님의 글에서도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강원도 안 가고 선방에만 다녔다는 스님들이 미국에 오면 이분들은 포교의 열정도 없을뿐더러 부처님이나 불교 교리도 잘 모르고, 설법도 못하고, 강의도 못하고, 어린이, 학생들, 청년 지도도 할 줄 모르고, 포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거기다 선방만 다녔기 때문에 염불을 못한다고 말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일아스님,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doc 

 

 

오로지 선방에서만 보낸 스님들이 참선만하며 세월을 보내다 보니 교학에 대하여 몰르기 때문에 설법할 수 없고, 더구나  염불이나 예불도 할지 모른다 하니 앞서 언급한 접법사이트의 스님이 말한대로 선방승들은 불단도 안모시고 예불도 안하고..”라고 말한 것이 맞는 것 같다.

 

실제로 어느 스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는데, 그 스님은 말하기를 선방에 있는 스님들은 신심있는 불자라면 누구나 외우는 천수경도 못 외운다는 말을 들었었을 때 설마 하였다. 하지만 설마가 사실이 된 것 같다.

 

평당 1,600만원짜리의 절과 불자의 공간

 

불자들은 공부하는 스님들을 위하여 보시하고 공양을 정성껏 해 왔다. 그래서일까 최근 산중에 건립되 절을 보면 대궐같이 어마어마하게 큰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이름 있는 선사들의 사찰에 지어진 선원을 보면 앞으로 100 200백년 후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지어 놓았다. 그런 절을 짓는데들어간 비용은 얼마나 될까.

 

 

 

 

 

깊은 산중의 대궐과 같은 전각(경북 봉화 소재의 C사)

 

 

 

블로그에 댓글을 남겨 주시는 법우님의 글에 따르면 사찰을 짓는데 평당 1,600만원 정도 들어 간다고 한다. 건축설계 전문가인 법우님의 설명에 따르면 여름에 냉방이 되고, 겨울에 난방이 되어서 세속의 고급아파트 부럽지 않은 시설이라 한다.

 

하지만 평당 1,600만원에 달하는 절을 짓지만 신도들을 위한 공간은 배려되지 않는다고 한다. 산중의 절이 스님들의 수행공간이고 동시에 주거 공간이기 때문에 신도들이 사찰에서 않아서 쉴만한 다실하나 배려해 놓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 한다. 이런 점은 도심에 사찰을 짓는 경우도 마찬가지라 한다.

 

도심역시 사찰의 형태는 기와 지붕이 있는 전통적인 모습의 사찰인데, 들어가가는 비용역시 평당 1600만원이지만 신도들을 위한 공간과 도시에서 필수적으로 확보되어야 하는 주차장이 배려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인근의 교회와 대조를 이룬다고 한다.

 

교회의 경우 건물을 지을 때 가장 배려되는 것이 신도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고 주차장 확보는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무위(無爲), 무식(無識), 도식(盜食)

 

산중에서 사는 스님들이 이 생에 출가하여 시은만 잔뜩 입은채 대궐같은 기와 집에서 배불리 양껏 먹는 생활만 한다면 그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중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 스님들에 대한 비판은 재가의 불자들 뿐만아니라 원로스님들도 걱정할 정도라 한다.

 

최근 인터넷신문에 책에 대한 서평기사가 떳다. 불광출판사에서 발행된 한국의 선지직 18인에게 듣는 이야기 산승불회에 관한 것이다. 이 기사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지식들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 보았더니 대부분 깨닫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또 어느 스님은 산승불회(山僧不會)’ 라는 한자용어로 대신하였다고 한다. 산승불회의 뜻은 산승은 알지 못합니다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평생 산중에서 수도한 고승들도 깨닫지 못하였다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하여 불단도 모시지 않고 예불도 마다 하지 않은 산중승은 과연 언제나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을까. 깨닫기 전까지는 절대 하화중생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시주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스님들에 대하여 책에서는 석남사 회주인 정무스님은 한국불교의 병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 불교계에는 아주 나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무위(無爲)입니다. 아무것도 않고 노는 것입니다. 매일 도량 청소라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노는 스님들이 많습니다. 둘째는 무식(無識)입니다. 공부 안하는 수행자도 많습니다. 책이라도 봐야 중생을 제도 할 텐데 참 걱정입니다. 셋째는 도식(盜食)입니다. 일하지 않고 얻어 먹으려합니다. 이 세 가지만 고치면 불교가 좀 더 나아질 것입니다.”<산승불회> 273

 

(오마이뉴스, 스님18분에게 물었다, “깨달으셨습니까?”)

 

 

우리 불교계의 병폐를 세 가지로 요약 하였는데 그것은 무위, 무식, 도식이라고 하였다. 이는 흔히 불교계에서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스님들의 무사안일, 무식, 무위도식 소위 3무현상에 대한 것이다.

 

불량품은 구매하지 않듯이

 

이런 3무현상이 있는 한 한국불교의 미래는 없다. 아무리 타종교에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타종교인을 개종시키지 않겠다는 등의 종교평화선언 즉, 소위 ‘21세기 아쇼카 선언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이는  순진하고, 낭만적이고, 정치적인 선언에 불과 하다. 그 이전에 전법선언을 했어야 했다. 또 그 이전에 했어야 할 일은 ‘3무현상을 없애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비록 늦었지만 선방승 또는 산중승을 도시에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들로 하여금 전법에 열중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가장 먼저 시주의 은혜에 대한 두려움을 알려 주어야 한다. 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불자들의 깨어남이다.

 

시주의 은혜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는 스님들에게 시주를 하고 공양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시장에서 불량품은 구매하지 않듯이 불자들의 깨어남이 한국불교를 살리는 길이라 본다.

 

이제 중생을 위해 회향을

 

이처럼 시주의 은혜만 입고 10, 20, 30, 평생 산중에서만 사는 스님들을 향하여 혜문스님은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주의 은혜만 받고 그 좋은 도량과 대궐같은 집에서 별 어려움 없이 수행을 하셨으면 중생을 위해 회향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혜문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1 94일자)

 

 

 

2011-09-05

진흙속의연꽃

 

산중승(山中僧).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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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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