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기독교도 화쟁의 대상인가, 도법스님의 생명평화경(經) 도법교(敎)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0. 17. 18:16

 

 

기독교도 화쟁의 대상인가, 도법스님의 생명평화경() 도법교()

 

 

 

 

 

은행나무를 보면

 

은행나무를 보면 계절을 알 수 있다. 은행나무의 잎이 일제히 지는 때 본격적으로 겨울에 접어들고, 은행나무 잎이 피기 시작 하면 또 다시 봄이 시작 된다. 대략 11 20일을 전후 하여 잎이 지고, 4월 초를 전후하여 잎이 피기 시작 하므로 약 8개월간 잎파리를 볼 수 있다.

 

잎이 지고 난 후 은행나무의 모습은 삭막하기 그지 없다. 길고 긴 겨울에 볼 수 있는 나목의 기간은 약 4개월에 이른다. 이처럼 일찍 잎파리가 나오고 늦게 잎파리가 지기 때문인지 가로에 은행나무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해마다 이맘때 쯤이면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어 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은행나무의 열매도 익기 시작하여 마침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부지런한 사람들은 떨어진 은행을 주어 간식용 먹거리로도 활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매년 은행나무 잎이 피고, 열매를 맺고, 잎이 떨어지기를 반복 하지만, 그 잎, 그 열매는 작년의 것이 아니고 올해의 것이다. 그리고 내년에 보게 될 잎과 열매 역시 올해의 것이 아니라 내년의 것이 될 것이다.

 

 

 

 

 

 

 

엔트로피(entropy)법칙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 또한 오늘과 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저 멀리 있는 산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내부를 들여다 보면 변해 가고 있다. 올해 자란 나뭇잎은 작년의 잎파리가 아니고, 올해의 햇볕, 수분, 날씨등의 조건에 따라 형성되어진 것들이다.

 

이처럼 변화하는 과정속에서 또 현상들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끊임 없이 변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엔트로피(entropy)’가 증대되고 있다고 말한다.

 

닫혀진 계 내에서 현상은 항상 질서에서 무질서로향한다는 것이다. 마치 한 방울의 잉크를  비이커에 떨어뜨리면 그 잉크방울이 고루 퍼지듯이 항상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해 간다는 것이 엔트로피법칙이다. 그 결과 마침내 더 이상 질서도 무질서도 아닌 상태로 변해 버리는 것을 열사망(heat death)’이라고 한다.

 

이처럼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해가는 현상을 주변에서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의 경우 내버려 두면 어느 시점에서 무너지고, 회사의 경우 관리를 하지 않으면 부도로 가게 되어 있고, 아이들을 교육시키지 않으면 불량학생으로 되는 것처럼 이 세상은 항상 내버려 두면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려는 속성이 있다. 이런 엔트로피법칙에 대한 통찰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제행무상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숫따니빠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과일이 익으면 어느 날 떨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태어난 존재들은

언젠가는 죽음에 떨어져야 하는

두려움이 따라다닌다. (576)

 

마치 옹기장이의 점토로 만든 그릇들이

마침내는 부서지듯이

죽어 부서지는 인생도 이와 같다. (577)

 

젊은이도 늙은이도 지혜로운 이도 어리석은 이도

모두 다 죽음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모든 존재들의 종착역은 죽음이다. (578)

 

(숫따니빠따 3 8: 살라 수따 574-593,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과일이 익으면 떨어지는 것은 자연현상이다. 옹기장이가 만든 도기는 언젠가 깨어지게 되어 있다. 자연현상이든,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든 모든 것들은 언젠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이것이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동하는 엔트로피 법칙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목숨 또한 죽음으로 종결된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 인간은 죽을까봐 항상 겁낸다(Sn.576)” 라고 하셨다.

 

네겐트로피(negentropy)

 

항상 죽음을 두려워 겁내면서 사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감추어진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하여 갈망을 하게 된다. 그래서 부자나 가난한자나,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지금 이 생명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나에게 죽음은 별개일 것이라고 여길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생명은 엔트로피법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은 엔트로피법칙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엔트로피법칙과 반대로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명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동하는 엔트로피법칙이 아니라, 이와 거꾸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향해 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명과 같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질서화되고, 조직화되는 것을 엔트로피법칙의 저자 제레미 리프킨네겐트로피(negentropy)’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이름 붙였다.

 

하지만 이런 생명도 결국 종말을 맞고 만다. 생명이 다하면 죽기 때문이다. 이는 회사가 부도로 문을 닫는 것과 같고, 대제국이 전성기를 누리다가 내우외환으로 결국 망하는 것과 같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일시적으로 질서화되고 조직화되는 네겐트로피의 영향권에 있을지 모를지라도 거시적으로 본다면 엔트로피법칙을 피해 나갈 수 없다.

 

영원에 대한 집착, 생명에 대한 집착

 

이와같이 변화하고 무상한 것이 자연의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을 극대화시켜 왔다. 설령 수명이 다 되어서 죽는다고 할지라도 어떤 변치 않는 영혼이 있어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천국이나 극락과 같은 상락아정의 세계일 것이다. 이는 영원에 대한 집착이다. 이런 집착에 대하여 부처님은 삿된견해라고 연기법으로 논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에 대한 집착이 끊이지 않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영원에 대한 집착은 동시에 생명에 대한 집착이라고 볼 수 있다. 죽어서 영원히 산다는 유일신교의 영생론 역시 영원에 대한 집착이자 동시에 생명에 대한 집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기독교 목사들은 기독교가 영생의 종교라고도 말한다. 이런 논리는 불교를 공격하는데 있어서 종종 사용된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고, 불교는 죽음의 종교라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천국에서 영원히 살기 때문에 영생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연기법에 따르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상견에 해당한다. 연기법을 모르기 때문에 어리석은 견해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본다. 또 불교가 죽음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은 아전인수격에 해당된다.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영생과 차별화를 하여 불교를 폄훼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수법이라는 것이다. 이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나온 삿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유일신교에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대하여 죽음의 종교라고 딱지를 붙이고, 자신들의 종교는 생명의 종교라고 이름 붙이고 있는데, 불교계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동조하는 논문을 보았다. 그것은 불교평론에서 열린논단에 실린 도법스님의 글을 보고 나서 부터이다.

 

도법스님의 글에서

 

2010 6 25일 불교평론 열린논단에 실린 도법스님의 논문제목은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에 관한 글이다. 이 글에서 스님이 특히 강조한 것은 생명에 관한 것인데, 이 생명을 강조하다 보니 이 세상에 나와 있는 모든 종교에 대하여 포괄주의적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듯하다.

 

이는 마치 지난 8.23선언 때 종교평화를 위하여 열린진리관과 전법의 원칙을 천명함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양보와 타협에 일관하는 것과 같은 논리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생명평화라는 담론을 전개하기 위하여 타종교의 교리와 어떻게 타협하였을까.

 

 

도법스님

 

 

도법스님이 존경하는 사람

 

도법스님은 글에서 자신이 가장 존경해 마지 않는 인물로서 마하트마 간디를 들었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당연히 부처님 한 분일 뿐일텐데, 스님이 본 받고자 한 인물은 간디이었다. 그 이유는 간디의 삶과 활동에 자신이 찾는 해답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간디는 우주의 보편적 법칙인 진리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리라는 말이다. 도법스님은 논문 내내 진리에 대하여 강조하였는데, 그런 진리는 불자들이 생각하는 진리가 아니다.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사성제가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네 가지 진리가 사성제인데, 이 사성제야말로 부처님이 연기법을 통하여 지금 여기에서 겪고 있는 고통과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여 고통으로 벗어나게 해주고 또한 나고 죽는 일 없는 윤회에서 해방시켜 준 진리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도법스님이 말하는 다른 것이다. 그런 진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우주의 보편적 진리인 진실과 사랑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그 힘으로 뭇 생명의 염원인 생명평화의 삶과 세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간디의 삶과 활동에 우리가 찾는 해답이 있다는 판단이다. 기존의 모든 갈등과 대립, 고통과 불행을 낳는 모든 벽을 넘어 서로 함께할 수 있는 길은 보편적 진리인 진실과 사랑의 법칙이라는 믿음이다.

(도법스님,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불교평론 열린논다, 2010-06-25)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도법.docx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도법.pdf

 

 

간디는 우주의 보편적 법칙인 진리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라 한다. 그런 간디의 사상은 어떤 것일까. 인터넷백과사전에 실려있는 간디의 종교관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간디의 정신적 조언자였던 뛰어난 젊은 철학자 라지찬드라는 그에게 힌두교의 미묘함과 심오함을 깨닫게 하여 새로운 삶을 맛보게 했다. 또한 그가 영국에서 처음으로 읽었던 〈바가바드기타〉는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거기에서 특히 2가지 개념이 그를 매료시켰다. 하나는 물질적 욕망을 끊어버리라는 아파리그라하(aparigraha:무소유) 개념이고 또 하나는 고통이나 기쁨, 승리나 패배에 동요되지 말라는 사마바바(samabhava:평정) 개념이다.

 

(간디 [Mohandas Karamchand Gandhi], )

 

 

간디는 인도에서 비폭력을 제창한 인도의 위대한 민족주의 지도자이다. 그런 간디는 인도의 영웅이자 전 세계인이 존경하는 위인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의 사상을 들여다 보면 힌두교임을 알 수 있다.

 

비록 그가 인도독립을 위하여 비폭력저항운동에 따른 정치투쟁을 하였지만 그의 바탕에는 항상 힌두교적 가르침이 자리 잡고 있어서 인터넷 백과사전에 따르면 “30년 동안 열망한 것은 신과 대면하는 것”이라고 쓰여있다. 이런 간디의 사상을 도법스님은 우주의 보편적 진리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도법스님이 말하는 우주의 보편적 진리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도법스님의 진리관

 

스님은 자신의 글에서 생명과 평화를 화두삼아 이야기를 하였다. 그래서 생명평화를 위하여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양해야 된다고 말한다. 현재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가 보편적인 진리존재의 실상에 근거하지 아니하고 이원론적 실체론의 세계관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었는데, 만들게 된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자연스럽게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동학, 원불교, 동양철학 등 존재의 실상에 입각한 공통적인 세계관, 현대 과학이 제시하는 공통적인 세계관, 역사 경험으로 터득한 공통적인 세계관의 정신들을 종합적으로 반영했다. 예를 들어 본다면동체대비론으로는 화엄의 세계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관점으로는 기독교의 세계관, 생명 그물론으로는 과학의 세계관, 인내천의 관점으로는 동학의 세계관을 담았다.

(도법스님,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불교평론 열린논다, 2010-06-25)

 

 

과거 조선말에 일어난 신종교운동을 보는 것 같다. 동학등 유불선을 통합하여 만든 새로운 종교가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는데, 21세기에 새로운 종교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 신종교운동이 유불선의 통합에 그쳤다면, 이번 도법스님의 새로운 종교통합운동은 전세계의 종교를 망라한다. 불교와 기독교는 물론이고 이슬람교와 힌두교까지 포괄한다. 또 동학, 원불교는 물론 심지어 현대과학이 제시하는 새로운 세계관인 신과학운동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총망라한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는 보편적인 진리는 화엄사상에서의 인드라망세계관을 기본으로 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놀라웁게도 기독교의 세계관도 반영되어 있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점이 지난 8 23일에 발표된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에서 열린진리관의 바탕이 된 것이라 여겨진다.

 

어느 겨울 함박 눈이 내리던 밤에

 

이처럼 열린진리관을 가지고 있는 도법스님이 마침내 ()’을 하나 만들었다. 도법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어느 겨울날 함박 눈이 펄펄 쏟아져 내릴 때 만들었다고 한다. 그 경의 이름은 생명평화경이라 한다. 이 생명평화경을 만들게 된 배경에 대하여 도법스님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따라서 생명평화경은 누구의 창작이 아니다. 기독교, 불교, 동양철학, 현대과학, 동학, 역사적 경험 등 인류 문명사에서 존재의 실상에 근거하여 가꾸어진 기존의 보편성을 담고 있는 모든 세계관들을 나름대로 종합하여 만들었다.

 

(도법스님,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불교평론 열린논다, 2010-06-25)

 

 

생명평화경은 자신의 창작이 아니라고 한다. 다만 불교와 기독교등 인류문명사에 보였던 모든 경험에 대하여 존재의 실상에 근거하여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대목을 보면 마치 부처님이 연기법을 발견한 것 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연기법은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발견한 것이라고 설명된다. 그런 연기법은 과거의 부처님들도 발견한 불생불사의 근본법칙이다. 그런데 도법스님은 이 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부처님도 발견하지 못한 보편적진리를 말한다. ‘생명평화에 관한 것인데, 이 것은 아직까지 구 누구도 말한 적이 없는 것이라 한다. 오로지 자신이 기존의 불교와 기독교등 온갖 종교와 사상을 융해 하여 나름대로 정리하여 만든 것이 생명평화경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과 평화를 화두로 하여 어느 겨울 함박눈이 펄펄날리 날, 이를 보고 만든 생명평화경은 어떤 수트라(sutra)일까.

 

도법스님이 만든 생명평화경

 

우리나라 불자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금강경을 보면 경으로서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런 형식은 서분, 정종분, 유통분의 틀을 크게 벗어 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도법스님이 만든 21세기 수트라 역시 경으로서 형식을 갖추고 있다. 가장 먼저 서분에 해당되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

눈 내리는 한밤중에 진리의 스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생명평화의 벗들이여!

생명평화 길의 근본이 되는 존재의 실상인

상호 의존성과 상호 변화성의 우주적 진리를 말하리니

그대들은 귀 기울여 잘 듣고, 깊이 사유 음미할지니라.

 

(도법스님, 생명평화경)

 

생명평화경-도법.docx  생명평화경-도법.pdf

 

 

이 생명평화경은 불교평론 열린논단에 전문이 실려 있지 않다. 생명평화경 가운데 세계관부문만이 실려 있어서 생명과 평화를 설명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인터넷검색을 통하여 도법스님의 생명평화경 전문을 입수 할 수 있었다.

 

개인의 창작이 아니라는데

 

생명평화경은 나는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라고 시작된다. 이런 형식은 불자들에게 매우 익숙하다. 대부분 불교의 경들이 여시아문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법스님은 여시아문에 해당되는 나는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특히 개인의 창작이 아니고 인류 모두의 지혜로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나는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로 시작했다.

 

(도법스님,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불교평론 열린논다, 2010-06-25)

 

 

여시아문의 형식을 취하긴 하였지만, 이는 부처님에게 직접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의 스승에게 들은 형식을 취했다고 한다. 그 진리의 스승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명기 하지 않았으나, 글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존재의 실상으로 보여진다. 그런 존재의 실상을 보편적인 진리라고도 표현하였다. 더욱 더 구체적으로 본래면목이라는 표현도 사용하였다.

 

그런데 생명평화경은 자신이 직접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창작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모든 인류의 지혜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도법스님이 생명과 평화를 화두로 들고 있다가 어느 겨울날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것을 보고서 크게 깨달아서 인류를 대신하여 경을 만들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개인의 창작이 아니라고 하였을 것이다.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은

 

이처럼 서분에서 마치 기독교의 선지자가 자신의 유일신으로 부터 계시를 받는 듯한 대목이 있다. 그것은  그대들은 귀 기울여 잘 듣고, 깊이 사유 음미할지니라.”라는 내용이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은 무엇일까.

 

도법스님은 진리의 스승으로 부터 전해들은 내용을 기술하는 형식으로 생명평화경을 만들었다. 그런데 정종분에 해당되는 내용중에  매우 익숙한 문장을 보았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것이 있음을 조건으로 저것이 있게 되고,

저것이 있음을 조건으로 이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없음을 조건으로 저것이 없게 되고,

저것이 없음을 조건으로 이것이 없게 되느니라.

 

(도법스님, 생명평화경)

 

 

이 내용은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에 대한 것이다. 이를 연기송이라고도 하는데, 한역 중아함경에 실려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此有故彼有, 차유고피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此生故彼生, 차생고피생).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此無故彼無, 차무고피무),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此滅故彼滅, 차멸고피멸).

 

(중아함경)

 

 

이 연기송과 유사한 것을 빠알리 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원인이 일어나면 저 결과가 일어난다.

이 원인이 멈추면 저 결과도 멈춘다,

그러므로 무명을 원인으로 상카라가 일어나고 괴로움이 있게 된다.

무명의 소멸과 함께 괴로움이 소멸할 때 까지

상카라등의 소멸이 뒤따른다.

 

(상윳따 니까야)

 

 

한역 아함경과 빠알리 니까야의 내용이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통적으로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인과법칙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상윳따니까야의 경우 연기법에 따른 고통의 소멸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이 한역아함경과 차이라면 차이 일 것이다.

 

도법스님은 왜 부처님이 읊었다는 연기송을 생명평화경에 정종분의 첫머리에 언급한 것일까.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도법스님은 정종분의 첫 머리에 부처님의 연기송을 배치하여 놓은 것은 그럴만한 충분한 목적과 의도가 있어서라고 보여진다. 그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이를 증명한다.

 

도법스님은 연기송 다음에 이어지는 글로서 여러가지 의지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이웃 종교는 우리 종교의 의지처이고

우리 종교는 이웃 종교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종교 공동체이니라.

 

(도법스님, 생명평화경)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앞서 연기성을 말한 것이다.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은 중생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윤회를 끝내기 위하여 설한 것이었지만, 도법스님이 설한 연기송은 다른 데 목적이 있었다. 고통이나 윤회의 종결이 아닌 서로 의지하고 의존하여 살아가는데 있어서 도입부로 활용한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것이다.

 

도법스님의 연기관에 따르면

 

부처님의 연기송을 단지 생명들이 의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이웃 나라는 우리나라의 의지처이고~”부터 시작 하여 결국 종교에 까지 오게 되었다. 그래서 이웃 종교는 우리 종교의 의지처이고 우리 종교는 이웃 종교에 의지하여~”라는 문구가 나오게 되었다.

 

이런 문구는 8.23 아쇼카선언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연기적 세계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저것’ ‘은 서로 별개의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

.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웃종교는이웃에 있는 나 자신의 종교이며, 내 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 21세기 아쇼카 선언)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docx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pdf

 

 

도법스님이 말하는 연기적 세계란 서로 의지 하는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비록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서로 비추어 보는 거울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인드라 그믈망에 대한 것으로서 법계연기중에 사사무애에 관한 내용이다.

 

사사무애는 단일현상과 다수현상간의 상호침투의 관점에서 인과를 보는 것을 말한다. 단일현상과 다수현상이 동시에 서로를 창조하고 서로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과는 더 이상 선형이 아니고, 인과는 다층적인 것이 되고 만다.

 

이런 법계연기를 적용하였을 때 기독교는 더 이상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대하여 내 종교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하였고, 그 안에서 불교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생명평화경의 정종분

 

모든 경에서 정종분은 경의 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금강경에 있어서도 정종분이 있는데, 이를 대승정종분이라 한다. 대승정종분에서 아개영입 무여열반 이멸 도지 여시멸도 무량무수 무변중생 실무중생 득멸도자(我皆令入 無餘涅槃 而滅 度之 如是滅度 無量無數 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 )”가 있다. 이 부분을 볼 때 마다 항상 금강경의 클라이막스를 보는 듯 하다.

 

이처럼 모든 경에 정종분이 있는데, 생명평화경 역시 정종분에 해당 되는 것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종교의 의지처인 이웃 종교를 불안하게 하는,

진리를 외면한 내 종교 중심의 이기적 삶을 버리고

이웃 종교를 내 종교의 하느님으로 대하는

달관과 자족의 삶을 살지니라.

 

(도법스님, 생명평화경)

 

 

도법스님은 이웃종교를 불안하게 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웃종교를 하느님대하듯 하라고 엄숙하게 말한다. 이 말을 불자들에게 하는 말인지, 타종교인들에 하는지 알 수 없으나 문맥상으로 전부에 해당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불교승려로서 부처님이라는 말 대신 왜 하느님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을까.

 

하느님은 우리나라 고유의 말이다. 이를 고유명사라 한다. 이런 고유명사는 그 이름 그대로 불러 주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한국의 기독교와 천주교에서는 바이블에 나오는 여호와, 야훼라는 고유명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남의 아버지 이름을 부르듯이 하나님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요즘 하느님이라는 말은 이제 기독교의 전용어가 된 것이나 다름 없어졌다.

 

그런 하느님에 대하여 도법스님은 우주 자연을 내 생명의 하느님으로 대하는” “이웃 종교를 내 종교의 하느님으로 대하는라는 식의 표현을 수 없이 반복하고 있다. 부처님이라는 말을 사용할 법도 한데 문구마다 하님을 사용하고 있다. 대체 그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일까.

 

본래부처인데 수행한다고 해서..”

 

도법스님은 열린논단에서 두 개의 주제를 말하였다.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생명에 관한 것이고, 또하나는 수행에 관한 것이다. 글을 읽어 보면 두 개의 주제는 하나로 만나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스님이 제창한 신대승운동이다.

 

신대승운동은 도법스님이 제창한 새로운 불교운동이다. 앞서 언급된 생명평화와 대승불교를 접목한 도법스님만의 독특한 불교를 말한다. 이제 까지 그런 불교를 주창한 적이 없기 때문에 신대승운동에 기반한 불교를 도법교라고도 지칭할 만하다. 그런 도법교의 소의 경전은 생명평화경이라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도법교의 수행방법은 어떤 것일까.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본래부처인데 어디에 가서 다시 부처를 찾을 것이며, 본래부처인데 수행한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다시 부처가 이루어지겠는가? 한갓 부질없는 헛수고요 전도몽상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본래부처임을 알고 믿고 지금 당장 부처로 사는 것이다.

 

(도법스님,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불교평론 열린논다, 2010-06-25)

 

 

도법스님은 수행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본래부처인데 괜히 다시 부처를 찾고 이루려는 헛고생을 하지 말자고 한다. 그래서 지금 단장 본래부처로 살아야 된다고 강조한다.

 

경전을 뜯어 고치고

 

그대신 보현행원을 실천하자고 강조한다. 그런데 자신이 변형한 행원을 강조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께 예경 올립니다.
둘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를 찬탄합니다.
셋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께 공양 올립니다.
넷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에 대한 무례의 업장을 참회합니다.
다섯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의 공덕을 함께 기뻐합니다.
여섯째, 모든 인드라망 법의 바퀴 굴리기를 간청합니다.
일곱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들이 온전히 머물기를 청합니다.
여덟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를 따라 배웁니다.
아홉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에 수순합니다.
열 번째, 모든 인드라망 존재에 회향합니다.

(도법스님,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불교평론 열린논다, 2010-06-25)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에 나오는 내용중에 여래라는 인격적인 개념을 인드라망 존재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도법스님이 새로 만든 행원이다.

 

이처럼 도법스님은 불교경전을 21세기용 불교경전을 새로 만드는가 하면, 있는 경전도 고쳐서 도법교에 적합한 것으로 바꾸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법스님은 21세기 원효?

 

도법스님이 제창한 생명평화운동과 신대승운동은 결국 자신이 제창하는 불교 즉 , 도법교의 교세를 확장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모든 종교가 하나로 만나는 길을 제시 하였다. 그것이 도법식 불교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에 적절한 또 다른 말이 아마도 화쟁일 것이다. 조계종 화쟁위원회의 그 화쟁을 말한다. 그렇다면 화쟁이란 무엇을 말할까.

 

화쟁이란 통일신라시대 원효스님을 중심으로 생성된 이론으로서 여러 대립적인 이론들을 조화시키려는 불교사상을 말한다. 이는 불교의 특정 종파를 고집하지 않고 하나의 진리에 귀결시키는 것을 말한다.

 

원효스님은 각각 다르다고 여겨지는 여러 불교 종파와 사상들이 사실은 한마음, 일심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발현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이 일심을 각자 다르게 설명하지만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의 이치로 압축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상 교리와 사상의 통합작업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21세기 도법스님이 그런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생명과 평화라는 케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불교는 물론 타종교까지 화쟁하겠다는 것이다.

 

초기불교를 화쟁하고

 

그 첫 번째 단계로서 도법스님은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의 화쟁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대승불교에 초기불교를 접목하려 한 것이다. 그 방법중의 하나가 팔정도에 관한 것이다.

 

도법스님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팔정도에 대하여 도법식 화쟁 즉, 원융을 시도 하였는데, 정견에 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가 정견(正見)이다. 지금 직면한 존재의 실상, 법의 실상인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는 견해가 바로 정견이다.

 

(도법스님,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불교평론 열린논다, 2010-06-25)

 

 

이것이 도법식 해석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마음대로 훼손해도 되는 것일까. 21세기 생명평화경을 새로 만들어 내고, 보현행원을 왜곡하여 인드라망 행원을 만들어내는 가 하면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마저 손을 대고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팔정도에서 정견을 무엇이라고 하였을까.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이 정견에 대한 내용이 쓰여있다.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근원을 알고, 괴로움의 소멸을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아 는 것이다.

 

(상윳따 니까야 :45  막가 상윳따8,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이것이 부처님이 설한 정견이다. 정견은 바로 사성제를 말한다. 그런데 도법스님은 정견에 대하여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는 것이 정견이라고 하였다. 이는 서로가 서로를 의존하여 비추어 보고 창조하는 법계연기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것이 도법식 화쟁방법이다.

 

이런 화쟁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들은 동의 할 수 없다. 초기불교를 비판하며 갈라져 나온 것이 대승불교인데, 그 대승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 마저 왜곡하여 화쟁하려는 것이다.

 

기독교마저 화쟁하겠다고

 

이처럼 도법스님은 원효의 화쟁사상을 마치 21세기의 원효가 된 듯 생명평화라는 케치프레이즈를 이용하여 모든 종교와 사상을 화쟁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의 사상의 단면을 캐치 해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서로 분리시키고 서로 다르다고 우열을 다투어야 할 까닭이 어디에도 있지 않다. 중생의 병을 치유하는 데 적절한 처방이라면 그 이름이 초기불교면 어떻고 대승불교면 어떤가. 불교면 어떻고 기독교면 어떤가?

 

(도법스님,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불교평론 열린논다, 2010-06-25)

 

 

화쟁하는데 있어서 초기불교이든 기독교이든 가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마저 화쟁이라는 논리에 따라 변질시켜 버리는 대범함을 보였는데, 그런 대범함이라면 기독교의 교리도 수용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아쇼카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나의 종교가 우주 전체를 담고 있듯이 상대의 종교 또한 우주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 인연의 차이일 뿐입니다. 각자의 다른 인연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은있는 그대로세계의 실상이며 아름다움입니다.

 

(도법스님,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불교평론 열린논다, 2010-06-25)

 

 

바로 이 선언문이 도법식 화쟁방식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마치 21세기 원효처럼 모든 종교와 사상을 자신의 생명평화사상에 원융시키겠다는 말과 같다. 자신의 사상을 위해서라면 상대방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무차별적인 화쟁방식에 대하여

 

이와 같은 무차별적인 화쟁방식에 대하여 우려의 소리가 매우 높다. 특히 불교를 넘어 기독교든 뭐든 화쟁하겠다고 하는데, 이는 자신의 교리에 대한 자신감인지 알 수 없다. 

 

눈오는 밤 생명과 평화를 화두삼아 크게 깨친듯한 도법스님의 진리관은 기독교를 원융의 대상으로 삼기에 충분한 진리를 발견한 듯 하다. 그래서일까 열린진리관을 표방하며 기독교와 교리통합(화쟁)을 시도 하고 있는데, 이런 현상에 대하여 교계의 어느 스님은 다음과 같이 교계 인터넷신문에 우려의 글을 발표 하였다.

 

 

현 상태의불교인 선언문이나 얼마 후 종교계가 유사한 선언문을 발표 시 그야말로 기독교계는 불교계(조계종)로부터 앉아서 항복문서를 받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법응스님, 하나님에 귀의하는듯한 종교평화선언,  불교포커스 2011-10-16)

 

  하나님에 귀의하는듯한 종교평화선언-선언.docx  하나님에 귀의하는듯한 종교평화선언-선언.pdf

 

 

이번 선언문이 불교계의 항복선언과 같다는 것이다. 타종교를 화쟁하기 위하여 그들의 교리를 인정하고 그 대신 불교의 교리에 대하여 양보와 타협으로 일관하였는데, 이는 재앙과도 같은 선언이라는 것이다.

 

도법스님의 스승은 누구?

 

7세기의 원효스님은 그 때 당시 난립된 각 불교 종파를 하나의 사상으로 통합하고자 하였다. 의상스님이 화엄종을 중심으로 원융을 시도 하였다면, 원효스님은 종파에 구애 됨이 없어 모든 종파를 하나의 진리로 귀결 시키려 하였는데, 이는 교리와 사상을 통합하는 화쟁을 말한다. 

 

그런데 21세기에 도법스님은 이를 넘어 불교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조차 도법식 불교로 화쟁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하였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모든 종교를 도법교에 통합하려는 작업을 하고 있다.

 

불교와 기독교의 진리관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도법식 생명평화경에 따르면 그 어떤 종교, 그 어떤 사상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내 이웃을 하느님으로 대하듯이 이웃종교도 하느님 대하듯이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도법교의 소의경전이라 볼 수 있는 생명평화경 유통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거룩하십니다. 진리의 스승이시여!

진리의 가르침을 귀 기울여 잘 듣겠나이다.

깊이 사유 음미하겠나이다.

온몸과 마음을 다하여 실행하겠나이다.

 

(도법스님, 생명평화경)

 

 

도법스님은 부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스승을 믿고 있다. 그 진리의 스승은 누구인가.

 

긴박하고 가슴 조이는 나날들

 

모든 생명은 유한하다. 생명이 비록 무질서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네겐트로피적 특성을 갖고 있긴 하지만, 한 번 형성된 것들은 모두 예외 없이 무상하므로 어느 것 하나 엔트로피의 법칙에서 벗어 날 수 없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도법스님의 생명운동은 영원에 대한 집착, 영원을 향한 몸부림으로 보여진다. 이런 영원론, 불멸론은 부처님 가르침인 연기법에 따르면 상견으로서 삿된 견해에 속한다.

 

현재 한국불교는 도법스님이 주창하는 새로운 불교운동에 빠져 있다. 마치 21세기 원효가 출현한 것인양 초기불교든 기독교든 가리지 않고 화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데, 특히 불교보다 영향력이  몇 배나 크고 더구나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학자들로 가득 포진한 기독교에 화쟁을 하였으니, 이제 그 결과만 남았다.

 

한국불교, 과연 기독교를 융합하여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 갈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의 교리에 먹혀 들어 갈 것인가. 그런 와중의 한 복판에 있는 도법스님은 화쟁으로 21세기의 원효가 될 것인가 아니면 교단을 혼란케 하였던 데와닷타가 될 것인가. 참으로 긴박하고 가슴 조이는 나날들이다.

 

 

  

 

2011-10-1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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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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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경-도법.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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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도법.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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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도법.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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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경-도법.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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