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신학자들이 불교를 연구하는 까닭은?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0. 8. 18:07

 

신학자들이 불교를 연구하는 까닭은?

 

 

 

 

신물이 나도록 들은 방송광고

 

한 동안 나오지 않던 방송광고가 다시 시작 되었다. “광주대원정사 부처님은생불산에 화현하시어...”로 시작되는 광주대원정사광고방송이다. 매일 아침 6 20‘BBS불교방송불교강좌시간이 끝나는 때 방송되는 광고방송은 이제 신물이 날 정도이다. 지난 5년간 매일 같은 시간대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것이 생각났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듣던 광주대원정사 방송광고는 대웅전불사에 관한 것이었다. 전국의 불자들을 대상으로 불사에 동참을 권유하는 방송광고이다. 지난 2007년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대웅전이 전소됨으로서 전국의 불자들에게 복원불사를 호소하는 방송광고이었는데, 단일 사찰로서 5년동안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광고방송을 하였다는 것은 불가사의한일이다.

 

다 끝난줄 알았는데

 

불교방송을 애청하는 불자라면 꼼짝없이들을 수 밖에 없는 광고방송이 중단 된 것은 지난 7월의 일이었다. 화재가 난지 6년만에 대웅전 복원불사가 완료되어 삼존불탱화점안 법회가 7 2일 봉행 됨으로서 더 이상 방송광고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 끝난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 10월 부터 다시 방송광고가 시작 되었다. 3개월만에 재개된 방송광고는 지장전, 산신각, 칠성각 불사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 디카로 음성을 캡쳐하고, 녹취하여 동영상을 만들었다.

 

 

 

 

새로 시작된 대원정사 방송광고 방송(BBS불교방송, 오전 6 20)

  

 

 

방송광고에 대한 문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광주 대원정사 부처님은 기도하는 사람 사람마다 소망을 잘 성취해 주시는 부처님으로 유명합니다. ‘화현부처님의 가피로 소망성취를 위한 철야기도에 동참을 바라오며, 기도법을 모르거나 기도성취가 잘 되지 않는 분에게 속히 기도성취하는 방법을 배우는 기도수행학교에도 불자님들의 입학을 바랍니다.

 

또한 대원정사에서는 화마로 전소된 지장전불사산신각’, ‘칠성각불사를 봉행하오니 동참바랍니다.

 

엄마의 품안에 있다 세상을 떠나 불쌍한 태아영가에게 엄마의 그리움과 원결에서 벗어나 지장보살님을 엄마로삼아주는 인연불사에도 많은 동참을 바랍니다.

 

문의는 광주 지역번호 062 571 6789 571 6789번 대원정사로 하시기 바랍니다.

 

(광주대원정사 광고문구, 매일 아침 BBS불교방송에서 아침 6 20분에 1분간방송)

 

 

신물이 날 정도로 방송광고를 해서일까 전면 5칸의 대웅전 건축불사는 지난해 2010 4월에 준공되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광고는 대웅전에 들어갈 후불탱화등의 광고가 약 1년이상 지속되었다. 건축물에서 부터 후불탱화등까지 복원에 사용될 모든 것을 전국의 불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동참을 호소하는 광고이었다.

 

그런데 다시 재개된 광고의 내용을 보니 이제 지장전, 산신각, 칠성각등 부속전각의 불사에 대하여 전국의 불자들에게 동참을 호소하는 광고를 다시 내 보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불사가 끝날 때까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다. 대웅전 불사를 예로 본 다면 몇 년동안 같은 멘트를 꼼짝없이 들어야 할 것 같다.

 

죄의식을 가진 불자들을 대상으로

 

광주대원정사의 방송광고의 특징은 소망성취영가천도에 관한 것이 특징이다. 광고문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광주대원정사 부처님은 소망을 성취해 주는 부처님으로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열심히 기도하면 한 가지 이상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고 하는데, 기도하는 방법을 모르면 기도수행학교에서 기도하는 방법도 가르쳐 준다고한다. 또하나의 특징은 영가천도에 관한 것인데, 특히 태아영가천도에 관한 것이다.

 

전세계 어느나라든지 낙태는 없을 수 없다. 우리나라 역시 지난 시절 어느 누구든지 낙태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는 여성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낙태한 것에 대하여 일종의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 착안해서일까 광고문구를 보면 그리움과 원결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불쌍하게 죽은 태아영가들이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것에 대하여 일종의 원한을 가지고 있다는 뉘앙스이다.

 

이런 광고문구를 듣는다면 누구든지 뜨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불쌍하게 죽은 태아영가를 천도시켜 주어야 할 당위성을 말하고 있는데, 방법은 지장보살을 엄마로하여 인연맺어주기이다.

 

세상에서 떨어지는 단물을 빨아먹고

 

광주대원정사의 방송광고를 보면 기도천도가 핵심단어이다. 이는 우리나라 불교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법을 멀리 하면서 기복방편으로 일관하는 한국불교가 미래에도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이화여대 최준식 교수는  지난 10 4일 조계종 자정과 쇄신 결사 추진본부(본부장 도법)에 주최한 특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국불교는 종교로서 해야 할 작업인 세상을 인도하는 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거나 능력이 안 돼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한국불교는 종교 본연의 일은 뒷전이고 세상에 붙어 세상에서 떨어지는 단물을 빨아먹고 부산물을 챙기는데 더 바쁜 형국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최준식 이화여대 교수, 불교포커스 2011-10-04, 밖은 21세기, 안은 19세기)

 

  절 밖은 21세기, 절 안은 19세기.docx  절 밖은 21세기, 절 안은 19세기.pdf

 

 

최준식 교수는 한국불교가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불교가 사회를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별 관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능력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기복방편으로만 일관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표현으로서 세상에 떨어지는 단물을 빨아먹는존재정도로 혹평한 것이다.

 

이삼십년 후 한국불교는

 

더구나 새로운 세대를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오직 나이든 노보살을 바라보면서 기복과 방편으로 일관하는 한국불교의 미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암울하게 내다 보았다.

 

 

한국불교 20년 내지 30년 후의 모습은신도 숫자는 현저히 떨어지고 연령대 역시 매우 높게 될 것이고 교육 정도 역시 높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최준식 이화여대 교수, 불교포커스 2011-10-04, 밖은 21세기, 안은 19세기)

 

 

한국불교의 사찰에서 젊은불자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나이 든 노보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노인들만 있는 한국불교에서 앞으로 이삼십년 후가 되면 어떻게 될까.

 

역삼각형 모양의 불교인구 구성에서 노보살들이 하나 둘 사망하게 되었을 때 청년불자들이 받쳐 주지 않는다면, 한국불교는 이삽십년 내에 신도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 들 것이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명맥을 유지하긴 하되 사회적 영향력이 없는 소수종교로 전락할 것이라는 암담한 이야기이다.

 

이처럼 비관적으로 보는 이유로서 19세기나 사용하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든지, 어려운 한문교리, 출가와 재가의 비민주적인 위계질서, 가부장적 문화를 들고 있는데, 이는 천주교가 현대화된 교육을 받은 50대 미만의 사람들에게 적합한 언어로 교리를 전달하는 것과 대조 된다는 것이다.

 

최준식교수는 누구일까

 

이와 같은 특강을 한 최준식교수는 누구일까. 이화여대 교수로 알려져 있는 최교수는 인터넷 검색결과 죽음학회회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불교평론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 하였는데, 과거에 그의 글을 블로그에 올렸던 것을 검색하였다.

 

 

 

-왜 종교인가(불교평론2004)

왜 종교인가-최준식.docx

왜 종교인가-최준식.pdf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진짜 이유(불교평론 2004)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진짜 이유-최준식.docx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진짜 이유-최준식.pdf

 

 

-종교의 특질

  종교의 특질-최준식.docx

종교의 특질-최준식.pdf

 

 

-진정한 반미(불교평론 2003 9 10)

  진정한 반미-최준식.docx

진정한 반미-최준식.pdf

 

 

 

위 논문중 진정한 반미라는 컬럼이 강하게 뇌리에 남았다. 그것은 글의 가장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멘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성장세는 멈출 줄을 모른다. 아니 드디어―실제의 세력 면에서는 이미 불교가 기독교에 뒤져 있었지만―수적으로도 불교는 기독교에 밀리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수 있을까? 민족 종교 가운데 가장 큰 종교인 불교에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인 학자 가운데에는 불교를 전공한 사람들이 많은데 불교 학자들 가운데에는 기독교 신학을 전공한 이가 거의 없다. 사정이 이 정도라면 게임은 끝난 것 아닐까?

 

(최준식, 진정한 반미, 불교평론, 2003 9 10)

 

 

이글은 2003년 불교평론에 실렸던 글이다. 이글을 블로그에 올린 것은 2006 2월에 역시 같은 제목(진정한 반미)으로 올렸다. 글에서 마지막 구절에서 최교수는  사정이 이 정도라면 게임은 끝난 것 아닐까?”라는 멘트를 날렸는데, 이는 무슨뜻일까.

 

2003년의 예언이 현실로

 

마지막 문구를 보고 한편으로 불쾌하였고, 또 한편으로 우려스런 감정이 교차하였다. 그것은 본문중에 기독교인 학자 가운데에는 불교를 전공한 사람들이 많은데, 불교 학자들 가운데에는 기독교 신학을 전공한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8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사정이 이 정도라면 게임이 끝난 것이 아닐까?”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이다. 그것은 지난 8 23일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 발표한 아쇼카선언문 때문이다.

 

선언문의 열린진리관전법의 원칙에 따르면 불교와 기독교는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보여졌고, 그로 인하여 더 이상 전법을 할 수 있는 명분이 없어서 전법포기선언으로 비쳐졌다. 그런 의미로 보았을 때 게임은 끝난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게 되기까지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들의 역할도 매우 컷을 것이다.

 

신학자들은 왜 불교를 연구할까?

 

그렇다면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들은 누구일까. 불교평론에 글을 쓴 기독교신학자는 최준식 교수를 비롯하여 길희성, 오강남, 김경재, 이찬수 교수등이다. 이들 교수들은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목사이다. 그렇다면 이들 신학자들이 불교를 연구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기독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으면서 불교를 연구하는 목적은 불교가 좋아서일 수도 있지만, 결국 불교를 기독교화시키는 것이 더 큰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불교를 연구하는 신학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불교와 기독교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오강남 교수와 김경재교수는 참나와 하나님은 같은 것이라고 불교평론에 발표 하였고, 길희성 교수는 불교의 진리와 기독교의 궁극적 실재는 같은 것이어서 길은 달라도 정상에서 만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자신의 논문에서 주장하였다. 이찬수교수는 불교평론에서 불교의 교리가 자신있다면 기독교를 품어라라고 다그쳤다.

 

이처럼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 학자들은 겉으로 종교평화와 다원주의를 제창하면서 속으로는 불교와 기독교의 공통점을 찾기에 주력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불교와 기독교가 결국 같은 목표를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을 밝힘으로서, 불교를 기독교에 편입시키기 위한 작업으로 보여진다. 그런 노력이어서일까 금번 8.23 아쇼카 선언에서 기독교 신학자들이 그토록 원하던 것이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선언문을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기독교신학자이자 목사인 이찬수교수도 함께 참여 하였다는 사실이다.

 

하이에나 같은 신학자들

 

사자를 백수의 제왕이라고 한다. 사자의 포효에 산천초목이 떨고 모든 동물들이 숨을 죽인다. 그래서 예로 부터 부처님의 목소리를 사자후라 하였다. 하지만 백수의 제왕 사자도 늙고 병들면 힘을 쓰지 못한다. 더군다나 사자충이라는 내부의 적에 의하여 파괴되기도 한다.

 

이렇게 병들고 늙고 힘이 빠진 사자는 예전의 사자가 아니다. 그래서 하이에나의 공격을 받기도 하는데, 이는 외부의 적으로 무너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한국불교가 마치 병들고 늙은 사자처럼 보인다. 그런 한국불교가 내외적으로 공격당하고 있다.

 

첫번째는 내부적으로 마치 사자충과도 같은 기복과 방편에 의하여 공격당하고 있다. 정법에 의지하여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불교 본래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신격화된 부처님에 대한 소원성취기도를 한다든가 영가천도라는 명목으로 치루어지는 각종 천도재가 이를 증명한다. 이는 불자들로 부터 단물을 빨아먹고 부수러기나 주어 먹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기복과 방편을 추구하면 할 수록 한국불교는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되어 결국 국민들로 부터 외면받게 되어 마치 사자몸의 사자충이 사자몸을 파괴하듯이 내부로 부터 무너지게 될 것이다.

 

두 번째는 외부적으로 유일신교로 부터 공격당하고 있다. 그 공격의 방법은 매우 다양한데, 그 중의 하나가 불교를 연구하는 신학자들의 공격이다. 그들은 교리적으로 불교와 기독교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불교를 기독교에 편입하려는 논리를 개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들은 넘쳐나고, 반대로 기독교를 연구하는 불교학자들은 찾아 볼 수 없는데, 이런 현상을 두고 최준식교수는 2003년도에 이런 사정이라면 이미 게임은 끝난것이나 다름없다라는 취지로 글을 맺었다. 이는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학자들은 불교를 외부에서 공격하는 하이에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한다.

 

 

 

사자와 하이에나

사진 : 에나

 

 

 

이처럼 내외적으로 공격당하고 있는 한국불교가 이들 공격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초조(初祖)의 정신으로

 

한국불교가 현재와 같이 기복과 방편으로 일관하면서 청소년이나 군포교등으로 젊은 불자들을 양성하지 않고, 돈 많은 노보살들을 대상으로 하여 단물만 빨아 먹는 것으로 일관한다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없다.

 

또 궁극적실재를 찾는 것을 깨달음으로 여기는 한국불교는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들의 좋은 먹잇감이다. 그들이 마치 하이에나처럼 불교주변을 맴돌면서 외부적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할까. 기사에서 최준식 교수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최 교수는 한국불교가 현재 처한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가장 이상적인 불교공동체를 제시했다. 그는 이상적인 불교공동체를 초기 붓다가 만들었던 사부대중이 동등하게 참여해 가장 민주적으로 운행되는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어떤 종교든 개혁의 소리가 높아질 때면 나오는 표어가초조의 정신이라면서붓다가 지금 한국에 왔다면 어떤 일부터 시작할지 깊게 생각해보라라는 말을 끝으로 최 교수는 강의를 끝맺었다.

 

(최준식 이화여대 교수, 불교포커스 2011-10-04, 밖은 21세기, 안은 19세기)

 

 

현재 한국불교가 처한 난국을 극복하려면 처음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을 초조(初祖)의 정신이라 하였다. 이는 종교를 창시한 교주의 정신을 말한다. 불교라면 당연히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한다.

 

기복에서 수행의 불교로

 

사람들은 일을 하다가 본질에서 벗어났을 때 항상 처음시작하였던 마음을 상기한다. 그래서 어느 가게나 회사의 액자에 처음처럼또는 처음으로”,“처음의 마음으로라는 구호가 적힌 문구를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불교 역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다면 처음으로되돌아 갈 필요가 있다. 바로 그것은 부처님 법대로사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의 불교공동체를 말한다. 그런 공동체의 생활을 엿 볼 수 있는 것은 어렵지 않다. 초기불교경전에 다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복에서 수행의 불교로거듭나야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초조의 정신으로 돌아갔을 때 단물만 빨아먹는 기복은 발 붙일래야 발 붙일 수 있는 터전이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 어디에도 신격화된 부처님에게 기도를 하여 소원성취를 이룬다든가, 영가를 천도하는 방편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 법대로 산다면 하이에나와 같은 신학자들의 공격도 막아 낼 수 있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유일신교의 교리는 일치하는 점이 하나도 없고 모두 반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경우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 신학자들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접하였을 때, 자신들의 신앙이 상견(常見)을 추구하는 삿된 견해(邪見)’라는 것을 알게 되어 불법승 삼보에 귀의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와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한국불교가 살아 남으려면 초조의 정신으로 돌아 가는 것 밖에 달리 길이 없어 보인다.

 

 

 

2011-10-08

진흙속의연꽃

 

왜 종교인가-최준식.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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