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기독교부정이 곧 불교부정이라고? 개종할 명분을 주는 아쇼카선언의 이상한 연기관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0. 5. 14:55

 

 

기독교부정이 곧 불교부정이라고? 개종할 명분을 주는 아쇼카선언의 이상한 연기관

 

 

 

 

법우님들께 물어 보았더니

 

이번 가을 순례법회에 참가한 법우님들께 종교평화선언에 대하여 아느냐고 물어 보았다. 불과 몇 명에 물어 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번 종교평화선언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에 대하여 아는 법우님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불교의 근본을 뒤흔드는 경천동지할 선언이 지난 8 23일에 있었지만 대부분의 불자들은 그런 선언이 있는 줄 조차 모르고 언제나 그렇듯이 태평한 모습들이었다.

 

 

 

 

 

 

 

우리나라 불자들은 매우 소박한 신심을 가지고 있다. 수 년간 함께 법회를 다니면서 느낀 사항이지만 대부분의 불자들이 기복신앙에만 머물러 있을 뿐 그 이상 불교의 심오한 교리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건강, 입시, 사업, 치유등 소위 4대 기도에만 열심히 매달릴 뿐 불교가 존망에 처해 있는지 아는 법우님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기독교적 정서를 바탕에 깔고

 

이렇게 소박한 신앙을 가진 불자들은 불교가 좋아서 믿는다. 이를 달리 말하면 기독교가 득세하는 한국적 특수상황에서 기독교와 정서가 맞지 않아 불교를 선택하였다고 볼 수 도 있다. 이와 같이 반기독교정서를 배경에 깔고 있는 불자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알고 있는 법우님도 그런 사람중의 하나이다.

 

그 법우님은 자신의 친가중에 자신 혼자만 불교를 믿고 있다고 한다. 친정어머니와 여동생은 여의도 S교회의 열렬한 신자인데, 유독 자신만 불교를 믿고 있어서 개종의 타켓이 되고 있다고 한다. 여동생이 교회로 억지로 데려가기도 하고 수시로 개종을 권유 받았으나, 그래도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불교를 믿고 있다. 그런 법우님을 친가에서는 고집이 센 사람으로 찍혔다고 한다. 하지만 이 법우님이 개종할 것 같지는 않다. 교리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불교방송에서 경전공부불교강좌시간을 놓치지 않고 꾸준히 듣고 있기 때문에 다른 법우님들보다 교리에 대하여 아는 것은 매우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법우님들은 아침방송등을 통하여 불교교리와 접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기복에만 의지 하는 기복불자들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기복불자들은 자신들이 복만 받을 수 있다면 그 대상이 어떤 것이든 상관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이번 순례법회에서 그런 뉘앙스로 말하는 법우님도 보았기 때문이다.

 

나이 드신 보살님들의 개종이 종종 이루어지는 이유도 평생 기복으로만 살았기 때문이다. 나이들어 더 이상 산중에 기도하러 갈 수 없을 때 종교서비스가 좋은 이웃종교에 쉽게 넘어 갈 수 있는 것도 불교의 핵심교리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반기독교정서를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이처럼 교리에 대하여 무지하고 평생 기복으로만 불교를 믿는 대부분의 불자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웃종교의 타켓이 되어 개종이 이루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불자들이 반기독교정서를 바탕으로 깔고 있기 때문에 그 반기독교정서를 제거하지 않는 한 개종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8.23일 발표된 아쇼카선언은 불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반기독교적 정서를 일거에 해소해 버렸다. 그래서 불교의 근간을 흔드는 경천동지할 선언이라는 것이다.

 

8.23 아쇼카선언은 불자들을 무장해제한 선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가 득세하는 한국에서 반기독교정서를  바탕으로 깔고 있는 불자들을 향하여 타종교에도 진리가 있다는등 소위 열린진리관으로 인하여 반기독교적 정서를 누그러 뜨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어느 경전을 근거로 한 연기관인지

 

선언문의 서문을 보면 연기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런 연기관 역시 반기독교적 정서를 누그러뜨리는데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연기적 세계관은 서로 다른 인간들이 상호 존중하고 상생할 수 있는 평화적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연기적 세계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저것’ ‘은 서로 별개의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연기적 세계관으로 본다면 반목과 대립은 바람직한 생존의 방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이것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을 인정해야 하고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남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 연기적 세계관의 가르침입니다.

 

(8.23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 21세기 아쇼카선언)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docx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pdf

 

 

 

불교의 핵심교리이자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연기법이다. 그런 연기법이 너와 남이 다르지 않고 우리 모두 하나라는 이야기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지 말고, 또 상대방을 부정하지 말고 인정하자는 것이다. 더구나 남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도 부정하는 것이 연기법이라는 논리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자함인가. 바로 기독교의 교리도 진리임을 인정하자는 것과 같다. 대체 어느 경전을 근거로 한 연기관인지 알 수 없다.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은 곧 불교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불자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기독교의 창조론, 원죄론, 대속론, 종말론, 구원론, 종말론과 같은 교리는 인과를 무시하고 있어서 말도 안되는 유치원 동화 같은 것으로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교리는 모두 마음이 만들어낸 일체유심조로 보는 것이 또한 불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되는 기독교의 교리를 위에 언급된 연기적 세계관에 대입하면 충격적인 결과가 나온다. 그 예를 하나 들어 보았다.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이것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à

 

기독교교리를 부정하는 것은 불교교리를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은 곧 불교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선언문의 문구에서 저것대신 기독교교리를 대입하고, ‘이것대신에 불교교리, ‘대신에 기독교, ‘대신에 불교를 대입하면 위와 같이 놀라운 결과가 도출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결국 기독교와 불교는 같은 종교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개종할 명분을 주는

 

이런 논리라면 이제까지 불자들이 철옹성 같이 지켜왔던  반기독교적 정서가 일시에 무너질 것이다. 창조론등을 부정해서는 안되고, 만일 부정한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는 논리는 지금까지 기복으로만 일관해 왔던 불자들에게 개종할 명분을 주고도 남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이 진짜 선언문의 내용대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내것과 네것이 구별이 없는것을 말하는 것일까. 대체 이런 연기법은 어떤 경전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일까. 더구나 근거도 출처도 알 수 없는 국적불명의 연기법이 단지 기독교의 교리를 인정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설한 연기법은 어떤 것일까.

 

우리나라 불자들은 기복에만 매달려 있다 보니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하여 잘 모른다. 또 절에서 스님들이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근본교리에 대하여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더욱 더 알 수 없고, 더구나 불교의 근본교리에 대하여 자신있게 설명할 수 있는 스님들도 드믈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기불교에 대해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는 불자라면 누구라도 근본교리에 대하여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 수 있게 되고, 불교인이 된 것에 대하여 긍지자부심을 갖게 되어 불자로서의 신심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게 된다. 그런 교리중에 연기법이 있다.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은

 

불교의 교리는 어렵고 난해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극대화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와 다르다. 유일신교에서는 모든 것을 신의 뜻대로하기 때문에 사유에 사유를 거듭하고 명상수행을 하는 전통이 없다. 하지만 신의 속박에 구속되지 않는 불교는 인간의 사유능력을 극대화 하여 존재와 근원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부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연기법의 발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연기는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기 이전에더 이후에도 존재해 있었지만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기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여래는 통찰지로 그 사실을 보고 깨달으셨을 뿐 없는 것을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요소는 존재해 있었다’라고 했다.

(pm.571, 청정도론 주석서)

 

 

청정도론에 대한 주석서에서 연기법은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출현하기 전에도 있었는데, 다만 부처님이 발견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마치 ‘만류인력’의 법칙 처럼 자연의 근본법칙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오하고 또한 심오한 연기법

 

이처럼 부처님이 고도의 명상수행과 사유에 사유를 거듭하여 통찰지로 발견한 연기법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아난다여, 이 연기는 심오하고, 또한 심오하게 드러난다.(S.iii.92).”

 

 

이처럼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은 매우 심오한 가르침으로서 보기도 어렵고 주석을 하기도 어렵다고 5세기 청정도론의 저자 붓다고사비구가 말하였는데, 연기의 가르침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진리(sacca), 중생(satta), 재생연결(paisandhi), 조건(paccaya), 이 네 가지 법은 보기 어렵고 가르치기도 아주 어렵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25)

 

 

진리, 중생, 재생연결, 조건과 같은 법을 설명하려면 빠알리 삼장을 통달하고 성자의 경지에 올라간 자가 아니면 연기에 대한 주석은 불가능하다고 붓다고사는 말하였다.

 

이런 이유로 연기, 진리, 재생연결등, 무아, 윤회등 보기 어려운 법을 범부가 주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뿐만아니라, 설령 이에 대하여 설명한다고 할지라도 개인적인 견해에 치우칠 수 있어서 반드시 경전주석서에 의지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본다.

 

괴로움과 윤회를 소멸시키는 연기법

 

이처럼 보기도 어렵고 주석하기도 어려운 연기법이지만 경전과 청정도론과 같은 주석서에 의지한다면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하다. 그런 연기법은 어떤 것이고 무엇을 말하고자함일까.

 

경전에서 연기법은 12연기로 정형화 되어 나타난다. 그런 연기법은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12연기의 주석에 따르면

 

 

경전에서 12연기로 정형화되어 나타나는 이 연기는 존재론적인 실체가 없음을 천명하는 무아와 동의어이며, 진리로써는 사성제로, 실천체계로는 팔정도로 나타난다. 연기는 나고 죽는 윤회의 바퀴를 지탱하여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돌아가게 하는 조건들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결코 우주의 법칙이나 생성원리를 설명하는 체계가 아니라 현실 즉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발생구조와 어떻게 괴로움을 소멸시킬 것인가 하는 소멸 구조를 드러내는 가르침이다.”

 

 

라고 설명된다.

 

연기법은 한 마디로 괴로움과 윤회를 소멸시키는 구조일 뿐이지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원리로 보았을 때 앞서 언급된 8.23 아쇼카 선언문에서 보는 것과 같은 '너와 내가 다름이 아닌 연기적 세계관'과 맞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통과 고통의 소멸이라는 2지연기(사성제)부터 8지연기, 10지연기, 12지연기등 다양한 연기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이 중 12지연기는 윤회의 원인과 윤회의 종식에 설명되고 있다.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을 연기법으로 논파하고

 

부처님은 연기법을 통하여 우리들을 고통(사성제)’윤회(12연기)’에서 해방시켜주고자 하였다. 동시에 상견(常見)’단견(斷見)’과 같은 삿된견해(邪見)’를 연기법으로 논파하였다.

 

자아와 세상은 영속한다불멸론자들의 견해에 대하여 원인없이 일어나는 법은 없고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법만 있을 뿐이다라 말하고, 불멸론자들의 견해가 거짓임을 연기법으로 논파 하였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더 이상 내생은 없다라는 단멸론자들의 견해에 대하여, 뒤이어 법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 줌으로서 역시 거짓임을 연기법으로 논파하였다.

 

헤뚜 빠띳짜 팔라(hetu-paticca-phala, 因緣果)

 

또한 연기에서  앞의 단어인 연()으로 영원함이 없음을 논파하고, 뒤의 단어인 기()로서 단멸등을 논파한 것이다. 그래서 오직 연기법만이 진리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런 연기법을 잘 설명한 문구가 청정도론에 소개된 다음과 같은 문구일 것이다.

 

 

원인과 조건에 따른 순수한 법들이 일어날 뿐이다.”

(청정도론, 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20)

 

 

여기서 원인()’을 말하고, ‘조건()’을 말하고 일어난 법()’를 말한다. 그래서 이를 한단어로 줄이면 인연과(因緣果)’가 될 것이다. 이를 빠알리로 헤뚜 빠띳짜 팔라(hetu-paticca-phala, 因緣果)’라 한다. 따라서 인연과는 연기법의 또다른 이름이라 볼 수 있다.

 

타고난 운명은 바꿀 수 있다!

 

이처럼 연기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건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법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조건을 남기고 사라진다.”

 

 

인연과를 현재를 살고 있는 입장에서 해석해 보면 은 자신의 적극적 의지라 볼 수 있고, ‘주변환경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주변의 환경을 유리한 조건으로 만들어 갈 때 그 결과가 좋게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은 업에 따른 숙명론을 지금 두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극복할 수 있는 적극적 의미로서도 해석된다. 따라서 연기법에 따르면 타고난 운명도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부처님당시 브라만의 사성계급에 묶여 숙명론적인 삶을 살아가던 민중들에게 희망의 메세지를 주는 대사건이었다.

 

윤회의 원인은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이 이전 법의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또 다음에 일어날 법의 조건을 남기고 사라지면서 상속한다고 하였을 때, 이러한 연기법을 상견과 단견에 적용하면 이들 견해는 모두 거짓이 되고 만다. 특히 12연기에서 삼세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청정도론에 12연기의 무명갈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명과 갈애, 이 두 가지 법이 존재의 바퀴의 뿌리라고 알아야 한다. 과거로부터 왔기 때문에 무명이 그 뿌리이고 느낌이 마지막이며, 미래로 상속하기 때문에 갈애가 그 뿌리이고 늙음과 죽음이 마지막이 되어 이 윤회의 바퀴는 두 가지이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285)

 

 

12연기에서 윤회의 원인을 무명과 갈애로 보고 있다. 그런데 무명은 과거의 원인이고, 갈애는 미래의 원인이 된다. 이는 상견과 단견을 논파하는데도 사용될  수 있다.

 

상견과 단견을 뿌리뽑기 위하여

 

청정도론의 저자 붓다고사비구의 설명에 따르면 과거의 원인인 무명은 부처님이 단견을 뿌리뽑기 위하여설하였다고 한다. 이는 지금 현재 결과가 일어나는 것으로 알 수 있는데, 원인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이어져 왔기때문이다. 그래서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나고, 행을 원인으로 하여 식이...”  이런 식으로 법이 일어나기 때문에 단견은 삿된 견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견은 어떻게 설명될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부처님은 상견을 뿌리뽑기위해서갈애를 원인으로 설명하였다. 갈애가 일어나면 미래의 원인이 되어 일어난 법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일어나고, 집착을 원인으로 업이 생성되고, 업의 생성으로 인하여 노사가 일어나는데 이로 인하여 슬픔, 비탄, 육체적 괴로움, 정신적 괴로움, 고뇌가 일어남을 연기적으로 밝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늙고 죽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영속론자들의 주장은 거짓이 되고 만다.

 

이상하고 수상한 선언

 

8.23선언은 한국불교 역사에 있어서 엄청난 사건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불자들은 이와 같은 선언이 있는 줄 조차 모른다. 설령 선언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종교평화라는 명분때문에 그것이 좋은 것인줄만 알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아는 불자들은 극소수이다.

 

선언문의 내용은 결국 타종교의 진리도 인정하다는 열린진리관이 키워드인데, 그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연기관을 동원하였다. 그런데 대체 어떤 경전을 근거로 한 것인지 듣도 보도 못한’연기관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8.23 선언문의 연기관에 따르면 기독교교리를 부정하는 것은 불교교리를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은 곧 불교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라는 놀라운 문장으로 바뀌고 만다. 이는 반기독교적 정서에 바탕을 둔 불자들을 무장해제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런 선언문은 결국 불자들에게 개종의 빌미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말 것이다.

 

연기법은 부처님이 위없는 깨달음으로 발견한 불변의진리이다. 그런 연기법은 창조론등으로 대표되는 영속론과 숙명론, 유물론등의  단멸론을 뿌리 뽑기 위하여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다. 따라서 연기법이 아닌 불멸론과 단멸론등은 뿌리를 뽑아야 할 삿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삿된 견해를 인정하자는 아쇼카선언의 주장은 거기에 인용된 출처 불명의 연기관 만큼이나 이상하고 수상한선언이다.

 

 

 

2011-10-0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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