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인터넷토론과 댓글놀이, 이 세상에 비난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1. 9. 28. 16:42

 

 

 

인터넷토론과 댓글놀이, 이 세상에 비난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은가? 이런 질문에 부처님은 답을 하지 않았다. 만일 사후에 존재한다고 말하면 상견에 빠졌다고 비난할 것이고, 또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단견에 빠졌다고 비방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나는 왜 그것들을 단언하여 말하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이것들은 목표와 이어져 있지 않으며, 청정한 삶의 근본에 적합하지 않으며, 깨어 있음으로 이끌지 않으며, 욕망의 버림, 갈애의 소멸, 평화로움, 촤상의 지혜, 깨달음, 그리고 열반으로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맛지마니까야:63  쭐라말룽꺄경,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은 세상은 영원한가?”등의 열가지 질문에 단언하여 말하지 않은 주된 이유는 고통스런 삶의 현실에서 형이상학적 질문은 고통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독 묻은 화살을 비유로 하여 무가치한 토론이 쓸모 없는 것이라 하였다.

 

낚이지 않기위하여

 

글을 쓰다 보면 댓글을 많이 받는다. 주로 수 년간 지켜 보아주시는 법우님들이 대부분이지만 종종 새로 찾아온 네티즌으로 부터더도 글을 받는다. 댓글을 받는 경우 글을 쓰는 사람의 정성과 노력을 생각해서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답신을 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간혹 답신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가 있다. 위에 언급된 형이상학적 질문과 같은 내용의 글을 받을 때이다. 더구나 무아나 윤회, 열반과 같이 매우 무겁고 어려운 주제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무척망설여진다.

 

이럴 때 답신을 하게 되면 엮이게되기 쉽상이다. 토론이 전개 되면서 점차 논쟁이 치열해지고 그에 따라 감정이 상해서 결국 파국을 맞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무기로 일관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무기로 일관하는 경우는 바쁘거나 성의가 없다기보다 낚이지 않기 위한 목적이 더 클 것이다. 그런 현상을 종종 인터넷카페에서 본다.

 

질문같지 않은 질문을 할 때

 

인터넷 카페에서 어느 네티즌은 재생연결식은 심장에 있나요? 뇌에 있나요?” “극락세계는 태양계 내에 존재하나요?” “윤회의 과정을 보려면 어떻게 하나요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을 한다. 하지만 카페 주인장은 이에 대하여 결코 답을 주지 않는다. 만일 답을 하게 되면 댓글놀이를 즐기는 자들의 밥이 되기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와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질문같지 않은 질문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막연하고 애매모호한 질문을 하였을 때 선뜻 답신을 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답신을 하기 곤란할 경우 무기로 일관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이는 결례가 아니라고 본다.

 

답신을 하는 경우 질문자가 형식을 갖추었을 때이다. ‘묻고 답하기코너에 가보면 카페 주인장이 매우 상세하게 답신을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질문자의 태도에 많이 좌우됨을 알 수 있다. 질문자가 예의형식을 갖추고 질문의 범위를 좁혀서 궁금한 점에 대하여 물어 보았을 때 카페 주인장은 매우 친절하게 자세하게 일러 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말하기 좋아 하는 사람들은

 

말하기 좋아 하는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해도 비난하고 반대로 말을 하지 않아도 비난한다. 이런 현상은 인터넷공간이라고 해서 조금도 다르지 않다. 댓글에 대한 답신을 해도 비난받을 수 있고, 반대로 답신을 하지 않아도 오해를 살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옛날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당시에 재가신자 아뚤라 이야기가 그것이다.

 

 

 

재가 신자 아뚤라 이야기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떄, 남자 재가 신자 아뚤라와 그의 친구들과 관련하여 게송 227~30번을설법하시었다.

 

어느 때 아뚤라와 그의 친구 오백 명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레와따 테라를 찾아갔다. 그러나 레와따 테라는 사자와 같이 초연하고 고상한 자세로 앉아서 단 한 마디의 담마도 설해 주지 않았다.

 

그들은 레와따 테라를 못마땅하게 여겨 이번에는 사리뿟따 테라를 찾아갔다. 그러자 사리뿟따 테라는 대단한 장광설로 아비담마(불교철학)를 설하여 그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이에 젊은이들은 너무나도 방대하고 깊이 있는 아비담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사리뿟따 테라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이번에는 아난다 테라를 찾아갔다. 아난다 테라는 그들에게 간략하게 요점만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아난다 테라가 너무 설법을 짧게한다고 불평이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찾아 뵙고 이렇게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저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자 왔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부처님을 찾아뵙기 전에 다른 여러 테라들을 만났습니다. 그렇지만 아무에게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예컨대 레와따 테라는 아무 성의도 없이 침묵했고, 사리뿟따 테라는 장광설로 저희를 질리게 했으며, 아난다 테라는 간략하게 요점만 설해 줄 뿐이었습니다. 저희는 그 같은 설법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여래의 제자들이여, 남을 비방하는 것은 그대들이 처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니라.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남의 비방을 듣지 않은 사람은 없는니라. 사람들은 설사 붓다나 왕일지라도 비방하느니라.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로부터 듣는 비방은 중요하지 않으며, 다만 지혜로운 사람으로부터 비판을 받거나 칭찬을 듣는 것이 중요하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 네 편을 읊으시었다.

 

 

, 아뚤라여! 이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옛날부터 있어 왔던 일

그들은 침묵해도, 말을 많이 해도

혹은 적게 말해도 각기 비방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그 같은 자들의 비방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어느 누구든 항상 칭찬만 받거나

비방만 받을 수는 없었다.

이는 지금도 그러하나니

또한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그는 현명하며 앎이 있고 그는 진실로 허물 없다고

어진 사람이 매일같이 조사하여 본 뒤 칭찬하는 사람

그가 지혜와 계행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마치 잠보나의 황금처럼

순수하고 맑아 티 한 점 없으니 어찌 비방하랴?

신들도 천왕도 그를 칭찬하리라!

 

 

부처님의 이 설법 끝에 아뚤라와 그의 친구 오백 명은 모두 소따빳띠 팔라를 성취하였다.

 

(거해스님의 법구경 인연담)

 

 

 

 

 

 

 

 

이 세상에 비난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위 법구경 인연담에는 레와따, 사리뿟따, 아난다 이렇게 세 명의 장로테라가 등장한다. 재가신자 아뚤라가 이들 장로 비구들에게 가르침을 청하기 위하여 물어 보았는데, 레와따 테라는 한마디도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불만이었다. 반대로 사리뿟따테라는 이해하기도 어려운 아비담마를 곁들여 장광설을 한참 늘어 놓았다. 이번에는 너무 말이 많아서 불만이었다. 마지막으로 아난다테라에게 찾아 갔는데 요점만 간단히 말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설명이 너무 짧다고 불만이었다.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 어느 누구로부터도 만족 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불만을 부처님에 말하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신 것이다.

 

 

Porāameta Atula           뽀라나메땅 아뚤라

neta ajjatanāmiva           네땅 앗자따나미와

nindanti tuhimāsīna       닌단띠 뚠히마시낭

nindanti bahubhāina      닌단띠 바후바니낭

mitabhāimpi nindanti        미따바님삐 닌단띠

natthi loke anindito.          낫티 록께 아닌디또.

 

사람들은 말 없이 조용히 앉아있어도 비난한다.

너무 많이 말해도 비난한다.

말을 조금해도 역시 비난한다. 오 아뚤라여,

이것은 지금만 있는 이야기가가 아니고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이다.

이 세상에서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Dhp 227, 일아스님역)

 

 

Na cāhu na ca bhavissati   나 짜후 나 짜 바위싸띠

na cetarahi vijjati              나 쩨따라히 윗자띠

ekanta nindito poso        에깐땅 닌디또 뽀소

ekanta vā pasasito.      에깐땅 와 빠삼시또.

 

비난만을 받는 사람도 없으며, 칭찬만을 받는 사람도 없다.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Dhp 228, 일아스님역)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

 

말이 없어도 비난받고, 말이 많아도 비난받고, 말을 조금해도 비난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청정도론에서 담마빠다로 부터 인용한 게송이 있다.

 

 

 

Selo yathā ekaghano         셀로 야타 에까가노

vātena na samīrati            와떼나 나 사미라띠

eva nindāpasasāsu       에왕 닌다빠상사수

na samiñjanti paṇḍitā         나 사민잔띠 빤디따.

 

큰 바위가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칭찬과 비방에

흔들리지 않는다.

(Dhp 81)

 

 

 

 

 

 

중국 하남성 운대산

 

 

 

여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청정도론에서 통찰지를 갖춘 사람이라고 설명하였다.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비난이나 칭찬에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한다. 따라서 결코 화를 내지 않는다  

 

아라한은 결코 화를 내지 않는다. 아라한이 되는 과정에서 탐욕과 성냄에 대한 족쇄를 모두 부수었기 때문이다. 마치 법화경에 나오는 상불경보살처럼 누군가 놀려대도 결코 화를 내거나 악심도 품지 않은 것을 말한다. 반대로 누군가 자신에 대한 칭찬을 할 때 동요하지 않은 것이 마치 바람에 움직이지 않는 단단한 바위산과 같아 보인다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

 

이런 통찰지는 마음을 맑게 함으로 해서 얻어진 것인데 이는 모든 부처님의 한결같이 강조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담마빠다에 칠불통계게라 불리우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게송이 있다.

 

 

 

Sabbapāpassa akaraa    삽바빠빠싸 아까라낭

kusalassa upasampadā      꾸살라싸 우빠삼빠다

sacittapariyodapana        사찟따빠리요다빠낭

eta buddhāna sāsana    에땅 붇다나 사사낭.

 

일체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착한 공덕을 힘껏 행하며

자기의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Dhp 183)

 

 

 

 

2011-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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