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한국불교가‘독불(督佛)’이 된까닭은?

담마다사 이병욱 2011. 9. 29. 14:59

 

 

한국불교가독불(督佛)’이 된까닭은?

 

 

 

 

보통불자로 살면서

 

보통불자로 살면서 글을 써 온지 햇수로 6년째이다. 생업을 유지하면서 틈만 나면 글을 쓰고 있는데 이제 거의 생활화 되어 자판을 두드리는것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듯이 하얀여백을 채우는 것이 습관화가 되어 하루도 글을 안쓰면 허전 하여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남들은 고상한 취미를 가졌다고 말하지만 글을 쓸 때는 늘 긴장감과 스트레스, 알 수 없는 강박감등을 갖는다. 마침내 여러시간에 걸쳐 글이 완성되어 블로그에 올렸을 때, 마치 숙제를 다한 학생이 홀가분한 기분을 가지듯이 오늘 할 일을 다 마친듯한 해방감을 만끽한다.

 

간접적으로 접한 불교는

 

글을 쓰면서 처음에는 불교의 홍보에 치중하였다. 블로그를 만든 목적중의 하나가 유일신교가 득세하는 한국적 종교시장에서 불교의 훌륭한 교리를 널리 알리자는 것에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이 작성한 글이나 논문등을 열심히 퍼 날랐다. 그런 과정에서 불교계 내부의 사정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주로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사이트를 통해서이다.

 

수 년 간 매일 주요 사이트를 문안인사드리다시피 방문하여 본 결과 불교계내부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 번도 승가 근처에 가본적이 없기 때문에 종단과 스님들에 대하여 알 수 없었으나 간접적으로 접한 불교계의 내부사정은 반성해야 될 점이 많았다. 더구나 법회를 참석하면서 보통불자가 느낀 단상은 원래의 부처님가르침과 동떨어진 것도 많았다. 그런 대표적인 것 둘을 들라하면 기도신격화된 부처님을 들 수 있다.

 

기독교에 먹힐 것을 염려하여

 

이와 같이 불교계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승가의 무사안일, 무위도식, 무식등 소위 ‘3무현상기도신격화된 부처님으로 대표되는 법회현장을 보고서 비판적인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수의 글을 양산하였는데, 그런 글 중의 하나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 적이 있었다.

 

 

 

인도 불교가 멸망한 이유가 초기불교의 가르침에서 너무나 멀어진 결과로 빚어진 결과라는 것은 여러가지로 증명이 되는 사항이다. 그런 불교가 기독교의 유입으로 인하여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큰 요인은 ‘실재성’을 인정 하는 것이다. 참나가 있다고 주장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 개념이나 참나 개념은 매우 유사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진보적인 기독교 신학자인 오강남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엇보다 종교를 자기중심적인 나를 비우고 내 속에 있는 참 나를 찾는 길로 받드는 것이다. 내 속에 있는 참나는 결국 절대자이기에, 그 절대자와 내가 하나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오강남교수, 불교평론 2009년 가을,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72)

 

 

대승불교의 참나와 기독교의 절대자를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는 기독교를 극복 할 수 없다. 아니 인도에서 불교가 힌두교에 먹혔듯이, 한국에서 대승불교가 기독교 먹힐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불교로 되돌아 가자는 것이다.

 

(진흙속의연꽃, 초기불교를 하면 불교의 퇴보라는데,  현응스님의 ‘깨달음과 역사’를 보며, 2010-02-24)

 

 

 

이 글은 2010 2월에 작성된 글이다. 1 7개월 전에 작성된 글에서 한국의 대승불교가 기독교에 먹힐 것을 염려하였다. 이유로서 기독교측에서 진보적신학자들이 대승불교의 참나와 기독교의 하나님을 같은 개념으로 보고 불교와 기독교가 추구하는 진리나 궁극적 실재는 서로 같은 것이라는 글을 불교평론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우려가 현실로

 

이후로도 불교평론에서는 이와 비슷한 논조의 글이 김경재 목사이찬수목사의 이름으로 실렸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불교계내의 불교학자들이나 스님들도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일심이 제반 종교에서 말하는 초월적 존재의 이름과 같은 것이라는 한자경교수의 강연과 서광스님의 책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기독교의 신학자들과 불교의 스님과 학자들이 진리와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결국 같은 것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하여 불교의 위기로 보고 기독교에 먹힐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글로서 염려 하였는데, 현 시점에서 그런 염려과 현실화 되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소멸의 길로

 

지난 8 23일에 불교평화선언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초안이 발표 되었다. 이제 한달이 넘은 시점에서 그 동안 이 선언에 대한 글을 거의 하루 걸러 한 번씩 발표하였다. 경천동지할 선언의 내용으로 인하여 한국불교가 어쩌면 소멸의 길로들어설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때문이었다.

 

그렇지않아도 종단과 스님들이 현실을 외면하며 산중에서  살며 세상과 소통하려 하지 않은 마당에 도시에서 불교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여기에다 불자라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소위 열린진리관전법의 원칙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이런 선언문을 만든 사람들은 누구일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인터넷검색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이번 선언을 작성한 주체인 조계종 화쟁위의 멤버중에 목사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목사는 강남대에서 불상에 절하였다는 이유로 해직당한 이찬수 교수이었다.

 

이미 1월에 예고된 아쇼카 선언

 

그런데 글을 쓰는 과정에서 검색을 통하여 알게 된 사실은 이번 8.23선언문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 지금으로터 7개월전인 2011 1 27일 화쟁위 내부에 선언문을 만들기 위한 기획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멤버중에 한 사람으로 이찬수목사가 포함되었다는 기사를 발견하게 된것이다. 그 기사중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화쟁위는 신설된 종단 안팎의 전문가가 참여한 기획위원회의 주도로 올해 안에 21세기 아쇼카 선언을 성사시킬 계획이다.

범종교, 시민사회 공동 종교평화 선언은 <종교평화법> 제정을 목표로 각 종교계와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노력할 것을 제안하는 곳이 골자를 이루고 있다. 종교계와 시민사회가 먼저 종교평화를 위한 선언을 이끌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종교평화법> 제정을 추진한다는 복안이다.

 

(불교닷컴, 화쟁위, 아쇼카 종교평화 선언 내놓는다, 2011-1-27)

 

  화쟁위, 아쇼카 종교평화 선언 내놓는다-1101.docx  화쟁위, 아쇼카 종교평화 선언 내놓는다-11012.pdf

 

 

8 23일 발표된 21세기 아쇼카선언에 대한 것이 6개월전에 이미 언급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명칭까지 이미 정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월에 예고된 아쇼카 선언에 어떤 내용이 실릴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왜 목사가 들어갔을까

 

하지만 6개월 후 8 23일 이 아쇼카선언의 뚜껑을 열어 보았을 때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한다등의  경천동지할 만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아쇼카 선언문을 만들기 위한 기획위 멤버에 관한 것이다. 동일 기사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기획위원회는 학계를 대표해 박경준 동국대 교수, 조성택 고려대 교수, 정윤선 KIST 연구원, 이찬수 강남대 교수와 갈등해결 분야의 강영진 갈등해결센터 대표, 김정희 ()케이씨엔컨설팅 대표, 언론계의 김종락 문화일보 전 문화부장, 오상광 MBC 시사교양국차장 외에 NGO와 문화기획, 종단 인사로 짜여졌다.

 

(불교닷컴, 화쟁위, 아쇼카 종교평화 선언 내놓는다, 2011-1-27)

 

 

이 기사에서 불교학자인 박경준동국대 교수와 조성택고려대교수와 더불어 기독교신학자인 이찬수목사의 이름이 뜨인 것이다. 대체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강한 데자뷰를 느끼며

 

이와 관련된 글로서  화쟁위에 왜 목사가 있을까? 아쇼카 선언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밝혀야라는 제목으로 올렸는데, 그 글을 쓰는 과정에서 1 27일이라는 날자와 이찬수교수라는 이름을 보고 강한 데자뷰를 느꼈다.

 

언젠가 한 번 쯤 경험한 것을 또 다시 경험한 것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데자뷰란 무엇일까. 인터넷백과사전을 찾아 보았다.

 

 

데자뷰

 

기시감(旣視感) 또는 데자뷔(프랑스어: Déjà Vu)는 처음 보는 대상을 이전에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 현상을 말한다.

 

데자뷔는 불어로“이미 본”이란 뜻으로 최초의 경험인데도 불구하고, 과거에 이와 같은 경험을 경험한 것 같은 착각을 일컫는 말이다. 인간의 뇌는 일상생활에서 엄청난 양의 기억을 저장하는데, 이 엄청난 양의 기억을 저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인간의 뇌는 일상생활에서의 기억을 간략하게 저장하는데, 간략하게 저장된 엄청난 양의 정보는 비슷한 기억이더라도 인간의 뇌는 같은 기억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생긴다는 견해가 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심리학자인 플로랑스 아르노(Florance Arnaud)가 최초로 이러한 현상을 규정하고, 이후 에밀 부아라크(Emile Boirac, 18511917)이 데자뷰란 단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출처; 한국어판 위키백과, 기시감)

 

 

데자뷰를 우리말로 기시감이라 한다. 이는 처음으로 경험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과거에 이와 똑 같은 경험을 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찬수 목사가 조계종의 심장부에서 아쇼카 선언문을 만드는데 기획위원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을 보고서 그가 쓴 글이 떠 올랐기 때문에 강한 기시감을 느낀 것이다. 더구나 8.23 아쇼카선언문의 열린진리관의 내용이 그가 쓴 글 어느 불교적 기독교인이 불교(불교평론 열린논단)’와 거의 유사해서 강한 데자뷰현상을 느겼다.

 

8.23 아쇼카 선언문의 문제점

 

8.23아쇼카선언과 이찬수목사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가장 문제시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조계종의 심장부에서 이번 아쇼카선언문의 작성에 직접적으로 참가한 기획위멤버이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가 과거 불교평론에 올린 글이 이번 아쇼카선언문에 그대로 반영이 된 듯한 느낌이다. 이를 법응스님이 작성한 아쇼카 선언은 대폭 수정되어야 합니다에서 지적한 사항과 비교하여 보았다.

 

먼저 8.23 아쇼카 선언문에 대한 문제점을 법응스님이 조목조목 비판하였는데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8.23 아쇼카선언문에 대한 법응스님의 지적사항

No

8.23 아쇼카선언문

법응스님 지적사항

1

이웃에 있는 나 자신의 종교이며, 내 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관된 존재일 뿐 아니라 서로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나의 종교가 우주 전체를 담고 있듯이 상대의 종교 또한 우주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불교가 아닌 타 종교의 세계관도 불교와 같이 완벽한 세계관, 우주관이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석가모니부처님가르침의 온전성, 완벽성 등 타 종교에서 추종이 불가능한 부처님의 고귀한 가르침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2

각자 인연의 차이일 뿐입니다. 각자의 다른 인연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은있는 그대로세계의 실상이며 아름다움입니다.

여러 종교가 존립하는 것은 각국의 인종, 문화 등 인연의 차이이지 그 자체가 있는 그대로 실상이라며 온갖 종교의 사상을 긍정하는 즉 삼종외도설과 육사외도와 같은 허구의 종교사상을 긍정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3

연기적 세계관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관점이며, 불교가 세상과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방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불교인들은 이웃종교를 진정으로이웃으로 생각하는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이웃종교인의 허물을 내 허물로 여기고 그들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데 충분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이웃종교를 질시하거나 경쟁하는 상대로 여겼던 적은 없었는지 반성합니다. 그리고 이웃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귀 기울여 배우려는 노력이 충분하지 못하였음을 반성합니다.

승려가 타 종교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이미지의 구절입니다. 현실에서 타 종교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념적 내용에 대해 배우고 따라야 하며 그동안 그러하지 못한 점을 반성해야 한다고 하니 이는 종단적 차원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주장입니다.

4

불교는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열린 진리관은 이웃종교를 대하는 기본 원칙이며 대화와 소통을 위한 출발입니다.

기독교 등 타 종교에도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표현만 다르다고 하니 이는 훼불적이며 조계종의 종지를 뒤 흔들고 교주 석가모니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모독하는 구절임이 분명 합니다. 타 종교에 진리가 있다 한다면 승려나 불자를 포기하고 교회나 성당에 나가되 되며 그 곳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 아니고 무엇인지요?

제아무리 이웃종교와 소통을 위한 방편이라 해도 표현이 다를 뿐 타 종교도 진리라 한다면 불교 무용론 그 이상의 의미입니다.

5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불교의 기본 담마()인 사성제, 팔정도, 삼법인, 육바라밀이 타 종교에도 표현의 차이지 그러한 내용이 있다는 마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6

이웃종교에 대한 인정과 관용이라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그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부 전문직 승려의 기독교 등 타 종교에 대한 비교종교학적 차원의 연구가 아닌 전 승려가 그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배우라는 종단적 선언을 한다면 어쩌자는 것인지요? 사찰에 십자가라도 걸라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진리를 향한 동반적 관계이며 이웃종교의 장점을 통해 내 종교의 부족함을 채우는 상호보완적 관계입니다.

유일신 및 유아적 교리, 절대적 신을 향한 주종관계의 종교에서 불교의 부족함을 채우자 하니 이는 그야말로 치광외변주의 마설이 아니고 무엇인지요?

8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실현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 나의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 타종교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지향하고 다른 종교인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법이어야 할 것입니다.

포교의 포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불교국가인 아시아의 각국에 2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개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칼라마경에도 잘 나와 있듯이 전법은 불자의 사명이며, 그릇된 종교, 세계관, 인생관을 바로잡아 주어서 해탈과 열반에 이르게 하는 기본적 의무이며 사명입니다. 이를 포기하겠다면 조계종이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종단에서 미주와 유럽에 교구본사를 설치하려는데 태생적으로 기독교인인 외국인들에게 포교를 포기 하자는 주장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9

이웃종교인들도 그들이 믿는 종교를 통해 평화와 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길은 다르지만 우리가 이르고자 원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불교를 지말무명이나 해결해서 안락을 구하는 종교로 격하시키고 있습니다. 근본무명의 해결인 해탈과 열반에 대한 기본적 개념과 구경목표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도 그 기조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해야 합니다.

10

내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이웃종교를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 그들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기본(근본)가르침을 무력화 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 그들의 종교를 이해한다 함은 유신론 창조론을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서 이해하라는 너무나 억지의 주장이 아니고 무엇인지요?

출처; 아쇼카 선언은 대폭 수정되어야 합니다(법응스님)

 

아쇼카 선언은 대폭 수정되어야 합니다-법.docx 아쇼카 선언은 대폭 수정되어야 합니다-법응.pdf 

 

 

 

위 표에서 8.23선언문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이 열린진리관에 관한 것이다. 이를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웃종교는 ‘이웃’에 있는 나 자신의 종교이며, 내 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
-
나의 종교가 우주 전체를 담고 있듯이 상대의 종교 또한 우주 전체를 담고 있다.
-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 인연의 차이일 뿐.
-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다.
-
진리란 특정종교나 믿음의 전유물이 아니다.
-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이다.

 

 

이 선언문을 보면 명분은 매우 좋다. 하지만 그런 명분때문에 불교적 진리에 대하여 많은 양보와 타협을 하였다. 진리는 항상 최선을 추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정치하는 것처럼 양보와 타협을 하여 진리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그래서 이번 선언을 조계종 내부의 화쟁위가 종교계에서 이슈를 선점하고 종단내부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저지른 일종의 불교쿠데타이자언론플레이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비불교적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독하는 듯한 훼불행위에 대하여 법응스님은 교구본사 주지스님을 상대로 보낸 편지에서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8.23 선언문과 이찬수목사의 글과 유사성

 

그런데 위 열린진리관의 내용중에 일부가 이찬수교수가 작성한 글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8.23 아쇼카선언문과 이찬수목사의 글과 유사성

No

8.23 아쇼카선언문

불교평론에 실린 이찬수 목사의 글

1

이웃에 있는 나 자신의 종교이며, 내 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관된 존재일 뿐 아니라 서로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나의 종교가 우주 전체를 담고 있듯이 상대의 종교 또한 우주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불교학자 김용표가현대 한국 불교도의 타종교에 대한 태도를” “교단적으로는 배타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교리적으로는 포괄주의적 해석을 하고 있으며, 종교 체험적으로는 다원주의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한 것이 그 보기다.

(불교학자 김용표의 말을 빌어 불교가 다원주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2

각자 인연의 차이일 뿐입니다. 각자의 다른 인연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은있는 그대로세계의 실상이며 아름다움입니다.

 

3

연기적 세계관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관점이며, 불교가 세상과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방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불교인들은 이웃종교를 진정으로이웃으로 생각하는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이웃종교인의 허물을 내 허물로 여기고 그들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데 충분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이웃종교를 질시하거나 경쟁하는 상대로 여겼던 적은 없었는지 반성합니다. 그리고 이웃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귀 기울여 배우려는 노력이 충분하지 못하였음을 반성합니다.

내심 불교는 그리스도교보다 한 수, 아니 여러 수 위라는 심리적 위안감만 가질 뿐, 구체적으로 무엇이 그런지 진지하게 연구하려는 자세는 별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아예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어떤 때는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직접 대하기, 한 자리에서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그리스도교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은 그저 자신의 우물에만 안주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종교적 의무 관심충실하지 못한 태도로 이어지게 된다.

4

불교는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열린 진리관은 이웃종교를 대하는 기본 원칙이며 대화와 소통을 위한 출발입니다.

상대를 알고 받아들이려는 적극적인 자세 없이는 언제까지고 자신의우물에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세상 모두를 내 지혜의바다로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5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내가 보건대 이들 종단 간에는 그저 외형적 혹은 문화적 차이가 존재할 뿐, 교리나 사상, 더 나아가 종교 체험의 정도에는 별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6

이웃종교에 대한 인정과 관용이라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그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의상이 오늘날 태어났다면일승이라는 우주적 구원의 진리 안에 그리스도교를 자연스럽게 포섭했으리라.

 

-불교는 나머지 10%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도 30%를 채우려는 그리스도교인의 노력 이상으로 기울여야 한다. 그럴 때에만 그리스도교가, 서양이 제대로 보일 것이다.

 

- 상대방의 세계에 매일만큼 그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치열한 매임과 속박의 과정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다가설 수 있는 것일테니까.

7

진리를 향한 동반적 관계이며 이웃종교의 장점을 통해 내 종교의 부족함을 채우는 상호보완적 관계입니다.

-불교가 정말로 깊고 넓다면의 것을 소화해 받아들핼 태도로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불교적 자세의 핵심에 속해 없다기보다기 때문이다. 그런데 받아들핼 태도로으려면 무엇보다 관심을 갖고 공부해야 한다. 공부해야 이해가 되고, 그래야 받아들핼 태도로게 된다. 모른 채 받아들인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 이 마당에 그리스도교를 차별의 대상으로 남겨두지 않고 적극 포섭하는 자세는 불교적으로 보더라도 필연적, 자연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8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실현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 나의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 타종교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지향하고 다른 종교인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법이어야 할 것입니다.

 

9

이웃종교인들도 그들이 믿는 종교를 통해 평화와 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길은 다르지만 우리가 이르고자 원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불교계 안에도 21세기 유신이 일어나야 할 시점에 와있는 것이 분명하다. 한국의 대표적인 고승인 원효의 일심(一心)사상과 여래장사상, 의상의 화엄일승(一乘)사상 등 최고 스승들의 뛰어난 사상들은 한결같이 일체의 차별적인 것들을 하나로 포섭해내려 한 시도였다는 사실에서도 오늘날 불교유신의 이유와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화쟁(和諍)을 자기 사유방식의 큰 틀로 삼았던 원효가 21세기에 다시 태어난다면 아마도 그리스도교를 화쟁 대상으로 삼았으리라

10

내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이웃종교를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 그들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내가 보기에 불교는 스스로에 대해 깊고 넓은 종교라는 자긍심만을 가졌을 뿐, 정작 다른 종교나 사상을 실제로 포용할 만큼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출처; 이찬수목사, 어느 불교적 기독교인이 본 불교

 

  어느 불교적 기독교인이 본 불교-이찬수목.docx 어느 불교적 기독교인이 본 불교-이찬수목사.pdf

 

 

 

 

위 표를 보면 8.23아쇼카 선언문과 아쇼카선언문 작성에 참여한 이찬수 목사의 글과 놀라우리 만치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불교가 교리에 자신이 있다면 기독교를 품으라고 하는가 하면, 불교인들도 기독교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불교와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진리는 같은 것이라는 어법으로 말하고, 결국 불교와 기독교는 같은 것이라는 뜻으로 쓰고 있다.

 

유일신교의 치밀한 선교전략

 

왜 이와같은 일이 불교내부에서 벌어졌을까. 그것은 유일신교의 치밀한 선교전략에 기인한 것인지 모른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유일신교가 득세하고 있는 곳은 한국과 필리핀 뿐이라고 한다. 필리핀은 서세동점시절 스페인의 점령이래 지난 400여년간 철저한 식민통치를 받아서 역사와 문화의 전통이 거의 없다시피한 국가로서 대다수가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50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화민족국가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만큼은 전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만큼 기독교가 득세하고 있다. 그렇게 되기 까지 여러요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들의 선교전략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유일신교에서는 선교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길거리와 지하철등 노방선교는 물론 각종 매스콤을 활용하기도 한다. 연예인들이 연말에 하나님 운운하며 수상소감을 발표하는가 하면 체육인들은 기도세레모니를 함으로서 교묘한 선교전략등을 구사한다. 정치적으로 시예산의 1%를 기독교복음에 활용하는 단체장들의 성시화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이런 현상은 장로정권이 들어서면서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2020년에 전국민의 75%를 기독교신자로

 

이렇게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선교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국민일보에 발표된대로 비전2020’때문일것이다. 2020년에 전국민의 75%를 기독교신자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통계상 최대종교로 되어 있는 불교를 부수어야 한다. 그래서 지난 십수년전부터 노골적으로 불상을 훼손하고 절에 불을 지르는 훼불행위를 자행하여 왔고, 최근에는 사찰이 무너지라고 기도회를 여는가 하면, 절안마당까지 들어와 땅밝기를 하고, 심지어 법당안에서조차 기도를 하는 충격적인 모습이 매스컴에 공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직접적인 타격이 매스컴과 국민에게 부정적으로 보여지자 이제 다른 방법을 찾게 된 것 같다. 간접적으로 타격을 가하여 부수는 방법 같은 것이다.

 

불교내부의 분열을 조장하여

 

이번 8.23선언의 내용을 보면서 기독교의 우회공격전략을 보는 듯 하였는데, 이와같은 간접적 타격전략은 일찌기 스리랑카에서 영국인들이 스리랑카 불교를 탄압하고 개종시키기 위한 방법과 매우 유사함을 알았다. 그렇다면 영국인들은 스리랑카불자들을 개종시키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사용하였을까.

 

마성스님의 스리랑카법난사에 보면 영국인들은 스리랑카의 불교를 말살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첫째, 불교도 내부의 분열을 조장

둘째, 기독교의 선교활동을 적극지원하여 국교화

셋째, 교육을 통하여 불교는 저속한 종교, 기독교는 문명의 종교라고 세뇌교육

넷째, 불교도에게 불이익을 주고, 기독교를 우대하는 정책

 

 

위와 같은 방법은 시대를 넘어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편향현상과 매우 유사하다. 모두 직접적인 타격대신 간접적으로 교묘하게 불교를 고립시키고 말살시키려는 전략이다. 이런 전략중에 첫번째인 불교도내부의 분열을 조장한다는 항목에 주의한다.

 

이번 8.23선언의 발표로 인하여 실제로 내부분열조짐이 일어나고 있다. 8.23선언을 찬성하는 그릅과 이에 대하여 반발하는 그룹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현상이 기독교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선교전략일 것이다. 그런 선언문을 만드는데 있어서 기독교측의 목사가 참여 하였다면 이는 기독교측이 불교도의 내부분열을 조장하였다는 혐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미국과 정반대이다.

 

카부와 주부

 

최근 미국에서 불교가 인기 있다고 한다. 기독교가 대부분을 차지 하고 있는 미국에서 불교를 믿는 불교도들이 점차로 증가추세에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고학력 중산층의 백인이라고 한다. 미국에서 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이유는 1950년대에 일본의 선불교가 크게 영향을 주었고, 이후 70년대와 80년대에 달라이 라마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리차드 기어스티븐 시갈, 샤론 스톤과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활약도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위빠사나 명상수행이라 한다. 부처님 당시부터 전해져 오는 이 수행법은 현대심리학과 접목되어 불교심리학이라는 독특한 학문으로 발전하였고, 현재 임상치료에서 70%정도가 적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불교는 미국의 고학력, 고소득 중산층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데, 특히 가톨릭을 믿으면서 불교식명상수행하는 사람들을 -(Ca-Bu,Catholic-Buddhist)’라 하고, 또 유대교를 믿으면서 불교식 명상수행을 하는 사람들을 -(Ju-Bu, Jewish-Buddhist)’라고 한다.

 

이처럼 신조어 카부와 주부가 만들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의 종교를 바꾸어 불교에 귀의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들에게 없는 불교의 명상기법만 받아 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진정한 불자라고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불교에 대하여 호의적으로 보고 불교적 명상을 하는 기독교인들 역시 불자들이라 보기 어렵다. 대체로 그런 그룹이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들인데, 이찬수목사도 그런 부류에 들어 갈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종교를 바꾸어 불교에 귀의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없이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조계종의 심장부에 들어가서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그것은 이번 8.23선언문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가 불교평론에서 밝힌 것과 같은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만일 8.23선언대로 불교가 기독교의 진리관을 받아들인다면 그런 불교를 무엇이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개독과 불독

 

인터넷에서 기독교를 비방하는 말중에 가장 널리 쓰이는 말이 개독이다. 이는 개같은 기독교라는 준말로서 기독교가 덩치만 컷지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기독교안티들이 즐겨사용하는 말이다. 반면 불교를 비하는 말은 무엇일까.

 

불교에도 불교를 비하는 말이 있다. 개독과 유사한 불독이라는 말이다. 이는 불교정신을 잃은 불교를 지칭하는 말로서 역시 개같은 불교라는 뜻이다.

 

기독교이든 불교이든 종교가 지향하는 근본정신을 잃었을 때 개같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 명칭이 개독과 불독으로 나타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 8.23선언으로 기독교의 교리도 진리라고 인정하자는 열린진리관에 따른 불교는 무어라 불러야 할까.

 

한국불교의 기독교따라하기

 

한국불교에서 기독교따라하기는 일상화 되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 두가지를 들라면 기도신격화된 부처님이다. 이런 용어는 자력신앙을 표방하는 불교의 본질과 먼 것으로서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이다.

 

이중 기도라는 용어는 기독교의용어로서 불과 몇십년전까지만 해도 불가에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불가에서 불공이라는 말은 있어도 기도라는 용어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기도라는 말이 일반화 되어 이제는 거의 모든 절에서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영향이어서일까 기도의 대상은 당연히 초월적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 불자들은 모든 소원을 들어 줄 것 같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부처님이나 보살에게 기도하는 것이 불교신행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신행방식은 스님들의 법문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열심히 기도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 말하는가 하면 부처님이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내려다 보고 있고 알고 있다고 법문하는 것이다.

 

이런 법문 방식에 대하여 어느 법우님은 기도의 대상을 부처님에서 유일신으로 바꿔치기 해 놓아도 모를 정도라고 하였다. 이처럼 알게 모르게 기독교따라하기가 되어 버린 한국불교 현실에서 이번 8.23선언문은 기도의 대상이 사실은 모두 같은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그렇다면 불자들이 굳이 절에 나갈 필요가 있을까.

 

한국불교를 지탱하는 것은

 

한국불교를 지탱하는 것은 노보살들의 신심쌈짓돈이라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한국불교의 스님들은 청소년포교에 등한시하면서 노보살을 위해서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한국불교의 스님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사설사암갖기 경쟁이 붙었다고 한다. 도시에서 포교당은 볼 수 없지만 재력있는 스님들은 노후를 대비하여 산중에 개인사찰이나 토굴 한개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 한다. 그 숫자가 무려 1,641개로서 조계종 사찰의 66%를 차지 하고, 매년 사설사암은 36개씩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같은 사설사암을 만드는 돈은 어디서 나왔을까. 대부분 신심깊은 노보살들의 쌈짓돈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 많은 노보살들을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라 한다. 그런데 노보살들이 나이를 많이 먹어서 무릎관절염으로 인하여 험준한 산길을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어떻게 될까.

 

 

 

 

2008년 8.27 범불교도 대회에서 절을 하고 있는 노보살

 

 

 

 

반기독교적 정서에 의존하여

 

노보살들이 불교를 믿는 이유중의 하나는 반기독교적 정서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집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먼 산길을 마다 하지 않고 기어이 올라가는 이유는 기독교가 정서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기독교가 득세하는 한국적 현실에서 불교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불자들의 반기독교적 정서에 기인하고 있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 선언으로 인하여 기독교에도 진리가 있고, 창조론등과 같은 것도 진리로 인정할 수 있고, 그런 진리를 배우자고 말하는가 하면, 결국 같은 진리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울 뿐이라고 말한다면 불자들은 큰 혼란을 겪을 것임에 틀림없다.

 

만일 8.23선언대로 불자들이 열린진리관을 갖게 된다면 한국불교를 지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노보살들이 무릎관절의 고통을 무릎쓰고 험한 산길을 올라가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진다. 열린진리관에 따라 결국 불교와 기독교가 같은 것이라고 인식한다면 바로 집 가까이에 있는 교회에 가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정타를 맞은 한국불교

 

8.23선언이후 한국불교는 어떻게 될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한국불교를 지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노보살들의 이탈이 가속화될 것이다. 나이가 들고 무릎이 아파 더 이상 산에 있는 절에 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집 가까이 있는 교회에 다닐 것이다. 열린진리관으로 인하여 반기독교적정서가 누그러뜨려져 불보살이든 유일신이든 누구든지 자신에게 복을 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결과 어떻게 될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비전2020이 실현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것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이제까지 기복과 방편으로 일관해 오면서 기도와 신격화된 불보살등으로 열심히 기독교따라하기를 해온 불교가 이번 8.23선언으로 결정타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다.

 

신조어 독불(督佛)’

 

8.23선언으로 열린진리관을 받아들인 불교를 무엇이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미국에에서 불교식 수행을 하는 가톨릭을 카부(Ca-Bu,Catholic-Buddhist)’라 하였다. 그렇다면 이미 알맹이는 다 빠지고 껍데기만 남은 불교는 기독교화 되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기독교따라 하는 불교라고 명칭을 부여 할 수 있다. 그런데 너무 이름이 길다. 그래서 새로 신조어를 만들었다. 기독교화된 한국불교는 독불교이다. 이를 두 자로 줄인다면 신조어 독불(督佛)’이 될 것이다.

 

 

 

2011-09-29

진흙속의연꽃

 

 

 

 

 

화쟁위, 아쇼카 종교평화 선언 내놓는다-1101.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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