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지금 기독교와 전쟁하자는 건가, 아쇼카선언은 꼼수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0. 21. 15:10

 

지금 기독교와 전쟁하자는 건가, 아쇼카선언은 꼼수다

 

 

 

길거리를 지나다 멋진 식당을 보았다. 유리창너머로 보이는 식당은 마치 고급레스토랑처럼 보였다. 동그란 탁자에 하얀천이 깔려 있고 의자는 고풍스런 모양이다. 그런데 그 식당은 보통식당이 아니었다. 교회의 식당이었다. 3층짜리 단독건물 전체가 교회인데, 1층에다 신자들을 위한 식당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가을이어서일까 목사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식당창가의 빈공간에 만발한 노란국화를 옮겨심고 있었다.

 

 

 

 

교회

 

 

 

교회건물 맞은 편에 큰 성당이 보였다. 교회가 불과 몇 십미터 간격으로 밀집해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성당은 한 동()에 히나 정도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성당의 건물은 크고 우람해 보인다. 그 성당도 보기에 당당해 보였다. 더구나 성당에 종마루 높은 곳에는 하얀 예수상이 서 있었는데, 두 팔을 벌려 어서 오라는 듯이 보였다.

 

 

 

 

성당

 

 

 

이렇게 도시의 곳곳에 교회와 성당일색이지만 정작 불교를 상징하는 절은 보이지 않는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초라하기 그지없다. 단독건물을 가진 절은 찾아 보기 힘들고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절이 종종 보인다. 어느 절의 경우 교회를 흉내낸 것처럼 철탑을 세우고 그 위에 만()자 네온싸인을 만들어 놓았지만 초라하고 옹색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도시의 사찰

 

 

 

이런 만자는 불교를 상징하는 기호인데 절뿐만이라 점집에서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만자 붙은 곳을 보았을 때 절은 큰집, 점집은 작은집정도로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점집

 

 

 

종교장사를 잘 하기 위하여

 

도시에서 교회는 부지기수이다. 구멍가게보다 더 많은 곳이 교회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이다. 이렇게 교회가 많은 이유는 종교장사가 잘 되기 때문일 것이다. 수요공급의 원칙에 따라 수요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생겨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정된 수요를 놓고 공급이 과잉되다고 보니 경쟁이 치열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도시의 종교시장은 교회끼리 경쟁한다.

 

동네 주민을 대상으로 서비스경쟁이 벌어지는데, 명사나 연예인 초청 간증회와 유치원, 청소년 공부방은 기본이고 동네 어르신을 위한 무료점심제공과 미용서비스등을 제공함으로서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몸부림치는 듯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교회앞에 진을 치고 사탕, 과자, 음료, 커피등을 제공하는가 하면 자신들의 교회에 나오라고 전도에도 매우 열중한다. 그런데 노방전도방식을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천주교도 이에 가세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전도방식은 가정집이나 사무실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지 대상이 된다. 특히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 매우 적극적이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종종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경우 거의 예외없이 여호와의 증인교도들이다. 그들은 노크를 하지만 결코 먼저 문을 열고 들어 오지 않는다. 안에서 들어오라고 해야만 들어온다. 이런 방식은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예의이자 전도의 원칙으로 보여진다.

 

보통 2 1조로 이루어진 그들의 옷차림은 보통사람들 보다 잘 차려 입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처럼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자신들을 소개 하는데 긴 말 하지 않고 준비한 책자를 주면서 읽어 보라고 한다.

 

 

 

 

여호와의 증인 책자

 

 

 

이렇게 도시에서는 노방에서든 가정집과 사무실이든 가리지 않고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를 알리기에 여념이 없다. 이런 시도는 아마도 이 나라가 완전한 기독교국가로 탈 바꿈할 때 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도시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이미지

 

도시의 종교시장에서 불교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절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믿으라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평생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시민들이 종종 불교를 접할 수 있는 때가 있다. 식당에서 밥먹을 때 보는 탁발승들이다. 그런 탁발승들이 정식승려인지 알 수 없으나 대부분 사이비승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탁발승들은 정중하게 노크하는 법 없이 일단 문을 열고 들어 온다. 그리고 아무말 하지 않고 목탁을 친다.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경우도 있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외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아무 허락없이 목탁부터 치는 탁발승에 대하여 식당주인은 좋아 할리 없다. 장사에 방해되기 때문에 천원짜리 한장 쥐어 주고 빨리 내 보낸다.

 

 

 

 

식당의 탁발승

 

 

이것이 도시민들이 일반적으로 불교와 대면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만자 붙은 점집이나 가끔 보는 탁발승의 이미지가 굳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도시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이미지는 극과 극이다. 기독교가 도시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교회끼리 서비스경쟁을 벌여서 좋은 이미지를 주고 있는 반면, 불교는 점집이나 탁발승등으로 인하여 그다지 좋지 않은 이미지를 주어서 때로 불교를 혐오스럽게 생각하기 까지 한다. 아파트 단지 정문에 세워진 어느 사찰의 일주문 건립당시 단청을 문제삼아 데모를 한 예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종교시장 경쟁에서 밀린 불교

 

이런 현상에 대하여 불교방송에서 불교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혜문스님은 불교와 기독교의 직업관에 대한 차이 때문이라 하였다. 기독교의 경우 목사들이 교회를 만드는 것은 하나의 생업차원이지만, 스님들은 가족을 부양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목사들처럼 죽기살기로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일년에 수 천명씩 쏟아져 나오는 신학대 졸업자들 때문에 목사들은 생존경쟁이 치열하여서 마치 벤처기업을 창업하듯이 개척교회를 만들기 때문에 도시에 교회천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교회는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목사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하나의 생계수단이다. 교회에 신자들이 많아야 교회가 유지되고 발전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장점과 단점을 모두 함께 가지고 있다. 많은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가 득세하는 세상이 된 것은 시장경쟁의 원리가 작동해서 일것이다. 그런 경쟁에 불교는 발도 담구어 놓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럴 생각도 없는 것 같다.

 

도시에서 불교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종교시장 경쟁에서 밀려 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만큼 한국에서 추구하고 있는 불교는 종교상품으로서 가치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판매할 스님들의 의욕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에 도시에서 불교는 없는 것과 다름이 없고, 설령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영향력은 기독교의 십분의 일(1/10)이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불교가 종교평화 선언을 하였다. 그것도 강제로 전법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빼도 박도 못하게

 

지난 8 23일 불교인의 종교평화선언이 발표 되었다. 이를 21세기 아쇼카선언이라 한다. 비록 초안이긴 하지만 불교인이라면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열린진리관등이 포함되어 있는 이 선언은 전격적으로 전국민을 대상으로 발표되었다.

 

이렇게 중요한 선언임에도 불구하고 불교계 내부의 의견도 듣지 않고 언론에 먼저 공개한 것은 절차와 의례를 무시한 일종의 불교쿠데타와 같은 것이다. 먼저 질러 놓고 나중에 수습하자는 것과 같다. 언론에 공개 되었으므로 꼼짝 없이 따라 갈 수 밖에 없도록 빼도 박도 못하게만들어 놓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조치에 대하여 비판을 하면 싸우면서 닯자는 것인가라고 말하며 마치 기독교 근본주의자나 이슬람원리주의자를 대하듯 불교근본주의자로 몰아 세운다. 타종교의 교리에 대하여 열린자제를 취하면서 내부적 지적에 대하여 닫힌자세를 취하는 이중적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마치 사실인것처럼

 

그런 선언문은 열린진리관과 전법의 원칙, 이 두 가지가 주된 내용인데 그 중 전법의 원칙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실현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다. 나의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 타종교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지향하고 다른 종교인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법이어야 할 것이다.

 

(조계종 화쟁위원회 도법스님,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 - 21세기 아쇼카 선언-, 2011-08-23)

 

  이학종 칼럼- ‘아쇼카 선언 토론회’ 참석.pdf

 

 

이 학종기자는 선언문에 개종을 목적으로 한 전법에 대한 내용이 왜 포함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한국의 스님들이나 불자들이 기독교의 전도사처럼 진돗개와 같은 전법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선언문에서 보는 전법의 원칙은 크게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는 전법의 목적이 개종하는 것이라고 사실을 왜곡한 것이고, 둘째는 이땅의 모든 스님과 불자들을 마치 기독교의 전도사와 같이 한번 물면 믿기 전까지 절대 놓아 주지 않는 개같은 존재로 취급하여 불자들을 모욕하였다는 사실이다. 불자들을 ()’같이 본 것이다.

 

번지수를 잘 못 짚은 전법의 원칙

 

이와 같은 전법의 원칙은 번지수를 잘 못 찾은 것 같다. 기독교에 적용해야 할 내용이 불교로 잘 못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혹여 불교사학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까. 중고등학교에 불교사학이 다수 있는데, 거기에서 개종을 목적으로 전법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참고로 우리나라 종교사학의 비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종교사학 비율

종 교

초등

중학교

고등학교

전문대

대학교

전체학교

5,646

2,935

2,095

158

191

불교

1

11(0.37%)

10(0.47%)

-

2

개신교

10

123(4.2%)

165(7.8%)

17

34

천주교

6

27(0.91%)

38(1.8%)

2

9

원불교

6(0.2%)

7(0.3%)

2

3

 

 

 

중학교의 경우 불교사학의 경우 11개교로서 전체학교에서 차지 하는 비율은 0.37%로서 극히 미미하다. 고등학교의 경우 10(0.47%), 대학의 경우 2개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개신교사학의 경우 중학교는 123(4.2%), 고등학교는 165(7.8%), 대학교는 전문대포함 51개이다. 이처럼 불교사학과 개신교사학의 숫자는 비교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불교사학에서 강제개종교육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8.23선언문이 작성되었다면 이는 번지수를 잘 짚어도 한참 잘 못 짚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강제개종사례는 개신교사학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강제종교교육의 실상

 

고등학교를 개신교사학에서 다녔다. 미국인 선교사가 세웠다는 그 학교는 입학한 모든 학생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겠다는 집념이 넘쳐 나는 것 같았다.

 

교회에 가서 도장을 받아 오라고 하고, 성경시간에 번호 순으로 불려 나가 기도를 해야 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번 방송조회, 일주일에 한 번 내지 두 번에 걸친 성경시간등 학사일정이 개신교 선교를 위해서 돌아가는 듯 하였다. 이것이 강제종교교육의 실상이다.

 

이런 교육과정을 거쳐 보지 않은 스님들이나 불자들은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타종교도 불교같은 것인양 착각하고 있다. 특히 어려서 어떤 연유로 인하여 동진출가한 스님들은 한 평생 절에서만 살기 때문에 종교문제로 인한 불편함이나 고통을 당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역이나 터미널에서 내렸을 때 극성스런 전도사들로 부터 스토킹에 시달린 것이 고작일 것이다.

 

 

 

스님을 스토킹하는 전도사

 

 

개신교 공포증 환자가 된 사연

 

하지만 종교가 다름으로 인하여 개종을 권유 받았을 때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불편함에 대하여 김나미작가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책에서 기술하였다.

 

 

오랜 세월 예장 보수파 개신교는 나에게 종교가 아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간 내가 본 보수 개신교는 독선과 배타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내 식구가 아니면 다 사탄으로 낙인찍는다. 내가 불교를 공부할 때 사탄, 마귀, 악녀로 몰렸던 적도 있고 이슬람 칼럼을 내보내니 집으로 찾아오고 불을 지르겠다는 협박편지가 날라 왔다. 독자로서 질문이 있다며 부드럽게 나를 유인해 만나자고 해놓고 예수 영접해 구원 받으라고 강요도 했다. 삐뚤어진 기독교 천국에서 갈수록 살기 힘들어 하다 결국 개신교 공포증 환자가 된 것이다.

 

(김나미 작가, 신앙지옥 불신천국)

 

 

김나미 작가가 개신교 공포증 환자가 된 과정을 소개 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잠시도 사람들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도무지 살아 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기독교을 겨냥해 만든 선언문?

 

이처럼 학교를 비롯하여 사회 전분야 걸쳐서 기독교화가 되었을 때 불자로서 살아가기가 매우 힘들어 진다. 종교가 다름으로 인하여 각종 불이익과 차별을 감수해야 한다. 한 마디로 불자로서 살아가기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자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서 이 나라가 불국토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런 바람과 달리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는 전법을 포기하는 듯한 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개종을 목적으로 한 전법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상대방은 개종을 목적으로 전도 하고 있는데, 개종을 목적으로 포교한 적이 없는 스님과 불자들에게 마치 개종을 목적으로 전법한 것인양 기정 사실로 인정하여 발표한 것이다. 그런 말은 기독교인들에게 했어야 바른 말이다. 기독교인들에게 해야 할 말을 불교인들에게 말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번째로 8.23선언은 이상론적 선언이다. 불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는 개종을 목적으로 한 전법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론이다. 하지만 이 선언은 제목이 말해 주듯이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이다. 불교인들이 실천해야 하는 선언인 것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한 번도 개종을 목적으로 한 접법을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선언을 한 것은 번지수를 잘 못 짚어도 한참 잘 못 짚은 듯한 선언이다. 

 

두번째로 8.23선언은 정치적 선언이다. 고도로 계산되 정치적 선언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을 겨냥해 만든 선언문이라는 혐의를 받기에 충분하다. 앞서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금 이 시각에도 전국 각지에서 기독교의 강제적 전도행위가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 그칠 것 같지 않기 때문에, 불교선언인 것처럼 가장하면선 기독교를 치는 꼼수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터넷에서 이 선언문을 접하고 어느 기독교인은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았다.

 

8.23 아쇼카선언은 꼼수이다

 

요즘 한창 인기 있는 프로 중의 하나가 나는 꼼수다(나꼼수)’라고 한다. 그 때 꼼수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일까. 인터넷 국어사전에 따르면 쩨쩨한 수단이나 방법으로 표기 되어 있다.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종의 편법이자 방편이라 볼 수 있다. 특히 방편은 불교에서 자주 활용되는 것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자주 사용된다.

 

이처럼 방편과 동의어인 꼼수를 이번 8.23선언문에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내용이 열린진리관전법의 원칙에 그대로 실려 있다는 것이다.

 

열린진리관에서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라는 표현은 사실 기독교에서 기독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라고 사용 했어야 한다. 기독교의 경우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으로 인하여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열린진리관은 불교에 적용하기 보다 기독교에 적용되는 것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불교인 스스로 반성하는 척 하면서 기독교를 자극 하는 고도의 정치적 술책이자 꼼수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이는 전법의 원칙에서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아니다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8.23 아쇼카선언은 꼼수이다.

 

불자들이 바라는 것

 

불자들은 불교가 이 땅에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온 국토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가득차기 바란다. 그렇게 바라는 이유는 지금 여기에서 불자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주위가 대부분 기독교도이다 보니 늘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기 일쑤이고 그런 경향은 점차 심화되어 가는 양상이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심산유곡에서 부처님의 전도명령을 어기면서 직무태만으로 일관하는 출가수행자들은 불자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설령 안다고 할지라도 도시로 나와 중생들과 함께 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평생 산에 살면서 국민들은 물론 불자들과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

 

도시에서 삶을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불자들은 불교가 널리 퍼져서 이 땅이 불국토로 바뀌는 것이 소원일 것이다. 기독교도 역시 자신의 종교가 이 땅을 지배하여 완전한 기독교국가로 탈바꿈하는 것을 바랄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종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모든 종교인들의 공통적인 바램이다. 그래서 종교평화선언은 상대방의 진리를 서로 인정한다는 도발적인 내용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선에서 그쳤어야 하였다. 그래서 마성스님은 자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종교 간에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타종교를 비방하거나 폄하하지 말고, 종교 상호간에 서로 존중하자.”

 

(마성스님, 불교의 근본을 흔드는 ‘아쇼카 선언’, 불교포커스 2011-10-01)

 

  불교의 근본을 흔드는 ‘아쇼카 선언’-마.docx  불교의 근본을 흔드는 ‘아쇼카 선언’-마성.pdf

 

 

불교가 좋아서 불자가 되었는데

 

하지만 8.23선언문을 작성한 조성택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기독교가 그러니 우리 또한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야 말로 패배주의자의 넋두리일 것이다라고 불자들의 바램을 나무라고 있다. 이는 불교를 종교를 가지고 있는 모든 불자들에 대한 모독이다. 불교가 좋아서 불자가 되었고, 불교 보다 더 좋은 종교가 있으면 기꺼이 가겠다라고 말하는 불자들이 있을 정도로 불교를 아끼고 사랑하는 불자들을 능멸하는 말이다.

 

대체 자신의 종교가 좋아 자신의 종교가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런데 그런 소리를 다시 한번 더 한다. 조교수는 교인수를 늘리는 것이 전법의 목적이 아니다. 종교는 상품을 파는 행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런 말은 있지도 않은 말을 꾸며내어 하는 것이다. 언제 스님들이 불교를 상품화하여 기독교처럼 판매한 적이 있던가.

 

맥도날드 햄버가 같은 기독교

 

그에 비하면 기독교의 교리는 완전히 상품화 되었다. 마치 맥도날드 햄버거 맛이 세계 어느 곳을 가나 맛이 동일하듯이, 기독교의 교리는 메뉴얼화 되어 있어서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똑 같다. 영화 밀양에서 본 예배장면을 보고서 그 장면이 매우 익숙하였는데, 그것은 고교시절 미션스쿨 당시 예배형식과 똑 같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맥도날드 햄버거가 매뉴얼대로 만들어져 전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동일한 맛을 유지하듯이 기독교 역시 매뉴얼화 되어 있는데, 바로 이것이 전형적인 상품으로서의 종교인다.

 

그런데 조교수는 불교인선언문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종교는 상품을 파는 행위가 아니라고 하면서 마치 불교가 상품화 된 것처럼 말하였다. 하지만 불교에서 불교를 상품화 한 적이 없다. 이는 도시에서 불교를 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다. 종교의 상품화는 기독교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처럼 8.23선언문의 대부분의 내용이 불교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해당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선언으로 바꾸어 선언한 것은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자, 기독교를 간접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꼼수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전법의 원칙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기독교와 전쟁하자는 건가

 

출가수행자들이 언제 타종교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뛴 적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8.23 불교인 선언문에서  전법의 원칙을 보면 분명히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말하는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측에 전달되어야 할 선언문이 번지수를 잘 못 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인들의 선언이라고 해야 할 아쇼카선언은 결국 칼 끝이 기독교를 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땅의 기독교들은 지금까지 선언문에 실려 있는 것과 같이 개종을 목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도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이번 8.23 아쇼카 선언문은 기독교에 대한 선전 포고와 같다.

 

지금 기독교와 전쟁하자는 건가

 

 

 

2011-10-21

진흙속의연꽃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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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종 칼럼- ‘아쇼카 선언 토론회’ 참석.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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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근본을 흔드는 ‘아쇼카 선언’-마성.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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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종 칼럼- ‘아쇼카 선언 토론회’ 참석.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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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근본을 흔드는 ‘아쇼카 선언’-마.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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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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