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그런데 해도해도 안 돼요”도법스님의 신동아인터뷰 기사를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2. 26. 14:44

 

 

 

그런데 해도해도 안 돼요도법스님의 신동아인터뷰 기사를 보고

 

 

 

논란의 한 가운데 있는 도법스님

 

도법스님이 논란의 한 가운데 서 있다.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사이트에 따르면 도법스님은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작년 봉은사 직영화 과정에서 외압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외압의 논란을 불러 일으킨 모임에 참석하였던 김영국거사는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반발하였다고 한다.

 

 

김영국 민주당 불교특위 위원장은 23 <불교닷컴>과 통화에서 "(외압이 없었다는 주장이)총무원장의 얘기를 들은 건지, 본인이 확실하게 알고 하는 건지 빠른 시일 안에 명확하게 답변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 "스님 7명, 호텔에서 MB 충성맹세" , 불교닷컴 2011-12-24)

 

 

이와 같은 논란과 함께 또 한가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도법스님의 불교관수행관에 대한 것이다.

 

신동아 인터뷰에서 도법스님은 내가 하는 게 진짜 수행이고 불교다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대체 도법스님이 이해하고 있는 불교와 수행관은 어떤 것일까.

 

조계종 개혁의 총사령관

 

도법스님은 조계종 화쟁위원장으로서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소위 ‘21세기 아쇼카 선언을 주도하였다. 지난 8 23일에 불교계의 제도와 절차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언론에 발표하여 대서특필하게 만들었었는데, 불교계내에서 격렬한 찬반논란을 야기시킨 바가 있다.

 

비록 본선언은 종정스님의 유보지시에 따라 불발로 그치고 말았지만 그 이후에 벌어진 스님의 반발을 보면 반드시 선언을 이끌어 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그런 도법스님은 어떤 분일까.

 

도법스님이 인터뷰하였다는 신동아 기사를 검색하여 보았다. ‘도법스님신동아를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 신동아 실린 장문의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신동아 12월호에 실린 기사를 보면 도법스님이 생각하고 있는 불교관, 수행관, 인생관, 생활관등 도법스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해 준다. 지난 10 29일 목동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사무실에서 인터뷰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에 대한 논란이 가열차게 진행되던 때이다.

 

기사에서 도법스님에 대하여 조계종 개혁의 총사령탑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주었다. 이는 도법스님이 자성과 쇄신 결사 추진본부본부장을 맡고 있는데, 이 기구는 화쟁위원회와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종교평화위원회를 합친 기구이기 때문에 한국불교 개혁의 최선봉에 서 있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불교 개혁의 총사령관격인 도법스님의 불교관은 어떤 것일까.

 

나는 내가 하는 게 진짜 수행이고 진짜 불교라고 생각해요.”

 

도법스님은 인터뷰에서 나는 내가 하는 게 진짜 수행이고 진짜 불교라고 생각해요.”  이에 대하여 질문자가 왜 그렇죠?”라고 묻자 도법스님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한국 불교가 자랑스러운 대안으로 얘기하는 게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예요. 최근엔 성철 스님의 봉암사 결사를 예로 들지요. 그런데 둘 다 산중에서 고고하게 수행 잘하자는 얘기예요. 출가자 중심이에요.

 

그런데 부처님이 하신 불교는 그게 아니에요. 수행 잘하는 건 당연한 거고요. 부처님은 당신 자신과 불교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불교를 하지 않았어요. 중생과 세상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불교는 존재하고 자신도 그걸 위해 일생을 바치고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런 것을 제대로 계승하는 게 진짜 불교라는 생각에서 이런 운동을 해온 겁니다.”

 

(신동아 12월호, 생명운동 도법 스님의 쾌도난담)

 

  생명운동 기수 도법 스님의 쾌도난담 -신동.pdf  생명운동 기수 도법 스님의 쾌도난담-신동.docx

 

 

도법스님은 한국불교의 정신적인 지주나 다름없는 지눌과 성철스님의 행태에 대하여 먼저 비판한다. 중생과 유리된 채 산중에서 자신만의 도만 닦는 불교와 수행관에 대하여 부정한다. 그 대신 자신이 생각하는 불교는 중생과 세상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불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의 목적이 이고득락이라고?

 

불교의 목적은 무엇일까. 어느 스님은 어느 강연에서 불교의 목적이 이고득락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 나오는 말이라 한다. 불교의 목적이 고통의 소멸인 것은 맞지만 락()을 추구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맞는 것일까.

 

()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행복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불교의 목표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일까. 이는 사성제를 몰라서 하는 말일 것이다.

 

사성제에서 부처님은 고통만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고통의 소멸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한마디로 열반을 이야기 하고자 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목적이 이고득락이라고 한다면 굳이 불교를 믿지 않아도 될 것이다. 타종교를 믿어도 행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종교를 믿지 않아도 행복 추구는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기필코 이를 구원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법스님은 인터뷰에서 이고득락적 발언을 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 이 딱 두 마디예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세상에 나의 존재가치보다 더 귀한 건 없다는 뜻이고요.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온 세상 생명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니 내가 최선을 다해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겠다는 뜻입니다.”

 

(신동아 12월호, 생명운동 기수 도법 스님의 쾌도난담)

 

 

이것이 도법스님이 알고 있는 불교의 목적일 것이다. 대승경전에 있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이다. 이는 대승에서 부처님의 출현에 대하여 구원론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에 대한 해석에 대하여 어떤 이는 모든 중생이 고통속에서 헤매고 있으니 내 기필코 이를 구원하리라”라고도 보기 때문이다. 중생의 안락과 행복이 불교의 목적이라고 보는 스님의 견해와 같은 것으로 본다.

 

더 이상 다시 태어남(再生)은 없다

 

하지만 초기경전의 내용은 이와 아주 다르다.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도 여기서 정해진 법칙이다.

 

 보살은 태어나면서 두 발로 가지런히 땅에 서서

 북쪽을 향해 일곱 발자국을 걸어간다.

 

 하얀 일산이 펴질 때 모든 방향을 굽어  

 

 '나는 세상에서 최상이요

 나는 세상에서 제일 어른이요,

 나는 세상에서 으뜸이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생이다.

 더 이상 다시 태어남(再生)은 없다.'라고

 

 대장부다운 말을 한다.

 

 이것이 여기서 정해진 법칙이다.”

 

(마하빠다나경-Mahapadana Sutta-대전기경, 디가니까야 D14)

 

  마하빠다나경(Mahapadana Sutta 대전기경 D14).docx  마하빠다나경_Mahapadana Sutta 대전기경 D14_.pdf

 

 

이것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탄생게와 다른 부분이다. 즉 초기경에서는 열반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반에 들어 다시는 나고 죽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불교의 진정한 목표임을 부처님은 선언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열반을 성취하기 위하여 부처님은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핵심가르침을 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로 가면 근본 가르침이  존재론적 유아사상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도법스님은 중생의 안락과 행복이 불교의 목표라 말하고 자신의 독특한 사상관인 생명평화를 주장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상형문자같기도 하고 부적같기도 한

 

도법스님은 관계론적 세계관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도법스님이 주장하는 생명과 평화사상에 대한 것이다.

 

아직까지 한국불교에서 어느 누구도 시도한 바 없는 도법스님만의 독특한 생명평화사상은 스님의 트레이드마크와 다를 바 없다. 그런 사상의 전파를 위하여 매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도법스님은 하나의 그림을 선 보인다. 그 그림은 다음과 같다.

 

 

 

 

 

 

 

도법스님의 그림

우주 질서를 표현한 것이라며 도법 스님이 내보인 그림

사진 :신동아 12월호, 생명운동 기수 도법 스님의 쾌도난담

 

 

도법스님이 만들었다는 이 그림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마치 고대 상형문자같기도 하고 부적같기도 한 이 그림에 대하여 도법스님은 다음과 같이 만들게 된 경위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왼쪽 원이 태양, 오른쪽 원이 달이다. 사람 머리 위의 화살표 모양이 나무, 즉 식물이다. 왼쪽 형상은 새와 물고기의 조합이다. 오른쪽은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신동아 12월호, 생명운동 기수 도법 스님의 쾌도난담)

 

 

부적같이 생긴 그림은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삼라만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 한 것이다. 이는 생명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생명평화사상과 아쇼카선언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에 대한 설명이라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태양 없이 내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가. 낱낱의 존재는 그물코처럼 얽혀 있죠. 그물코처럼 서로 의존하고 영향과 도움을 주고받죠. 그것이 불교의 인드라망 세계관입니다.

 

물이 곧 내 생명이고 숲이 곧 내 생명입니다. 새와 물고기가 편 갈라서 우리끼리 살겠다고 할 수 있나요? 더불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서로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배려하고 협력하고 나누고 살아야죠.

 

그걸 불교에서는 자비라 하고, 기독교에서는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거죠.”

 

(신동아 12월호, 생명운동 기수 도법 스님의 쾌도난담)

 

 

스님은 모든 존재가 그물코처럼 얽혀 있다고 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법계연기에 대한 것이다. 특히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가 서로를 창조한다는 사사무애적 관점을 설명하고 있는 듯 하다.

 

이렇게 얽히고 설킨 관계 속에 있는 것이 모든 존재이기 때문에 공생하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계연기적 관점으로 본다면 불교의 자비사상이나 기독교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사상 역시 같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계연기와 자신만의 독특한 생명평화사상의 관점에 따라 21세기 아쇼카 선언이 나왔을 것이다. 그런 대목을 아쇼카선언 초안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웃종교는이웃에 있는 나 자신의 종교이며, 내 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관된 존재일 뿐 아니라 서로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나의 종교가 우주 전체를 담고 있듯이 상대의 종교 또한 우주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 인연의 차이일 뿐입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 21세기 아쇼카 선언-, 2011-8-23)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docx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pdf

 

 

도법스님이 추진하던 아쇼카선언은 본선언이 불발되었다. 그런데 아쇼카선언 초안을 보면 모든 종교는 같다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도법스님의 독특한 생명평화사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법스님의 간화선에 대한 회의

 

그런 도법스님은 불교에 대하여 회의하고 있는 것으로도 비추어진다. 이에 대한 것이 불교평론에 실린 마성스님의 글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스님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수행자임을 자처하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수행 하면 참선, 선방 수좌, 선사를 떠올리는 풍토이기 때문에 선방 못 가고 참선 못 하고 수좌가 아닌 경우 수행을 제대로 못 하는 것이라고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그러면 이처럼 훌륭한 간화선을 통해 수행한 스님들은 얼마나 많이 깨달음을 이루었는가?

 

도법 스님은

 

“(조계)종단 출가 수행자가 비구·비구니를 포함하여 대략 1 2천 명이라고 한다. 50여 년 전체를 합치면 연인원 50여만 명이 수행에 진력해온 셈이다. ……그동안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함께 살기도 하고 쟁쟁한 소문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면 깨달았다고 큰소리쳤던 사람이 이상하게 된 경우가 의외로 많다. 실제 괜찮게 된 경우는 50만 명 중에 20여 명 정도를 넘지 않는다. 20여 명도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대중이 반신반의하는 것을 보면 깨달은 도인이 기대했던 것처럼 매력적이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볼 때 수행하여 이루어낸 결과가 너무 초라하고 허망하다.”

 

고 탄식하고 있다.

 

(한국불교의 수행법, 무엇이 문제인가 / 마성, 불교평론 2011-09-01)

 

 

도법스님은 한국불교에서 최상승이라고 말하는 간화선에 대한 회의감을 표출하고 있다. 이는 자신도 수행을 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해도 해도 안 돼요.”

 

신동아 인터뷰에서 도법스님은 참선을 10년 가량하였다고 하였다. 그 때 깨달음을 얻었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존재 이유에 대한 원초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몸부림쳤어요. 그 문제를 안 풀고는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해인사에 가 살면서 성철 스님도 뵙고 법정 스님도 모시게 된 거죠.

 

그런데 경전을 봐도 법문을 들어봐도 결론은 같더라고요. 참선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그래서 경전 때려치우고 선방으로 가서 참선을 시작했죠.

 

그런데 해도해도 안 돼요. 책이나 법문대로라면 잘돼야 하는데 안 되는 거예요. 대단히 실망스럽고 좌절감이 컸죠. 그런데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도 별수 없더라고요. 선배도 친구도. 어른이라고 큰소리치는 분도. 말씀 들어봐도 별로 매력적이지도 않고. 성철 스님에게도 그다지 끌리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그분이 훌륭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어쨌든 그러다보니 선방에 대한 회의가 생겼습니다. 선방 사람들이 정직하지도 성실하지도 않더라고요. 잘 안 되면 그걸 솔직히 인정하고 함께 대화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는데, 다들 뭔가 되는 것처럼 근엄한 모습만 보이는 겁니다. 말 안 해도 보면 다 알잖아요. 그 풍토에 좌절해 선방을 나왔죠.

 

나가서 내 방식대로 해보자고. 그렇게 내 마음 소리에 따라 갈지자로 왔다 갔다 하면서 여기까지 온 거죠.”

 

(신동아 12월호, 생명운동 기수 도법 스님의 쾌도난담)

 

 

경전도 보고 참선도 해 보았지만 해도 해도 안되더라는 것이다. 이는 다른 선승들도 마찬가지라 한다. 이것이 간화선에 대한 실망이고 한국불교에 대한 회의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선방을 뛰쳐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방식대로 불교를 해석했다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본래면목을 보는 것이라 한다. 오리지널 페이스(original face)를 보는 것이 깨닫는 것인데, 이는 다름아닌 선종의 직지인심, 견성성불에 대한 것이다. 본래성품, 불성, 진여, 한물건, 참나, 본마음, 본래면목등을 말한다.

 

이는 주류불교와는 거리가 있는 여래장사상을 말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깨달음이란 탐진치를 소멸시키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출가이유도 탐진치를 소멸하여 열반을 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이런 좀이 주류불교와 여래장사상계열의 불교와 커다란 차이일 것이다.

 

이처럼 출발이 다르니 결과 또한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도법스님 역시 한국불교에 있어서 어느 출가자들이 그랬듯이 선방에서 참선을 통하여 본래면목을 찾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래면목을 보지 못하였을 경우 출가의 의미가 크게 퇴색되고 그 의지 또한 꺽여지지 쉬웠을 것이다. 이는 주류불교에서의 출가이유와 다른 것이다.

 

출가이유

 

신동아인터뷰기사에 따르면 도법스님은 17세에 출가하였다고 한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고 한다. 유복자로 태어난 스님은 어머니가 받아온 사주팔자에 따라 결정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이는 자의에 의한 출가가 아니라 보호자에 의한 출가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출가유형은 우리나라 승단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구한말 크게 선종을 부흥시킨 경허스님의 경우도 9세에 출가하였는데, 이는 보호자의 의하여 절에 맡겨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동진출가한 스님들의 출가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초기불교에서 출가이유는 크게 다르다. 이는 초기경전에 잘 묘사 되어 있다.

 

 

랏타빨라 경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을 보면

   어리석어 얻은 재물을 보시할 줄 모르네

   욕심스럽게 재물을 쌓아두고

   더욱더 감각적 쾌락을 열망하네

 

   땅을 무력으로 정복한 왕은

   바다에 아르기까지 온 땅을 다 통치하고

   아직도 바다 이쪽에 만족하지 못하고

   바다 저쪽까지 탐내네

 

   왕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와 같이

   갈애를 버리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면

   아직 만족하지 않은 채 시체를 떠나네

   세상에서 감각적 쾌락은 만족이 없네

 

   친족들은 울며 머리를 쥐어뜯고

   "아이고,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네"

   수의로 감싸서 운반하여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태우네

 

   재물은 뒤에 남긴 채 수의 한 벌만 입고

   불타는 막대기에 찔리면서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네

   죽는 사람에게는 친족도,친구도

   안식처가 될 수 없고 의지처가 될 수 없네

 

상속자가 재물을 가져가고

   사람은 업에 따라 제 갈 길을 가야 하니

   죽을 때는 자식도, 아내도, 재물도, 토지도

   아무것도 그를 따를 수 없네

 

   재물이 많다해서 장수할 수 없고

   부유함이 늙음을 몰아낼 수 없네

   "인생은 짧다" 고 모든 성인은 말하네

   영원한 것은 없으며 변화할 뿐이라고

 

   부자든 가난하든 똑같이 죽음이 오네

   성인도 어리석은 자도 똑같이 죽음이 오네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음에 의해

   마치 때려눕힌 듯 누워 있지만

   현명한 자는 죽음이 와도 흔들리지 않네

 

   재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혜이며

   그 지혜로움으로 궁극의 목표를 얻네

   어리석음으로 사람들은 악행을 저지르고

   세세생생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네

 

   달콤하고 즐거운 수많은 감각적 쾌락이

   여러 면으로 마음을 괴롭히니

   감각적 쾌락에 얽매임이 위험을 보고

   대왕이여,나는 출가를 하였네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사람도 그와 같네

   젊은이든 늙은이든 몸이 부서지면 떨어지나니

   대왕이여, 이것을 보고 나는 출가하였네

   사문의 삶이 확실히 더 훌륭하다네.

 

 ( 맛지마니까야  82, 랏타빨라 경, MN82, Ratthapala Sutta,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이것이 초기불교에서의 출가이유이다. 이는 자력에 의한 출가이다. 본래면목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고 죽는 일 없는 윤회를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다.

 

또 하나 출가이유에 대한 이야기가 담마딘나 비구니이야기 일 것이다. 담마딘나의 전남편인 위사카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아나함(불환자)이 되었다. 아나함이 되면 감각적 욕망(탐욕)과 적의(성냄)가 소멸되어 ‘불환자’가 된다. 죽으면 색계 ‘정거천’에 태어나 열반에 들기 때문에 다시 이 욕계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불환자가 되면 모든 ‘감각적 욕망’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부부생활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아나함이 되면 출가하여 상가의 일원이 되어 성스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라 한다. 이것이 주류불교에 있어서 출가이유가 될 것이다.

 

생존욕구와 이기적욕구

 

도법스님은 불자들이 보기에 매우 자유자재한 삶을 살아 온 것 같다. 마치 거리낌 없는 무애행을 보는 듯 하다. 그런 것중의 하나가 스님의 성()에 대한 인식도 포함된다. 이것 역시 생명평화사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스님은 식욕, 성욕 등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그렇죠. 그런데 생존 욕구와 이기적 욕구는 다릅니다. 우린 이걸 혼동해요. 생존 욕구는 선악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아먹고 살도록 돼 있어요. 그걸 두고 악한 놈이라 할 수 없지요. 일종의 생명 욕구로 이기적 욕구와는 다르죠.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 쌓아놓는 것 봤습니까. 생존 욕구는 생존 문제만 해결되면 끝나요. 토끼가 널려 있어도 손 안 댑니다.

 

그런데 이기적 욕구는 자꾸 쌓아놓는 거죠. 우리의 문제는 생존 욕구가 아니라 이기적 욕구죠. 이건 인간에게만 있는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생존 욕구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지만, 이기적 욕구는 끊임없이 관리하고 다듬고 창조적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신동아 12월호, 생명운동 기수 도법 스님의 쾌도난담)

 

 

스님은 생존욕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 생존욕구의 대표적인 것 두 가지를 들라면 식욕과 성욕일 것이다. 특히 성욕에 대한 스님은 생존 욕구죠. 생명 욕구이고.”라고 답한다. 물론 이런 욕구가 생존이 아닌 소유욕으로 나타날 때 또 이기적으로 나타날 때 문제가 된다고 한다.

 

성에 대한 스님의 생각은

 

성에 대한 스님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한다.

 

 

스님도 인간이니 그런 욕망이 있겠죠?

 

당연하죠. 맨날 X질하고 싶죠. 그것이 피할 일입니까.”

웃음을 꾹 누르며 질문을 이어갔다.

 

가장 힘든 게 뭡니까.

 

여자 생각이죠.”

 

·담배 하는 스님도 많죠?

 

얼마든지 있죠.”

 

그런 행위는 이해할 만한 건가요?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죠. 그렇지만 정당하거나 괜찮다고 할 순 없죠. 어떤 살인행위가 이해된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화될 순 없잖아요? 한두 번 실수할 순 있지만 그것이 상습화되고 관성이 되는 건 안 되죠.”

 

스님들 중에는 속세를 다 겪어봐야 한다며….

 

그건 자기 합리화인데 옳지 않다고 봅니다. 요석 공주와 연애한 원효가 성욕의 감옥에 갇혀 살았는가. 거기에 지배받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거죠. 술을 먹었지만 늘 술을 못 먹어 전전긍긍했던가. 절대 아닙니다. (욕망에서) 자유로우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성욕도 괜찮다고 봅니다.”

 

얽매이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죠. 물론 몰염치해서 자유로운 것과는 달라요. 정말로 자유로운 사람은 여성과 어떤 필요나 상황에 의해 성관계를 가졌다 하더라도 거기에 매이지도 않거니와 여성에게 상처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잘 안 되죠.”

 

스님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있죠. 술도 먹어봤고. 그렇지만 나는 그런 걸 안 하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에 과오도 있고 오류도 있었던 걸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고 극복하려 하죠. 사람이 별 수 있겠어요? 다 그만그만하죠.”

나는스님 얘기를 들으니 속이 다 시원해진다며 그예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성적인 욕망이 그만큼 참기 힘들다는 거죠?

 

가장 힘들죠. 생명 욕구의 하나인데. 식욕 못지않죠.”

 

스님도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거죠?

 

그렇죠. 다만 끊임없이 그것에서 자유로워지도록 애쓰는 거죠. 그리고 그건 에너지예요. 이 에너지가 승화되도록 노력해야죠. 모성애는 자식에게만 작동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승화되면 내 자식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나타나죠. 그걸 우린 인류의 모성애라고 표현합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그것이죠.”

 

(신동아 12월호, 생명운동 기수 도법 스님의 쾌도난담)

 

 

스님의 성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다. 어느 누구도 성문제에 있어서 자유스러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스님은 수행자가 60이 되도 안심할 수 없다고 한다. 실제로 그 나이에 파계하여 속퇴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어느 스님은 불교TV에서 말하기를 관뚜껑을 닫을 때 까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 출가자의 성에 대한 문제라고 하였다.

 

도법스님은 성욕은 식욕과 마찬가지로 존재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근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참기 힘든 것이라 한다. 그래서 자신도 성적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토로한다. 다만 성적욕구를 승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마도 생명사상이 나오게 된 배경이 이와 같은 근본적인 욕구에 대한 승화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부처님의 제자들은

 

하지만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에 관한 문제는 극복가능한 것이라 한다. 조준호교수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붓다의 제자들 가운데는 출가 후라도여인을 보자 여색에 마음이 어지러워져서 욕정이 일어났으나스스로 다잡아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애욕에 대한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함을 다지는 경우도 나타난다.

 

특히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유혹적인 옷을 입은 여자를 보아 성적 욕망이 엄습하여 경도되지 않도록 붓다는 제자들에게 늘 ‘sati를 확립(四念處)‘한 상태를 유지하기를 권장한다.

 

sati가 확립된 상태란 어떠한 유혹으로부터도 휘말리지 않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한 경전에서는 박쿨라 비구가 오랜만에 어렸을 때 친구였던 한 나행(裸行) 사문을 만난다.

 

 

그런데 그 나행 수행자 친구는출가한 후 80년 동안 몇 번이나 성교를 해보았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불교 승려는 성교는 그만두고 80년 동안에 욕상(欲想)이라도 일으킨 기억이 있는가라고 묻게 하고 그 답으로도를 배운 지 80년 동안 아직 한 번도 욕상이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까지 말하는 예에서 출가한 불교도의 성생활 정도를 가름할 수 있다.

 

( 성적욕망을 어떻게 보는가 / 조준호, 불교평론 열린논단 2011-10-17)

 

  [열린논단] 불교는 성적욕망을 어떻게 보는.docx  [열린논단] 불교는 성적욕망을 어떻게 보는.pdf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늘 알아차림을 확립하였을 때 성적 욕망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여섯감각기관이 여섯감각대상에 대하여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있을 때 자동적으로 는 지켜지고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있다면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유혹적인 옷을 입은 여자를 보아도  성적 욕망이 엄습하지 않을 것이라 한다. 더구나 경에서 80년동안 성교는 커녕 욕상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출가수행자가 성욕에 휘둘리지 않고 알아차림으로 극복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출세간적 삶을 지향하고 열반을 추구하는 수행자적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는 것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는 것이 성행(性行)이라 한다. 성생활을 벗어나는 것이 출가의 시작이고, 출가의 완성 역시 성욕을 극복하는 것이라 한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성과 속, 성인과 중생의 차이는 마치 종이 한장의 차이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완전한 해방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성행은 어떤 것일까.

 

성행위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기도 하지만 도법스님이 지적하였듯이 소유하려고 하였을 때 이기적인 욕망이 발현된다. 그때의 감정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조준호교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성은 대단히 복합적인 콤플렉스로서 위선, 조작과 왜곡, 초조, 불안, 강박, 히스테리, 우울, 스트레스, 불만족, 의심, 시기, 시샘, 질투, 시기, 결핍과 상실, 박탁감, 공허감, 수치심, 죄책감, 죄의식, , 미움, 신경질, 짜증, 분노, 폭력, 자학과 가학, 회피와 도피, 절망, 중독, 맹목 등과 같은 갖가지의 뒤틀린 심리와 또다른 차원의 욕망과 내연(內緣) 관계에 있다.

 

성은 이러한 부정적인 정서와 감정 그리고 의지로 표출하기도 하고, 거꾸로 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성욕은 또다른 욕망인 물욕, 권력욕, 명예욕, 식욕, 수면욕 그리고 생명연장욕망 등과 내밀하게 상의상관해 있다.

 

(불교는 성적욕망을 떻게 보는가 / 조준호, 불교평론 열린논단 2011-10-17)

 

 

성을 단지 생명연장이 아닌 소유와 이기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시기, 질투 등 온갖 해로운 마음은 다 일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자기중심적 성적욕망이 도사리고 있는 한 결코 성스런 도의 길로 갈 수도 없고 도 또한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평화를 위한 도법선언

 

도법스님은 조계종 개혁을 총괄하는 총사령탑에 있는 총사령관과 같은 위치에 있다. 그런 스님이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던 것이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선언)’이었다.

 

하지만 이 선언은 본 발표를 앞두고 종정스님의 유보지시로 인하여 좌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 상반기 안으로 다시 추진하겠다는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그런 선언문은 과연 전불교인들을 만족시키는 선언문일까.

 

도법스님은 선언문의 제목에서 불교인 선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도법스님의 선언문이나 다름 없다. 이는 신동아 인터뷰에서 나는 내가 하는 게 진짜 수행이고 진짜 불교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도법스님이 생각하는 불교이고 수행방법이다. 한국불교와 간화선에 실망한 스님이 나가서 내 방식대로 해보자고. 그렇게 내 마음 소리에 따라 갈지자로 왔다 갔다 하면서 여기까지 온 거죠.” 라고 말한 것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자신의 방식대로 갈짓자 행보를 거쳐 만들어진 것이 생명평화사상일 것이다. 그림으로도 표현된 생명사상은 도법스님이 만든 독특한 사상이다. 이런 사상을 기반으로 한 종교평화선언에 불교인을 붙이는 것은 지나치다. 차라리 조계종선언으로 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종교평화 실현을 조계종선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조계종 내부적으로도 반발이 심하다.

 

그렇다면  21세기 아쇼카선언의 제목인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선언  종교평화를 위한 도법선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2011-12-2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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