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기도하지 마라” 나꿀라삐따경 (S21.1)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 25. 10:36

 

 

 

기도하지 마라나꿀라삐따경 (S21.1)

 

 

 

사람들은 병이 나면 초월적 존재에게 의지하려 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신의 은총이나 불보살의 가피는 없다. 그렇다면 병이 났을 때 부처님은 어떤 말을 하였을까.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나꿀라삐따경

(Nakulapitusutta, 상윳따니까야 S21.1.1.1,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박가의 쑹쑤마라기라에 있는 베싸깔라바나의 미가다야에 계셨다. 그때 장자 나꿀라삐따가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앉았다. 한쪽으로 물러앉은 장자 나꿀라삐따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장자]

"세존이시여,

저는 늙고 노쇠하고 고령인데다가 만년에 이르러서는 몸에 병이 들어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립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더구나 세존과 바른 마음을 깨우쳐주는 수행승들의 모습을 결코 친견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오랜 세월 안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제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제게 가르침을 베풀어 주십시오."

 

[세존]

"장자여,

참으로 그러하구나. 장자여, 참으로 그러하구나. 장자여, 그대의 몸은 허약하고 낡아버렸다. 장자여, 그와 같은 몸을 이끌고 다니면서 잠시라도 하물며 건강하다고 자칭한다면 어리석은 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그것에 관해 이와 같이 '나의 몸은 병들어도 나의 마음은 병들어서는 안된다' 라고 배워야 한다.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그러자 장자 나꿀라삐따는 세존께서 하신 말씀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오른 쪽으로 돌아 존자 싸리뿟따가 있는 곳을 찾았다. 가까이 다가와서 존자 싸리뿟따에게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앉았다. 한쪽으로 물러앉은 나꿀라삐따에게 존자 싸리뿟따는 이와 같이 말했다.

 

[싸리뿟따]

"장자여,

그대의 모든 감관들이 기쁨으로 빛나고 안색이 청정합니다. 오늘 세존을 친견하고 설법을 듣지 않았습니까?"

 

[장자]

"존자여,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존자여, 저는 지금 세존께서 가르치신 설법으로 감로와 같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자여, 바로 제가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앉았습니다. 한쪽으로 물러앉은 저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늙고 노쇠하고 고령인데다가 만년에 이르러서는 몸에 병이 들어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립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더구나 세존께서 수행승들과 함께 바른 마음으로 수행하시는 모습을 결코 친견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오랜 세월 안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제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제게 가르침을 베풀어주십시오.'

 

이와 같이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제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장자여, 참으로 그러하구나. 장자여, 참으로 그러하구나. 장자여, 그대의 몸은 허약하고 낡아버렸다. 장자여, 그와 같은 몸을 이끌고 다니면서 잠시라도 하물며 건강하다고 자칭한다면 어리석은 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그것에 관해 이와 같이 나의 몸은 병들어도 나의 마음은 병들어서는 안 된다고 배워야 한다.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존자여, 이와 같이 저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감로와 같은 설법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싸리뿟따]

"장자여,

그런데 그대는 세존께 이와 같이 '세존이시여, 어떤 점에서 몸이 병들고 마음도 병든 것입니까? 그리고 어떤 점에서 몸이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은 것입니까?' 라고 거듭 질문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장자]

"존자여,

저는 존자 싸리뿟따를 뵙고 그 말씀하신 바의 뜻을 알려고 멀리서 온 것입니다. 존자 싸리뿟따께서는 그 말씀하신 바의 뜻을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싸리뿟따]

 "장자여,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것을 잘 듣고 숙고하십시오."

 

[장자]

"존자여,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장자 나꿀라삐따는 존자 싸리뿟따에게 대답했다. 존자 싸리뿟따는 이와 같이 말했다.

 

[싸리뿟따]

"장자여,

 어떤 점에서 몸이 병들고 마음도 병든 것입니까?

 

장자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물질이 나이고 나의 것이 물질이고 나 가운데 물질이 있고 물질 가운데 내가 있어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냅니다. 그는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만 그 물질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 물질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납니다.

 

장자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감수가 나이고 나의 것이 감수이고 나 가운데 감수가 있고 감수 가운데 내가 있어 나는 감수이고 감수는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냅니다. 그는 나는 감수이고 감수는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만 그 감수는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 감수가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납니다.

 

장자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지각이 나이고 나의 것이 지각이고 나 가운데 지각이 있고 지각 가운데 내가 있어 나는 지각이고 지각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냅니다. 그는 나는 지각이고 지각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만 그 지각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 지각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납니다.

 

장자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형성이 나이고 나의 것이 형성이고 나 가운데 형성이 있고 형성 가운데 내가 있어 나는 형성이고 형성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냅니다. 그는 나는 형성이고 형성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만 그 형성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 형성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납니다.

 

장자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의식이 나이고 나의 것이 의식이고 나 가운데 의식이 있고 의식 가운데 내가 있어 나는 의식이고 의식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냅니다. 그는 나는 의식이고 의식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만 그 의식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 의식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납니다.

 

장자여,

이런 점에서 몸이 병들고 마음도 병든 것입니다.

 

장자여,

어떤 점에서 몸이 병들어도 마음이 병들지 않는 것입니까?

 

장자여,

이 세상에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들은 거룩한 이를 보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 참사람을 보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 물질이 나이고 나의 것이 물질이고 나 가운데 물질이 있고 물질 가운데 내가 있어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 않지만, 그 물질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렇지만 그 물질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장자여,

이 세상에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들은 거룩한 이를 보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 참사람을 보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 감수가 나이고 나의 것이 감수이고 나 가운데 감수가 있고 감수 가운데 내가 있어 나는 감수이고 감수는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감수이고 감수는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 않지만, 그 감수는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렇지만 그 감수가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장자여,

이 세상에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들은 거룩한 이를 보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 참사람을 보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 지각이 나이고 나의 것이 지각이고 나 가운데 지각이 있고 지각 가운데 내가 있어 나는 지각이고 지각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지각이고 지각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 않지만, 그 지각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렇지만 그 지각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장자여,

이 세상에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들은 거룩한 이를 보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 참사람을 보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 형성이 나이고 나의 것이 형성이고 나 가운데 형성이 있고 형성 가운데 내가 있어 나는 형성이고 형성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형성이고 형성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 않지만, 그 형성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렇지만 그 형성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장자여,

이 세상에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들은 거룩한 이를 보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 참사람을 보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 의식이 나이고 나의 것이 의식이고 나 가운데 의식이 있고 의식 가운데 내가 있어 나는 의식이고 의식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의식이고 의식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 않지만, 그 의식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렇지만 그 의식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장자여, 이런 점에서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는 것입니다."

 

존자 싸리뿟따는 이와 같이 말했다. 장자 나꿀라삐따는 존자 싸리뿟따가 말한 것에 대하여 환희하여 기쁘게 받아지녔다.

 

 

.

- 바른 마음을 깨우쳐주는 수행승 :

manobhavaniyanam bhikkhunam. 붓다고싸에 의하면, '마음을 성장하게 하는 자들' 로 만약에 '그분들을 볼 때에 선이나 선의 위력으로 마음이 성장하면 그들을 예를 들어 싸리뿟따나 목갈라나 등을 manobhavaniya 라고 부른다.

 

- 감로와 같은 축복 :

amatena abhisitto. 감로수(甘露水)로 관정(灌頂)을 받았다는 뜻이다. 감로수란 불사(不死)를 의미하며 열반의 축복을 누린다는 뜻이다.

 

 

 

(나꿀라삐따-Nakulapitusutta, 상윳따니까야 S21.1.1.1, 전재성님역, 한역대응경: 잡아함107 장자경)

 

  나꿀라삐따경(S21.1.1.1).docx 나꿀라삐따경(S21.1.1.1).pdf

 

 

몸이 아플 때

 

나꿀라삐따장자가 병이 들었다. 더구나 나이 들어 몸이 노쇠하여 생긴 병은 나을 가망도 별로 없다. 이렇게 병마와 싸우고 있는 장자에게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어서는 안된다라는 것이었다.

 

경에서 몸이 아프다고 하여 열심히 기도하라는 말은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이런 말을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 존자가 장자에게 부처님을 대신하여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어서는 안된다라는 가르침에 대하여 오온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 물질(),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을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변화하는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 난다고 말한다.

 

둑카웨다나(dukkha-vedanā, 苦受)

 

병이 생겨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또 불의의 사고로 다칠 수 있다. 이처럼 병이나 사고로 인하여 육체적 고통이 생겨나는 것은 불가항력이다. 존재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체적 고통을 정신적 고통으로 까지 연장시키면 더욱 더 고통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육체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으로 끝내고 더 이상 정신적 고통으로 발전시키지 말자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

 

둑카웨다나(dukkha-vedanā, 苦受)라는 말이 있다. 이 말뜻은 고통이 오면 고통을 알아차리면 고통이 제거된다라는 말이다. 위빠사나 명상수행에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육체적 고통이든 정신적 고통이든 간에 고통을 호소하면 그 즉시 알아차려라!” 하는 것이 수행처에서 하는 말이다.

 

통증이 일어났을 때 그 부위에 대하여 마음을 집중하고 알아차리면 고통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바로 일어나고 사라짐을 말한다. 한 번 형성된 것은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진 : http://wisdomquarterly.blogspot.com/2008/07/painful-facts-dukkha.html

 

 

 

 

병의 치유와 위빠사나 수행

 

이는 제행무상의 다름이 아니다. 따라서 고통 그 자체도 하나의 현상일 뿐이지 영원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관찰만 하는 것만으로도 통증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전이 되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아픈 부위를 바라만 보아도 고통은 사라진다는 둑카웨다나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아픈 부위를 바라만 보아도 사라지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치유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런 위빠사나 수행의 이점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청정한 마음을 갖게 한다.

둘째, 안정되고 균형 잡힌 마음이 된다.

셋째, 병이 치유 된다.

넷째, 법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다.

다섯째,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여섯째, 궁극적으로 성스런 법을 얻는다.

 

 

이와 같이 위빠사사나 수행의 이점이 여섯가지가 있는데, 그 중 병의 치유에도 매우 유효하다는 것이다.

 

신의 은총과 불보살의 가피

 

질병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신의 은총이나 불보살의 가피와 같은 신비적인 사상은 있을 수 없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기도는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에는 기도가 난무한다.

 

각 사찰의 일정표를 보면 기도로 가득차 있다. 초하루기도, 관음기도, 지장기도, 동지기도, 백일기도, 수능기도, 새벽기도 등 각종 기도로 꽉 차 있다. 심지어 불공이나 법회도 기도라는 용어로 대체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것이 현실이고, 실제로 스님들은 신도들에게 열심히 기도하라고 주문한다.

 

그런데 기도하는 행위는 매우 비불교적이라는 것이다. 유일신교에서 창조주의 은총을 기대하듯이 불보살의 가피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월적 존재에게 빌고 바라는 측면에서 있어서 기도는 유일신교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단지 야훼나 알라와 같은 창조주의 이름이 신격화된 부처님이나 보살로 이름이 바뀐 듯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유신론적이고 타력신앙화 된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도라는 유일신교적 용어가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더구나 영혼이라는 말 또한 스님들의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 나온다.

 

비집고 들어 갈 틈이 없어

 

기도와 영혼은 유일신교의 용어이다. 유일신교에서나 사용하는 말을 사찰에서 스님이나 신도들이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불교가 유일신교화 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는 불교가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인 신앙으로 변질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도와 영혼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연기법에 따르면 기도와 영혼이라는 말은 비집고 들어 갈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연기법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며,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며,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성립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감수가 소멸하며,

감수가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하며,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아하라경-Ahara Sutta- Nutriment, 자양분경, 전재성님역, S12.2.1)

  아하라경-자양분경.docx  아하라경-자양분경.pdf

 

 

이것이 연기법의 정형구이다.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연기법의 특징은 조건법이다. 조건에 따라 법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법이 스스로 원인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로 되는데, 이는 반드시 앞에 일어난 법을 조건을 다음 법이 일어남을 뜻한다.

 

자아를 더욱 더 강화하는 기도

 

연기법에 따르면 그 어떤 신의 은총이나 불보살의 가피가 있을 수 없다. 은총이나 가피는 조건 발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하는 행위는 연기법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이는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법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더구나 기도를 함으로 인하여 자아를 더욱 더 강화하기 때문에 무아론에도 위배된다.

 

연기법에 따르면 우리의 몸과 마음 즉, 오온은 연기적 존재이다. 이를 다른 말로 조건발생적 존재로 본다. 그래서 의식이 경험하고 체험하고 유전한다는 자아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처럼 조건 발생에 따른 자아는 연기적 존재이므로 무아라 한다. 고정되고 불변하는 자아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기도를 한다는 것은 조건 발생에 따른 연기법을 거스르는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갈망일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연기법에도 어긋나는 자아를 더욱 더 강화 하기 때문에 비불교적인 것으로 본다.

 

알아차리면 사라진다

 

사람들은 위기에 닥쳤을 때 무언가 의지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매우 어리석은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연기법을 알게 된다면 더 이상 비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행위를 관찰하게 될 것이다. 어떤 현상이든지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몸이 아파 통증을 겪고 있다면 그 통증 또한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에 영원할 리가 없기 때문에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다리 골절상과도 같이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도 육체적 통증이 계속 되지 않는다. 반드시 파도 처럼 몰아친다. 1파가 오고 난뒤 2파가 오는 식이다. 따라서 그 때 마다 통증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육체적 고통을 정신적 고통으로 까지 발전시키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나꿀리삐따장자에게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다름아닌 알아차림을 의미한다.

 

모든 통증, 고통은 알아차리면 사라진다는 둑카웨다나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알아차림은 통증에 만 한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탐욕, 성냄 등 모든 현상에 적용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빠알리 삼장을 한 글자로 줄이면 사띠(sati, 알아차림)’라고 하였을 것이다.

 

기도하지 말고 알아차려라

 

경에서 나꿀리삐따장자는 부처님의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말라는 말씀을 듣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존재의 다발(오온)에 속박되지 않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비록 육체는 병들어 고통을 당할지언정 마음으로 까지 전이되어 정신적 고통을 당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도와 영혼이라는 말은 없다.

 

점차로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인 신앙으로 인하여 유일신교화 되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한 마디 한다면 다음과 같다.

 

 

기도하지 말고 알아차려라

 

 

2012-01-2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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