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담마에 의한 정복, 아소까의 담마위자야(Dhammavijaya)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 29. 18:48

 

 

 

담마에 의한 정복, 아소까의 담마위자야(Dhammavijaya)

 

 

 

‘21세기 아쇼카선언은 진행중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비록 본 선언이 유보 되긴 하였지만 추진세력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 시점이 새 종정스님이 취임하는 3월 이후가 될 것이라 한다.

 

하지만 21세기 아쇼카선언은 여러가지 논란거리를 남겨 두고 있어서 만약 본 선언이 이루어진다면 한국불교는 극심한 정체성논쟁에 휘말리게 되고 그것은 불교의 분열과 내분으로 연결되어 이득을 보는 세력에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전법의 원칙을 보면

 

그런 선언문 중에 열린진리관과 전법의 원칙이 큰 이슈인 이중 전법의 원칙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3) 전법과 전교의 원칙
 
믿음을 전하는 일은 곧 자신의 믿음을 다듬어 나가는 과정이요, 서로 다른 믿음을 지닌 이들과 어우러지면서 큰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입니다.
 

실천적 활동을 통해 내 믿음의 참됨을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말없는 감동이 가장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말로 전하는 일은 가장 나중의 일이며, 또한 가장 조심스럽게 행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실현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 나의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 타종교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지향하고 다른 종교인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법이어야 할 것입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 21세기 아쇼카 선언-, 2011-08-23)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docx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pdf

 

 

초안에서는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못을 박아 놓았다. 그리고 말없는 감동을 보여 주는 것이 최선이라 하였다.

 

말없는 감동이 최선이라고?

 

이에 대한 비판이 일자 수정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셋째,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내종교를 선전하기 위해 이웃 종교를 비방하지 않겠습니다.

전법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 뭇 생명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웃 종교를 존중하면서 실천하는 모범을 통해 내 믿음의 참됨을 보여줘야 합니다. 말없는 감동이 최선입니다. 말로 전하는 일은 가장 나중에, 가장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진리는 주장이 아니라 참된 삶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 (수정본)-21세기 아쇼카 선언-, 2011 11)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수정본.docx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수정본.pdf

 

 

수정본에서 골자는 전법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다라고 한다. 앞서 ㅇㅇㅇ네티즌의 부처님이 불교를 비즈니스 하라 했나?”라는 내용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아쇼카 선언문중 전법에 관한 사항에서 말없는 감동을 보여 주는 것이 가장 먼저 할일이고, 그 다음이 말로 전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런 논리라면 현재의 포교 방식은 접어야 한다. 이는 사실상 포교무용론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포교원이 필요없다. 말없는 감동으로 포교를 하는 것이 우선이라면 말이나 글로서 하는 포교방식은 당분간 그쳐야 하는 것이다.

 

왜 이런 선언이 나오게 되었을까

 

이렇게 화쟁위의 ‘21세기 아쇼카 선언에 따르면 전법이라는 것이 교세의 확장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 대신 뭇 생명의 안락과 행복을 위한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이와 같은 선언이 나오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이번 선언문 작성을 주도한 고려대 조성택 교수의 말을 들어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조성택 교수는 주권방송에서 아쇼카 선언문이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아쇼카대왕이 남긴 비문이 있습니다. 제가 잠깐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 아쇼카왕은 그들이 출가지이든 재가자이든 모든 종교의 신자들을 존경 합니다. 각 종교마다 기본교리는 다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종교를 선정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어떤 의도에서든 자신의 종교에 오히려 큰 해악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조화가 최선입니다. 우리모두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자신의 종교도 발전하게 되고 진리도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 입니다.”

 

(조성택교수, 주권방송 종교톱아보기 35 조성택교수편)

 

 

조성택 교수는 위와 같은 아쇼카의 종교정책에 감동하여 어느 강연에서나 반드시 인용하고 있다고 방송에서 말하였다. 그래서일까 ‘21세기 아쇼카선언문에서 위와 같은 문구가 고스란히 실려 있음을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저 아쇼카왕은 모든 종교의 신자들, 그들이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모두를 존경합니다. 각 종교마다 기본 교리는 다를 수 있으며,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어떤 의도에서이건 자신의 종교에 오히려 더 큰 해악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조화가 최선입니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자신의 종교도 발전하게 되고 진리도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 21세기 아쇼카 선언-, 2011-08-23)

 

 

 

아쇼카 비문의 내용과 21세기 아쇼카선언문에 있는 내용이 똑 같음을 알 수 있다. 이 비문에 입각하여 열린종교관이 전개 되었고, 결국 전법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는 논리로 귀착이 된 것이다.

 

담마에 의한 정복(Dhammavijaya, 담마위자야)

 

하지만 이런 논리는 아쇼카대왕의 비문을 심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아쇼카 비문에 조교수가 언급한 열린종교관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 많은 비문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쇼카 대왕은 비문에서 어떤 말을 하고자 하였을까. 그것은 놀라웁게도 조성택교수가 말한 것과 매우 다르다. 한 마디로 아쇼카대왕은 담마에 의한 정복을 천명하였기 때문이다.

 

일아스님이 지은 아소까(민족사)’에 따르면, 아소까왕은 인도를 불국토로 만들었고 그 주변 국가들을 또한 불국토로 만들었다. 그리고 담마 사절단을 멀리 그리스, 이집트,스리랑카까지 보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다름 아닌 전쟁에 의한 정복이 아닌 담마에 의한 정복(Dhammavijaya, 담마위자야)”를 발원하였고, 또한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불국토를 만들게 된 동기는

 

그렇다면 아소까가 불국토를 만들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일아스님의 책 아소까에서는 크게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온 세상을 전쟁없는 극락세계로 만들기 위해

둘째, 전쟁에 의한 정복이 아닌 담마에 의한 정복을 이루기 위해

셋째. 이웃나라와 서로 평화롭게 살기 위해

넷째, 세상의 평화는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Ashoka Pillars

 

  

 

이렇게 네 가지 이유 때문에 아소카가 불국토를 만들게 되었는데, 조성택 교수는 이 중 세 번째에 해당 되는 비문에 대한 것만 언급하여 소위 ‘21세기 아쇼카 선언문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부처님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이 없다

 

하지만 아소카 대왕의 궁극적 목적은 불국토 건설에 있었다. 따라서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담마에 의한 정복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런 결실이 전 세계에 담마 행정관을 파견한 것이 이를 잘 증명해 준다. 이와 같이 담마에 의한 정복에 대하여 비문에 실린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No

불국토 실현 동기

  

 

1

온 세상을 전쟁없는 극락세계로 만들기 위해

깔링가를 정복한 후에 자비로운 왕은 매우 열성적으로 담마에 몰입하게 되었고, 담마를 열망하였고 사람들에게 담마를 가르쳤다.”

바위 각문 13

2

전쟁에 의한 정복이 아닌 담마에 의한 정복을 이루기 위해

담마에 의한 정복을 가장 훌륭한 정복이라고 생각한다.”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행복을 가져온다

바위 칙령13

 

 

 

두 번째 항을 보면 담마에 의한 정복의 취지가 잘 드러나 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일아스님의 아소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좀더 확실히 살펴보자. “담마에 의한 정복(Dhammavijaya, 담마위자야)”이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바로 그가 귀의한 불교에 의해 세상을 통일하는 것이다. 전쟁없는 세상은 오직 부처님 가르침에 의한 통일이라는 그의 확신의 결과이다.

 

그 이유는 첫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적이고, 배탕성이 없고, 관용적이고, 평등성에 바탕을 둔, 바른 윤리를 가르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여 서로 평화롭고 전쟁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원대한 열망에서였다.

 

둘째는 하나의 종교로 이웃나라 등을 통일하면 같은 신앙의 동질감에 의한 융화와 이해와 전쟁 없는 친밀한 유대관계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일아스님, ‘아소까에서)

 

 

담마위자야 즉, ‘담마에 의한 정복에 대한 내용의 글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만이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아소까대왕의 확신에 대한 것이다.

 

각문에 표기된 담마덕성을 보면

 

그래서 아소까대왕은 인도 전역에 비문을 세웠는데, 그 비문의 내용을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으로서 어느 종교인이 보더라도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인 내용이었다. 그런 것 중의 일부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각문에 표기된 주요 담마덕성

No

각문에 표기된 담마덕성

각문

1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의 행복

13

2

살생을 금함

9

3

웃어른에게 공경하고 복종하는 것

9

4

자선품을 보시, 건물, 동굴기증

9

5

복지설비를 함:약초, 우물 등

8

6

부모에게 공양하고 복종하는 것

7

7

사문과 브라흐민에게 관대한 것

5

8

친척, 친구를 공경하는 것

5

9

스승을 공경하는 것

4

10

종과 노예에게 공평하게 대하는 것

4

11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대하는 것

 

12

감옥의 죄수들에게 바른 처우를 하는 것

4

 

 

 

각문에 표기된 내용을 보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보편적인 교훈임을 알 수 있다.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행복을

 

그런데 이런 내용들이 모두 초기경전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중 첫 번째인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의 행복에 대한 각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에 행복을 가져온다. 모든 큰 기쁨을 담마와 연관된 기쁨에 두도록 하자. 왜냐하면 담마와 연관된 기쁨은 이 세상과 저 세상에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작은 바위 각문 13)

 

 

각문에서 아소까 대왕은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행복을 가져 올 수 있다고 천명하였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의 행복에 대한 경전적 근거

 

그렇다면 이에 대한 경전적 근거는 무엇일까.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이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의 행복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자기자신이 사랑스럽다면 악으로 멍에를 씌우지 말라.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행복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죽음의 신에게 잡힐 때 목숨을 버려야 하는데

정말로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있는가?

 

죽을 때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그림자가 항상 따라다니듯이 지은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기의 것이다.

죽을 때 이것을 가지고 간다.

마치 그림자가 항상 따라다니듯 이것이 따라다닌다.

그러므로 사람은 선행을 닦아야 한다.

공덕은 저 세상에사 든든한 후원자이다.

(상윳따니까야, S3.1.4)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자신을 위해

확고한 마음으로 붓다, 담마, 승가에 믿음을 둔다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담마를 실천하는 사람은

이런 이야말로 이 세상에서도 칭찬 받고 죽은 후 좋은 곳에서 즐긴다네.

(상윳따니까야, S3.3.5)

 

 

자신들의 이익을 바라는 마음으로

스승은 자비심에서 이와 같이 담마를 가르친다.

 

이것은 그대들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이것은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제자들은 귀담아 듣고, 이해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으며,

스승의 가르침에 등을 돌리지 않는다.

그것은 오랫동안 그대들을 행복함과 유익함으로 이끌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마하순나따경 M122)

 

 

악을 짓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괴로워한다.

내가 악을 저질렀구나하고 괴로워하고

불행한 곳에 떨어져서는 더더욱 괴로워한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행복하다.

내가 선행을 했구나하고 행복해하고

행복한 것에 가서도 더 더욱 행복하다.

(담마빠다, Dhp17-18)

 

 

담마의 길을 따르는 사람은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행복을 누린다.

 계행을 지켜라. 악을 따르지 말라.

담마의 길을 따르는 사람은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행복을 누린다.

(담마빠다. Dhp68)

 

 

참으로 인색한 사람은 천상에 가지 못한다.

어리석은 자는 너그럽게 베푸는 것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는 것을 기뻐하는 지혜로은 사람은

그런 공덕으로 저 세상에서 기뻐한다.

(담마빠다, Dhp77)

 

 

진실을 말하라.

성내지 말라.

넉넉지 못한 처지라도 달라는 사람에게 베풀라.

이 세가지 공덕으로 그는 신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담마빠다. Dhp224)

 

 

이것이 아소까 각문에 새겨진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는다라는 문구의 근거가 되는 경이다.

 

이처럼 아소까 대왕은 철저하게 경전을 바탕으로 각문을 작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머지 11가지 사항도 모두 초기경전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깨닫게 되면, 부자가 되면

 

아소까각문에 새겨진 비문을 보면 화쟁위에서 작성한 선언문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화쟁위의 선언문이 아소까 비문의 일부만 적용하여 마치 전체인 것처럼 왜곡하였기 때문이다. 또  그런 왜곡은 선언문에서 수 없이 발견된다.

 

예를 든다면 초안에서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문구일 것이다. 이는 전법의 목적이 마치 개종을 하는 것처럼 왜곡한 대표적 사례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수정본에서 “전법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 뭇 생명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없는 감동이 최선입니다. 말로 전하는 일은 가장 나중에, 가장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라 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전법을 하지 말자”는 의미로 받아 들여진다.

 

교세의 확장이 전법임에도 불구하고 전법이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 하고, 전법은 말이나 글 등의 수단을 통하여 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나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난 후 전법하자는 것은 ‘이상론’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수행 따로, 전법 따로”를 연상케 한다. 이는 다음의 논리와 같은 것이다.

 

 

깨닫게 되면 그 때 가서 전법하겠다.”

“부자가 되면 그 때 가서 보시하겠다.”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은 언제 이루어질지 모른다. 선방에서 10년, 20년, 30년, 평생을 앉아 있어도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단 한 번도 전법하지 못하고 생을 마칠 수 있다. 마찬가지로 10억을 목표로 열심히 저축을 하는 사람에게 보시는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목표는 평생 걸릴 수 있는데, 단 한 번도 보시를 못하고 생을 마감할 수 있다.

 

아소까대왕에 대한 모독

 

전법은 아는 만큼 하면 되고, 보시는 능력껏 하면 된다고 하였다. 모두 지금 여기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다.

 

주변에 법구경책을 선물하는 것도 전법이면서도 동시에 보시이다. 식당을 한다면 타 종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법구경의 한 게송을 액자로 만들어 걸어 놓을 수 있다. 네티즌이라면 카페나 블로그를 만들어 부처님의 말씀을 매일 적어 나갈 수 있다. 또 좋은 내용이라면 열심히 퍼 나를 수 있다. 검색하면 누구나 볼 수 있기 때문에 전법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보시이다. 이처럼 깨닫지 않아도, 부자가 아니어도 전법할 수 있는 방법은 널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법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고 운운한다든가, 말로 전하는 것은 나중에 해야 한다든가 하는 21세기 아쇼카선언문은 아소까대왕에 대한 모독이다. 아소까대왕은 담마에 의한 전세계의 정복을 비문에서 천명하였기 때문이다.

 

경전에 근거해야 하는 이유

 

그렇다면 전법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그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경전에 근거해서 전법하는 것이다.

 

제 아무리 잘나고, 똑똑하고, 많이 배우고, 도력이 높다고 할지라도 경전에 근거하여 이야기하지 않으면 견해가 되어 버린다. 일반적으로 견해는 사견(邪見, ditthi)’으로 본다.

 

따라서 불자라면 반드시 경전에 근거하야 이야기 하여야 하는데, 비록 덜 배우고, 덜 깨우치고, 덜 가졌다고 할지라도 경전에 근거하여 이야기 하면 모두 정견’(正見, dassana)’이 된다. 그런 좋은 예가 있다.

 

포교대상은 누구인가

 

마성스님이 몇 해전 불광법회에서 약의 비유를 법문하였다. 이를 몇 차레 블로그에 올렸는데, 금번 호국연무사 대작불사와 관련하여 다시 한번 사용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약을 먹어도 병이 낫지 않은 사람

둘째, 약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 병이 낫는 사람

셋째, 약을 먹으면 병이 낫고, 약을 먹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는 사람

 

 

이것이 약의 비유이다. 포교의 대상은 바로 세 번째라는 것이다.

 

첫 번째의 경우 너무 오염되었거나 타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서 교화대상이 아니고, 두번째의 경우 스스로 가르침을 찾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따로 교화할 필요가 없지만, 세 번째의 경우 교화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들이다.

 

세 번째의 경우는 덜 오염된 사람들이고 세상에 덜 물든 사람들로서 청소년과 군인들을 말한다. 따라서 한국불교에서는 이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하여야 한다.

 

부처님의 명령, 붓다사사나(Buddha Sasana)

 

출가수행자들의 본분은 무엇일까.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수행과 포교이다. 수행따로 포교 따로가 있을 수 없다. 만일 수행만 하고 포교를 하지 않는다면 이는 직무태만이고 동시에 직무유기에 해당된다.

 

불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비록 아는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을 지라도, 아는 만큼 알려주고, 능력껏 보시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평화선언을 추진하는 자들의 논리를 보면 전법을 포기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전법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든가, 말없는 감동이 최상이라는 등의 논리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준엄하게 명령하였다.

 

 

[세존]

나는 하늘나라의 올가미와 인간세계의 올가미, 그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도 하늘나라의 올가미와 인간세계의 올가미, 그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둘이서 같은 길로 가지 마라. 수행승들이여, 처음도 훌륭하고 가운데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이 풍부하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펴라.

 

오로지 깨끗하고 청정한 삶을 드러내라. 더러움에 덜 물든 사람도 있다.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버려지고 있지만 가르침을 들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나도 역시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쎄나니 마을로 가겠다.”

 

(두띠야빠사경-Dutiyapāsasutta.-올가미경, 상윳따니까야 S4.1.5, 전재성박사역)

 

  두띠야빠사경( 전도선언).pdf  두띠야빠사경(전도선언).docx

 

 

이렇게 부처님이 명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제자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아소까대왕은 부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담마에 의한 정복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만이 진정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고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말이다.

 

청소년, 청년포교에 올인해야

 

하지만 불교가 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21세기 아쇼카선언을 아무리 외쳐 보아도 우리에게 힘이 없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계는 힘부터 길러야 한다.

 

그 첫 단계가 포교이다. 그 중에 을 쓰면 약발이 먹히는 청소년과 군대 포교이다. 여기서 말하는 약은 초코파이, 피자, 치킨이 아니라 부처님의 담마(Dhamma)’이다.

 

더 이상 보살불교, 치마불교라 불리우는 불자들에게 의존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돈이 되지 않더라도 청소년과 군대포교에 올인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 주는 것 만큼 커다란 공덕도 없을 것이다.

 

 

 

2012-01-2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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