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도법스님의 ‘단멸론’적 발언을 보고, 깟짜야나곳따경과 야마까경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 31. 12:33

 

 

도법스님의 단멸론적 발언을 보고, 깟짜야나곳따경과 야마까경

 

 

도법스님의 놀라운 발언

 

도법스님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레디앙(Redian)이라는 진보매체 사이트에서 지난 1 17일 인터뷰한 기사이다. 이 기사에서 도법스님은 놀라운 발언을 하였다. 그것은 불교의 근간이라 볼 수 있는윤회를 부정하는 듯한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기자 질문:  

삶의 과학, 지혜, 실사구시를 강조하셨는데 불교에서도 내세를 설명하는 말들이 있지 않나?

 

도법스님 답:

많다. 지옥, 아귀, 축생 같은 것들이 그렇다. 불교가 윤회를 가르치는 종교로 많이 얘기를 하는데 나는 그것이 핵심이 아니라고 본다. 불교는 연기론적 세계관과 중도적 사유방식을 가지고 지금 여기,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실현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도록 삶을 다룬다.

 

그럼 전생을 여기서 이해할 수 있나, 확인할 수 있나, 실현할 수 있나.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다. 문제를 이렇게 다루면 안 된다는 게 불교다. 내세도 마찬가지도. 그럼 현재의 문제를 다뤄야 하는 것이 기본인데, 그럼 윤회는 뭐냐, 어떻게 설명돼야 하나 하는 문제가 나온다.

 

죽으면 지옥 가고, 아귀가 되고, 천상에 가고 그런 식으로 얘기한다. 그런데 이건 옛날 사람에게 삶을 잘 보고, 파악하고, 다루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효과적인 설명 방식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본다. 실제가 아니다.

 

실제는 요즘 말로 하면 생명의 순환질서라든지 생태적 순환질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것이 세상 이치이고, 관계의 순환질서라고 하는 존재의 법칙과 질서다. 관계의 순환질서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이것을 신화적 설화적으로 묘사한 것이 지옥, 아귀, 축생, 천상, 이런 개념이라고 본다.

 

물이 산에서 흘러 바다로 갈 때, 낭떠러지를 만나면 폭포수가 되고, 자갈밭을 만나면 여울물이 된다. 다 똑같은 물의 흐름인데 이름이 다르다. 생명이 존재 법칙, 관계의 순환질서에서 나타난 현상을 현성 범주화시켜서 사람들에게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다뤄갈 수 있도록 소설적으로 묘사한 것이 일반적으로 얘기되는 윤회설이라고 본다.

 

(도법스님, "불교는 삶의 과학이다", 레디앙 2011-01-25)

 

  불교는 삶의 과학이다-도법스님.docx  불교는 삶의 과학이다-도법스님.pdf

 

 

기사에서 도법스님은 지옥, 아귀, 천상 등 죽어서 내세에 태어나는 것에 대하여 실재가 아니고 개념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연의 순환의 예를 들면서 윤회는 소설’같은 것이라 하였다.

 

이는 현재를 열심히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이야기하면서 나온 이야기이지만, 이제까지 불자들이 알고 있었던 내세관과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놀랍지 않을 수 없다부처님이 그토록 경계하였던 단멸론을 보는 것 같다.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난다

 

과연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상 등 육도라고 불리우는 내세의 세상은 단지 마음속에만 있는 허구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를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인식을 벗어난 외부의 세계는 우리 내부의 마음에 있는 여러 현상이 밖으로 반영 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 이 외부세계라는 것은 다름이 아닌 우리 마음에 있는 미세한 여러 계층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이나 비실재로 외부세계를 이해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외부세계는 엄연히 실재 하며 객관적인 사실로 존재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외부세계는 항상 마음으로 이해 되는 세계이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여러 유형의 마음들이 외부로 부터 자신에게 나타나는 대상의 성질을 결정 한다고 한다. 따라서 마음이 없으면 외부세계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어떤 중생은 천상에 태어나고, 또 어떤 중생은 천상과 같이 특정한 세계에 태어 나는 것일까. 이 것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전생에 그가 그 세계에 태어나기에 적합한 업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세계와 마음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인 관점에서 본 다면 중생들이 사는 모든 세상은 중생들의 정신적인 행위가 만들어 내고 지탱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와 동시에 이들 세계는 마음으로 하여금 새로운 환경 하에서 새로운 인격을 형성 하도록 향상을 계속 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진흙속의연꽃, 천상과 지옥은 실재할까, 불교의 세계관과 데바 프레말의 명상음악, 2009-08-04)

 

 

 

 

cosmos

 

 

지난 2009년도에 올렸던 글이다. 아비담마 길라잡이에 실려 있는 내용을 참고한 것이다.

 

이 글에서 핵심은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도 색계에 태어나기를 바라면 색계선정수행을 닦는 것으로 되어 있다. 누군가 천상에 나기를 바란다면 열심히 계를 지키고 보시하면 될 것이다. 또 누군가 인갈말종의 못된 짓을 하였다면 그 업의 과보를 받을 수 있는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법스님의 글을 보면 육도는 실재가 아니고 단지 개념일 뿐이라 하며 단지 지금 여기에서 현재를 잘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일 뿐이라고 말한다.  

 

단멸론자들은

 

이처럼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보면 단멸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일반적으로 불교단멸론자들은 오로지  지금 여기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행복하고 잘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 죽은 다음에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몸이 무너지면 동시에 마음도 무너져 단멸하는 것으로 본다. 한마디로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내세는 없다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단멸에 대하여 어떤 말을 하셨을까. 상윳따니까야에서 단멸을 키워드로 하여 살펴 보았더니 단멸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무수한 경을 발견하였다. 그때 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는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

는 견해를 일으킨다

 

 

이것이 부처님이 단멸에 대하여 경계한  정형구라 볼 수 있다.

 

몸이 파괴됨과 동시에 마음도 파괴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내세를 부정하는 것이고, 동시에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이다.

 

“A, 그러므로 B”

 

연기법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문경전에서 보는 중국식 한문투의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 차무고피무(此無故彼無) 차멸고피멸(此滅故)연기송이다. 또 하나는 조건에 따라 발생되는 십이송이다. 문제는 전자이다.  

 

잡아함에 실려있는 연기송을 보면  “A, 그러므로 B” 또는 “C, 왜냐하면 D”와 같이 되어 있다. 이는 조건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몸이 무너지면 마음도 함께 무너진다는 단멸론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십이연기나 빠알리어 문구에서의 연기송은  “A가 있을 때 B가 있다또는 “C를 조건으로 D가 일어난다고 되어 있어서 연기의 원칙을 잘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조건문 연기송은 단멸론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깟짜야나곳따경(S12.2.5)에서

 

초기경전에서 단멸에 대한 것은 수 없이 많다. 그 중에서 두 가지를 보았다. 하나는 깟짜야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이고 또하나는 야마카경 (Yamaka sutta)이다.

 

먼저 깟짜야나곳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깟짜야나곳따경

(Kaccānagottasutta, 상윳따니까야 S12.2.5)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존자 깟짜야나곳따가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앉았다. 한쪽으로 물러앉은 존자 깟짜야나곳따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깟짜야나] "올바른 견해, 올바른 견해 하는데 세존이시여, 올바른 견해란 어떤 것입니까?"

 

[세존]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나 비존재의 두 가지에 의존한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면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접근, 취착, 주착을 통해 얽매여 있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접근하고 취착하고 마음으로 욕구하여 유입되고 잠재되는 것에 다다르지 않고 붙잡지 않고 주착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괴로움이 일어나면 일어난다. 괴로움이 사라지면 사라진다'고 의심하지 않고 혼란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에게 다른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 지식이 생겨난다. 깟짜야나여, 이와 같이 올바른 견해가 생겨난다.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며,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며,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감수가 소멸하며, 감수가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하며,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

 

- 존재와 비존재 :

atthita natthita. 한역으로 有無. 유는 존재의 영원성을 뜻한다. 여기서 존재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소멸될 수 없는 파르메니데스적인 의미에서 이해된다고 리즈 데이비스는 말한다. 여기서의 존재에 대한 견해란 존재의 영원성에 바탕을 둔 철학적 이론, 즉 영원주의로 알려진 상견(常見)을 뜻한다. 반대로 무란 존재의 불연속적인 허무성을 뜻한다. 비존재에 대한 견해란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는 허무주의, 즉 단견(斷見)을 말한다.

 

- 올바른 지혜로써, 즉 올바른 관찰의 지혜(觀智)와 올바른 길의 지혜(道智)로써 모든 형성되어진 존재들이 업(), 무명, 갈애(渴愛) 때문에 끊임없이 생겨나는 사실을 통찰한다면 현세의 존재에게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허무주의적 단멸론은 사라지며, 마찬가지로 모든 형성되어진 존재들이 끊임없이 무상하게 소멸해가는 것을 관찰한다면 모든 존재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적 상주론은 사라진다.

 

 

- 접근, 취착, 주착을 통해 얽매여 있다... :

upaya 는 접근, 시도 등의 뜻을 지녔는데 붓다고싸에 따르면 두 가지의 upaya, 즉 갈애에의 접근과 사견(邪見)에의 접근이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주착(住著)이란 '빠져든 상태, 새겨진 상태'를 뜻한다. 갈애나 사견이 조건지어진 것과 관련하여 발생할 때 그것들을 '나 혹은 내 것(, 我所)'이라는 잘못된 관념을 일으킨다. 그런데 가이거는 이를 경험적인 사물과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보아 사유와 대상과의 점진적 결합과정의 절정들을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서 정신은 대상에 묶여버린다(繫縛). 마음이란 의미와 관계된 것은 그 다음 문장의 adhitthana(욕구, 결정) abhiniversa(성향, 貫入) anusaya(경향, 잠재)이다.

 

 

깟짜야나곳따경

(Kaccānagottasutta, 상윳따니까야 S12.2.5, 전재성님역)

 

  깟짜야나곳따경(S12.2.5).docx  깟짜야나곳따경(S12.2.5).pdf

 

 

깟짜야나곳따경에서 극단을 경계한다.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것이다. 존재에 집착하면 상견에 빠지고, 비존재에 집착하면 단견에 빠진 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관찰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연기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경에서는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알려 주는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법이 조건지워져 발생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상견과 단견은 어떻게 논파되었나

 

이와 같이 조건에 따라 법이 발생하기 때문에 상견과 단견은 연기법으로 논파 되는데 그 예를 청정도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5.

이와 같이 물질의 몸의 조건을 파악한 뒤 단시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라는 방법으로 정신의 몸을 파악한다. 이와 같이 조건에 따라 정신 · 물질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현재에 이렇듯이 과거에도 조건으로부턴 생겼고, 미래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길 것이라고 관찰한다.

 

(청정도론, 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5)

 

 

연기법은 조건에 따라 발생하므로 지금 여기도 과거의 조건으로부터 생겼고, 미래도 조건으로부터 생길 것을 예측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건발생에 따르면 상견과 단견은 논파 될 수 밖에 없는데, 이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이 기술 되어 있다.

 

 

285.

무명과 갈애, 이 두 가지 법이 존재의 바퀴의 뿌리라고 알아야 한다. 과거로부터 왔기 때문에 무명이 그 뿌리이고 느낌이 마지막이며, 미래로 상속하기 때문에 갈애가 그 뿌리이고 늙음과 죽음이 마지막이 되어 이 윤회의 바퀴는 두 가지이다.

 

286.

이 가운데서 먼저 것(무명)은 사견의 기질을 가진 자를 따라 설했고, 나중 것(갈애)은 갈애의 기질을 가진 자를 따라 설했다. 무명이 사견의 기질을 가진 자들을 윤회로 인도하고, 갈애가 갈애의 기질을 가진 자들을 윤회로 인도한다.

 

혹은 먼저 것은 단견을 뿌리 뽑기 위해서 설했다. 결과가 일어나는 것을 통해서 원인들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나중 것은 상견을 뿌리 뽑기 위해서 설했다. 일어난 것들의 늙고 죽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혹은 먼저 것은 태생의 중생들에 따라 설했다. 왜냐하면 연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중 것은 화생의 중생에 따라 설했다. 왜냐하면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285-286)

 

 

윤회의 원인인 무명과 갈애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이 무명을 설한 이유는 단견을 논파하기 위한 것이고, 갈애를 설한 것은 상견을 논파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영속론과 단멸론이 틀린 이유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은 과거 원인에 대한 결과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를 조건으로 하여 미래에 법이 일어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단견은 거짓이 된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내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지은 업에 적합한 곳에 태어나 새로운 생이 시작되기 때문에 단멸론은 틀렸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들은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상견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일어난 모든 것들은 조건을 남기고 멸하기 때문에 영속론은 틀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연기법으로 상견과 단견은 모두 논파 되는데, 야마까경에서 좀 단멸론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라한의 단멸에 대하여

 

특히 아라한의 단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야마까라는 비구가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행승들]

벗이여, 야마까여,

그대는 이와 같이 '번뇌를 소멸시킨 수행승은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라고 세존께서 가르치신 바를 나는 이해한다' 는 악한 견해를 일으킨 것이 사실입니까?”

 

(야마까경 -Yamaka sutta, 상윳따니까야 S21. 2. 4. 3, 전재성님역)

 

  야마까경(S21.2.4.3).docx  야마까경(S21.2.4.3).pdf

 

 

동료비구들이 야마까비구에게 물어 보는 말이다. 아라한이 죽었을 때 이를 단멸로 보는 견해에 대하여 우려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야마까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야마까]

"벗들이여,

나는 이와 같이 '번뇌를 소멸시킨 수행승은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 라고 세존께서 가르치신 바를 나는 이해합니다."

 

(야마까경 -Yamaka sutta, 상윳따니까야 S21. 2. 4. 3, 전재성님역)

 

 

번뇌 다한 자(아라한)’의 몸이 죽으면 단멸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며,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고 야마까가 말한다.

 

이에 대하여 동료비구들은 야마까가 부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였음을 계속 지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야마까는 뇌를 소멸시킨 수행승은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법의 사령관사리뿟따존자는

 

이에 동료비구들은 법의 사령관이라 불리우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의견을 묻고, 사리뿟따존자는 야마까를 불러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설명해 준다.

 

먼저 사리뿟따존자는 야마까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싸리뿟따]

"벗이여,

야먀까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질은 영원합니까 무상합니까?"

 

[야마까]

"싸리뿟따여, 무상합니다."

 

(야마까경 -Yamaka sutta, 상윳따니까야 S21. 2. 4. 3, 전재성님역)

 

 

이렇게 물질,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이 무상함을 일깨워주고, 다음으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싸리뿟따]

"벗이여,

야마까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래는 물질이라고 생각합니까?"

 

[야먀까]

"벗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야마까경 -Yamaka sutta, 상윳따니까야 S21. 2. 4. 3, 전재성님역)

 

 

이렇게 여래가 물질도 아니고 감수, 지각, 형성, 의식도 아니라고 설명한다. 또 여래는 물질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물질 밖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감수, 지각, 형성,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사리뿟따존자는 야마까에게 오온의 예를 들어 대화식으로 묻고 답하기를 하고 난후 다음과 같이 정리하듯이 질문한다.

 

 

[싸리뿟따]

"벗이여, 야마까여,

이 세상에서 여래는 진실로 실체로 파악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대가 이와 같이 '번뇌를 소멸시킨 수행승은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세존께서 가르치신 바를 나는 이해한다' 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야마까]

"벗이여, 싸리뿟따여,

악한 견해를 일으킨 것은 지난 나의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존자 싸리뿟따의 설법을 듣고 그 악한 견해를 버리고 진리를 현관했습니다."

 

(야마까경 -Yamaka sutta, 상윳따니까야 S21. 2. 4. 3, 전재성님역)

 

 

사리뿟따존자는 여래는 실체로 파악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번뇌가 다한 아라한의 몸이 파괴 되었을 때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올바른 견해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야마까의 사견(邪見)

 

야먀까는 여래에 대하여 오온(존재)으로 생각하였다. 여래가 물질,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의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뇌 다한 아라한의 몸이 무너지면 감수, 지각, 형성, 의식도 함께 무너져 단멸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는 여래(如來 tathagata)나 아라한을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경에서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 야마까의 사견 :

붓다고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가 모든 형성된 것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형성된 것의 윤회의 멈춤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사견이 아니며 가르침에 부합되는 지식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존재가 파괴되고 사라진다고만 생각하면 그 때문에 사견이 된다'

(전재성박사 주석, 야마까경 -Yamaka sutta, 상윳따니까야 S21. 2. 4. 3)

 

 

야마까가 사견(邪見)을 갖게 된 요인에 대하여 오온에 대하여 존재론적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존재론으로 인식한다면 번뇌 다한 자가 죽어서 단멸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윤회가 멈출 뿐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한 번 형성된 것은 반드시 소멸하기 때문에 조건이 더 이상 생성되지 않아 다음 법이 일어나지 않으면 윤회가 종식된 것으로 본다.

 

이는 연기법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아라한의 죽음은 연기법에 따르면 단지 윤회가 멈출 뿐이지 단멸된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멸로 보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오온을 존재로 보았을 때 단멸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본다. 이때 오온은 오취온과 같은 것으로 본다. 오온을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삼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하고픈 갈애가 일어났을 때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영속론이 생겨나고, 존재하고 싶지 않은 갈애가 일어났을 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내세는 없다라는 단멸론이 발생된다. 이렇게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모두 존재론에 근거를 둔다.

 

이런 갈애는 집착으로 발전되어 윤회를 계속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윤회를 종식하기 위해서는 갈애를 극복 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성제에서 말하는 고멸성제이다. 갈애를 극복해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단멸론자들의 분탕질

 

요즘 인터넷상에 온갖 견해가 난무 한다. 대부분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은 개인적인 견해들이다. 그러다 보니 불자들에게 큰 혼란을 주고 있는데, 특히 불교에 처음 입문하였거나, 본격적으로 교리를 알기 위하여 스스로 공부하는 불자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단멸론이다.

 

단멸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를 보면 매우 단순하다. 경전의 일부 문구를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경전은 물론 초기경전도 믿지 못하겠다는 식이다. 그런 단멸론자들이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는 경전은 윤회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혀 없는 사띠빳타나경(염처경)이나 마하사띠빳타나경(대념처경)등 수행과 관련된 경, 그리고 오온과 관련된 몇 개의 경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단멸론자들이 자신의 입맛대로 경전의 문구를 해석하여 오로지 지금 여기만을 주장하며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잘 살면 그만이다"라는 현세주의와 죽으면 끝이다, 내세는 없다식의 단멸론을 주장하는데, 이는 불자들을 혼돈에 빠뜨리는 분탕질이나 다름 없다.

 

도법스님의 단멸론적 발언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불자들을 혼돈에 빠뜨리고 분탕질을 일삼는 단멸론자들이 활개 치는 인터넷 공간에서 도법스님에 대한 기사를 보니 매우 또한 혼란스러워졌다. 그것은 다름아닌 단멸론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님은 경전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육도는 실재하지 않는 개념이라든가, 윤회는 소설에 불과하다고 하였는데, 이런 발언은 단멸론으로 오해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스님은 사회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유명인사이고 또 조계종에서 자성과 쇄신추진본부장을 맡고 있고 매우 영향력 있는 스님이다. 또 최근에는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선언)’을 추진한 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의 직함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불교계의 앞날을 이끌어 가고 있는 스님의 글을 보면 불자들이 혼란에 빠질 염려가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실려있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에 해당되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다.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인 자가 인도해줄 사람이 없어

어떤 때는 바른길로 어떤 때는 길이 아닌 곳으로 가듯

윤회에 돌고 도는 어리석은 자는 인도해줄 사람이 없어

어떤 때는 공덕이 되는 행위를

어떤 때는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를 짓는다.

법을 알고서 진리들을 관찰할 때

무명은 가라앉고 고요하게 다닐 것이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119)

 

 

 

 

 

2012-01-3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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