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단멸론자와 유물론자의 공통점, 낫티딘나경(없음경, S23.1.5)

담마다사 이병욱 2012. 2. 1. 12:06

 

단멸론자와 유물론자의 공통점, 낫티딘나경(없음경, S23.1.5)

 

 

 

초기경전을 보면 의외로 영속론단멸론에 대한 것이 많다. 이는 부처님 당시 정통바라문교의 영속론과 육사외도의 단멸론 등에 대하여 부처님이 연기법으로 논파 하였기 때문으로 본다.

 

자세히 보면 꼬리가 보여

 

영속론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라고 주장하는 것으로서 요즘으로 말하면 유일신교의 논리에 해당된다. 단멸론은 죽으면 끝이고 내세는 더 이상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으로서 인터넷상에서 활약하는 단멸론자들의 견해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영속론과 단멸론은 상견과 단견으로서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사견(邪見)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중 불자들을 큰 혼돈으로 빠뜨리는 것이 있다 . 그것은 다름 아닌 단멸론이다.

 

단멸론자들의 주장을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 처럼 보이는데 사실 알고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말을 하고 있다. 겉으로 보아서 불교인지 아닌지 구분 할 수 없는데, 자세히 살펴 보면 꼬리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단멸론자들의 대표적 케치프레이즈는 윤회는 없다이고 또 하나는 현세에 행복하게 잘 살자이다.

 

윤회가 없다는데

 

단멸론자들은 윤회가 없다고 주장한다.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문구를 들어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의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윤회없음을 주장하기 위하여 인용한 것 뿐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若彼終後即於爾時一切永滅無餘 永滅

만약 저 이 파괴되고 목숨을 마친 후라면

곧 이때 일체의 느낌은 영구히 멸하고, 남음이 없으므로 영구히 멸한다.

(한역잡아함경 969, 장조경)

 

 

이것이 단멸론자들이 윤회없음을 주장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문구중의 하나이다. 그런 단멸론자들은 주로 한역 아함경을 애용한다.

 

그런데 한역 아함경의 경우 오역된 부분이 많다고 한다. 이는 중역(重譯)’ 되었기 때문이다. 빠알리경전에서 산스크리트어 경전으로, 다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서 한역 되었으므로 원래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유럽인도어와 중국어의 언어체계의 다름으로 인하여 논리적인 빠알리경전을 정확하게 번역하는 어려움이 있었던 탓도 있다. 이는 한자어가 격변화가 자유롭지 않은 단점이 있어서, 글자 하나가 어떤 이미지 또는 상징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보는 관점에 따라 각기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若彼終後(만약 저 이 파괴되고 목숨을 마친 후라면) 即於爾時一切永滅無餘 永滅 (곧 이때 일체의 느낌은 영구히 멸하고, 남음이 없으므로 영구히 멸한다)’처럼 단멸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문구가 나왔을 것이다.

 

모두 못 믿겠다?

 

이는 한자어가 논리적인 인도어를 정확하게 번역하지 못한 오류에서 나온 것이고 또한 오온(존재)의 죽음을 단멸로 생각하여 몸이 무너지면 정신도 함께 무너져서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내생은 더 이상 없다고 단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단멸론자들이 한역경전에 의지하여 단멸의 당위성을 주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윤회가 부정되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윤회를 주장하지 않았는데 후대 경전편찬자들이 집어 넣었다든가,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다보니 대승경전은 물론 초기경전도 못 믿겠다고 나오는 것이다. 특히 윤회나 신통과 관련된 경은 모두 위경이거나 후대에 편집되었거나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매도 한다.

 

이렇게 윤회를 부정하다 보니 테라와다 불교의 논서인 아미담마, 주석서인 청정도론도 못 믿겠다고 주장한다. 이처럼게 초기경전과 논서, 주석서에 대하여 의심을 하다 보니 십이연기에 있어서 삼세양중인과와 재생연결식 또한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이처럼 단멸론자들이 윤회를 부정하다 보니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곤 몇 개의 경에 지나지 않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문구만 반복하여 강조하는 단조로운 경향이 있다. 그리고 정서가 매마르고 건조해 보인다.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해오는 동안

 

하지만 대부분의 초기경들은 윤회와 관련되어 있다. 부처님은 윤회와 관련하여 수 많은 가르침을 펼쳤기 때문이다. 비록 방편이나 대기설법에 따른 것일이라 할지라도 부처님의 윤회와 관련된 가르침은 불자들로 하여금 삶의 모습을 되돌아 보게 하고 인과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그런 경 중에 눈물경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해오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의 양과 사대양에 있는 물의 양과 어느 쪽이 더 많겠는가?”

 

(앗수수경- Assusutta-눈물경, 상윳따니까야 S3.1.3, 전재성님역)

 

  아나마딱가 상윳따(S15).docx  아나마딱가 상윳따_S15_.pdf

 

 

눈물경과 마찬가지로 젖경(Mātuthaññasutta,S3.1.4)’ 또한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마신 어머니의 젖과 사대양의 물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많겠는가?”라고 묻고 있는데, 이처럼 부처님은 한량 없는 윤회의 과정에 있어서 뭇 삶들의 모습에 대하여 자비를 가지고 말씀 하신 것이다.

 

집을 짓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또한 부처님은 윤회하는 고통스런 삶에서 해방되는 길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과 사성제를 통해서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침내 윤회하게 하는 요인을 알아내었는데, 담마빠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nekajātisasāra                  아네까자-띠삼사-

sandhāvissa anibbisa             산다-위쌍 아닙비상

gahakāra gavesanto                 가하까-랑 가웨산또

dukkhā jāti punappuna              둑카- -띠 뿌납뿌낭

 

한량없는 세월의 생사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둑카였네.

 

 

Gahakāraka diṭṭhosi                 가하까-라까 딧토시

puna geha na kāhasi               뿌나 게항 나 까-하시

sabbā te phāsukā bhaggā             삽바- 떼 빠-수까- 박가-

gahakūta visankhata              가하꾸-땅 위상카땅

visankhāragata citta             위산카라-가땅 찟땅

tahāna khayamajjhagā              딴하-낭 카야맛자가-

 

, 집을 짓는 자여! 나는 이제 너를 보았노라!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

이제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이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닙바나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파괴되어 버렸느니라.

 

(법구경, Dhp153-154, 거해스님역)

 

 

게송에서 부처님은 윤회하는 요인을 집짓는 자라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집을 짓는 자를 본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갈애이다.

 

사성제에서 갈애의 소멸은 열반을 말하는데, 이 갈애가 윤회의 주범임을 알고 부처님은 서까래는 부서지고 대들보는 부서졌다고 선언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서까래는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를 말하고, 대들보는 무명을 말한다.

 

갈애를 일으키는 요인인 탐진치를 소멸시켰으니 서까래는 무너진 것이고, 마지막으로 무명을 타파 하였으니 집을 지탱하는 대들보가 무너진 것과 마찬가지로 본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게송에서 분명히 윤회를 언급하면서 윤회의 원인인 무명과 갈애를 타파하여 열반을 성취함으로서 윤회를 종식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단지 존재(오온)이 멸하여 단멸한다는 것과 다른 것이다.

 

부처님은 연기법적으로 윤회의 종식을 말씀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멸론자들은 초기경에서 윤회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를 가졌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윤회를 알면 자살하지 않는다

 

단멸론자들은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만 믿는다. 그런 단멸론자들이 윤회없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왜냐하면 윤회없음이 되기 위해서는 윤회관련 경이나 신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경, 그리고 이들 경에 대하여 삼세양중인과적으로 설명해 놓은 주석서를 부정해야 하는 것은 단멸론자들의 입장에서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멸론자들에게 있어서 윤회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아무론 논리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입맛대로 해석하고 왜곡하여 불자들에게 큰 혼란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단멸론자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연기법에 대한 것이다. 단멸론자들의 주장에 조건발생적으로 설명되는 연기법에 대한 이야기가 보이지 않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법은 조건에 따라 발생되기 때문에 조건이 끊어지지 않는 한 법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이는 바로 을 말한다.

 

업이 남아 있는 한 그 업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법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런 연기에 법칙에 따르면 단멸은 있을 수 없다. 죽더라도 다시 태어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죽고 싶다고 영원히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자살이 왜 최악의 범죄행위인지에 대한 답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윤회를 알면 더 이상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멸론자들은 죽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죽어도 좋아

 

10년전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가 있었다. 노년의 성과 성문제를 다룬 영화이다. 영화의 제목이 죽어도 좋아이고, 실제로 대사에 죽어도 좋아라는 말이 나온다.

 

무엇이 그토록 죽어도 좋은 것일까. 그것은 젊은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이나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에 대한 것이다. 죽어도 좋을 만큼 좋은 것이 감각적 쾌락인데, 이는 매우 현세적욕망 추구에 대한 것이다.

 

현대인들은 감각적 쾌락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 번 태어난 인생 최대한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는 단멸론자들이 곧잘 주장하는 것이다.

 

단멸론자들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한다. 또 고통을 여의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죽은 다음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고, 알 필요도 없고, 알 의미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은 필연적으로 도덕적 허무주의로 귀결 되고 말 것이다. 단멸론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먹이고 수행을 말하고 있지만, 그 종착지는  막행막식, 감각적  쾌락주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멸론자들에게 있어서 죽으면 끝이고 내생은 더 이상 없는데, 무슨 수행이 필요하고 도덕적 삶이 필요할까. 되는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단멸론자는 정신적 장애자

 

이처럼 단멸론자들은 윤회를 부정하는 현실주의자들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역으로 인과를 부정하고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자들임을 동시에 알 수 있다. 그런 단멸론자들은 한 마디로 장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장애는 육체적 장애가 아닌 정신적 장애를 말한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고, 인격적 결함이 있다는 말이다. 더 정확하게 불교식 용어를 들어 말하면 오장애가 있다는 말이다. 다섯가지 정신적 장애를 말한다.

 

다섯가지 정신적 장애는 오장애 또는 오개라고 한다. 그런데  다섯가지 장애는 보통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라 한다. 이런 오장애는 선정수행과 지혜수행을 통하여 제거 될 수 있는데, 오장애와 선정수행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다섯 가지 선정[五種禪]와 다섯 가지 장애[五蓋]의 대치관계

다섯 가지 선정[五種禪]

다섯 가지 장애[五蓋]

1

일으킨 생각(, vitakka)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2

지속적인 고찰(, vicāra)

회의적 의심(vicikicchā)

3

희열(, piīti)

악의(vyāpāda)

4

행복(, sukha)

들뜸과 후회(uddhacca-kukucca)

5

집중(心一境, cittassekaggatā)

감각적 욕망(kāmāchanda)

 

 

 

표와 같이 오장애는 감각적 욕망(kāmāchanda), 악의(vyāpāda),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들뜸과 후회(uddhacca-kukucca), 회의적 의심(vicikicchā)을 말한다.

 

이중 감각적 욕망과 악의가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이는 다름 아닌 삼독 중의 탐욕(감각적 욕망)과 성냄(악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감각적 욕망이 가장 큰 장애요인인데, 이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과 쾌락을 위하여 죽어도 좋아!” 하며 돌진 하는 것이다.

 

오장애와  물의 비유

 

따라서 단멸론자들이  지금 여기 살아 있을 때 안락과 행복을 추구하자는 것은 다름 아닌 감각적욕망을 추구하자는 것과 다름 없고, 이는 다름 아닌 정신적 장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신적 장애자나 다름없는 단멸론자들의 견해는 오장애와  물의 비유로도 설명할 수 있다.

 

 

오장애와  물의 비유

No

오장애

물의 비유

   

1

감각적 쾌락의 욕망

다섯 가지 색깔로 물든 물

색성향미촉에 대한 감각적 쾌락과 넓은 의미에서 재색식명수의 욕망.

2

분노(악의)

부글부글 끓는 물

감각적 쾌락과 다른 극단적 형태의 성냄을 수반하는 것으로 자타에 대한 증오, 화냄, 원한, 혐오등을 속성으로 함.

3

해태와 혼침

이끼가 낀 물

해태는 정신적으로 아둔한 것을 의미하고, 혼침은 마음이 무겁고 가라앉아 졸리는 것.

4

흥분과 회한

바람이 불어 파도치는 물

흥분은 마음의 흥분, 불안정을 의미하고, 회한은 걱정으로 과거에 대한 후회와 원하지 않았던 결과에 대한 근심.

5

매사의 의심

흐린 흙탕물

의심은 어리석음에 수반하는 상습적인 미결정과 미해결, 신뢰의 결여 등을 뜻함.

 

 

 

상윳따니까야 전재성박사의 주석에서 참고한 것이다. 표를 보면 정신적 장애자와 같고 인격적 결함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단멸론자들의 행태와 거의 들어 맞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단멸론자들의 사고는 탁하다는 것이다. 이끼가 잔뜩끼어 더럽고, 흙탕물처럼 혼탁하고, 파도쳐서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부글부글 죽 끓듯이 끊어서 때에 따라 색깔을 달리 하는 변덕스런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부처님당시 단멸론자는

 

이처럼 단멸론자를 다섯가지 정신적 장애를 가진 장애자로 볼 수 있는데, 이런 단멸론자의 뿌리는 깊다.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초기경에서 단멸론자들의 견해와 유사한 유물론은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까. 그리고 부처님은 유물론자에게 어떤 가르침을 펼쳤을까. 초기경전에서 낫티딘나경(없음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처럼 괴로움이 있을 때 괴로움에 집착하고 괴로움에 탐착하여 이와 같이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공양도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홀연히 생겨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고 깨달아 천명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

 

네가지 위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사람의 그 목숨이 끝날 때에 흙은 흙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

 

네 명의 인부가 상여에 죽은 자를 싣고 가서 화장터에 이르기까지 곡을 하지만 마침내 뼈는 표백되고 재물은 재가 된다. 보시는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이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허황된 망설이다.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는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

 

는 견해를 일으킨다.”

 

(낫티딘나경-Natthidinna sutta- Nothing- 없음경, 상윳따니까야 S23.1.5, 전재성님역)

 

  낫티경(없음경-S23.1.5).docx 낫티경(없음경-S23.1.5).pdf

 

 

부처님은 유물론자들의 견해에 대하여 물질,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의 예를 들어가며 유물론자들의 잘못된 견해에 대하여 지적하였다.

 

아지따 께사깜발린(ajita kesakambalin)의 유물론

 

부처님당시 인도에는 정통브라만교에 맞서 온갖 사상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 중 잘 알려진 것이 육사외도이다. 이런 육사외도에 대한 이야기는 초기경에 자주 등장한다. 이는 브라만교의 영속주의와 더불어 논파되어야할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육사외도 중 현재 인터넷상에서 볼 수 있는 단멸론과 유사한 것이 아마도 아지따 께사깜발린(ajita kesakambalin)’유물론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유물론과 인터넷상에서의 단멸론은 어떤 유사성이 있을까.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유물론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상윳따니까야 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다음의 '없음' 이라는 경은 이것은 윤리적 허무주의를 고취시키는 철학적인 유물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아지타 께사깜발린(ajita kesakambalin)은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론자이다. 그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 물질적 원소만이 참된 실재라고 하여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인간은 네가지 원소로 만들어졌으며, 목숨이 다하고 죽으면 땅은 땅의 세계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세계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세계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세계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기관은 허공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유물론자들은 감각적으로 지각가능한 인상만을 인정하고 분리된 지각에 물질적 실체성을 부여함으로써 인과성을 부정한다. 유물론자들은 시랑까가 언급한 자성론자(自性論者 svabhavavadin)로서 물리적 개체를 구성하는 질료의 명령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내적 본성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결정론자이므로, 인간의 노력을 부정하고 도덕적 정신적인 모든 영역에서 인과성을 부정하며 따라서 무인론(無因論)을 주장한다.

 

1.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차별이] 없다.

2. 모두 물질로 구성되었으므로 선악업의 과보가 없다.

3. 선악업의 과보가 없으므로 어머니[에 대한 의무] 아버지[에 대한 의무]와 같은 윤리적인 책임감도 없다.

 

이들은 그래서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몸이 파괴되고 단멸하고 소실하여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고 주장했다. 모든 것을 물질적 요소로 환원시키는 유물론자들은 감각적 유물론에 토대를 둔 쾌락주의를 지지했다.

 

인도에서는 이러한 유물론자들을 로카야타(lokayata)라고 불렀으며 한역불전에서는 순세외도(順世外道)라고 불렀다. 또한 짜르와까(carvaka)라고 하는데, 그것은 유물론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도덕적 인과성의 부정에 따라 인간의 사후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측면에서 허무론은 단멸론(斷滅論 ucchedavada)이라고 불리운다. 넓게는 우연론이나 숙명론도 이러한 허무론에 속하며 특징적으로 도덕적인 허무주의, 무정부주의를 표방한다.

 

(전재성박사, 쌍윳따 니까야 제5 [존재의 다발모음 2] 해제)

 

 

 

해제글을 읽어 보면 단멸론자들은 유물론자들과 다름 없음을 알 수 있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 등 감각적으로 인지가능한 것만 믿고, 인과를 부장하는 측면에서 유물론자들과 똑 같다는 것이다.

 

단멸론자들에 대한 정형구

 

이런 유물론자들의 정형구는 초기경에서 단멸에 대한 경에서 볼 수 있는데, 부처님은 항상 이렇게 말씀 하셨다.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는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

는 견해를 일으킨다”

 

(초기경에서 단멸론자에 대한 정형구)

 

 

이런 문구는 인터넷상에서 단멸론자들의 윤회없음과 내생없음의 근거로 활용되는 한역아함경의 若彼終後即於爾時一切永滅無餘 永滅(만약 저 이 파괴되고 목숨을 마친 후라면 곧 이때 일체의 느낌은 영구히 멸하고, 남음이 없으므로 영구히 멸한다.-한역잡아함경 969, 장조경)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또 해제글에 따르면 유물론자들은 감각적 유물론에 토대를 둔 쾌락주의를 지지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인터넷상의 단멸론자들이 주장하는 현세에서의 안락과 행복추구와 같은 맥락이다.

 

단멸론자들의 종착지

 

단멸론자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내생은 없다”라고 말하며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한다. 그런 단멸론자들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아마도 유물론적 허무주의로 귀결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막행막식으로 일관할 것이다.

 

이처럼 인과와 내생을 믿지 않는 단멸론자들에게 있어서 필연적으로 막행막식과 쾌락주의는 그 어떤 도덕적 규범도 무시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일을 서슴없이 해도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데, 도덕적인 덕목을 어긴다고 하여도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알면 사라진다!

 

초기경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단멸론은 삿된 견해이다. 연기법적으로도 맞지 않는 것이다. 지은 업이 남아 있는 한 반드시 재생될 수 밖에 없는데, 이를 부정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외도와 같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방해하는 마라(마구니, 악마)’와 같은 것이다. 그런 마라는 어떤 것인가.

 

초기경에서 마라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은 정형구가 보인다.

 

 

그러자 악마 빠삐만은

 

'세존께서는 나에 대해 알고 계신다.

부처님께서는 나에 대해 알고 계신다'

 

라고 알아채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그곳에서 곧 사라졌다.

 

(초기경에서 ‘마라’에 대한 정형구)

 

 

 

 

 

 

Mara attacks

 

 

 

 

초기경에서 빠삐만(마라)은 모든 경우에 부처님을 유혹하는 반대편에 선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의 악마와는 달리 대조적인 견해를 드러내서 깨달음의 길을 분명히 하는 데 있어서 이용되는 일종의 도구라 한다.

 

그런 마라의 특징은 알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마라에 대하여 정체를 알게 되자 더 이상 유혹하지 못하고 세존께서는 나에 대해 알고 계신다. 부처님께서는 나에 대해 알고 계신다라고 말하면서 사라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마구니는 알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정법을 훼손하는 단멸론자들의 주장 역시 그 정체를 알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2012-02-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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