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카라(行)에서 어떻게 재생연결식(識)이 일어나는가? 나는 업(業)의 상속자
윤회주체가 있어야 한다는데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할 수 있을까? 윤회를 믿는 불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의문을 가져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을 이해하면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문부호를 내는 것은 ‘윤회의 주체’에 대한 미련때문일 것이다. 윤회를 하는데 있어서 주체가 있어야 하는데, 무아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윤회에 대한 개념으로 잘 설명되고 있는 것이 힌두교의 윤회설이다. 힌두교의 윤회설은 부처님 당시의 정통바라문교의 윤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라문 전통에 따르면 각 개인 마다 부동의 실체인 ‘아뜨만’이 있어서 존재의 영속성이 유지 된다고 본다. 이는 영혼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아뜨만의 실체를 부정하는데 강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일체의 존재들은 오온으로 이루어진 연기적 존재로서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윤회의 주체가 따로 없다. 그리고 윤회를 경험하는 자도 없다.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오온)이 조건발생하여 연기하듯이 윤회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주류불교에서의 윤회는 ‘삼세양중인과’로 설명된다. 이는 윤회를 설명하는 있어서 십이연기에 대하여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걸쳐서 두 번 인과를 받는 것을 말한다.
업감연기설(業感緣起設)
하지만 여전히 남는 의문은 ‘업’에 대한 것이다. 과거에 지은 업이 익었을 때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었을 때 이에 대한 주체는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업감연기설’로 설명되기도 한다. 업감연기는 어떤 것일까. 실용한영불교사전에 따르면 업감연기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소승 (小乘)의 연기론으로 사종연기 (四種緣起)의 하나. 일체의 현상은 모두 우리들의 업에 의하여 나타난다는 구사론 (俱舍論)의 세계관과 인생관. 곧 감업고 (感業苦)의 삼도 (三道)가 전전 (展轉)하여 인과가 상속됨을 말함. 감 (感)은 마음의 병이고, 업 (業)은 몸의 악이며, 고 (苦)는 생사의 과보 (果報)다. 마음의 병이 연 (緣)이 되어 몸으로 악을 짓고, 이 몸의 악이 인 (因)이 되어 생사의 과보 (果報)를 받게 됨으로, 이것을 가리켜 업감연기( 業感緣起)라 말함. 십이연기 (十二緣起) 참조.
다시 말해 우리들은 각기 뜻을 정하고 그 결정을 행동과 말로 나타내게 됨에 따라 업력 (業力)이 되고, 이들 업력은 없어지지 않고 아뢰야식에 함장 (含藏)되었다가 유사한 인연을 다시 만날 때 반드시 그 결과를 불러온다고 함. 아뢰야식연기 참조
소승이라는 말이 들어 간 것으로 보아 대승불교시각에서 쓰여진 것을 알 수 있다. 업감연기는 ‘인연과’로 설명될 수 있다. 원인(因)과 조건(緣)과 결과(果)에 따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인연과를 빠알리어로 ‘헤뚜빠띳짜팔라(hetu-paticca-phala)’라 한다. 업이라는 원인이 발생되었을 때 조건이 성숙된다면 반드시 결과로 맺어지는 것을 말한다.
대승에서 세운 윤회주체
이렇게 주류불교에서 업과 무아와 윤회에 대하여 연기법적으로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 대승불교에서는 별도의 윤회주체를 세우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수원대 정현숙님의 논문을 보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존재론적 무아설이 윤회문제 해결을 위하여 업감연기설을 제안하였으나 윤회주체가 사멸 재생할 때 업의 연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관한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으며 이에 인식론적 과제로 되었다.
이에 부파불교의 6식에 제7식과 제8식이 추가되어 심층심리의 연구가 유식불교의 주요 업적이 되었다. 제8식인 아라야식은 인식주체뿐만 아니라 일체의 기세간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임을 주장하였고,
이에 윤회는 아라야식의 깊은 바다에 파도가 생겨났다 다시 사라짐을 반복하는 것으로 비유되었다.
(정현숙님, 불교의 무아설과 융의 자기실현 비교고찰)
불교의 무아설과 융의 자기실현 비교고찰.docx 불교의 무아설과 융의 자기실현 비교고찰.pdf
유식사상이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초기불교에서의 무아와 윤회 그리고 업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이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제7식(말라식)’과 ‘제8식(아뢰야식)’을 추가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유식사상인데, 이 유식사상은 오온중에 ‘오로지’ ‘식’에 대한 것이다.
실재론적 윤회론으로
오온에서 색, 수, 상, 행, 식 이렇게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이 있는데. 그 중 식에 대해서만 설명하였기 때문에 이를 ‘불교식 인식론’이라 한다. 이런 인식론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수원대 정현숙님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트만 사상은 개체로서의 영혼의 실재를 인정하지만 이 아트만이 고립된 모나드가 아니라 전 우주적 실재인 브라만과 하나임을 주장함으로써 상호 대극적인 통일을 모색한다.
불교에서는 자아의 의식에 영혼의 실재가 없다고 보지만 모든 업을 함장하고 자아 의식의 생멸의 기반이 되는 아라야식을 통하여 무아와 윤회를 조화시키고, 아라야식만의 실재를 인정하는 유식(唯識) 철학을 발전시켰으며 일체의 오염사량(汚染思量)이 없어진 아라야식을 진여(眞如)로 보아 불생불멸의 실재와 생멸하는 자아의식의 통합적 사상을 제시하였다
(정현숙님, 불교의 무아설과 융의 자기실현 비교고찰)
무아윤회를 위하여 오온 중 오로지 식만 분별하여 아뢰야식이라는 ‘인식론'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아뢰야식이 윤회의 근본주체라 하였고 이는 실재론으로 발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초기불교의 무아윤회론이 ‘실재론적 윤회론으로’ 변질된 것으로 본다.
그런데 대승에에서의 실재론적 윤회사상은 부처님이 부정하였던 아뜨만 사상에 입각한 윤회론으로 복귀한 듯하다. 이는 윤회의 주체로서 실재를 인정한다는 면에 있어서 똑 같은 것이고, 더구나 주체와 객체가 합일 한다는 측면에 있어서 유사하기 때문이다.
교학과 수행에 모두 달통한 마하시사야도
이처럼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벗어났을 때 돌고 돌아 결국 원점으로 회귀하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류불교(초기불교,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십이연기에 대하여 삼세양중인과를 적용하여 무아와 윤회를 설명하고 있다.
이런 삼세양중인과는 청정도론에서 5세기의 붓다고사에 의하여 잘 설명되어 있는데, 이에 못지 않게 현대에서도 잘 설명되고 있다. 그것은 미얀마의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patticca-samuppada)’에서 보면 알 수 있다.
마하시사야도는 빠알리삼장에 통달하여 교학적으로 전세계에 매우 잘 알려져 있다. 또 전세계에 마하시위빠사나 수행센터도 건립하여 수행자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처럼 교학과 수행에 모두 달통한 마하시사야도가 법문한 내용을 모아 놓은 것이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patticca-samuppada)’이다.
그런 법문집에 무아와 윤회에 대한 부분이 있다. 십이연기에 있어서 “행을 조건으로 하여 식이 발생된다”라는 부분이다. 이때 식은 ‘재생연결식’을 말한다.
재생연결식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렇다면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설명한 마하시사야도가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법문집의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상카라[行]에서 어떻게 재생연결식[識]이 일어나는가?
상카라[行]에서 어떻게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레디 사야도(Ledī Sayādaw)는 연기법에서 이 부분이 오해의 소지가 많다고 지적하셨습니다.60
주해60.
레디 사야도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과거(전생)의 선하거나 불선한 업형성력(상카라)이 발현되지 않으면 재생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점은 매우 심오하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통적인 불교신자들이 지닌 견해는 피상적일 뿐인데, 이들은 요소와 현상을 꿰뚫어 보는 직관적 통찰지가 여전히 부족하다.”A manual of the excellent man (Uttamapurisa Dipani), by Ven. Ledī Sayādaw. BPS. Kandy. 2000. P.117
아직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생은 선업이나 불선업의 결과로 마지막 마음, 즉 죽음의 마음(cuti-citta)과 함께 모든 정신과 물질이 소멸되자마자, 새로운 정신과 물질과 함께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영혼의 전이에 대한 믿음인 상견(常見)이나, 죽으면 모든 것이 소멸한다는 단견(斷見)에 빠지기 쉽습니다.
단견은 죽은 다음의 원인과 결과간의 관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무명이 어떻게 상카라[行]에 이르고,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 갈애[愛]등이 어떻게 인과관계의 사슬을 구성하고 있는지는 현실의 삶에서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에 알기 쉽습니다.
하지만 죽은 다음에 새로운 생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견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에 기반을 두어 사유하는 배운 사람들은 대체로 상카라가 재생연결식을 일으킨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합리적이고 체험적인 접근방법이 못되기 때문에 오늘날 유물론적 인생관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어떻게 재생이 일어나는지를 맑고 투명하게 봅니다.
수행자는 마음의 단위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또 차례로 일어났다가는 번개 같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수행자가 체험으로 발견하는 것이지 스승에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수행자는 처음에 그렇게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수행자가 명상의 지혜(sammāsana-ñāṇa)와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baya-ñāṇa)를 얻었을 때야 비로소 그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지혜(paccaya-pariggaha-ñāṇa)가 생기면서 수행자는 죽음의 마음과 재생연결식에 대한 어렴풋한 개념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재생에 대해서 어떤 의심도 없어지는 시기는 명상의 지혜와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를 얻고 나서부터입니다.
수행자는 이러한 지혜를 토대로 죽음이란 위빠사나 수행에서 본인이 주시하는 마음 단위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마지막 마음의 단위가 사라짐을 뜻하고 또 재생이란 그러한 첫 마음의 단위가 일어남을 뜻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점을 간과합니다. 그들은 영원한 자아가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마음과 동일시합니다. 아비담마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견해를 부정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여러 전생에서 그러한 견해에 집착해왔기 때문에 여전히 유신견(有身見)61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지혜가 아직 완전히 성숙되지 않은 위빠사나 수행자도 때로는 유신견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을 느낍니다.
주해61.
유신견(有身見)으로 번역되는 삭까야딧띠(sakkāya-diṭṭhi)는 sakkāya(존재의 무더기=오온) + diṭṭhi(견해)의 합성어이다. 영역은 personality belief, wrong view of self등으로 풀이 된다. 불멸하는 영혼이나 인격 주체와 같은 존재론적 실체가 있다고 믿는 그릇된 견해로 중생들을 윤회에 묶어두고 있는 10가지 족쇄(saṃyojana)중 첫 번째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엔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 ① 오온(五蘊)이 바로 자아라는 생각 ② 오온(五蘊)안에 자아가 들어 있다는 생각 ③ 오온(五蘊)과 따로 있다는 생각 ④ 오온(五蘊)의 주관자란 생각이다. 빨리 경전에 나오는 유신견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정통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의 법에 정통하지 못하여 물질[色]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한다. 느낌[受]을 … 인식[想]을 … 상카라[行]들을 … 식(識)를 자아라고 관찰하고, 식(識)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식이 자아 안에 있다고, 식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한다. 이와 같이 유신견이 있다.”(M44)
이 유신견은 성자와 범부를 판단하고 걸러내는 금강석이다. 왜냐하면 이 유신견을 타파하지 못하면 성자의 초보단계인 예류자(sotāpanna)도 될 수 없기 때문이고, 유신견으로 대표되는 족쇄들이 풀리지 않는 한 아무리 깊고 미묘한 천상에 태어나더라도 탐· 진· 치의 불길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상견(常見)과 단견(斷見)
유신견에 사로잡힌 범부들에게 죽음은 한 개별적 실체의 소멸이나 또 다른 보금자리나 존재로 뒤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단멸론에 대한 믿음인 단견(斷見)과 영혼이 다른 몸이나 보금자리로 옮겨간다는 믿음인 상견(常見)62의 전도된 견해입니다.
주해62.
상견으로 번역한 사싸따딧띠(sassata-diṭṭhi)는 sassata(영원, 항상함) + diṭṭhi(견해)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상견(常見)으로, 영어로는 eternalism, eternity-belief라고 한다. 이는 영혼이나 자아는 절대 죽거나 분해되지 않는다고 믿는 영원주의라는 삿된 견해이다. 거친 육신이 소멸되어도 살아있는 실체인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다른 새로운 몸속으로 들어가서 계속해서 존재하며, 설령 세계가 무너지고 파괴될지언정 영혼은 영원히 존속하고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교외의 다른 종교는 대부분 이러한 상견을 취하고 있다. 요컨데, 영혼이나 살아있는 실체가 소멸되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 옮겨간다고 보는 믿음은 다 상견이다. 그리고 이 상견과 결부된 갈애를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 taṇhā)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몸이 자라고 성장함에 따라 마음도 저절로 성장한다는 원인을 부정하는 견해[無因論]63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해63.
원인을 부정하는 견해(無因論 ahetuka-diṭṭhi)는 중생의 번뇌와 청정에는 아무런 원인[因, hetu]도 조건[緣, paccaya]도 없다는 견해로서 중생들은 우연이나 운명이나 필요에 의해서 오염되기도 하고 청정해지기도 한다고 주장하는 3가지 삿된 견해(micchā-diṭṭhi)중의 하나이다. 경전에서는 이외에도 허무주의의 견해(虛無論 natthika-diṭṭhi), 업보를 부정하는 견해(akiriya-diṭṭhi)를 삿된 견해로 더 들고 있다.(D2; M60; M76)
어떤 사람은 정신과 물질의 흐름인 윤회에 대해서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몸을 삶의 주인공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는 일시적 거주처로 여깁니다.
육체가 분해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머지않아 육체가 부활한다고 굳게 믿고 시신을 소중히 다루기도 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상카라[行]와 재생연결식[識]의 인과관계에는 오해의 소지가 많다는 레디 사야도(Ledī Sayādaw)64의 말씀에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주해64.
레디 사야도(Ledī Sayādaw)는 근세 미얀마가 낳은 걸출한 스님이다.
레디 사야도가 어떤 방법으로 수행하였는가 구체적인 정보는 없지만, 전통적인 수행방법인 호흡에 대한 관찰과 몸의 감각을 관찰하는 방법을 바탕으로 한 위빠사나 수행을 하였을 것이라고 고엔카 전통에서는 정리하고 있다. 이 방법은 사야 텟 지와 우바킨을 거쳐 고엔카지의 위빠사나 수행법으로 이어진다.
평범한 불교신자도 이러한 전도된 인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불교의 교리인 무아를 믿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못할 정도로 이런 환상을 맹목적으로 지니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죽음, 재생, 정신과 물질에 대한 완벽한 지식이 없어도 명상 하여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직후에 찬나(Channa)장로65는 위빠사나 수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견 때문에 수행에 진전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후 아난다(Ānanda) 존자66의 연기 법문에 따라서 명상을 했으며 전도된 인식을 극복하고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주해65.
찬나(Channa) 장로는 부처님이 출가할 때 마부였다. 그는 부처님과 법에 대한 집착과 자만심이 너무나 강해서 출가의 이익을 체득할 수 없었다고 한다. 세존께서는 찬나와의 인연을 중히 여기시어 유훈으로 어느 누구도 그와 상대를 하지 말라는 최고의 처벌(brahma-daṇḍa)을 내리셨다. 「율장」(Vin.ii.292)에 의하면 찬나는 이 처벌을 받고 크게 정신이 들어서 자만심과 제멋대로 하는 성질을 꺾고 홀로 한거하여 열심히 정진하였으며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부처님 당시의 야마까(Yamaka)비구는 아라한은 완전한 열반에 들고 나면 단멸한다고 믿었습니다. 사라뿟따(Sāriputta)가 그를 불러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법문을 들으면서 야마까 장로는 명상 하여 해탈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열과 성을 다해 위빠사나를 수행하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죽음과 수태의 본성에 대한 무지와 의심, 그리고 단견에 집착하는 성향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사후에 내생이란 게 과연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자체가 한 생명 안에 있는 자아니 영혼이니 진아(眞我)니 하는 것들을 전제로 합니다.
유물론은 영혼의 개념을 부정합니다만 죽은 자와 산 자를 구별 짓는데 있어서 자아에 대한 전도된 인식이 은연중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노골적으로나 은연중에 자아를 수용하는 사람들의 질문에 불교적 관점으로 답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만약 우리가 내생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우리가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지지한다고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하지만 불교는 무조건 내생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런 질문에 답변하지 않으셨습니다. 더구나 보통사람들에게 증거를 제시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신통이 있는 사람은 지옥이나 천신계를 보여줄 수 있겠지만 회의적인 사람들은 이를 마술이나 속임수라고 치부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선 이런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번뇌가 소멸하지 않은 경우에는 죽음 뒤에 정신과 물질 과정이 계속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생의 문제는 지적으로는 접근할 수 없고 특별한 불교수행을 통해서만 해결됩니다. 이러한 수행을 통하여 수행자는 신통을 얻어서 선한 사람은 천신계에 태어나고 악한 사람은 악처에서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보는 것은 두 집을 다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선명합니다. 수행자는 높고 낮은 세계의 수많은 천신, 동물들 중에서 자신이 보고자 하는 사람을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선정과 신통을 얻을 수 있으며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하는 가르침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실제로 저 세상(para-loka)67과 신통으로 접촉을 갖는 수행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통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그러한 신통은 강력한 집중에 의지하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이 더 쉬운 길입니다.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지혜(paccaya-pariggaha-ñāṇa)가 계발되어 수행자가 죽음과 수태의 본성을 잘 알게 되면 삶의 문제가 더욱 명확해집니다. 명상의 지혜(sammāsana-ñāṇa),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baya-ñāṇa), 그리고 무너짐의 지혜(bhaṅga-ñāṇa)를 성취하면 삶의 문제는 보다 더 명확해집니다. 왜냐하면 식(識)의 단위들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이란 현생의 마지막 식이 사라진 다음에 수태, 즉 내생의 처음 식(識)이 뒤따라서 일어나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혜도 아직은 취약한 것으로 수행자가 최종적으로 예류의 성위를 얻고 나서야 비로소 내생에 대한 모든 의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위빠사나 수행은 하지 않고 내생에 대해서 묻기만 하려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서양의 과학자와 철학자의 의견을 구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신통을 지닌 아라한이라고 믿어지는 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에게 의지하기 보다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해답을 구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baya-ñāṇa)의 단계에서 수행자는 사라진 식(識)단위의 흐름에서 감각대상에 집착하는 새로운 식(識)의 단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수행자는 전생에서 죽은 마지막 순간에 한 대상에 대한 집착에 의해 조건 지어진 식의 단위와 함께 새로운 생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죽기 직전의 식의 흐름은 물질적인 몸에 의존하면서 하나의 식 단위가 다음 식 단위로 끊이지 않고 계속됩니다. 죽은 다음 몸은 분해되고 식의 흐름은 다른 세계의 물질적인 과정으로 옮겨갑니다.
이것은 전기를 끊임없이 공급받는 전구가 지속적으로 빛을 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전구가 나가면 불은 꺼지지만 전기는 계속해서 들어옵니다. 낡은 전구를 새 전구로 갈아 끼우면 빛이 다시 들어옵니다. 여기서 전구, 전기, 빛은 모두 변화하는 물질적 과정이며, 우리는 이들의 무상한 성질을 주의 깊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주석서는 메아리, 등불, 도장의 인각, 거울에 비친 영상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메아리는 음파가 벽이나 숲 등에 부딪쳐서 나오는 소리의 반향입니다. 우리가 소리와 메아리의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소리가 먼 곳까지 전이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거울을 볼 때 여러분의 얼굴이 그 거울 속에 비치는데 비록 자신의 얼굴과 거울에 비친 영상이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두 가지를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불이 붙어 있는 등불은 다른 등불을 켜는데 쓸 수 있습니다.
불을 붙여준 등불이 여전히 타고 있으므로 새로운 등불의 불꽃은 이전의 등불이 분명히 아니지만, 이전의 두 등불과 두 개의 불꽃이 인과적으로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끝으로 도장은 그 표면과 같은 각인을 남기지만 실제로는 도장의 표면은 아니며 도장 없이 표면은 찍히지 못합니다.
이 비유는 재생의 성질을 어렴풋이 알게 해줍니다. 사람이 죽어갈 때 자신의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 나타납니다. 죽은 뒤에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는 이들 표상 중의 어느 하나에 조건 지어진 재생연결식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재생은 식의 마지막 단위가 다른 생으로 옮겨감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임종 때의 표상에 의해 조건 지어집니다. 그래서 재생은 죽어가는 사람이 보는 표상이 인도하는 무명, 상카라 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재생연결식은 전생과 인과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두개의 연속되는 식 단위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우리는 한사람을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또는 전 생애동안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임종의 마지막 식을 재생연결식과 함께 동일한 사람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합니다. 사람이 천신계나 다른 세계에 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전체로서의 정신과 물질의 전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재생은 인과적으로 관련된 정신단위의 흐름과 관련 있기 때문에 동일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동시에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에 전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믿는 것은 단견입니다. 이에 따르면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것이 끝납니다. 대부분의 불교신자들은 이러한 단견으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두 개의 연속된 삶이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관습적인 용어로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재생이란 자아가 새로운 보금자리로 옮겨가는 것을 뜻하는 상견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성숙한 위빠사나 지혜를 가지고 있는 수행자는 현생의 정신적 단위들의 일어나고 사라짐과 그들의 인과관계를 철저히 알기 때문에 이러한 단견과 상견을 지니지 않습니다. 이렇게 알면 개인이 불멸하거나 단멸한다는 전도된 인식에 휘말릴 소지가 없습니다.
식(識)의 본성은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분명합니다. 낙담 다음에 기쁨이 오고 또 기쁨 다음에 낙담이 옵니다. 고요한 마음 다음에 짜증이 오고 짜증 다음에 고요한 마음이 옵니다. 이러한 식(識)의 변화는 명확히 그 이질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식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밤에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면 그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식들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인과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연속된 식들 간의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는 사람은 죽음으로만 격리되었을 뿐인 죽음의 마음과 재생연결식의 두 가지 식 사이에도 똑같은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임종 때의 표상
새로운 존재의 식(識)에는 재생연결식과 일생에 걸쳐 일어나는 식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재생연결식은 악처에 하나, 인간과 천신의 욕계에 아홉, 색계범천계에 다섯, 무색계 범천계에 넷, 이렇게 모두 19가지입니다.
재생연결식이 일어나고 나서 일생에 걸쳐 일어나는 과보식(vipāka-viññāṇa), 즉 과보의 마음은 모두 32가지입니다. 이러한 목록은 아비담마를 공부한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살면서 지었던 행위의 회상인 업(kamma), 업과 연관된 주변 조건인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 나타납니다. 업은 과거에 대한 회상이나 현재에 대한 환상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부는 임종하는 순간 마치 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말하거나 보시를 많이 한 사람은 죽기 얼마 전 보시를 행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나는 쉐보에서 만달레이와 양곤의 파고다를 참배하는 성지순례단을 이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순례단에 있던 한 노인이 쉐보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습니다. 그는 성지순례의 경험을 회상하는 말을 되뇌면서 죽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또한 보시행과 관련된 가사, 승원, 비구, 불상등과 같은 행한 업의 환경을 보거나 살인자의 경우 흉기, 범행 장소, 피해자를 봅니다.
그리고 내생에 받게 될 운명을 봅니다. 예를 들면, 지옥으로 갈 예정이라면 지옥의 불이나, 지옥지기들을 볼 것이며, 천신계에 태어날 운명이라면 천궁, 천신을 볼 것입니다.
한때 죽어가는 바라문이 자신이 본 불꽃의 표상은 범천계를 가리킨다는 말을 친구들에게 들었습니다. 바라문은 그렇게 믿었지만 죽은 다음에 지옥에 떨어진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릇된 견해는 참으로 위험합니다. 죽어가는 친구에게 유익하다고 믿고, 보시를 위해 소를 죽인 행위를 마음속에 떠올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법구경」주석서(DhA.i.129ff)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 사왓티에 남자신도 500명이 각각 5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수행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중 가장 연장자인 마하담미까(Mahā-dhammika)는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일곱 명의 아들과 일곱 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마하담미까는 나이가 듦에 따라 병들고 쇠약해졌습니다. 집으로 모셔온 비구들이 독경하고 있을 때 천상의 마차가 천신계로 자신을 데리러 온 것을 보았습니다. 마하담미까는 천신들에게 “기다려 주세요!”라고 소리쳤습니다.
비구들은 죽어가는 사람이 하는 말인 줄로 알고는 독경을 그만두었습니다. 아들과 딸들은 아버지가 죽음의 두려움에 혼미해서 중얼거린다고 생각하고는 울었습니다. 비구들이 떠난 다음에, 마하담미까는 또렷한 목소리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화환을 공중에 던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자 화환이 공중에 둥둥 떠 있었습니다. 그러자 마하담미까는 화환이 있는 곳이 도솔천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아들과 딸들에게 천신계에 재생하기 위해 자기처럼 선행을 많이 하라고 충고하고는 죽어서 도솔천에 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선한 사람이 임종할 때 천신계의 표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몰라먀잉(Mawlamyaing)의 한 남자신도는 죽기 바로 직전에 아주 훌륭한 푸쨔(pucca)건물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천신계의 표상일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날 운명의 어떤 죽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가 될 사람, 거처 등의 표상을 봅니다. 몰라먀잉의 한 사야도는 강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3년 후에 한 어린이가 메르귀(Mergui)에서 몰라먀잉으로 와서 전생에 자신과 같이 살았던 사야도들의 이름을 확인해주었습니다.
그는 강도들이 돈을 얻지 못하자 자신을 칼로 찔렀고 부두로 도망쳐와서 배를 타고 메르귀에 와서 현재의 부모집에 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도주, 배를 탄 것등은 어쩌면 사야도의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었을 것입니다.
업의 표상(kamma-nimitta)과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은 즉사할 경우에도 나타납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철봉위에 앉아 있는 파리를 망치로 내리칠 때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큰 도시 하나를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핵무기가 있습니다. 불교적 견해에 따르면 이런 핵무기는 잠재적 피폭자의 악업으로 인해 생겨난 것입니다.
이 핵폭탄에 죽는 사람들도 회상과 표상을 봅니다. 마음의 매커니즘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터무니없게 들리겠지만, 정신- 물질을 찬찬히 관찰하는 수행자는 이를 쉽게 수긍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눈 한번 깜짝할 찰나에도 마음의 단위들은 수십억번이나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경전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baya-ñāṇa)를 얻은 수행자는 한 찰나에도 수없이 많은 마음의 단위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경험적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사고나 갑자기 죽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회상과 표상들에 집중된 마음의 가능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항상 대상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들은 자주 이전에 한 행위를 회상하거나 천신계나 인간계를 생각합니다, 선행을 한 사람이 만약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죽는다면 천신이나 사람으로 재생할 것입니다.
임종 때 가지는 이러한 생각의 대상을 태어날 곳(gati-nimitta)의 표상이라고 하고, 업과 관련된 대상의 표상을 업의 표상(kamma-nimitta)이라고 합니다.
임종할 때의 현상들에 대한 언급은 주석서뿐만 아니라 빨리68 성전에서도 발견됩니다.『중부』「우현경(愚賢經 Balapandita Sutta)」(M129)과 그 밖의 다른 경들에서 부처님께서는 임종 때의 선행이나 악행에 대한 기억을 말씀하시면서, 이를 저녁때 들판에 드리워진 산의 그림자로 비유하셨습니다. 그것은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한때 나는 죽어가는 여인이 잔인하게 학대당하는 것처럼 극도의 두려움을 보이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말을 하질 못했고 친척들이 안심시키려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악업의 결과로 태어날 불행한 내생을 미리 맛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업을 지어서 죽는 순간에 선업과 연관된 대상이나 사람의 표상과 좋은 내생의 표상이 생기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선행이 지혜롭고 목적의식이 강하며 욕계의 여덟 가지 유익한 마음중의 하나라면 과보식은 네 가지 지혜가 있는 식(識)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재생은 어리석지 않음(amoha)과 결부되고, 그렇게 어리석지 않음(amoha), 성냄 없음(adosa), 탐욕 없음(alobba)의 세 가지 뿌리와 조건, 즉 원인(hetu)과 함께 일어납니다.
이러한 선근을 타고난 사람이 사마타를 닦을 경우에는 선정과 신통을 얻을 수 있고 위빠사나에 매진할 때에는 성스러운 도와 닙바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열반에 대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한 선행들은 그러한 선한 재생으로 인도하고 궁극에 가서는 명상이나 법문을 통해 도와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만약 열반에 대한 목적의식이 약하거나 선하기는 하지만 지혜가 모자란 행위, 즉 업에 대한 믿음이 결여된 선행일 경우에는 네 가지 어리석은 과보심(moha-vipāka)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리석지 않음(amoha)이 없이 다른 근본 조건, 즉 탐욕 없음(amoha)과 성냄 없음(adosa)만을 가지고 재생이 일어납니다. 이를 두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dvehetupaṭisandhika)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은 선천적인 지혜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선정이나 도를 얻을 수 없습니다.
만약 선행이 지혜와 결부되지 않았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선근도 없이 선한 재생연결식만을 낳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불완전한 눈과 귀 등을 가지고 태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선행을 할 때에는 열반을 목표로 하고 열과 성을 가지고 해야만 합니다. 마음을 열반으로 향하게 한다면 선행은 열반으로 인도할 것이며 선행을 할 때의 열과 성은 선근을 가지고 재생하도록 할 것입니다.
지혜롭게 열과 성을 다해 선행을 한다면 고귀하게 재생한다는 것은 틀림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선행을 함에 있어서 열과 성이 없다면 탐욕 없음(alobha)과 성냄 없음(adosa)이 없는 재생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시와 지계는 재생과 윤회고에 이르는 무명에 뿌리박은 선한 업 형성력인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무지에서 비롯된 그릇된 견해입니다. 열반을 바라는 마음에서 보시와 지계를 행하면 가장 고귀한 재생을 보장하고 최고의 목표에 이르도록 합니다.
사리뿟따와 다른 부처님의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열반을 얻은 것은 보시와 지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벽지불69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보살도 또한 자신의 선행이 일체를 아는 지혜를 얻게 해달라고 서원하면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이 될 보살의 태어남과 관련된 어리석지 않음(amoha), 성냄 없음(adosa), 탐욕 없음(amoha)의 세 가지 선한 근기를 가진 재생은 기쁨(somanassa)과 함께하는 마음과 평온(upekkhā)이 함께하는 마음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두 가지 마음은 각각 자극받지 않은 마음(asaṅkhārika-citta)과 자극받은 마음(sasaṅkhārika-citta)이 있습니다. 보살의 재생연결식은 강력하고 열정적이고 자극받지 않은 마음이었습니다.
옛 주석서에 따르면 그것은 기쁨(somanassa)이 함께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모든 중생이 행복해지길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모든 중생들에 대해 무한한 자애(mettā)를 가졌습니다. 강력한 의지의 자애는 보통 기쁨(somanassa)과 함께하므로 보살의 재생연결식은 기쁨과 함께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하시와(Mahāsiva) 장로70는 평온(upekkhā)이 보살의 재생 마음부수로 함께 하지 않겠느냐는 견해를 피력합니다. 장로의 견해에 따르면 보살의 마음은 확고하고 심오하기 때문에 기쁨보다는 평온이 보살의 재생연결식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여하튼 이 재생연결식은 위없는 깨달음을 바라는 욕구에서 자극받은 선행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롭고 선한 업형성력(saṅkhāra)이 재생에 이르게 했지만 윤회를 연장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윤회로부터 해방되도록 했습니다.
마음은 재생연결식이거나 다른 것이거나 간에 매우 짧은 시간만 머묾니다. 그것은 시간적인 측면에서 일어남(生 upāda), 머묾(住 ṭhiti), 무너짐(滅 bhaṅga)이라는 세 가지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이들 마음의 단위는 눈 깜짝할 동안에 수백만 번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합니다. 각 단위의 순간들은 너무나 짧아서 백만분의 1초도 머물지 않습니다71.
재생연결식이 소멸한 다음에는 다른 식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한, 보고 듣는 것과 결부된 정신활동의 일종인 인식 과정(vīthi)이라고 하는 잠재의식인 바왕가의 흐름(bhavaṅga-sota)이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삶이 이어지는 한 이 바왕가의 흐름은 계속되며 그것의 주요 원인은 재생연결식과 마찬가지로 상카라(saṅkhāra)입니다.
바왕가의 흐름이 지속되는 기간도 주로 상카라, 즉 업(kamma)에 의존합니다. 이는 마치 하늘에 던져진 돌과 같습니다. 돌을 던진 손의 힘이 세다면 돌은 멀리 올라가겠지만 힘이 약하다면 그다지 멀리 올라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업의 힘은 또한 총알이나 로켓 따위가 처음 발사되었을 때의 속도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죽음은 그와 같은 업의 힘에서 나온 식(識)의 소멸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때 맨 처음 일어나는 재생연결식, 바왕가의 흐름, 마지막 죽음의 마음(cuti-citta)은 전적으로 과거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정신적 생명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업, 즉 상카라(saṅkhāra)로 인하여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것과 결부된 오문인식과정이 있으며 감각대상에 초점을 둔 정신적 단위, 조사하는 마음(santīraṇa-citta)72, 자와나(javana)73의 대상을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citta)74이 있습니다. 이들은 재생에 이르게 하는 원래의 업이나 다른 종류의 업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논장(論藏)에 따르면 선한 마음, 불선한 마음, 업이 되지 않는 작용만 하는 마음(kiriya-citta)을 포함하는 모든 식(識)의 원인은 상카라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작용만 하는 마음(kiriya-citta)도 상카라에 뿌리를 둔 바왕가의 마음(bhavaṅga-citta)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는 합리적입니다. 그리고 연기법은 특히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 업의 회전(kamma-vaṭṭa), 과보의 회전(vipāka-vaṭṭa)과 그들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업의 회전(kamma-vaṭṭa)에서 나온 32가지 세간의 과보심의 원인을 상카라에 돌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32가지 마음 가운데 우리는 재생연결식, 바왕가(잠재의식), 죽음의 마음 등으로 이루어진 19가지 마음을 설명하였습니다. 나머지 마음 중 일부는 상카라에 따라서 선한 것도 있습니다.
12연기의 가르침은 처음의 두 요소인 무명(無明)과 상카라[行]는 전생의 원인으로 설명하고, 식(識), 정신-물질[名色], 감각접촉[觸], 느낌[受]은 현생의 결과로 설명하고, 현세의 갈애[愛], 집착[取], 존재[有]로 인해서 내생에 태어남[生], 늙음-죽음[老死]이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마하시사도의 ‘빠띳짜사뭅빠다-12연기’ 에서)
마하시사야도 법문집의 특징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법문집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교학적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주가 있어서 도움이 되긴 하지만, 마음에 대한 분석에 대한 것을 알지 못하면 무슨 이야기 하는 것인지 놓치기 쉽다.
이는 사야도가 철저하게 니까야와 같은 논장, 아미담마 같은 논장, 그리고 청정도론과 같은 주석서를 바탕으로 법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야도의 법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아비담마나 청정도론과 같은 교학적 바탕이 있어야 한다.
그런 법문집에서 마하시사야도는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이는 철저하게 연기법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상카라(행)을 조건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식)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경전과 주석서를 근거로 설명하고 있고 또 알기 쉽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런 내용중의 하나에 ‘우현경’이 있다.
저녁때 들판에 드리워진 산의 그림자
부처님께서는 임종 때의 선행이나 악행에 대한 기억을 말씀하시면서, 이를 ‘저녁때 들판에 드리워진 산의 그림자’로 비유하였다고 하였다. 그 부분에 대하여 우현경을 찾아 보았다.
9.
또한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위에 올라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 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 위에 올라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면 어리석은 자는 이와 같이 생각한다. ‘참으로 나는 착한 일을 하지 않았다. 참으로 나는 건전한 일을 하지 않았다. 두려움에서 나를 수호하지 않았다. 참으로 나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참으로 나는 불건전한 일을 하였다.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나는 악을 짓고 포악하고 죄과를 지은 자들의 운명, 그 운명으로 수명이 다하면 떨어질 것이다. 그는 슬퍼하고 우울해 하며,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고 통곡하다가, 실신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어리석은 자는 지금 여기에서 이와 같은 세 번째의 고통과 불쾌를 느낀다.
(발라빤디따경-Balapandita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우현경,맛지마니까야 M129, 전재성박사역, 한역대응경; 중아함199)
발라빤디따경(우현경-M129).docx 발라빤디따경(우현경-M129).pdf
경에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지은 업은 반드시 받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큰 산의 그림자가 저녁 무렵에 드리워지는 것 같다고 하였다.
어둠은 점차 다가오고 갈 길은 먼데 큰 산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때 나그네는 두려움을 느낄 것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과거에 지은 악행으로 인하여 비록 지금은 그 과보를 받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 받을 것을 생각하면 산그림자를 보는 두려움과 같다는 것이다.
자신의 악행을 되새겨 볼 때
그래서 악행을 저지른 자는 그 악행으로 인하여 악처에 떨어질 과보를 생각하면서 괴로워하는데, 실제로 악처에 떨어져 괴로워 할 것이다. 이에 대한 법구경의 게송이 있다. 법문집에서 선행을 한 재가신자 마하담미까와 비교되는 백정 ‘쭌다수까리까 이야기’가 있다. 이에 대하여 법구경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Idha socati pecca socati, 이다 소짜띠 뺏짜 소짜띠
pāpakārī ubhayattha socati 빠아빠까아리 우바얏타 소짜띠
So socati so vihannati, 소 소짜띠 소 위한나띠
disvā kammakiliṭṭham attano 디스와아 깜마낄릿탐 앗따노
이 세상에서도 그는 비탄에 빠지고
다음 세상에서도 그는 비탄에 빠진다.
이처럼 악한 행동을 한 사람은
양쪽 세상 모두에서 괴로움을 겪는다.
그가 더욱 괴로운 것은
고통을 겪으며 자기 악행을 보고 되새기는 것이다.
(법구경 Dhp15,거해스님역)
악행을 저지른 자는 두 번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한 번은 현생에서 또 한 번은 내생에서이다. 이 경우 내생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와 같은 악처를 말한다. 현생에서 고통을 받는 다는 것은 ‘자신의 악행을 되새겨 볼 때’이다.
혹시라도 완전범죄를 저질러 사회법으로 처벌받지 않았을지라도 양심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임종하는 순간 가장 강렬하였던 기억이 떠오르는데, 그것이 악행이었다면 그 악행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나 악처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악행을 저지른 자는 현생에서도 괴로워 하고 또 내생에서도 고통받을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중으로 고통받는다고 한다.
꿈속의 나와 꿈꾸는 나
마하시사야도 법문집 12연기를 보면 무아이면서도 윤회하는 것에 대하여 경장과 논장, 주석서의 예를 들어 가며 상세하게 설명해 놓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연기법적으로 윤회를 설명해 놓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 대승불교에서 업과 윤회주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유식사상을 발전 시켰는데, 이것은 오로지 ‘식’에 관한 것이다.
오온에서 식만 따로 떼어 내어 발전시킨 것이 불교인식론이다. 그러다 보니 아뢰야식의 실재를 인정하였고, 이 아뢰야식을 윤회의 주체로 본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부정하였던 ‘존재론’에 대한 것이다.
이때 아뢰야식과 자아의 관계는 ‘바다와 파도’에 비유된다. 아뢰야식은 존재의 근원으로서 바다와 같은 것이고, 자아는 생멸하는 파도 또는 포말, 물방울과 같은 것으로 본다.
이런 아뢰야식은 여래장사상과 결합하여 원효스님의 일심(한마음)사상으로 발전하였는데, 이화여대 한자경 교수에 따르면 ‘꿈속의 나’와 ‘꿈꾸는 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꿈속의 나와 꿈속의 기세간은 모두 꿈꾸는 나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으로서 꿈속의 나가 꿈을 깨면 꿈꾸는 나와 같은 것이라는 취지의 이야기이다.
이때 꿈속의 나는 가아이고, 꿈꾸는 나는 진아로 본다. 그런데 이런 식의 이야기는 선사들의 임종게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현실에 대하여 한 바탕 꿈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깨닫는 것에 대하여 꿈을 깨는 것으로 본다.
세상을 보는 관점
이처럼 대승에서는 진아와 자아와의 관계에 대하여 바다와 파도, 꿈꾸는 나와 꿈속의 나의 비유로 설명하는데, 이는 자아 보다 진아를 찾는 것에 더 목적을 두는 케이스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류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이분법적 구조는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연기적 존재’만 있을 뿐이다. 그 결과 대승불교와 주류불교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도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진아를 설정한 대승불교에서는 나를 세상의 일부로 볼 수 있다.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나란 존재는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있어서 내가 태어 났고, 또 내가 태어 나기 이전에도 세상은 있었고, 내가 없어도 이 세상은 있을 것이라는 인식이다. 또 창조주이든 누구이든 이 세상의 근원인 어떤 존재가 나를 지켜 보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나라는 존재를 객에 지나지 않는 ‘객관적 존재’처럼 보이는 것이다. 어떤 하나의 원인에서 존재가 출현하였고 다시 그 제일 원인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온 이외 다른 어떤 것이 없이 오로지 연기적으로만 존재한다면 세상은 주관적이 된다. 나 자신이 주인이되고 주체가 되는 ‘주관적 존재’이다. 그래서 창조주가 주체가 되고 내가 객체가 되는 것을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다.
나는 업의 상속자
따라서 연기적 존재로서 내가 지은 모든 업은 내가 업의 주인이고, 업의 상속자이다. 오온 이외 다른 어떤 곳에 경험하는 자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이 존자는 자기 업의 주인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이 존자의 권속이고,
업이 이 존자의 의지처이다.
이 존자는 그가 행한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청정도론, 제9장 거룩한 마음가짐 24절)
2012-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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