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밭농사보다 마음농사, 까시 바라드와자경(Sn1.1.4)

담마다사 이병욱 2012. 2. 4. 19:58

 

 

밭농사보다 마음농사, 까시 바라드와자경(Sn1.1.4)

 

 

 

 

까씨 바라드와자의 경

(kasibharadvaja sutta)(*1)

 

 

주해(*1)

까씨(kasi)는 ‘밭갈기’를 뜻한다.

그는 바라드와자의 가문에서 태어나서 밭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룬 이후 대략 11년후에 그를 방문한 것이다.

 

이 경은 여러 가지의 의식을 벌이는 농경축제 가운데 파종 축제를 취급하고 있다.

그 것에는 습윤한 진흙에 파종하는 것과 건조한 흙먼지에 파종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다.

 

여기서는 두 번째의 건조한 먼지 파종을 말한다.

 

이 경이 설해진 인연담은 이 경속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길게 언급하는 것을 생략한다.

이 경은 후세 선 불교의 심우도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다끼나기라에 있는 에까날라라는 바라문 마을에서 마가다(*1)인들 사이에 계셨다.

 

2. 그 때 바라문 까씨 바라드와자가 파종할 때가 되어 500개 가량의 쟁기를 멍에에 묶고 있었다.

 

3. 마침 세존께서는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을 하기 위해 바라문 까씨 바라드와자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 가셨다. 바라문 까씨 바라드와자는 음식을 나누어 주고(*2) 있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바라문 까씨 바라드와자가 음식을 나누어 주고 있는 곳으로 가서 한쪽에 서 계셨다.

 

 

주해(*1)

마가다는 부처님 당시의 인도 4대 왕국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마가다국은 8만 마을과 둘레가 1260km에 달하는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 빔비사라와 아자타삿투 왕으로부터 700년 후 아쇼카 왕에 이르기까지 마가다는 북인도의 역사를 장식했다. 빠알리어도 마가다어로 알려져있다.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도 마가다 출신이다. 이 마가다 지역은 오늘날에 남 비하르에 해당한다.

 

주해(*2)

바라문 농토에서 파종에 종사하는 500명의 인부들에 대한 음식의 분배를 말한다.

 

 

4. 마침내 바라문 까씨 바라드와자는 세존께서 탁발을 하려고 서 계신 것을 보았다. 보고나서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까씨] “수행자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습니다. 그대 수행자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드십시오”

 

5. [세존]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습니다.

 

[까씨] “그러나 저는 그대 고타마의 멍에도, 쟁기도, 쟁기 날도, 몰이 막대도, 황소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고따마여, 그대는 이렇게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6. 그러자 바라문 까씨 바라드와자는 세존께 시로서 말했다.

 

[까씨] “그대는 밭을 가는 자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대가 밭을 가는 것을 보지 못했네. 밭을 가는 자라면 묻건대 대답하시오. 어떻게 우리는 그대가 경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7. [세존] “믿음이(*1)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가(*2) 비며(*3), 지혜(*4)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5)

부끄러움이(*6) 자루이고(*7), 정신이(*8) 끈입니다.(*9)

그리고 마음챙김이(*10) 나의 쟁기 날과 몰이막대(*11)입니다.

 

 

주해(*1)

믿음 : (saddha,삳다) :

거의 모든 종교는 맹목적인 신앙으로, 보이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보고 알고 깨닫는’데 바탕을 두고 있지, 믿는데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불경에도 믿음이나 신심으로 번역되는 '삳다(saddha)'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보다는 확신에 가까운 말이다.

 

대승 불교에서는 부처님과 그가르침과 그 참모임에 헌신한다는 의미에서 신심이라는 내용이 들어가 있기는 하다. 서기 4세기경 유명한 불교 철학자 아쌍가 - [Asanga ; 북인도 바라문 가문에서 출생하였고, 형제로는 유명한 유식학의 논사 세친이 있다. 처음에는 소승 공관을 공부하였으나 나중에 도솔천에서 미륵보살을 만나 대승공관을 배웠다고 전한다. 그의 저작으로는 한역 대장경에 금강 반야론, 순중론, 섭대승론, 대승아비달마론집론 등과 서장대장경 가운데 해심밀론경 등이 있다] - 는 삳다라는 말이 세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첫째, 진리에 대한 완전하고 확고한 확신.

둘째, 확신에 대한 희열.

셋째, 목표를 성취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주해(*2)

감관의 수호

- 원래는 ‘고행’이라는 말인데 불교에서는 감각능력의 수호, 감관의 제어를 뜻한다.

 

주해(*3)

- 바라문에게서 우기의 비의 은혜를 받아 종자나 종자의 뿌리가 수확을 향해 성장하며 시들지 않고 완성을 향해 가는 것처럼, 부처님에게서도 감각 능력의 수호의 은혜를 받아 믿음과 믿음의 뿌리가 되는 계행 등의 선법이 성장하여 시들지 않는 완성을 향해서 간다.

 

주해(*4)

지혜

- 지혜의 내용은 올바른 견해( 正見)와 올바른 사유(正思惟)를 말한다. 올바른 견해는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에 대한 통찰을 뜻하고, 올바른 사유는 자비에 충만한 사유를 말한다. 따라서 지혜란 자비로운 통찰을 의미한다.

 

주해(*5)

멍에와 쟁기

- 세간적 지혜와 출세간적 지혜의 두 종류를 말한다. 지혜를 구성하는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사유가 있는데, 그것이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나 올바른 사유가 되면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八正道)의 출발점으로서 세간적인 지혜에 해당하고, 궁극적으로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를 증득하게 되면 궁극적인 지혜에 해당하게 된다.

 

주해(*6)

부끄러움이 없이 철면피하고 무례하고 대담하고 죄악에 오염된 사람의 생활은 쉽다. 부끄러움이 있고 항상 청정을 구하고 집착없이 겸손하여 천정한 생활을 영위하는 식견있는 사람의 생활은 어렵다.

 

주해(*7)

부끄러움이 세간적 출세간적 지혜를 구성하는 멍에와 쟁기를 지탱한다. 부끄러움이 없으면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

 

주해(*8)

마음을 뜻하지만 삼매를 뜻한다.

 

주해(*9)

끈은 세가지가 있다.

1) 쟁기를 멍에에 연결하는 끈,

2) 멍에를 소에 연결하는 끈,

3) 수레를 소에 연결하는 끈이다.

 

주해(*10)

올바른 마음챙김(正念)을 말한다. 올바른 노력은 올바른 마음챙김의 기반이 되는 것으로 거기에 필요한 힘을 제공하며, 올바른 마음챙김은 주의력을 위한 안정된 기반을 제공하고 올바른 집중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삼매의 구성요소 사이의 수반적 관계에 관해서는 붓다고싸의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 세 소년이 놀이하러 정원에 갔다. 걸으면서 꼭대기에 꽃이 활짝 핀 나무를 보았다. 그래서 그 꽃을 따 모으기로 했다. 꽃은 제일 큰 사람의 키를 넘는 것이었으므로 친구가 엎드리고 키 큰 친구가 그 위에 올라 갔으나 떨어질까 두려워했다. 그때 또 다른 친구가 그 옆에 서서 어깨를 빌려주어 키 큰 친구는 그 어깨에 기대어 꽃을 따 모을 수 있었다.

 

여기서 꽃을 따 모으는 키 큰 친구는 올바른 집중을 의미하고, 등을 제공한 친구는 올바른 노력을 의미하고, 어깨를 빌려준 친구는 올바른 마음챙김을 뜻한다. 올바른 집중은 이와 같이 올바른 노력과 올바른 마음챙김의 지원을 받아 그것들을 수반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챙김을 실천하는 것은 마음이 활동을 일으키지 않고 평정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의도나 사유는 직접적인 체험을 방해하는 장애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것이 소멸됨으로써 마음챙김 속에서 대상은 있는 그대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챙김은 그냥 수동적인 관찰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챙김은 강력한 기능을 발휘한다. 그것은 우리를 현실 속에 닻을 내리게 하며, 사유작용과 더불어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 방황하게 두지 않는다.

 

마음챙김이 없는 마음은 호박에 비유되고, 마음챙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돌에 비유된다. 호박은 수면 위를 떠다니지만 돌은 물 밑바닥에 이를 때까지 가라앉는다. 이처럼 강한 마음챙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대상의 겉모습 속에 떠돌지 않고 대상에 머물러 대상의 속성 속으로 깊이 침투해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통찰하는 기반을 제공한다.

 

디가니까야에는 네가지 마음챙김의 토대(四念處)가 함께 주어져 있다.

 

‘무엇이 네가지 [마음챙김의 토대]인가?

수행승 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몸에 관해 몸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느낌에 관해 느낌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마음에 관해 마음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사실에 관해 사실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주해(*11)

통찰(, vipassana)과 연결된 마음챙김이 쟁기날이고, (, magga)과 연결된 마음챙김이 몰이 막대이다.

 

 

8. [세존] “몸을 수호하고 , 말을 수호하고, 배에 맞는 음식의 양을 알고,

나는 진실을(*1) 잡초를 제거하는 낫으로 삼고,

나에게는 온화함이(*2) 멍에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

 

 

주해(*1)

진실

-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은 그가 베나레스 근처의 이씨빠띠나에서, 동료인 다섯명의 수행자들에게 행한 최초의 설법인 초전 법륜경에서, 설한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있다.

 

1)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苦聖諦)

2)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集聖諦)

3)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滅聖諦)

4)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거룩한 진리(道聖諦)이다.

 

빠알리 대장경은 이 진리에 대해 더욱 상세하게 부연된 또 다른 형태의 여러 가지 설법으로 가득하다. 여러 경전들과 그 주석을 참고해서 이 사성제를 연구한다면 원전에 입각한 붓다의 교설에 관하여 훌륭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진리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염세주의로 잘못 이해 하는 이유는 이러한 제멋대로 풀이한 안이한 해석과 피상적 해석 때문이다. 불교는 비관 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불교는 합리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종교이다. 불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 불교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이상향에 살도록 부추기거나, 온갖 종류의 상상적인 공포나 죄악감에 놀라거나 괴로워하게 하지 않도록 한다.

 

불교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을 둘러싼 세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정확히 그리고 객관적으로 설명할 뿐만아니라 인간이 자유와 평화, 청정과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어떤 의사가 질병을 과장해서 희망을 포기하라고 엄숙하게 선언하고, 또 어떤 의사는 오진으로 병이 없다고 단언하면서 아무런 치료도 필요없다라고 거짓 위안으로 환자를 안심시킨다. 전자는 비관론자, 후자는 낙관론자라고 할 수 있다. 둘 다 똑같이 위험한 것이다.

 

어떤 의사는 질병의 징후를 올바로 진단하고 질병의 원인과 발생을 이해하고 그것을 치유할 수 있다고 확신한 다음 용기있게 치료해서 환자를 구해낸다. 부처님은 이러한 종류의 의사이다. 그는 이세상의 질병에 대한 현명하고 과학적인 의사이다.

 

주해(*2)

온화함

“선한 열반을 즐기는 것”으로 아라한의 경지를 말한다.

 

 

9. 속박에서 평온으로 이끄는 정진이(*1) 내게는 짐을 싣는 황소입니다.

슬픔이 없는 곳으로 도달해서(*2) 가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주해(*1)

정진

- 정진에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가 있다.

 

1) 제어에 의한 노력 (律儀勤)

-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의 발생을 방지하는 것을 말한다.

“ 수행승들이여,

 여기 수행승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건전한 악한 상태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생겨나게 하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정진한다.

 

2) 버림의 노력 (斷勤)

-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극복하였더라도 과거의 업으로부터 유래된 불건전한 사유가 남아있는데 그것을 버리는 것이다. 이미 생겨난 악한 불건전한 상태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키고 하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진한다.

 

3) 수행의 노력 (修勤)

- 아직 생겨나지 않은 착하고 건전한 상태를 계발하는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키고 하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진한다.

 

4) 수호의 노력 (守護勤)

-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수호의 노력이다.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증가시키고 성만하게 하며 충만하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진한다.

 

주해(*2)

모든 슬픔과 화살이 제거된 열반의 상태를 말한다.

 

 

10. 이와 같이 밭을 갈면 불사의(*1) 열매를 거두며,

이렇게 밭을 갈고 나면 모든 고통에서 해탈합니다.

 

 

주해(*1)

불사(不死)를 말한다. 죽음은 중생들의 ‘존재의 다발의 파괴’인데 그것은 ‘나의 소유, 나의 존재, 나의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의 다발(오취온)의 파괴를 의미한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결코 실재하는 사건으로 체험할 수 없다. 우리는 남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죽음을 사유할 뿐이다. 우리가 체험하는 죽음은 죽음, 또는 죽음에의 접근에 대한 사유에 대한 체험일 뿐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은 존재하지 않을 때만 죽음이라는 결론에 이른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유위법적 사유의 근본 구조 속에서 죽음을 사유하면서 그것을 ‘나의 소유, 나의 존재, 나의 자아’로 동일시하여 실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렇게 해서 사유하는 자아와 동일시 되는 존재의 다발은 다시 죽음과 동일시 된다.

 

모든 사물의 변화는 유위법적이며 그 속성을 주이성(住異性)에 두는 무상으로 나타나는 만큼, 괴로움을 수반하며 본질적으로 존재의 다발의 파괴는 죽음()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깨달아 더 이상 자아를 갖고 있지 않은 아라한의 체험속에는 변화와 소멸은 지각되지만 늙고 죽음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아라한에게서의 존재의 다발의 파괴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내려놓음’ 이라고 불리운다. 아라한의 체험에는 구조적으로 불사(不死)가 수반된다.

 

 

11. 이 때 바라문 까씨 바라드와자는 커다란 청동 그릇에 유미죽을 하나 가득 담아 스승에게 올렸다.

 

[까씨] “고따마께서는 유미죽을 드십시오. 당신은 진실로 밭을 가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당신 고따마께서는 불사의 과보를 가져다 주는 밭을 갈기 때문입니다.

 

12. [세존] “시를 읊은 대가를 나는 받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그것은 바로 보는 이에게 옳지 않습니다. 시를 읊은 대가를 깨달은 이는 물리치니, 바라문이여, 이치를 따른다면, 그것이 청정한 행위입니다.

 

13. 번뇌가 부서지고 의심이 소멸된 완전한 님(*1) 위대한 성자에게 다른 음식과 음료수로 달리 봉사하십시오. 공덕을 바라는 자에게 그것은 복밭이 될 것입니다.

 

 

주해(*1)

‘모든 덕성을 채우거나 모든 멍에를 벗어버린 것의 의미’를 지닌다.

 

 

14. [까씨] “ 그러면 존자 고따마여, 이 유미죽을 저는 누구에게 드려야 합니까?

 

15. [세존] “ 바라문이여,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 하느님등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행자들의 후예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의 세계에서 여래와 그의 제자들을 빼놓고는, 아무도 이 유미죽을 먹고 소화시킬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이 유미죽은 생물이 없는 물에 버리시오.

 

16. 그래서 바라문 까씨 바라드와자는 그 유미죽을 생물이 없는 물 속에 쏟아 버렸다. 그런데 그 유미죽은 물 속에 버려지자마자 부글부글 소리를 내면서 많은 거품을 내품었다. 마치 온종일 뙤약볕에 뜨거워진 호미날을 물 속에 던지자 부글부글 소리를 내면서 많은 거품이 이는 것과 같았다.

 

이때 까씨 바라드와자는 모골이 송연하여 두려워 떨면서 세존의 곁에 다가섰다. 그리고 세존의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며 여쭈었다.

 

17. [까씨] “존자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존자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존자 고따마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눈을 갖춘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속에 등불을 가져오듯이,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존이신 고따마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수행승의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저는 고따마 앞에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겠습니다.

 

18. 이렇게 해서 바라문 까씨 바라드와자는 부처님 앞에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홀로 떨어져서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훌륭한 가문의 제자들이 그러기 위해 올바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위없이 청정한 삶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

 

그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천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알았다.

 

마침내 존자 까씨 바라드와자는 거룩한 님 가운데 한 분이 되었다.

 

 

* 까씨 바라드와자의 경이 끝났다. *

 

( 바라드와자-Kasībhāradvāja Sutta- The farmer Bhāradvāja, 숫따니빠따 Sn1.1.4, 전재성박사역)

 

까시 바라드와자경(Sn1.1.4).docx 까시 바라드와자경(Sn1.1.4).pdf 

 

 

 

Brahmin Kasi Bharadvaja

 

 

 

밭농사와 마음농사

 

 

지난 해 TV에서 KBS특집다큐 ‘다르마’를 보았다. 영국에서 어느 비구니 두 명이 도심의 거리에서 탁발을 하기 위하여 바루를 들고 서 있었는데, 지나가는 행인이 “왜 일을 하지 않고 걸식하느냐?”고 물어 보는 장면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영국인 비구니는 탁발하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지만 행인은 이해 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처럼 서양에서는 일을 하지 않고 놀고 먹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점이 유럽이나 미국에서 비구와 비구 승가가 형성되기 어려운 점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고대인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인식을 가진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마도 까시 바라드와자 이야기일 것이다.

 

밭농사를 짓는 까시 바라드와자가 부처님에게 “그대는 밭을 가는 자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대가 밭을 가는 것을 보지 못했네. 밭을 가는 자라면 묻건대 대답하시오. 어떻게 우리는 그대가 경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 보는 장면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부끄러움이 자루이고, 정신이 끈입니다.

그리고 마음챙김이 나의 쟁기 날과 몰이막대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Ox

 

 

 

이는 마음농사를 짓는 것을 말한다. 까씨 바라드와자는 소와 쟁기등을 이용하여 육체적으로 밭농사를 짓고 있지만, 부처님은 믿음, 알아차림 등 깨달음에 이르는 수단을 이용하여 마음농사를 짓고 있음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 당시의 수행자들이 아무 하는 일 없이 놀고 먹으며 비생산적인 수행에 몰두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마음의 밭갈기는 육체적인 밭갈기 보다 훨씬 더 어렵고 수승한 것이라는 것을 농기구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수호경으로 유명한 게송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마음농사, 마음의 밭갈기에 대한 게송은 매우 유명하여 스리랑카에서는 보호주 또는 수호경으로 분류되어 불자들에게 널리 독송되어 지고 있다고 한다. 이 게송에 대한 빠알리어와 영어를 보면 다음과 같다.

 

 

 

Saddhā bīja tapo vuṭṭhi   삿다비잠 따뽀 웃티

paññā me yuganagala,     빤냐 메 유가난가랑
Hiri īsā mano yotta
      히리 이사 마노 욧땅

sati me phālapācana       사띠 메 팔라빠짜낭

 

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부끄러움이 자루이고, 정신이 끈입니다.

그리고 마음챙김이 나의 쟁기 날과 몰이막대입니다.

 

Faith is the seed, austerities the rain, wisdom my yoke and plough,

Conscientiousness the pole, mind the reins, and mindfulness is my driving stick.

 

 

 

Kāyagutto  vacīgutto       까야굿또 와찟또

āhāre udare yato,          아하레 우다레 야또
Sacca
karomi niddāna    삿짱 까로미 닛다낭

soracca me pamocana.    소랏짱 메 빠모짜낭

 

몸을 수호하고 , 말을 수호하고, 배에 맞는 음식의 양을 알고,

나는 진실을 잡초를 제거하는 낫으로 삼고,

나에게는 온화함이 멍에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

 

 Restrained in body and words, I know the right amount to partake

Indeed I do the mowing, and forbearance is my release.

 

 

 

Viriya me dhuradhorayha   위리양 두라도라이항

yogakkhemādhivāhana,        요각케마디와하낭
Gacchati anivattanta
       갓차띠 아니왓딴땅

yattha gantvā na socati.      얏타 간따와 나 소짜띠

 

속박에서 평온으로 이끄는 정진이 내게는 짐을 싣는 황소입니다.

슬픔이 없는 곳으로 도달해서 가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Effort is my yoked oxen, to run to the end of the yoke,

There if you go non-stop, you will not grieve.

 

 

 

Evamesā kasīkaṭṭhā sā       에와메사 까시깟타 사

hoti amatapphalā            호띠 아마땁팔라
Eta
kasi kayītvāna       에땅 까싱 까이뜨와나

sabbadukkhā pamuccatīti.    삽바둑카 빠뭇짜띠띠

 

이와 같이 밭을 갈면 불사의 열매를 거두며,

이렇게 밭을 갈고 나면 모든 고통에서 해탈합니다

 

Ploughing in this manner, results in the fruits of deathlessness,

Ploughing thus you are released from all unpleasantness.

 

 

(빠알리어/영어: http://awake.kiev.ua/dhamma/tipitaka/2Sutta-Pitaka/5Khuddaka-Nikaya/index.html,

빠알리음역; 진흙속의연꽃)

 

 

 

 

2012-02-0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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