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다라나이”1300년전에도 한류열풍이, 아스카시대와 호류지(法隆寺)
(1)일본성지순례 1일차(2012-06-05): 호류지(法隆寺)
인공섬에 건설된 간사이공항
인천공항에서 오사카 간사이(関西)공항까지 1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았다. 간단한 기내식 한번 하고 나니 일본에 온 것이다.
간사이공항은 일본인들의 자부심이라 한다. 1994년에 개항된 간사이 공항은 우리나라 인천공항과 달리 ‘인공섬’에 건설 되었다. 그러다 보니 공항바로 옆이 바다로 되어 있다. 위키백과에 실려 있는 간사히 공항사진은 다음과 같다.
간사히공항(関西国際空港)
오사카의 인공섬에 건설됨.
2005년의 경우 11만편의 비행기와 1,642만명의 승객을 기록함.
일본성지순례 첫째날 가장 먼저 방문할 곳이 호류지이다. 호류지는 우리말로 법륭사(法隆寺)라 한다. 담징의 금당벽화로 유명한 곳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간사이공항에서 1시간 30분거리에 있는 나라현남쪽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아스카시대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우리집에 왜 왔니”
나라현이나 아스카시대는 일본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생소한 말이다. 가이드는 먼저 일본에 대하여 소개 한다.
일본은 크게 4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북쪽이 홋카이도로서 남한의 약80%정도의 면적이라 한다. 혼슈의 경우 남한의 2배, 큐슈는 남한의 반 정도 되는 면적이라 한다.
혼슈의 경우 동북지방, 관동지방, 관서지방으로 크게 나누고 있는데, 이중 동북지방이 가장 살기 힘든 곳이라 한다. 지난해 쓰나미가 일어나고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한 곳이기도 한 동북지방은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처럼 척박하고 먹고 살기 힘든 곳으로서 아들을 나면 포기하고 딸만 키울 정도로 가난한 곳이라 한다.
그러다 보니 쿄토의 요정에서 딸을 사로 오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 동요 “우리집에 왜 왔니”노래의 발원지라 한다. “우리집에 왜 왔니” 노래의 가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
무슨 꽃을 찾으러 왔느냐 왔느냐
oo꽃을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가위 바위 보!!!
교토요정에서 온 사람에게 딸만 키우는 동북지방 사람이 “우리집에 왜 왔니”라고 묻자, 요정주인은 “ 딸을 사러 왔단다”라고 답할 정도로 가난한 곳이 동북지방이라 한다.
이처럼 옛날부터 가난하고 척박한 곳으로 잘 알려진 동북지방에서 걸출한 인물이 하나 배출 되었는데, 그가 천엔짜리 지폐에 실려 있는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 1876-1928)’라 한다.
이렇게 가이드는 목적지로 가는 도중 일본과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 주고 있었다.
나라현은 어디에
호류지는 나라현에 위치해 있다. 나라현은 어느 곳일까. 지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측하단에 호류지(법륭사)가 있다.
오사카에서 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라현은 794년 수도가 교토로 옮기지 전까지 일본의 중심지이었다고 한다. 나라시대 이전의 역사에 일본에서는 아스카시대라 하고 일본최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스카문화의 중심지는 나라현에서 남쪽지방 호류지 부근이다. 그런 아스카 시대는 어떤 성격일까.
아스카시대( 飛鳥時代)
아스카시대( 飛鳥時代)는 6세기 후반(592)부터 8세기 초반(710) 약 백여년간의 일본역사시대를 말한다. 이 시기에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538년 백제 성왕이 불상과 경전을 보내 불교가 공인되었고, 587년 천왕이 불교에 귀의 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 쇼오토쿠태자(聖徳太子)를 중심으로 한 일본최고의 불교문화전성시대를 이끌었는데, 이 때 건립된 사원이 호류지(法隆寺)이다.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호류지는 나라시대의 모습을 현재에 전달하고 있는 불교시설이라고 소개 되어 있다. 특히 금당과 오중탑을 중심으로 ‘서원가람’과 몽전을 중심으로 한 ‘동원가람’으로 분리되어 있고, 경내는 약 18만 평방미터이고,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 되었다고 한다. 그런 호류지를 들어 가 보았다.
부처님을 뵈러 가는 길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참도길이다. 부처님을 뵈러 가는 길을 말하는데, 바닥은 돌을 깔고 양옆에는 소나무를 심어 놓았다.
참도길
호류지는 평지에 있다. 드넓은 대지 한 가운데 있는데 주변에 집들이 있어서 도시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주변에 상가도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와 분위기는 다르다. 노점도 볼 수 없고 차분한 인상이다.
호류지 주변상가
6월달에 수학여행을
호류지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절이고 세계문화유산이어서일까 많은 내외국인 관광객들이 찾아 온다. 특히 단체관광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일본의 경우 6월달에 수학여행을 많이 가기 때문에 초중고 학생들로 넘쳐 난다.
패키지 여행에서 잘 찾지 않는 곳
호류지의 입장료는 비싸다. 개인은 천엔이고, 단체도 800엔이다. 이처럼 입장료도 다른 곳에 비하여 비싸고 나라에서도 ‘외곽’에 있다고 보니 패키지 관광코스에 들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일본성지순례의 경우 모두 불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불교사찰 위주이기 때문에 호류지가 포함 되었다.
세계최고로 오래된 목조 건물 오중탑
드디어 안쪽으로 들어 갔다. 회랑을 거쳐 들어가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이 오중탑과 금당이다.
좌측이 오중탑, 우측이 금당이다.
먼저 오중탑을 보면 ‘현재 세계최고의 것(現存世界最古のもの)’이라고 소개 되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통설에 따르면 601년 쇼토쿠태자가 호류지를 건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때 건설된 5중구조의 목조 탑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오중탑과 금당의 중문에 사용된 편백나무와 삼나무(ヒノキやスギ)는 2004년도 측정결과에 따르면 650에서 690년 사이에 벌채된 것이라 한다. 특히 오중탑의 심주( 心柱 )에 사용된 용재는 연륜연대측정에 따르면 594년의 것이라 한다.
위아래가 터져 있는 구조, 금당
다음으로 금당이다. 호류지에서 볼만한 것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세계최고의 목재탑이라 불리우는 오중탑과 담징의 벽화가 있는 금당이다. 모두 일본 국보로 되어 있다.
금당은 팔작지붕 양식 (入母屋造) 으로서 이중불당이라 한다. 전면 4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겉으로 보기에 2층이나 상층에는 방이 없기 때문에 들어가 보면 위아래가 터져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담징이 그린 벽화
금당에 유명한 것은 담징이 그린 벽화이다. 7세기 말에 그려진 금당벽화는 일본불교회화의 대표작이라 하고 국제적으로도 매우 유명하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작자는 ‘불명’ (確実な歴史的史料がないことから作者は不明とされている) 이라고 나온다.
이 금당벽화는 인도의 아잔타석굴군의 벽화와 돈황 막고굴의 벽화와 함께 고대 아시아를 대표하는 작품이었지만 1949년 벽화모사작업중에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이 소실로 인하여 문화재에 대한 경각심이 크게 일어나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었다고 한다.
현재 보는 금당벽화는 1967년부터 1968년에 걸쳐서 당시의 저명화가들에 의하여 모사된 것이라 한다.
소실전 금당벽화(6号壁上部 焼損前)
불교 조각사의 초두를 장식하는
금당에는 국보급 문화재가 많이 있다. 석가삼존상, 약사여래좌상, 사천왕입상, 비사문천-길상천립상 등이 있는데, 이중 석가삼존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석가여래삼존상(釈迦三尊像(国宝))
석가여래삼존상은 623년 만들어진 것으로서 일본 불교 조각사의 초두를 장식하는 명작이라 한다.
쇼토쿠태자 일족의 주거공간, 동원가람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호류지에는 수 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있다. 목조 건축물에서부터 불상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재가 있지만 다 볼 수 없었다. 한정된 시간 때문에 다만 겉으로만 보았을 뿐 그 내부를 다 볼 수 없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동원가람이다.
호류지는 크게 서원가람과 동원가람으로 나뉜다. 서원가람에는 5중탑과 금당 등이 있어서 관광객들이 주로 보는 장소이다. 반면에 동원 가람의 경우 외국인 관광객들이 보지 않고 지나치는 장소이다.
그런 동원가람은 쇼토쿠태자 일족이 머물렀던 주거공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동원가람 입구에 쇼토쿠태자에 대한 사당(聖靈院)을 볼 수 있었다. 종을치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 기도 하는 일본인들도 볼 수 있었다.
성령원(聖靈院)
백제관음상
동원가람 입구에서 눈에 띄는 푯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대보장원(大宝蔵院) 푯말이었다. 그런데 대보장원글씨 아래에 괄호안에 ‘백제관음당’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영어로 “쿠다라 칸논도(Kudara kannondo)”라 되어 있다.
대보장원(大宝蔵院)
대보장원이 아마도 백제와 관련이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 패키지 여행에서 대보장원 관람은 포함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백제와 관련이 있다하니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없다.
대보장원입구
대보장원은 쇼토쿠태자의 주거 공간이었다는 동원가람에 있다.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대보장원에 ‘백제관음상’이 있다고 한다. 백제관음상은 어떻게 생겼을까. 위키피디아를 계속 검색한 결과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백제관음상은 호류지에 소장되어 있고 아스카시대(7세기 전반 중엽)의 목조관음보살상이다.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백제관음이라 부른다. 높이는 210센티미터인데 작자는 불명으로 되어 있다.
백제관음상 (百済観音, くだらかんのん)
사진은 백제관음모조(百済観音像模造)이다
구다라나이
아스카문화는 백제와 매우 관련이 깊은 것 같다. 그때 당시 천왕도 백제계이었고 백제이주민과 백제 유민이 몰려와 산 곳이 이곳 나라현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산세가 우리나라와 매우 유사하다고들 말한다.
이처럼 백제인들이 몰려 산 곳이 나라현인데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그 때 당시 백제가 선진국이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백제것이면 좋은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제것이 아니면 별볼일 없다는 말이 생겨 났는데, 그 말이 “구다라나이”라 한다.
여기서 ‘구다라’라는 ‘백제’라는 뜻으로 일본식 발음이다. ‘나이’는 부정어로서 ‘아니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구다라나이” 하면 “별볼일 없다”라는 뜻이 된다고 한다.
구다라나이에 대하여 검색하여 보았다. 놀랍게도 일본어 어학사전에 다음과 같이 풀이 되어 있었다.
くだらない [ 下らない ]
【형용사】
시시하다, 형편없다, 쓸모없다.
彼かれの講演こうえんは全まったく下くだらないものだった
그의 강연은 아주 시시한 것이었다
下くだらない話はなし
시시한 이야기
下くだらない人間にんげん
쓸모없는 인간
くだらぬことにくよくよするな
시시한 일로 끙끙거리지 마라.
‘구다라나이’라는 말이 “별볼일 없다” 또는 “시시하다”라는 관용구로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일본말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시시하고 재미없는 이야기에 대하여 ‘구다라나이하나시(下くだらない話, 시시한 이야기)’ 라 하고, 쓸모 없는 인간이라 하였을 때 ‘구다라나이닌겐(下くだらない人間, 쓸모없는 인간)’이라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1300년전에도 한류열풍이
이와 같은 ‘구다라나이’에 대하여 한류원조로 설명하기도 한다. 지난 2004년 ‘욘사마’ 열풍이래 여전히 일본에서 한류가 강세인데, 이미 1300년전에도 한류열풍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백제의 물건이 워낙 뛰어 났기 때문에 백제것이 아니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구다라나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그 때 당시 백제와 일본과의 교류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구다라나이’라는 말이 생겨 난 것은 백제의 물건이 일본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평가 받았다는 증거라 한다.
이처럼 나라지방에 기반을 둔 아스카시대(592-710) 약 백여년간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기간 중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백촌강전투와 백제멸망이 그것이다.
역사의 분수령 백촌강전투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계가 몰려 살던 일본에서 구원군을 파견한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의 백강(현재 금강부근)에서 663년 백제-왜 연합군과 당-신라 연합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를 일본에서는 백촌강전투(白村江の戦い)라 하여 일본역사책에서는 비중 있게 다르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백강전투’라 하여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전투에서 당-신라 연합군이 승리하여 백제는 멸망하게 된다. 그렇게 됨에 따라 백제의 유민들이 대거 일본에 들어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왜 백제에 군대를 파견하였을까. 이는 일본에서 성립된 아스카시대의 주류가 백제계이었기 때문이다. 천왕이 백제계이고 유력가문 역시 백제계로서 모국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지원병을 파견한 것이다.
한반도에서 독립하고
백촌강 전투 이전까지 일본은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다. 하지만 백촌강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더구나 백제가 망하게 되자 일본은 더 이상 한반도의 영향권에 있지 않게 되었다. 이는 한반도로부터 독립을 의미한다. 그래서 독립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 나라(奈良)라 한다. 이것이 ‘나라시대’이다.
나라시대는 710년부터 794년까지를 말한다. 나라시대는 이전의 아스카시대와 다르다. 아스카 시대가 백제 등 한반도의 영향권에 있었다면 나라시대는 중국을 모방한 시대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는데, 사찰 역시 중국의 영향을 받아 거대한 사찰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 거대한 불상이 조성되었다.
이렇게 거대한 사찰과 대불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한반도로부터 독립하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한다. 그런 사찰중의 하나가 도다이지(동대사)이다. 다음 순례 목적지는 도다이지지이다.
2012-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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