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왜 그들은 거대함을 추구하였을까, 도다이지(東大寺)와 노사나대불

담마다사 이병욱 2012. 6. 11. 21:00

 

왜 그들은 거대함을 추구하였을까, 도다이지(東大寺)와 노사나대불

 

(2)일본성지순례 1일차(2012-06-05): 도다이지(東大寺)

 

 

 

 

순례팀은 아스카시대의 아스카문화의 중심지인 호류지(法隆寺)를 떠나 도다이지(東大寺)로 향하였다.

 

호류지에서 도다이지까지의 거리는 차로 40분 거리이다. 같은 나라현에 있지만 지도상 아스카에서 북동쪽으로 20Km가량 떨어져 있다.

 

일본의 가옥형태

 

차창 밖으로 본 나라현의 풍경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너른 평야와 주변의 산세, 그리고 모내기가 시작되고 있는 논을 보면 마치 우리나라의 한가로운 농촌풍경과 유사하다.

 

우리와 차이가 있다면 집의 모양이 달랐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옥도 있고 양옥도 있고 더구나 아파트도 있어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지만 일본의 가옥은 천편일률적으로 같은 모습이다. 단층 또는 2층으로 된 집으로서 일본전통가옥 양식이다. 이런 가옥은 도시나 농촌이나 거의 똑 같은 형태로 되어 있다.

 

 

 

 

 

일본의 전형적인 가옥형태

 

 

 

 

도다이지로 이동중에 가이드는 쉼 없이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었다. 아마도 심심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로 보이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이 가이드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런 가이드의 말을 듣다 보면 일본의 문화와 역사 등 전반적인 것에 대하여 매우 짧은 시간에 알 수 있었다.

 

일본의 종교인구

 

버스로 이동 중에 보는 주변 풍광의 특징 중의 하나는 교회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광경은 우리나라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일본인이 인천공항에서 서울에 있는 호텔에 이르기 까지 세어본 교회의 숫자가 120개 라고 하였다는데, 일본에서 차량으로 이동중에 교회는 볼 수 없었다. 왜 그럴까. 일본은 기독교세가 매우 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종교는 어떤 것일까.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일본에서 첫 아이를 낳으면 신사에 가서 안녕을 빈다고 한다. 그리고 성년이 되어 결혼하게 되면 교회에서 예식을 치르고, 늙어서 죽으면 절에서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이렇게 분업화 되어 있다 보니 일본인들에게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자신은 무교(無敎)’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어판 위키자료에 따르면 일본에서 종교구성은 일본전통종교라 볼 수 있는 신도(神道) 1 700만명이고, 불교가 9800만명이고, 그리스도교가 300만명, 그외 1000만명이라 한다. 이를 다 합하면 2 9000만명이 되어 일본 인구 12700만명 보다 훨씬 더 많은 수치가 된다. 특히 신도와 불교를 합하면 2억명이 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日本古民俗信仰基盤に、自然風土われた年中行事や、などをじて、くの日本人七五三初詣、あるいは季節りを神社い、時代寺請制度影響で、葬式やおなどを仏教うなど、にまたがってしている。キリストなどではけた時点でその信者るのにし、日本ではそのめば信者とみなすわけで、氏子檀家家庭たな子供まれるとそのまま信者にカウントしてしまう。また、死亡しても信者リストからすことなく放置するなどのもある

 

일본고래의 민속신앙에 기반하여 자연풍토 속에서 가꾸어진 연중행사, 제례 등을 통하여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칠오삼(남아는 3세·5, 여아는 3세·7세가 되는 해의 11 15일에 행하는 축하 잔치) 또는 초지(생후 처음으로 신불을 참배함), 또는 계절마츠리를 신사에서 행하고, 에도시대 사찰제도의 영향으로 장례식이나 무덤등을 불교식으로 하기 때문에 복수의 종교로 걸터 앉게 되는 의식에 참가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세례를 받는 시점에서 종교의 신자로 성립되는 것에 반하여 일본에서는 종교의 신에게 합장배례하면  신자로 간주 되기 떄문에, 씨자(같은 수호신을 모시는 고장 사람) 또는 단가(시주)의 가정에 새아기가 태어 났을 때 그 대로 신자로 카운트 되어 버린다. 또 사망하여도 신도로 카운트 되어 방치 되는 예도 있다.

 

(日本, 일본어 위키피디아)

 

 

일본에서 종교인구가 일본인구 보다 더 많은 이유가 일본전통신앙인 신도의 신자와 불교의 신자를 함께 카운트 하기 때문이라 한다. 태어나면 자신의 신에게 합장배례하면 자동적으로 신도의 신자가 되고, 또 절에서 하는 행사에 참여 하거나 죽으면 절에서 장례를 치루어 주기 때문에 역시 자동으로 불교신자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도의 신자나 불교의 신자는 큰 구별이 없다고 한다. 이런 점은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놀라운 통계자료

 

2008년도 문광부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불교의 경우 파악된 종단의 숫자는 모두 103개에 달한다. 이들 종단으로부터 회신 받는 교역자와 신도수를 모두 취합한 결과를 발표 하였는데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통계가 발표 되었다.

 

 

총종단수: 103종단

총사찰수 : 21935

총교직자수 : 49408

총신도수: 39,581,983

 

(불교통계자료, 문광부자료, 2008)

 

2009-3-17한국의종교현황(up).hwp

 

 

 

스님등 교직자수가 5만명에 가깝고, 총신도수는 4천만명에 가깝다. 불교신지가 4천만명이라면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83%가 불교신자라는 이야기이다. 스님이 5만명에 총신도가 4천만명이라는 수치는 믿을 수 없는 통계이다. 실제로 인구총조사 자료에 따르면 불교인구는 다음과 같다.

 

 

 

전체 종교인의 종단별 인구

단위 : (2005년 통계청)

종교있음

불교

개신교

천주교

유교

원불교

증산교

천도교

대종교

기타

전국

24,970,766

10,726,463

8,616,438

5,146,147

104,575

129,907

34,550

45,835

3,766

163,085

 

(문광부자료, 2008)

 

 

 

인구조사에 따른 불교인구는 1072만명으로 전체인구의 22.8%이다. 그런데 어떻게 4천만명이라는 수치가 나왔을까. 이는 문광부 자료에 다음과 기록 되어 있다.

 

 

종교별 교단(종단) 현황은 각 교단(종단)에서 제출한 자료를 토대로 작성하되 일부 종교연합단체의 협조 자료를 참조하였다. 교단(종단) 제출 자료와 일부 종교연합단체의 협조 자료가 중복되는 경우에는 전자를 일차 자료로 삼았다. 천주교의 경우에는 교단의 협조와 함께 ?2008~2009 한국 천주교 주소록?(2008)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http://www.cbck.or.kr)의 통계자료를 활용하였다.

 

교단(종단) 현황의 조사 과정은 다음과 같다. 2008년 9월까지는 연락처를 포함하여 각 교단의 주소록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9월 중순부터 각 교단에 개별 연락을 취하면서 10월에 각 교단에 관련 협조 공문을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그렇지만 자료의 회수율이 높지 않아 그 이후 각 교단과 관련 연합단체에 수시로 전화 통화를 시도하면서 재차 공문을 발송하였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 현지조사를 병행하였다.

 

불교의 경우, 주소와 연락처가 확보된 교단 수가 전체 168개였는데 그 가운데 103개 교단 현황이 파악하였다. 개신교에 대해서는 125개 교단의 협조 자료를 확보하였다. 천주교의 경우는 관련 책자와 홈페이지를 참조하되 보완할 부분에 대해 전화 통화나 이메일을 통해 자료를 확보하였다. 유교는 관련 홈페이지와 성균관을 통해 자료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천도교, 원불교, 대종교, 그 밖의 종교(38개 종단)의 경우는 공문 발송, 전화 통화, 그리고 현지조사 등을 통해 협조 자료를 확보하였다. 다양한 이유로 자료 협조가 불가능한 교단의 경우에도 ‘한국의 종교 현황’ 파악에 도움이 되도록 별도로 명단을 정리하여 제시하였다.

 

(문광부자료, 2008년)

 

 

문광부자료에 따르면 종단에서 제출한 자료를 근거 하다 보니 수치가 엄청나게 부풀려 졌다는 말이다. 각 종단의 주소를 확보하고 공문을 보냈으나 회신률도 높지 않았고 보내 온 자료에만 의존하다 보니 불교신자가 사천만명에 달한 것이다.

 

그렇다면 개신교의 경우는 어떠할까. 문광부 자료에 따르면 총 58,612개의 교회에, 95,596명의 교직자, 12,010,657명의 신도로 구성되어 있다. 신도수를 보면 인구 총조사 자료 8,616,438명 보다 많지만 불교처럼 터무니 없이 부풀려져 있지는 않다.

 

이와 같이 신도수가 부풀려 있는 불교와 개신교와 달리 천주교의 경우는 다르다. 단일 교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천주교의 경우 홈페이지 자료를 보고 통계에 활용하였다고 조사자가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사슴 떼가 이리 저리 돌아다니고

 

가이드의 재미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덧 도다이지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주차장에서 도다이지 정문(남대문)에 이르는 길에 볼 수 있는 독특한 광경은 사슴이다. 사슴 떼가 이리 저리 돌아 다니고 있는 것이다.

 

 

 

 

 

 

 

 

 

 

 

 

 

 

 

 

 

 

 

 

 

 

 

 

왜 도다이지 앞에 사슴들이 돌아다니고 있을까. 인터넷검색을 해 보았다. 자료에 따르면 사슴공원이 만들어진 것은 1880년 메이지시대라 한다.

 

메이지 13년 1880년에 황폐한 현지역일대를 정비해서 공원으로 조성하였으며 다이쇼 11년 1922년에는 나라의 명승지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도다이지(동대사)이나 고후쿠지(흥복사), 카스가타이샤(춘일대사)신사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넓은 대지가 현재의 사슴공원이라 한다.

 

도다이지의 남대문

 

긴 참도()를 따라 가다 보니 도다이지의 입구에 해당되는 남대문에 도착하였다. 일본의 사찰의 경우 우리나라와 달리 일주문이 없다. 그 대신 우리나라 사천왕문 개념에 해당되는 문이 있다. 그런 문이 도다이지의 경우 남대문이라 볼 수 있다.

 

 

 

 

도다이지 남대문(南大門)

 

 

 

 

남대문은 한눈에 보기에 거대하다. 보는 이로 하여금 그 규모에 압도 된다. 현재 일본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남대문은 고색창연해 보인다.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962년 태풍으로 넘어진 것을 1199년 복원시켰다고 한다.

 

아형(阿形)과 후형(吽形)의 금강역사상

 

남대문은 중국 송대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사천왕문 격에 해당되는 남대문에서 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금강역사상이다.

 

 

 

 

 

우측금강역사상

입을 다문 모습의 아형(阿形)

 

 

 

 

 

 

좌측금강역사상

입을 크게 벌려 사자후를 토하는 듯한 후형(吽形)

 

 

 

 

도다이지의 금강역사상은 매우 무시무시하게 생겼다. 키도 매우 크지만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 무서움이 절로 들 정도로 험악하게 생겼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는 금강역사상에 대한 위키피디아의 자료에 따르면 절 안쪽에서 문을 바라 보았을 때 좌측의 역사상은 입을 다문 모습의 아형(阿形)’이고, 좌측의 역사상은 입을 크게 벌려 사자후를 토하는 듯한 후형(吽形)’이다.

 

중국 금강역사상과 똑 같은 모습

 

이렇게 입을 벌린 모습과 입을 다문 모습은 중국의 금강역사상과 매우 비슷하다. 지난 해 중국 소림사에 갔었을 때 본 금강역사상은 다음과 같다.

 

 

 

 

중국 소림사 좌측금강역사상

입을 다문 모습의 아형(阿形)

 

 

 

 

 

 

 

중국 소림사 우측금강역사상

입을 크게 벌려 사자후를 토하는 듯한 후형(吽形)

 

 

 

입을 벌린 모습과 입을 다문 모습이 똑 같고, 위치 역시 또 같다. 이런 금강역사상은 우리나라 사찰에서 보기 힘들다. 금강역사상 대신 4기의 사천왕상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도다이지의 금강 역사상은 목조물로서 높이가 8.4미터에 달한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이들 역사상은 가마쿠라시대의 작품으로서 부속품을 짜 맞추듯이 하여 70일만에 만든 걸작품이라 한다.

 

금당입구의 중문(中門)

 

도다이지의 관문격인 남대문을 지나면 긴 참도가 나오고 중문에 이른다. 중문 역시 거대한 건조물이다. 금당(대불전) 앞에 있는 팔작지붕(入母屋造)의 다락문()건축양식이다. 1716년에 재건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중문(中門)

 

 

 

 

 

 

중문에서 남대문을 바로본 광경

 

 

 

 

‘ㄷ’자형의 회랑

 

중문의 양 옆은 ‘ㄷ’자형의 회랑이 있고, 회랑은 금당을 좌우로 싸고 있는 모습이다. 이 회랑 입구에 매표소가 있는데, 도다이지의 경내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도다이지 경내도

 

 

 

일본사찰의 특징은 금당을 중심으로 하여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보통 “ㄷ” 자형이다.

 

 

 

 

 

회랑

금당을 중심으로 “ㄷ” 자형이다.

 

 

 

왜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었을까

 

매표소를 지나 회랑에 들어서면 거대하고 웅장한 도다이지 금당(대불전)이 한 눈에 보인다.

 

 

 

 

 

도다이지 금당(金堂,殿

 

 

 

 

금당은 매우 크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나오게 할 정도로 거대한 건축물이다. 그렇다면 그 때 당시 일본인들은 왜 이렇게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을까. 이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시대의 산물이라 한다.

 

도다이지와 같은 거대한 건축물이 생겨난 것은 나라시대(710-794) 부터라고 한다. 이는 그 이전 시대인 아스카시대(592-710)와 차별을 두기 위한 것이라 한다.

 

아스카시대는 백제의 영향을 받은 백제영향권의 일본최초의 역사시대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백제가 멸망하자 아스카시대는 오래지 않아 끝이 난다. 그래서 수도를 아스카에서 약 북동쪽으로 20여 키로미터 떨어진 나라지역으로 옮긴 것이 나라시대의 시작이다.

 

이런 나라시대는 일본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한반도로 부터의 독립을 뜻한다. 아스카문화시대가 한반도 특히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다면, 나라시대는 한반도로부터 독립하여 당나라부터 직접 문물을 받아 들인 시기를 말한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는데, 당나라식으로 율령을 받아 들여 나라의 기틀을 다지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 과정에서 도다이지의 대불과 금당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이 출현한다. 이는 중국과 직접 상대하여 발생된 결과물이라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불교가 전래된 순서대로 석판이

 

회랑을 지나 금당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바닥에 석판이 깔려 있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불교가 전래된 순서대로 석판이 깔려 있다고 한다. 가장 멀리 있는 것이 인도에서 가져온 석판이 깔려 있고, 그 다음으로 중국, 한국순이라 한다. 한 가운데 일본석판이 깔려 있는데 다른 석판과 달리 약간 검은 색깔이다.

 

 

 

 

 

나라별 석판

 

 

 

 

6월은 수학여행철

 

일본에서 6월은 수학여행철이라 한다. 수 많은 초중고 학생들이 인솔교사의 지시따라 일사분란하게 입장하고 퇴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금동팔각등룡(金銅八角燈籠)도 국보

 

도다이지는 모든 것이 금당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금당과 대불만 보고 가는 것 같다. 그러나 가이드 말을 유심히 들으면 놓칠 수 없는 것도 많다. 그 중에 하나가 밤에 불을 밝히는 데 사용되는 등이다. 이를 금동팔각등룡(金銅八角燈籠)이라 하는데 놀랍게도 국보라 한다.

 

 

 

 

 

금동팔각등룡(金銅八角燈籠)

 

 

 

 

일어판 위키피디아의 설명에 따르면 나라시대 창건당시의 것이라 한다. 4면에 악기를 연주하는 음성보살상을 주출()해 놓았다고 설명되어 있다.

 

 

 

 

 

금동팔각등룡의 음성보살 (菩薩)상

 

 

 

두 차례에 걸쳐 병화로 소실되고

 

금당앞이다. 대불전이라고 하는 금당 앞에는 수 많은 관람객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그런 금당은 일본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현재의 금당은 나라시대의 모습 그대로일까.

 

일본어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금당은 성무천왕(聖武天皇)에 의하여 8세기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성무천왕이 국력을 다하여 건립한 절이라 한다. 그런 금당은 그 후 두차례에 걸쳐 병화로 소실 되었고 현재 보는 금당은 에도시대(18세기초)에 재건 된 것이라 한다.

 

 

 

 

 

 

 

 

 

 

 

 

 

 

 

 

 

 

 

 

 

14.7미터의 노사나불상()

 

금당안으로 들어 갔다. 들어가자 마자 거대한 대불과 마주쳤다. 금당안은 전반적으로 어두워서 사진이 잘 나오지 않는다.

 

 

 

 

 

 

 

 

 

 

 

 

 

도다이지 대불은 노사나불상()이다.  일본국보로서 높이가 14.7미터에 이른다. 한눈에 보기에도 거대한 불상이다. 그런데 이 불상도 원래의 불상 그대로일까.

 

위키백과에 따르면 현재 보는 불상은 나라시대의 것이 아니라 18세기 에도시대의 것이라 한다. 나라시대 불상은 병화등으로 인하여 소실되었고, 단지 대좌(蓮華座)만 남았다고 한다.

 

이렇게 복원된 불상은 높이가 15미터에 이르는 대불이지만, 나라시대 당시에는 규모가 더 컷 다고 한다. 현재 보는 불상의 규모는 나라시대의 불상 보다 2/3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다이지(동대사)는 국가 프로젝트

 

이처럼 거대한 건축물과 거대한 불상을 세운 이유에 대하여 일어판 위키백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さん」のとして、古代から現代るまで信仰め、日本文化多大影響えてきた寺院であり、聖武天皇日本の60建立させた分寺中心をなす「総国分寺」と位置付けられた。

 

대불상의 절로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끼지 광범위한 신앙을 모으고 일본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원이다. 성무천왕당시의 일본의 60여국에 건립시킨 국분사(奈良시대에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하여 여러 지방에 세운 절)의 중심을 이룬 ‘총국분사’로서의 위치가 부여 되었다.

 

(東大寺, 일본어 위키백과)

 

 

도다이지는 일본천왕이 총력을 기울여 지은 사찰로서 모든 사찰의 중심에 있는 천왕의 사찰이자 국가의 사찰이라는 것이다.

 

이런 도다이지에 대한 기록은 일본 정사인 속일본기(日本紀)에도 나오는데, 45대 천왕인 성무천왕과 광명황후가 어려서 죽은 황자의 보리(菩提, 깨달음)를 위하여 약초산기슭(若草山麓)에 산방을 설치하고 9인의 승을 머물게 한 것이 시초라 한다.

 

인도 승려 보리찬나(菩提僊那)대불개안식

 

대불조성은 747년에 시작 되었고, 이때부터 도다이지(동대사)라는 사호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대사 건설을 위하여 특별히 관청이 설립되었는데 그 이름이 조동대사(造東大寺司)’로서 사료에도 나와 있다고 한다.

 

이러한 국가적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면 민중의 지지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때 당시 조정으로부터 탄압받던 행기(行基)를 대승정(大僧正) 으로 영접하고 협력을 구했다고 한다.

 

난공사 끝에 대불의 주조가 완료 되었을 때 천축(인도)출신의 승려 보리찬나(菩提僊那)를 도사로 하여 ‘대불개안식’이 752년 거행되었다고 한다.

 

화엄종과 신쇼(審祥)

 

도다이지의 대불과 금당은 거대하다. 먼저 대불을 조성하고 나중에 대불전(금당)이 만들어 졌는데, 이런 거대 건축물과 불상을 지은 것에 대하여 중국과  직접적인 교역을 하면서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 나라시대(710-794) 는 우리나라의 통일신라시대(698-926)에 해당되고, 중국의 경우 당나라시대(618-907)에 해당된다.

 

이렇게 중국과 직접적인 교역을 통하여 그 때 당시 가장 선진국이었던 중국의 문물을 직접 받아 들였는데, 불교 역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불교문화가 활짝 핀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 불교를 나라불교라 하며 일본의 13개 종파 가운데 3개를 차지 하고 있다. 즉 화엄종(), 법상종(法相宗), 율종(律宗)을 말한다.  

 

이중 화엄종은 도다이지가 본사이고 개조는 신쇼(審祥)’로 되어 있다, 신쇼는 신라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신라에 유학한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고 한다. 신쇼는 당에 건너가 화엄종 3조인 법장으로부터 화엄학을 수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에서 화엄종은 화엄경과 범망경을 기본으로 강의 한다고 하는데, 그 사상이 반영된 것이 도다이지의 대불 노사나불(743-749)로 본다.

 

도다이지 대불은 용문석굴 노사나불의 모방품?

 

노사나불과 관련하여 중국에서도 거대불상을 볼 수 있다. 낙양부근의 용문석굴에 있는 노사나불이 그것이다.

 

작년 중국성지 순례기간 중 본 노사나불은 거대하였다. 암반을 뚫고 조성된 봉선사동의 노사나불은 석불로서 그 크기가 17.4m나 된다. 당나라 고종 때 조성하여 측천무후의 지원하에 675년 완공되었다는 노사나불과 일본 나라시대  조성한 철불로서 노사나불(743-749)은 시기적으로 약 70여년 차이가 난다.

 

나라시대는 중국과 활발한 교역이 있었고 더구나 수 많은 구법승이 당나라로 수학하러 간 시기이다. 그때 당시 선진국이었던 당나라의 모든 것을 받아 들이던 나라시대에 용문석굴에서 보는 것 같은 거대 불상 또한 받아 들였을 것임에 틀림 없다. 그래서 용문석굴의 노사나불을 모델로 하여 도다이지의 대불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해 본다.

 

용문석굴 봉선사동의 노사나불과 도다이지의 대불인 비로자나불은 모두 화엄종의 본존불이다. 그렇다면  용문의 노사나불과 도다이지 대불은 같은 계열이라 볼 수 있다. 용문 노사나불이 시기적으로 더 빠르기 때문에 후대에 만들어진 도다이지 대불은 용문노사나불의 모조품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 크기가 더 컷다는 사실이다.

 

용문석굴의 노사나불은 높이가 17.4m이다. 도다이지 대불의 높이는 14.7m 이다. 그런데 현재의 도다이지 대불의 경우 18세기 에도시대에 만들어 졌기 때문에 나라시대의 대불 보다 2/3 밖에 되지 않는 다고 한다. 그렇다면 원래 대불의 높이는 22m에 달할 것이다. 이는 도다이지 대불이 중국의 용문석굴의 노사나불 보다 훨씬 더 컸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용문석굴 봉선사동의 노사나불

높이 17.4m로 당나라 시대인 675년에 완공되었다.

 

 

 

 

이처럼 도다이지 대불이 용문석굴의 봉선사동 노사나불의 모방이라는 증거가 또 있다. 그것은 금강역사상이다.

 

모방이라는 또 하나의 증거

 

용문석굴 봉선사동에는 노사나불 뿐만 아니라 금강역사상, 사천왕상, 보살상, 가섭과 아난존자상 등이 바위를 이용하여 조각 되어 있다.  이중 금강역사상의 경우 노사나불에서 오른편은 파괴되어 있고, 왼편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오른편 금강역사상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봉선사동 오른편 금강역사상

얼굴부위가 파괴되어 형체를 알 수 없다.

 

 

 

 

 

 

 

봉선사동 왼편 금강역사상

오른쪽 첫번째가 금강역사상이다.

입을 다문 모습의 아형(阿形)이다.

 

 

 

 

봉선사동 오른편 금강역사상을 보면 도다이지 남대문에 있는 왼편 금강역사상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도다이지 왼편 금강역사상

입을 다문 모습 모습의 아형(阿形)

 

 

 

 

왼편 금강역사상의 특징은 입을 다문 모습의 아형(阿形)’이다. 이는 봉선사동것이나 도다이지 것이나 똑 같다. 봉선사동의 또 다른 금강역사상 즉 오른편 금강역사상은 얼굴부위가 파괴 되어 있지만 도다이지의 오른편 역사상과 같이 입을 크게 벌려 사자후를 토하는 듯한 후형(吽形)’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도다이지의 비로자나불과 금강역사상은 7세기 중국 당나라 시대 낙양 부근에 있는 용문석굴의 봉선사동을 모방한 것이라 보여진다.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시대는 한반도로부터 독립하여 중국과 직접교역을 통하여 당의 율령체제등 선진문물을 수입하여 왔으므로 당연히 불교 역시 그대로 들여 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철불보다 석불

 

이렇게 당의 불상을 모방하여 만든 나라시대의 대불은 아마도 봉선사동의 노사나불과 매우 유사하였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병화로 인하여 소실되고 그대신 에도시대인 18세기에 만들어진 작품을 보면 나라시대의 불상이라 볼 수 없다. 이는 철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바위로 만들어진 것은 화재의 영향을 받지 않지만 철로 된 불상은 화재가 나면 녹아 내리므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철로 만든 철불상보다 돌로 만든 석불상이 더 오래 감을 알 수 있다.

 

도다이지 대불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우리나라의 석굴암이다. 석굴암은 통일신라 시대 김재상에 의하여 751년에 착공하여 774년에 완성되었으니 도다이지 대불의 조성기간(743-749)과 엇비슷 하다. 하지만 도다이지의 대불은 그 때 모습이 아니고 18세기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반하여 석굴암은 1300년 전 모습 그대로이다. 비록 3.4m로서 거대하지는 않지만 수법이 정교하고 장중웅려한 기상이 넘치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걸작이다.

 

 

 

 

 

석굴암본존불

통일신라 김대성에 의하여 조성됨(751-774)

 

 

일이백년 이내에 주류종교로

 

 

어느 나라이든지 종교가 전래되고 나면 급속히 확산된다.  대게 일이백년 이내에 주류로 부상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전래된지 20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주류종교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대형교회들이 속속 생겨나고 그에 따라 대형건축물이 등장하고 있다. 현재 서울 여의도나 분당 등에는 수백억 내지 수천억원에 달하는 초대형 교회가 세워져 있고, 법원과 검찰청 앞의 사랑의 교회역시 국내최대의 건축물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종교가 퍼진지 일이백년이 되면 전성기를 맞이 하는 것이 보통이다.

 

불교 역시 아시아로 전래 된 후 큰 저항 없이 일이백년 이내에 전성기를 맞이 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불교가 가장 늦게 전래된 신라의 경우 527년 공인된 후 불과 일이백년 이내에 전국이 불국토가 되었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경우 538년 백제로부터 불교를 전래 받은 후 일이백년 이내에 불교가 전성기를 맞이 하였다. 더구나 왕권의 보호 하에 급격히 퍼졌는데, 601년에 쇼토쿠 태자에 의하여 호류지(법륭사)가 건립되었고, 국가적 프로젝트로서 도다이지(동대사) 대불이 747년 부터 조성되었다. 이로 보아 불교가 전래 된지  일이백년만에 주류종교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불교는 종교(宗敎)이다

 

아시에서 불교의 역사는 곧 그 나라의 역사나 마찬가지이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나라의 역사가 시작 되었기 때문에 그 때 당시 불교는 가장 앞선 최첨단의 가르침이자 문화이었다.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불교가 전파된 나라치고 불교를 받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는 가장 심오한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철학이고 과학이기 때문에 불교를 종교(宗敎)’라 한다. 한자어 宗敎(종교)’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불교는 종교인것이다.

 

종교로서 불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으뜸가는 가르침이다. 으뜸가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똑 같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금 유럽과 미국에서 불교의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고 한다.

 

유럽과 미국에 불교가 전래 된지 약 100년이 지났다. 그렇다면 앞으로 200년 이내에 불교가 널리 확산되어 불국토가 될 지 모른다. 어느 나라이든지 불교가 전래되면 일이백년 이내에 전성기를 맞이 하였기 때문이다.

 

 

 

 

 

 

 

 

 

 

 

 

 

 

 

 

 

 

 

 

 

 

 

 

 

 

 

 

 

 

 

 

 

 

 

 

 

 

 

 

 

 

 

 

 

 

 

 

 

 

 

 

 

 

 

 

 

 

 

 

 

 

 

 

 

 

 

 

 

 

 

 

 

 

 

 

 

 

 

 

 

 

 

 

 

 

 

 

 

 

 

 

 

 

 

 

 

 

 

 

 

 

 

 

 

2012-06-10

진흙속의연꽃

 

2009-3-17한국의종교현황(up).hwp
4.06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