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12. 7. 23. 14:56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다면

 

 

고유성을 발현하였을 때

 

백일홍이 예쁘게 피었다. 아파트 앞 화단에 누군가 심어 놓은 백일홍이 이곳 저곳에서 예쁜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다. 백일 동안 핀다는 백일홍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 꽃잎 중앙에 노랑 꽃술이 띠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꽃중에 또 꽃을 보는 듯하다.

 

이렇게 이중으로 피어 있는 백일홍의 꽃 색깔은 다양하다. 연분홍, 진홍색 등 붉은색 계통이 있는가 하면 하얀색과 노랑색 계통도 있어서 다양한 종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승불교에 산천초목성불이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하여 동국대 김종욱교수는 불교 TV 강의에서 비록 초목일지라도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 보이면 성불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백일홍은 성불한 것이나 다름 없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마침내 꽃을 피워냄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 모두는 성불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바위라면 어떨까.

 

바위 역시 성불이 가능한 것이라 본다. 바위가 바위로서 고유성을 보여 주었을 때 이다. 하지만 바위가 깨졌을 때 더 이상 바위로서 정체성은 보여 주지 못한다. 깨지고 조각난 바위가 비록 바위의 일부분일지라도 원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바위라 부르지 않고 깨진 돌조각 정도로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깨지고 조각난 바위는 바위로서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초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백일홍이 피기도 전에 꺽여져 버렸다면 백일홍으로서의 고유성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경우 백일홍인지 아닌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불특정 다수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

 

뉴스에서 어린이 납치 살해 사건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통영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이다. 김모씨(44)가 여자 초등학생을 자신의 차로 납치하여 성폭행하려다 반항하자 목졸라 살해 한 것이다. 또 다른 뉴스에서는 제주도 올레길에서 실종된 여자(40)에 대한 살해 용의자로 강모씨(46)에 대하여 수사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여성들이 잇따라 성폭행을 당하고 더구나 살해까지 당한 것은 한 개인의 삶을 통째로 짓밟아 버리는 반인륜적인 범죄행위이다. 한 개인이 자신의 고유성 즉, 타고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꽃이 피기도 전에 꺽여 버리는 것은 대승불교식 표현을 빌린다면 성불할 가능성을 원천 봉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여 한 개인을 철저하게 파괴하여 버린 범죄자의 심리상태는 어떤 것일까. 여러 차례 TV에서 범죄자들의 심리 상태에 대하여 방송을 하였지만 근본적으로 종교가 제역할을 못해서라고 본다. 특히 불교계가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가장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는 종교가 불교이다. 전국민의 22.8%가 불교를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하고 있다. 다른 종교에서도 살인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한 걸음 더 나가 인간을 포함하여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죽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불교의 가치관이 얼마나 넓은 것인지 알 수 있다.

 

이처럼 살생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 하여 오계 중에 가장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이 불살생계이다. 이런 불교적 가치관이 세상 속에 확산 되어 이를 실천하고 있다면 성폭행과 납치 살해  사건과 같은 반인륜적인 범죄는 훨씬 줄어 들 것이다.

 

왜 단멸론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가치관을 심어 주어야 할까. 빠알리 니까야에서 부처님은  범죄를 저지르면 그 과보를 반드시 받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이 확산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는 자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자들이여,

어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이와 같은 가르침과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참으로 업을 짓거나 업을 짓도록 시켜도, 살육하거나 살육하도록 시켜도, 학대하거나 학대하도록 시켜도, 괴롭히거나 괴롭도록 시켜도, 억누르거나 억누르도록 시켜도, 협박하거나 협박하게 시켜도,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가택을 침입하고, 약탈하고, 절도하고, 노략질하고, 타인의 처를 겁탈하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면도칼처럼 예리한 바퀴로써 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조각조각 고깃덩이로 잘라도 그것으로 인한 죄악이 없으며, 또한 죄악의 과보도 받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갠지스 강의 남쪽을 다니면서 살육하거나 살육을 시키며, 절단하거나 절단하도록 시키며, 학대하거나 학대하도록 시켜도 그것으로 인한 죄악이 없으며 또한 죄악의 과보도 없다.

 

어떤 사람이 갠지스 강의 북쪽을 다니면서 보시하거나 보시하도록 시키고, 제사지내거나 제사지내도록 시켜도 그것으로 인한 공덕이 없으며 또한 공덕의 과보도 없다. 보시에 의해서도 수행에 의해서도 계행을 지키더라도 진실을 말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한 공덕이란 없으며 또한 그 공덕의 과보도 없다.

 

(아빤나까경-Apaṇṇaka sutta- The Inquiring Teaching-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아빤나까경(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docx

 

 

 

경에서 부처님은 장자에게 단멸론자의 견해를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 당시 유물론자인 아지따 께사깜발린과 우연론자인 깟사빠 뿌라나의 견해가 대표적인데, 이들의 주장을 들어 보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그 어떤 과보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어떤 사람을 죽여도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다고 말한다. 또한 보시하고 지계하는 생활을 하며 남을 위하여 봉사하여 공덕을 쌓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다. 이는 육체의 소멸과 함께 정신도 소멸되어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단멸론에 근거한다.

 

쾌락주의와 허무주의

 

이런 단멸론적인 생각을 가진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특히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더욱 더 단멸론적인 사고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래서 과학이 발달한 요즘 단멸론은 현대인들에게 상당히 먹혀 들어 가고 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쾌락주의허무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멸론과 쾌락주의와 허무주의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범죄를 저지르는자 들 대부분이 쾌락주의에 바탕을 둔 허무주의자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신의 소멸과 함께 완전한 소멸로 보는데, 이는 철저하게 유물론적인 관점이다.

 

이처럼 유물론 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는 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대부분의 범죄가 이들 유물론적이고 단멸론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자들에 의하여 자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윤회와 내생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범죄자들이 윤회와 내생을 믿는 다면 납치, 성폭행, 살해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어서 악처에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다면

 

유물론자와 단멸론자들은 육체의 죽음으로 인하여 완전한 소멸로 보기 때문에 서슴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판이 될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된 뒤의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그러한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비난받는다.

 

2)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비난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실천하여 한 쪽만을 충족시키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버리고 있다.

 

(아빤나까경-Apaṇṇaka sutta- The Inquiring Teaching-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경에서 두 가지 가능성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하나는 저 세상이 존재 하지 않은 경우이고, 또 하나는 저 세상이 존재하는 경우이다. 반반의 가능성이다.

 

만일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다면 유물론자나 단멸론자의 악행은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소멸되고 말것이다. 반대로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범죄자의 악행은 그에 대한 과보를 받아 마땅 할 것이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부처님이 말씀하신 논파 할 수 없는 가르침

 

저 세상이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에 대하여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죽어서 돌아 온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론으로 알 수 있다. 지금 여기 우리가 있는 이유는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고 오늘은 내일의 연속이듯이, 마찬가지로 현생이 있다는 것은 전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고, 미래생 역시 현생의 연속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갈애를 소멸하여 더 이상 업을 짓지 않아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지 않은 이상 업생이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논파 할 수 없는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멸론자들은 이 논파 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못 받아 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인과를 무시하고 도덕을 부정하고 공덕을 무시하는 삶을 살아 가고 있는데 이는 한쪽면만 충족하고 있는 것이다. 그결과 성폭행, 납치 살해와 같은 끔찍한 범죄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이는 사회에 불교적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생과 윤회를 믿고 부처님의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안다면 그와 같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까. 그런 면으로 본다면 불교적 가치관을 사회에 확산하는 것이 요즘 같은 세태에서 불자들이 적극적으로 할 일이라 생각된다.

 

 

2012-07-2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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