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기도는 허망한 것, 공덕을 쌓으면 기도할 필요가 없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2. 7. 13. 12:03

 

기도는 허망한 것, 공덕을 쌓으면 기도할 필요가 없다

 

 

 

매일 글을 보는 법우님

 

알고 지내는 법우님들에게 블로그를 소개 하고 있다. 하지만 글을 계속 보는 이들은 극소수이다. 대부분 처음 소개 할 때 한 두번 보고 말뿐 지속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매우 희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끝까지 보아 주는 법우님들이 몇 분 있다. 주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본다고 한다.

 

로그인해서 들어오면 필명이 남기 때문에 알 수 있지만 그냥 들어 오는 경우 들어 왔는지 오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그런 법우님 중에 한 분이 가끔 글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어느 글의 경우 너무 표현이 지나치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을 받을 때 마치 모든 것을 다 들켜 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오랫동안 지켜 보아 왔던 법우님의 눈을 통하여 외면의 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심리상태까지 모두 간파 당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이렇게 매일 글을 읽어 보아 주시는 것만 해도 매우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만치 관심 있게 지켜 보고 있다는 표시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 친지나 법우님들 중에 지속적으로 글을 보아 주는 사람들이 매우 드믄 반면, 얼굴도 모르는 수 많은 법우님들로 부터의 시선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댓글을 남겨 주셨을 때이다. 글을 보면 대게 소박한 표현들이다. “종종 보고 있다또는 꾸준히 보고 있다또는 보는 것이 일상화 되었다는 등의 말과 함께 감사 하게 생각한다라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이런 글을 받을 때 마다 비록 로그인 하여 흔적을 남기고 있지 않지만 어디에서 인가 지켜 보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느낌을 받을 때 마다 이제 글쓰는 행위가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보게 된다.

 

글의 길이가 점점 늘어나는 이유

 

글쓰기는 일상적인 것이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밥을 먹듯이 글을 쓰고 싶은 욕구는 어쩔 수 없다. 좋은 소재가 나타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경전에 있는 내용이라도 올려 놓자는 주의이다. 누군가에는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검색을 통하면 비록 수 년전에 올려 놓은 글이라도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관련 내용이나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것을 올려 놓지 않으면 허전해서 하루라도 견딜 수 없을 지경이다.

 

이렇게 글쓰기가 일상화 되다 보니 글의 길이가 점점 늘어난다. 6년전 처음 글쓰기를 시작할 때 A4 한장 채우기도 힘들었으나 요즘 글을 썼다하면 10장 넘어가기가 보통이다. 그러다 글을 꾸준히 보고 있는 법우님은 글을 읽기가 점점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요즘같이 바쁜시대에 그 많은 내용을 언제 다 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불만이다.

 

이렇게 글이 점차적으로 길어지게 된 요인은 초기경전이나 논문, 기사, 사전 등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모두 객관적으로 검증된 자료들이다. 만일 이런 자료를 인용하지 않고 본인의 생각을 적게 되다면 A4한장 채우기도 힘들다. 설령 자신이 생각하는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견해를 빠알리어로 딧티(ditthi)라 한다. 딧티는 한자어로 사견(私見)이라고 볼 수 있지만, 때로 사견(邪見)이 될 수 있다. 삿된 견해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불자들에게 이와 같은 사견이 발생하는 이유는 경전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전적 근거 없이 자신의 깜냥으로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 되기 쉬운 것이다. 소위 인터넷에서 논객들이라 불리우는 네티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불자라면 반드시 경전이나 주석에 근거하여 글을 써야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른 견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전이나 주석서에 실려 있는 내용을 빠알리로 닷사나(dassana, 正見)라 한다. 따라서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는 반드시 경전이나 주석에 근거하여야 한다누구나 믿을 수 있고 객관적으로 검증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전 등 객관적으로 검증가능한 자료를 이용하여 글쓰기를 하다 보니 글의 길이가 길어 졌다. 그러다 보니 글쓰는 시간 역시 늘어나게 되었다. 폰트 사이즈 12로 하여 A4 5장 정도의 글을 쓰는데 보통 두세시간 걸리고, 10장 정도라면 대여섯시간 걸리는 것은 보통이다. 물론 이 과정에 사진이나 동영상을 올리고 또 교정까지 본 시간을 포함한 것이다. 때로 동영상음악까지 만들게 되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 가는지 조차 모를 지경이다. 이렇게 하루 일과 중의 반 이상 또는 대부분을 글쓰기에 투자 하고 있는데, 읽는 시간은 불과 몇 분에 지나지 않는다.

 

존경하는 분으로부터 받은 글

 

글이 갈수록 길어지고 내용도 숙고를 하며 읽어야 되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보아 주시는 법우님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힘이 된다. 그런데 가장 큰힘을 받는 것은 법우님들의 댓글이다. 특히 소박한 댓글을 보았을 때 감동하게 된다. 댓글을 작성하기 위해서 이리 저리 생각하고 썼다 지웠다 하며 귀중한 시간을 투자하여 보내 주신 댓글에 대하여 가급적 답신을 제 때에 해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했을 경우 미안한 마음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댓글을 남긴다는 것은 관심의 표현으로 본다. 그런 댓글 중에서도 존경하는 분으로부터 받은 글은 남다르다. 어깨들 토닥이는 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격려를 받는 듯하여 용기백배 하게 된다.

 

최근 마성스님으로부터 댓글을 받았다. 스님은 종종  댓글을 남겨 주시곤 하는데, 주로 잘못된 부분이 발견 되었을 때이다. 부적절한 표현이나 잘못 적용된 단어 같은 것이다. 스님의 댓글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진흙속의연꽃님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수행자도 공덕을 지어야 합니다. 부처님도 입멸 직전까지 공덕을 지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붓다와 그의 제자 아누룻다와의 대화편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육신을 잃어버린 아누룻다 존자가 헤진 가사를 낏기 위해 바늘에 실을 꿰어달라고 다른 동료 비구들에게 요청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공덕을 지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바늘에 실을 꿰어준 분은 부처님이었습니다. 그때 아누룻다는 부처님께서는 다겁생을 통해 수많은 공덕을 지으셨는데 다시 무슨 공덕이 필요하냐고 여쭈었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공덕을 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위 글에서 진흙속의 연꼿님께서는 법문(
法門, pariyāya-desanā) '대기설법(大機說法)'이라고 표기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표기해야 합니다. 대기설법이란 '듣는 자의 능력에 따라 법을 설한다(To tell the doctrine in accodance with the capacity of hearers)'라는 뜻입니다. 대기설법을 다른 말로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하는데, '병에 따라 약을 투여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대기설법을 흔히 방편법(upāya)이라고 합니다. 반면 진흙속의연꽃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아비담마(Abhidhamma)는 비방편설, 또는 비대기설법(非對機說法, nippariyāya-desan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성 _()_  

 

(마성스님,’공덕 짓는 사람과 공덕을 부정하는 자들의 댓글에서)

 

 

 스님은 잘못 적용된 한자어에 대하여 지적하였다. 이는 자료를 활용하다 보니 자료에서 잘못된 것을 그대로 사용하다 오류가 난 것이다. 이렇게 지적하여 주면 잘못이 바로 잡혀지게 된다.

 

인터넷은 구업(口業)을 짓는 곳

 

만일 오류인채로 인터넷바다에 떠다닌다면 구업(口業)’을 짓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글쓰는 행위에 대하여 신구의 삼업 중 구업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터넷 토론사이트에서 욕설이나 비아냥, 비속어 등은 모두 구업을 짓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구업은 삭제 하지 않는 한 없어지지 않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익명을 전제로 한 사이버 공간이지만 누군가 볼 것임에 틀림 없고, 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비록 사이버 공간이지만 글을 남기는 행위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이렇게 오류를 알려 주는 것에 대하여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정신없이 글을 쓰다 보면 철자는 물론 맞춤법, 한자적용 등 많은 실수를 하게 되는데, 가장 큰 실수는 뜻이 완전히 거꾸로 적용된 문장이다. 이런 경우 누군가 알려 주지 않으면 거꾸로 적용된 채 인터넷바다를 떠 돌아 다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는 분에게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바느질 하는 부처님

 

마성스님은 잘못 적용된 한자어를 지적해 주면서 부처님의 공덕짓기에 대한 글도 남겨 주셨다. 수행자도 복을 지어야 된다는 말이다. 부처님과 아누룻다 존자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것인데, 이에 대하여 인터넷 검색을 한 결과 한역 증일아함경에 실려 있는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빠알리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자료 검색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부처님과 아나율(아누룻다)존자와 대화 이야기이다.

 

 

 

  아나율이 낡은 옷을 깁고 있을 때였다. 이 때 육안은 허물어지고 티 없이 맑은 천안을 얻었다.

 

 그 때 아나율은 보통의 방식대로 옷을 기우려 하였으나 실을 바늘구멍에 꿸 수가 없었다. 이 때 아나율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 세상에서 도를 얻은 나한은 나를 위해 바늘을 꿰어다오'.

  

세존께서는 깨끗한 천이(天耳) '이 세상에서 도를 얻은 아라한은 나를 위해 바늘을 꿰어다오'라고 하는 이 소리를 들으셨다. 세존께서는 아나율이 있는 곳으로 가 말씀하셨다.

  

"너는 그 바늘을 가져 오라, 내가 꿰어 주리라."

  

아나율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까 제가 말한 것은 세상에서 복을 구하려는 사람은 저를 위해 바늘을 꿰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복을 구하는 사람으로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다. 여래는 여섯 가지 법에 있어서 만족할 줄을 모른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보시요,

둘째는 교훈이며,

셋째는 인욕이요,

넷째는 법다운 설명과 이치에 맞는 설명이며,

다섯째는 중생을 보호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구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공덕짓기-증일아함경 제31 38 역품)

 

  부처님의 공덕짓기-증일아함경 제31권 38 역품 .docx

 

 

 

 

눈이 먼 아누룻다 존자의 헤진 가사를 부처님이 바늘로 손수 기워 주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바느질을 하면서 부처님은 세상에서 복을 구하는 사람으로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지혜와 복을 구족한 분이라 하였다. 과거 3아승지 겁동안 십바라밀을 하여서 그 공덕의 힘으로 일체지를 얻고 정등각자(正等覺者, sammasambuddha)’가 되었지만 제자의 헤진 옷을 기워 주면서 또 공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득각자가 모든 것을 구족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복을 짓는 것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중생 제도를 위해서라고 하였다.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한국불교에서

 

부처님의 바느질 이야기는 오로지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해마다 선승들은 겨울과 여름 두 차례씩 안거를 하는데, 이와 같은 한국불교의 깨달음을 향한 열정은 세계적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깨달음만 추구 할 뿐 공덕 쌓는 알을 소홀히 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그 결과 사람 사는 곳에 절을 볼 수 없고 불자들은 가르침에 목말라 한다. 그래서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단멸론같은 삿된 견해에 빠지거나 심지어 유일신교로 넘어가기도 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연기법과 같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불자들이 알게 되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단멸론에 절대 빠질 수 없고, 자아와 세상은 영원한 것이라 말하며 천국과 같은 영원을 추구하는 영속론이 허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한국불교가 상구보리만 추구할 뿐 하화중생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스님들은 개인적인 깨달음에 앞서 먼저 하화중생 즉, 복짓는 일과 공덕쌓기부터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비록 많이 깨닫지 못하였어도 아는 만큼 불자들을 위하여 회향한다면 복을 짓는 행위라 볼 수 있다. 보시 중에서 가장 수승한 보시가 법보시라는 말이 있듯이 경전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공덕을 쌓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성스님은 댓글에서 수행자도 공덕을 쌓아야 된다고 하였다. 스님이 되었다고 하여 깨달음만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깨달음 최상주의가 만연된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이 복을 짓거나 공덕이 되는 행위를 소홀히 함에 따라 재가불자들 역시 복을 짓거나 공덕 쌓기에 등한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는 절에 가 보면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불자들이 절에 가는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가 복을 짓기 보다 복을 달라고 빌러 가기 때문이다. 법당에 달려 있는 수 많은 연등에 적혀 있는 발원문을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

 

전세계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종교가 기복적이다. 하지만 불교만은 예외이다. 기도를 할 대상도 없고 기도를 들어 줄 대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자들은 소원성취 기도를 마다 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합격, 건강, 사업, 치유 등에 대한 것이다. 이런 기도를 보면 유일신교의 기복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부처님에 대하여 무슨 소원이든지 다 들어 주는 초월적인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아무 효과가 없다.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

"촌장이여,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커다란 큰돌을 깊은 호수에 던져 넣었다고 합시다.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그것을 두고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

 

라고 기도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순례한다면

 

촌장이여,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커다란 큰돌이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합장하고 찬탄하고 순례한 까닭에 물 속에서 떠오르거나 땅위로 올라올 것입니까?"

 

(아시밧다까경-Asibaddhakasutta- Looking Westward- 서방인경, 상윳따니까야 S41.1.6, 전재성님역)

  아시밧다까경(서방인경-S41.1.6).docx 

 

 

 

 

prayer

 

 

부처님이 날란다에 있는 빠빠리깜바바나에 계셨을 때 그 지역의 촌장인 아씨반다까뿟따와의 대화에 대한 내용이다.  

 

촌장은 서쪽지방의 사제들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사제는 신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제관과 같은 역할을 말한다. 촌장은 부처님에게 "세존이신 고따마여, 서쪽지방에 사는 사제들은 물병을 들고 쎄발라 꽃으로 화환을 하고 물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불의 신을 섬기는데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을 들어올려 이름을 부르고 하늘나라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세상에 존경받으시고 거룩하고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분께서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로 태어날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하면서 물에 빠진 돌을 예로 들고 있다.

 

하지만 부처님은 죽은 자를 위하여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마치 물에 빠진 돌을 기도로 들어 올리게 해달라는 것 같은 터무니 없는 행위라고 말씀 하신다.

 

올바른 견해를 지녔다면

 

이와 같은 이야기를 보면 마치 한국불교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는 것 같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천도재를 말한다. 어느 절이든지 천도재를 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유행하고 있는 천도재는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이 이미 부정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복적인 천도행위 대신 부처님은 어떤 가르침을 펼치셨을까. 경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세존]

 "촌장이여,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고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이간질하는 말을 하지 않고 욕지거리하는 말을 하지 않고 꾸며대는 말을 하지 않고 탐욕스럽지 않고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올바른 견해를 지녔다면

 

그에게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지어다'

 

라고 기도하고 저주하고 합장하고 순례하더라도

 

촌장이여,

그 때에 그 사람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입니다."

 

 (아시밧다까경-Asibaddhakasutta- Looking Westward- 서방인경, 상윳따니까야 S41.1.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바른 견해를 가지면 무섭지 않다고 하였다. 오계를 준수하는 생활을 하다 죽었을 때,  어떤 못된 이가 죽어서 지옥이나 가라는 등의 저주성 발언을 퍼부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평소 쌓은 공덕으로 인하여 선처에 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평소에 바른 삶을 살아가고 복을 짓는 것을 강조 하였지, 평소에 엉망으로 살면서 돈의 힘으로 천상에 나기를 바라는 기도 행위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만일 기도발이 먹힌다면

 

이런 가르침이 초기경전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다. 또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한 번도 이와 같은 내용의 법문을 스님들로부터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오로지 열심히 기도하세요라고 말을 할거나 마치 사제처럼 천도재를 주관하는 모습을 너무나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초기경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매우 생소해 보인다는 것이다.

 

기도의 허구성에 대한 한가지 더 본다면 다음과 같다.

 

 

[세존]

"촌장이여,

예를 들어 버터기름이 든 병이나 참기름이 든 병을 깊은 호수에 집어넣고 부순다고 합시다. 그러면 조각이나 자갈이 되어 밑으로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 때에 버터기름이나 참기름은 위로 뜨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와서

 

'버터기름이여, 참기름이여,

잠겨라, 물밑으로 가라앉아라.

 

버터기름이여, 참기름이여,

바닥으로 가라앉아라'

 

라고 기도하고 저주하고 합장하고 순례한다면

 

촌장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버터기름이나 참기름이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저주하고 합장하고 순례한 까닭에 잠기거나 물밑으로 가라앉거나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입니까?"

 

(아시밧다까경-Asibaddhakasutta- Looking Westward- 서방인경, 상윳따니까야 S41.1.6, 전재성님역)

 

 

기름은 물에 뜨게 되어 있다. 그런데 물에 잠기도록 기도한다고 해서 잠겨지는 기적이 일어 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바위와 버터기름의 예를 들어 기도의 허무함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이와 같은 비유는 기도하는 행위가 인과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곧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연기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연기법에 의하면 물에 가라 앉은 바위가 기도한다고 하여 떠 오를 수 없고, 물에 떠 있는 기름이 기도한다고 하여 물 아래로 가라 앉는 기적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기도발이 먹혀서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이 세상은 뒤죽박죽으로 될 것임에 틀림 없다.

 

공덕을 쌓으면 기도할 필요가 없다

 

공덕을 쌓으면 기도할 필요가 없다. 기도하지 않아도 천상에 날 수 있고 또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탄탄한 토대가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매일 복을 지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행위를 몸소 보여 주신 것이 바느질 하는 부처님이다.

 

바느질 하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면 모든 것을 구족한 부처님도 복을 짓고 공덕을 짓는 행위라면 마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부처님의 제자들이 복을 짓고 공덕이 되는 행위를 하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런 부처님에 대한 찬탄의 노래가 있다. 라따나경이 바로 그것이다.

 

라따나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Varo varaññū varado varāharo            와로 와란뉴- 와라도 와라-하로
Anuttaro dhammavara
adesayī           아눗따로 담마와랑 아데사이
Idampi buddhe ratana
paīta         이담-삐 붓데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위없는 것을 알고, 위없는 것을 주고,

위없는 것을 가져오는, 위없는 님께서,

최상의 위없는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깨달은 님에게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oble, knowing the noble, giving the noble,

and to bring about nobility,

The incomparable Teaching was preached.

This too is precious in the Enlightened jewel,

by this truth may there be mental happiness.

 

(라따나경-Ratana Sutta, 보배경, 寶石經, 13번 게송, 숫따니빠따(Sn 2.1), 전재성님역)

 

라따나경(ratana sutta) 전문.docx

 

 

 

 

 

이미우이(Imee Ooi, 黃慧音) 창송

음성

经与吉祥利偈慧音

http://buddha.goodweb.cn/...ijing_huanghy.mp3  更多热门歌曲>>

 

 

 

여기서

 

‘위없는 것을 알고’ 라는 말은 ‘열반을 체득한자,

위없는 것을 주고라는 말은  ‘위 없는 가르침을 주는 자’,  

위없는 것을 가져오는라는 말은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을 가져오는 자’,

위없는 님이라는 말은 ‘위 없는 훌륭한 님’

 

이라는 뜻이다.

 

 

 

  

2012-07-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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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공덕짓기-증일아함경 제31권 38 역품 .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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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따나경(ratana sutta) 전문.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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