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진아(眞我)란 바로 이 아트만이자 브라만을 가리키는 것”한겨레신문의 불교개입

담마다사 이병욱 2012. 8. 13. 11:42

 

 

진아(眞我)란 바로 이 아트만이자 브라만을 가리키는 것한겨레신문의 불교개입

 

 

 

 

종교전문사이트가 있다. 휴심정(http://well.hani.co.kr/)이라는 사이트이다.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가 운영하는 이 사이트는 종교에 관한 모든 것을 올려 놓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3대 종교라고 불리우고 있는 불교, 개신교, 천주교에 대한 각종소식과 칼럼을 싣고 있다.

 

최근 이 사이트에서 불교와 관련된 글이 하나 실렸다. “형님스님과 나는 전과자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이다. 들어가 보니 굵은 글씨로 게송형식을 취한 굵은 글씨가 눈에 띄었다. 제목보다 더 자극적인 문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여인과 눈이 맞아
공금 쓰고 도망간 주지스님
그와 공범으로 엮인 또다른 스님
선생 하면서 카페 차렸다가
사직서를 제출한 신부님…

 

종교에선 참나를 찾으라지만
현실 속 인간은 이것저것 욕망
부처와 중생이 같다는데
차라리 환속해서 먹고살지
이들은 어찌 재판에 휘말렸을까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형님스님과 나는 전과자다, 휴심정 2012-08-11)

 

  스님과 나는 전과자다.docx

 

 

 

글을 보니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이라고 되어 있다. 확인해 보니 한겨레신문 사회면에 장사하자, 먹고살자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17) 종교인 재판으로 되어 있다.

 

김형태 변호사가 한겨레 신문에 올린 글을 휴심정 관리자인 조현기자가 제목을 형님스님과 나는 전과자다제목으로 휴심정 사이트에 올린 것이다. 이글을 보고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메이저신문의 개입을 초래한 한국불교

 

첫째, 이제 불교의 치부가 메이저신문을 통하여 전국민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불교계 내부의 자정기능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인과 눈이 맞아 도망간 스님이야기가 왜 메이져 신문에 등장 하였을까. 물론 김형태변호사의 회고록 형식이지만 이렇게 공론화 된 것은 불교를 이끌어 가는 종단과 스님들이 자초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불과 몇 달전 불교계는 승려도박파문으로 인하여 전국민으로부터 ‘개망신’을 당한 바 있다. 몰카를 촬영한 승려나 도박을 한 승려나 모두 법적으로 처벌 받았으나 이로 인한 파장은 만만치 않다.

 

지난 번 고향에 내려 갔을 때 사촌형님들 중의 한 분이 승려도박사건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다. 그러자 불교를 종교로 가진 입장에서 매우 부끄럽고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불자중에 어느 모임에 갔는데 갑자기 누군가 승려도박에 대하여 거론 한다면 그  자리에 앉아 있기가 몹시 불편할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제 대한민국 국민치고 도박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는 사실이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한번 신문과 방송에 알려지면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승려 도박 사건은 아직까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는 억대도박사건으로 뇌리에 박혀 있다. 이를 폭로한 성호스님이 억대라고 말하자 모든 기자들이 이를 그대로 받아 적어 기사화 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지만 이미 국민들은 스님들이 억대도박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처럼 불교계 내부의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신문과 방송등으로 매스콤을 탓을 때 한국불교의 이미지는 여지없이 추락해 버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교계 내부에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수 밖에 없다. 신문과 방송을 타기 전에 불교계 내부에서 활발한 문제제기와 토론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불자들이 감시를 해야 한다. 승풍실추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음주, 음행, 도박 등  승풍실추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고발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늘 휴대하고 있는 디카나 핸드폰, 스마트폰으로 촬영하여 근거를 남겨야 한다. 그리고 블로그나 카페에 올리거나 불교시민단체 또는 종단에 고발해야 한다. 이렇게 내부적으로 자정노력을 하지 않았을 때 필연적으로 매스콤을 탈 수 밖에 없다.

 

스님들의 은처행각

 

둘째, 한국불교에서 그 동안 쉬쉬하며 치부를 감추기에 바빳던 사건을 공론화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은처문제에 대한 것이다.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3자 동업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첫 사건으로 민사사건을 맡았다. 예쁘장한 아주머니 한 분이 찾아와 하소연을 했다. 남편이 돈 몇 푼 받고 어느 회사에 이름을 빌려 주었다가 패가망신하게 되었다는 거였다.

 

어음이고 세금이고 다 책임지게 되었으니 큰일은 큰일이었다. 사정이 딱해서 수임료를 받지 않고 재판을 해 주었고 결과는 비교적 잘되었다. 남편도 몇 번 왔었는데 어느 날 자신이 열심히 도 닦던 스님이었다고 고백을 했다.

 

그는 절에 불공드리러 왔던 예쁘장한 아주머니와 눈이 맞아 스님 생활을 그만두고 결혼을 했다. 이 세상에 나오긴 했는데 적응해 살기가 정말 쉽지 않다는 거였다.

 

기차 안에서 눈을 감고 곰곰 생각해보면 내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다가도 눈을 뜨면 먹고살아야 하는, 내가 분명 있다. 전직 스님도 열심히 돈 벌어 저와 마누라 먹여 살려야 한다.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형님스님과 나는 전과자다, 휴심정 2012-08-11)

 

 

전직스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느 스님이 있었는데 불공드리러 온 여인과 눈이 맞아 살림을 차렸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환속하게 되어 생활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는데,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한 과정에서 사기를 당하였다는 딱한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환속이야기에 대한 사례를 종종 듣는다. 불교TV 나 불교방송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스님은 은사스님의 환속으로 인하여 정신적 고뇌에 빠진 적이 있다고 하였다. 순례법회에서 어느 주지스님은 어느 본사 스님의 환속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렇게 보면 비구계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감각적 욕망에 굴복하여 파계하는 경우가 매우 많음을 알 수 있다.

 

김형태 변호사는 승풍실추에 대하여 또 하나의 사례를 보여 준다. 거두절미하고 승풍실추에 대한 글만 보면 다음과 같다.

 

 

그 절 주지 스님이 평소 절의 공금을 빼돌려 사적으로 써 왔다. 주지 스님에게는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에게 횡령한 돈을 주었는데 투서가 들어가 수사가 시작되자 주지는 도망을 갔다.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형님스님과 나는 전과자다, 휴심정 2012-08-11)

 

 

이는 은처에 대한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스님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몰래 아내와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은처행각은 현 불교종단의 심각한 문제라 한다.

 

종교전문기자 김나미님에 따르면 자신의 책 신앙지옥 불신천국(렛잇비)’에서 항간에 높은 승려 가운데 마누라를 숨겨놓지 않았다면 바보 멍청이라는 말도 들린다.”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고위직 승려들의 은처 현상은 일반화 된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은처문제로 처벌 받았다는 사례는 거의 없다.  은해사 D 스님의 경우 결혼증명서까지 제시 되었음에도 불구 하고 무혐의 처리 되었고, 현 조계종총무원장 스님의 경우 총무원장 선거 당시 은처의혹이 불거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자리를 유지 하고 있다.

 

이렇게 몰래 아내와 자식을 두고 이중 생활을 하는 스님들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럴 경우라면 차라리 환속해서 떳떳이 자신의 팔뚝의 힘으로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것이 나을 듯하다. 그래서일까 김형태 변호사는 글에서 그나저나 주지 스님은 스님 옷 벗고 환속해서 여인과 알콩달콩 살았으면 되었을 것을 어찌 그리 횡령에, 도주까지 하게 되었나.” 라고 말하고,  어찌어찌해서 도 닦는 스님이 될 수도 있겠으나, 또 인연이 안 되면 애 낳고 돈 벌고 살면 될 걸.”라고  넑두리 하는 장면이 보인다.

 

진아(眞我)란 바로 이 아트만이자 브라만을 가리키는 것

 

셋째,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하여 거론 하였다는 사실이다. 김형태 변호사의 글에서 이 부분이 가장 핵심적이라고 볼 수 있다. 스님의 이중생활에 대한 고발도 있지만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형님 스님과 횡령재판 다니면서 이리저리 괴롭혔다. “스님, 붓다가 가르치신 연기의 법에 따르면, 실체로서, 변하지 않고 다른 것에서 독립되어 영원히 존재하는 ‘나’가 없다지요. 그렇다면 대관절 윤회는 누가 합니까?” “원효대사가 해설을 부친 <대승기신론>에 유일 실재인 한마음(一心)이니 ‘진여’니 하는 말이 나오는데 이건 브라만이니 아트만이니 하는 힌두교 사상이지, 연기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거 아닙니까?”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형님스님과 나는 전과자다, 휴심정 2012-08-11)

 

 

김변호사는 우리나라 대승불교가 힌두교와 무엇이 다르냐고 직격탄을 날린다. ‘한마음이니 진여이니 하는 말들이 힌두교의 브라만과 아뜨만 사상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는 말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연기법과 맞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한다.

 

이런 지적은 한국불교를 이끌어 가는 종단과 스님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매우 뼈아픈 것이다. 한국불교의 실상을 제대로 알고 있는 불자들은 한국불교가 힌두교화 되었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참나라는 것이 있다.

 

조계종 종정스님을 비롯하여 현재 불교방송에서 불교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인천 Y선원의 S스님은 입만 열면 참나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그런 참나를 한자로 표기하면 진아(眞我)’이고, 그런 참나는 주인공, 진여, 불성, 본마음, 한마음, 한물건, 그놈 등 여려 이름으로 불리 운다.

 

참나는 ‘진짜 나’라는 뜻이다. 진짜 나를 찾기 위하여 선승들은 심산유곡에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평생을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참나, 진아는 힌두교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하여 김형태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하리시는 이 현상계는 감각 경험, 기억,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이 생각에서 벗어날 때 ‘참된 나, 진아(眞我)’를 깨달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힌두교 표현으로 바로 브라만이 참된, 절대적 실재로서, 이 온 우주의 비인격적 본질이자 존재하는 만물의 근원이다. 이 브라만이 나라는 개체 속에 들어와서는 아트만이라 불린다. 진아란 바로 이 아트만이자 브라만을 가리키는 것.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형님스님과 나는 전과자다, 휴심정 2012-08-11)

 

 

김형태변호사가 언급한 마하리시에 대하여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마라리시라는 이름을 가진 두 명의 힌두교 수행자를 찾을 수 있었다.

 

먼저 라마나 마하리시(Ramana Maharshi, 1879-1950)이다. 라마나 마하르시 또는 라마나 마하리쉬라 하는데, 인도의 힌두철학자이자 요가 수행자로 소개 되어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진아와 영원한 본질을 자각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대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으로 마하리시 마헤쉬(Maharishi Mahesh, 1917-2008)가 있다. 인도에서 초월명상법을 창시하고 발전시킨 요기이다. 비틀즈의 정신적 스승으로 1960년대 말부터 서구에 알려졌다고 한다.

 

 

 

 

마하리시 마헤쉬 요기(Maharishi Mahesh Yogi, 1917년-2008년)

  

 

이처럼 힌두교 성자로 추앙 받고 있는 마하리시는 참나와 진아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브라흐만이 절대적 실재로서 온 우주 만물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만물의 근원과 개아인 아뜨만이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힌두교에서 말하는 참나와 우리나라 선사들이 화두를 들면서 찾고자 하는 참나와 무엇이 다르냐는 투로 김형태 변호사는 말하고 있다.

 

 

홍위병을 동원하여

 

이와 같이 세 가지 관점에서 김형태 변호사의 글을 살펴 보았다. 이는 결론적으로 불교계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것도 불교계 내부에서 문제제기를 한 것이 아니라 한겨레신문이라는 메지저 신문에서 온 국민들을 대상으로 알린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불자들은 부끄럽고 창피하게 생각해야 한다.

 

불교계 내부에서 충분히 토론하고 걸러 낼 수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제3자가 그것도 전국민들을 대상으로 매스컴을 통하여 알렸다는 사실은 은 일종의 불교무시행위이자 앝잡아 보는 것이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런 결과를 초래 하였을까. 이는 불교계가 내부적으로 자정기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그런 예가 하나 있다.

 

 

대불청 정우식 회장은 “그간 우리는 불교닷컴과 국정원의 부적절한 관계를 지적했고, 국정원도 문제점을 인정하고 당사자인 이모 과장을 사실상 문책성 인사조치 했지만 불교닷컴은 아무런 해명이 없다”며 “불교닷컴이 책임 있는 답변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불청, 법원 결정문 공개 “해명 않으면 퇴출운동”, 불교포커스 2012-07-25)

 

 

대불청(대한불교청년회)에서 성명을 내었다. 불교닷컴이 불지회 소속으로 드러 났으니 퇴출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불청의 성명을 보면 마치 현총무원체제의 청년 전위대처럼 보이고, 중국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을 연상케 한다.

 

대불청 회장의 성명서에 따르면 불교닷컴이 멸빈된 사람이 대표로 있는 불지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 자체를 문제삼고 있다. 하지만 이는 비판적인 불교언론을 말살하기 위한 조치로 보여 진다. 그동안 불교닷컴이 현 조계종 총무원장의 은처의혹등 개인적인 문제점들과 불교전반에 대한 비리와 의혹에 대하여 지면을 통하여 꾸준히 고발하여 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불청이 비판적인 언론의 탄압에 압장서면서 정작 비리와 의혹의 온상이라고 불리우는 총무원장스님의 은처의혹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기사의 댓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대불청이 불교닷컴에 해명하란 요구에 이어 퇴출운동까지 하겠다 했다.
대불청이 그간 도박사건을 포함해 불미스러운 일에 입장만 밝혔지, 비리승려 퇴출까지 거론했나? 더구나 불교닷컴은 의혹 수준이고 비리승려는 비리가 적발된 경우다. 그런 비리승려들이야 말로 종단에 해악을 끼치고 불교 이미지 갉아 먹었는데 대불청이 그런 승려들 끝까지 처벌케 하거나 퇴출한 적 있냐?

자승원장은 상습도박행위, 룸싸롱출입(이건 자승원장 본인 입으로 고백한 내용)에다가 상습성매수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대불청이 자승원장에 쏟아지는 의혹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고 해명이 이뤄지지 않으면 사활을 걸고 퇴출운동해야 하지 않냐? 자승원장 의혹에 대해선 불교언론 뿐만 아니라 일간지 언론까지 보도했으며 심지어 얼마전 수경-불교닷컴 논란에서 보듯이 자승원장 비리에 대해 수경이 할거냐 불교닷컴이 할거냐하는 문제로 종단이 "폭로청탁"으로 명명까지 했다.

적어도 대불청이 어용소리 안듣고 모두에게 공평한 잣대, 정의를 논하려면 종단내 가장큰 권력인 자승원장 비리 의혹에 대해 강력한 해명요구와 퇴출을 말했어야 했다. 했냐?

자승원장 본인 입으로 고백한 "룸싸롱 출입 사실 인정"에 대해서도 왜 대불청은 벙어리 인가. 종단의 최고수장이 과거 룸싸롱이나 드나들던 수행자였는데 그가 현재 자성과 쇄신을 이끌고 있는 이 웃지못할 상황이 대불청에겐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가.

 

(기사 댓글, 대불청, 법원 결정문 공개 “해명 않으면 퇴출운동”, 불교포커스 2012-07-25)

 

 

대불청이 불교닷컴에 대한 의혹만 켈 것이 아니라 세간에서 회자 되고 있는 총무원장 스님의 은처의혹과 상습도박행위 의혹 등 각종의혹에 대해서도 동일한 잣대를 적용하여 추궁해야 되지 않는 논리이다.   

 

한국불교와 힌두교, 대체 다른 점이 무어냐

 

이렇게 홍위병을 동원하여 비판적인 언론매체를 말살하려 들고 승단의 용비어천가만 부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중대한 승풍실추 사건이 일어나면 어느 불교언론매체도 보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숨기기에 급급할 것이다. 그러다 터지면 대형사건이 터지게 되는데, 지난 번 승려도박사건이 좋은 케이스라 볼 수 있다.

 

불교계에서 내부적으로 꾸준히 문제제기를 하여 정화해 나가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외부의 개입이 초래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한겨레신문과 휴심정에 실린 김형태변호사의 글이 대표적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기사가 뜰 때마다 불자들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고 창피하게 생각한다. 더구나 한국불교와 힌두교의 다른 점이 무엇이냐는 문제제기가 매우 충격적이다.

 

 

 

 

2012-08-13

진흙속의연꽃

 

스님과 나는 전과자다.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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