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사이버세상과 인터넷포교사

담마다사 이병욱 2012. 8. 9. 12:21

 

사이버세상과 인터넷포교사

 

 

 

 

대통령과 관련된  글을 하나 올렸더니

 

런던올림픽과 대통령에 관련된 글을 하나 올렸다. 이 글을 올리고 나자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추천과 조회수로 나타나기 시작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올린 글이 메인 뉴스에 올라 간 것도 아니다. ‘다음 뷰(Daum View)’의 시사 장르에서 실시간 인기글로서 첫 페이지에 6-7시간 정도 등재되고, 이후 ‘1일 인기글로서 등재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 하루 만에 조회수가 3,200 여회에 이르고 추천은 178개에 달했다.  

 

추천과 조회수를 의식하지 않고 글을 쓴다는 것은 거짓에 가깝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것은 많이 보아 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천 한방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조회수가 많으면 뿌듯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블로거는 추천을 해 달라고 유도하는 문구를 버젓이 올려 놓기도 한다. 그런 블로그일수록 추천과 조회수가 많은 소위 파워 블로거로서, 서로 추천을 주고 받으면서 메인 뉴스에 띄우는 작업을 한다. 그렇게 하여 조회수가 많아 지면 광고 효과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수입과 직결된다. 유명 파워 블로그거의 화면 곳곳에 광고가 닥지닥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의도적인 글쓰기를 한 이유는

 

런던 올림픽과 대통령에 대한 글을 올린 것은 글을 띄우기 위해 의도적으로올린 것이다. 물론 라디오 시사프로에서 들은 대통령 전용기 관련 이야기에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쓸 때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키워드로 제목을 만든 것이다. ‘올림픽이라든가, 대통령관련 문제는 항상 민감한 이슈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슈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의도적인 글쓰기를 하였다. 한마디로 조회수를 올리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블로그를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렇게 의도적인 글쓰기는 금방 효과가 나타났다. 그것은 조회수가 말해 준다.

 

하지만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이제까지 불교관련 글만 쓰다가 갑자기 정치이데올로기관련 글을 쓰니 어리둥절 한 것이다. 더구나 시정잡배들이나 쓰는 XX” “미친XX”라는 자극적인 표현 까지 하였으니 당황스럽고 민망하다는 표현이 나올 법 하다.

 

오늘 아침 블로그 관리자 화면을 보니 3700명 이상 방문하였다. 평소 보다 3-4배 많은 숫자이다. 가장 관심을 가지고 본 것은 페이지뷰이다. 일반적으로 페이지 뷰는 방문자 보다 2-3배 정도 많이 집계 되고 있는데, 어제 페이지 뷰를 보면 약 7000명에 달했다. 평소 방문자가 1000명이라면 2700명이 더 왔으므로 방문한 이들이 한 번 이상 다른 글도 보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게 되면 글쓰기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다. 그들이 본 글의 대부분은 불교관련 내용일 것이다. 올려진 글에는 어느 곳에서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포교사라고 하는데

 

최근 불교포코스 정법정론 칼럼에 정기적으로 글을 올린 스님이 있다. 익명으로 올린 스님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았다.

 

 

장선우님이따타가따라는 책을 냈다. 이 소식은 인터넷에서 법보시를 열심히 하고 있는진흙속의 연꽃님의 블로그에서 알았다. ‘진흙속의 연꽃님의 블로그는 현재 3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다녀갔는데 글쓰기를 수행으로 삼고 있는 인터넷 포교사이다.

 

(조신, 영화감독의 불교이해, 불교포커스 2012-08-06)

 

 

 

 

지난 7 28일에 올린 글 <장선우 감독의 공개편지 “달라이 라마 존자님께 묻습니다”> 에 대한 글을 올렸다. 이 글을 보고 어느 스님이 영화 감독의 불교이해라는 제목으로 불교포커스에 글을 올렸다. 글의 모두에 필자의 필명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인터넷포교사라는 명칭을 붙여 주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인터넷포교사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또 포교사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부처님의 가르침이 좋아 공부도 하고, 공부한 것에 대하여 찾는 이들과 공유도 할 겸 글을 올리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법우님들로부터 많은 정보도 얻고 또한 몰랐던 것을 배우기도 한다. 이렇게 글 쓰기를 거의 매일 하다시피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어느 법우님은 지칠 줄 모르는 님의 글쓰기에 참으로 감탄을 합니다.”라는 표현도 하였다.

 

글쓰기는 일상적인 것이다. 눈을 뜨면 일어나 밥을 먹듯이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지 오래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이 나오는 것일 뿐이다. 이는 TV달인열전에서 달인들과 같은 것이라 본다. 달인들은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니 눈을 감고 던져도 바구니에 척척 들어 가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누가 인터넷포교사인가

 

한국불교에 인터넷포교사라는 제도는 아직까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현실세계에 포교사 제도가 있어서 수천명의 포교사가 배출되어 일선에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지만, 매일 넘나드는 사이버세상에서는 아직까지 포교사제도가 없어서 포교의 사각지대나 다름 없다. 다만 뜻있는 극소수의 불자네티즌들이 블로그와 카페를 만들어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원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들이 모두 인터넷포교사들이라 볼 수 있다. 비록 인터넷포교사라는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리기 위하여 경전에 근거한 글을 쓰고, 퍼 나르고 하는 것이 포교와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에 진정한 인터넷포교사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이들은 남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좋아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칠줄 모른다.  오늘도 내일도 글을 쓰고 퍼나를 뿐이다.

 

인터넷포교에 손을 놓고 있는 종단

 

이처럼 매일 넘나드는 인터넷공간은 현실공간 못지 않은 위력을 발휘한다. 오히려 현실공간 보다 더 영향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존 주류 제도권 종단에서는 사이버공간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실 공간에서의 인식이 인터넷공간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라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은 출가자들이 철저하게 현실을 외면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어 버리고 깊은 산중에서 숨어 살듯이 보여지는 것이  현실공간에서의 수행자들의 모습이라 보여진다. 그러다 보니 현실공간에서 포교가 이루어질 수 없다. 수 많은 포교사가 있다고 할지라도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한사람의 포교에 대한 원력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한다.

 

이렇게 한국불교의 제도권 승단과 이에 소속된 스님들은 현실공간은 물론 사이버공간에서도 역시 포교에 무관심함을 알 수 있다. 그런 불교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마성스님의 용기있는 지적

 

이처럼 현실공간에서 조차 포교가 이루어지 못함은 결국 불교의 쇠멸로 갈 수 밖에 없다. “지금 한국불교는 쇠멸의 도중에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지난 7 18일 통합종단 50주년 세미나에서 이도흠 교수가 한 말이다. 불교가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거기에다 승풍실추 사건이 끊임 없이 일어난다면 결국 쇠하여 멸하고 말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다.

 

이런 지적과 함께 최근 마성스님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한국불교의 문제점에 대하여 용기 있게 고발 하였다. 그 중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간혹 어떤 사람은 불교의 지도자가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불교발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권력에 불과할뿐 긴 안목에서 보면 불교의 쇠퇴 혹은 파멸을 가져 온다. 그러한 사례를 불교사에서 수 없이 확인 할 수 있다. 불교의 대사회적 영향력이 확대되었다고 해서 불교가 발전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없다.

 

(마성스님, 불교발전이란 무엇인가, 2012-08-07)

 

 

현 조계종 종단 총무원장스님은 정권과 유착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통령의 선거를 돕고 그 영향으로 종권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 종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은처의혹등 개인적인 약점이 있을 경우 정권으로부터 코를 꿰는 형국이 되므로 이런 스님이 종단의 수장으로 있는 한 결국 불교의 쇠멸로 나아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권과 유착된 종교지도자가 나오면 안된다는 것이다.

 

중생의 아픔을 외면하는 자는

 

그렇다면 불교가 쇠멸하지 않고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이어지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 것보다는 불교가 대사회적 기능을 다하고 있을 때, 불교가 발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중생의 아픔을 외면하는 것은 진정한 불제자라고 볼 수 없다. 붓다는 결코 세속의 아픔을 외면하라고 하지 않았다.

 

(마성스님, 불교발전이란 무엇인가, 2012-08-07)

 

 

마성스님은 불교의 대사회적 역할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어느 종교이든지 사회적 역할을 못 하였을 때는 퇴출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웃종교와 너무나 대비 된다.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유일신교의 경우 교회에서 어린이집, 청소년 공부방, 어르신 무료 급식과 이발 봉사 등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것도 교회끼리 경쟁을 한다. 거기에 불교는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철저하게 현실을 외면하는 스님들

 

이렇게 철저하게 지역주민과 밀착하여 지역주민을 위하여 봉사를 하고 있는 유일신교의 목사와 달리 선승들은 철저하게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그런 현상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다음과 같이 철저하게 비판한다.

 

 

그런데 대승불교를 표방하고 있는 한국불교 승단에서는 세속과 담을 쌓고 앉아 있는 것을 최고라고 여긴다. 이것이 과연 대승보살의 길인가? 선승들이 그토록 소승불교라고 폄하하는 현재의 상좌불교보다도 못한 소승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까? 어떤 불교학자는 사석에서 한국불교는 대형버스를 혼자 타고 가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아주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소승이라고 자처하고 혼자 타고 가는 자가용이 더 대승적이지 않은가? 한국불교는 밖으로는 대승불교라고 자처한다. 그러면서 그 큰 대형버스를 타고 가는 것과 같다. 입으로는 대승을 외치지만 그들의 삶은 매우 이기적이다.

 

(마성스님, 불교발전이란 무엇인가, 2012-08-07)

 

 

스님은 한국불교의 수행자들에 대하여 이기적이라고 하였다. 이기적이라는 말은 오로지 자기자신 밖에 모르는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소승보다 못한 것이 한국불교의 수행자들이라 비판하고 있다.

 

이는 스님들이 철저하게 현실을 버린 것을 의미한다.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고 깊은 산중에서 평생 도만 닦는 수행자들에 대한 일종의 고발이라 볼 수 있다.

 

테라와다 승려들이 하는 일은

 

이렇게 우리 스님들이 소승 보다 못하고 말로만 대승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토록 소승이라고 폄하하던 테라와다 불교국가의 비구들의 삶은 어떤 것일까. 실제로 스리랑카로 유학하였고, 태국 등 테라와다 불교국가에서 공부한 마성스님의 이어지지는 글은 다음과 같다.

 

 

반면 태국불교의 경우, 많은 승려들이 교육과 복지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이를테면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태국 국민들의 교육은 승려들이 거의 다 담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탁발을 통해 신자들에게 복을 지을 수 있는 복전(福田)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자기의 고유업무가 별도로 있다. 그들은 자신의 업무에 충실함으로써 불교는 물론 국가와 이웃에 봉사하고 있다.

 

(마성스님, 불교발전이란 무엇인가, 2012-08-07)

 

 

마성스님의 글을 접하면서 놀라게 된 것은 테라와다불교국가에서 비구들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그토록 소승이라고 폄하 하던 테라와다 불교라면 깊은 숲속에 들어가 자기자신만을 위한 수행을 해야 하나, 스님의 글에 따르면 정반대이다. 테라와다불교 국가의 비구들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교육과 복지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교회목사들의 역할을 보는 것 같다.

 

탁발정신이 왜 중요한가

 

이렇게 테라와다불교국가의 비구들이 현실세계와 밀접하게 관련을 가지는 것은 탁발정신에 있다고 보여진다. 매일 탁발에 의존함으로써 지역주민들과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없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 스님들이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이유는 탁발정신의 부재로 보여진다. 깊은 산중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는 먹을 것을 쌓아 놓고 조리해 먹기 때문에 지역주민과 접촉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 본다.

 

스님들이 산중에서 하는 일은 무엇일까

 

이렇게 사람이 사는 곳을 피하여 산중에서만 생활하는 스님들이 산중에서 하는 일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다음과 같이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많은 스님들은 아직도 실체가 없는 깨달음에 함몰되어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런 스님은 불교발전은 물론 국가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경제활동에 종사하지 않고 소비만 하기 때문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그런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경제활동 인구가 줄어들기 때문에 국가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성스님, 불교발전이란 무엇인가, 2012-08-07)

 

 

이글은 한국불교와 한국불교의 승단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비판은 인터넷 토론사이트에서나 볼 수 있다.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익명으로 한국불교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스님은 자신의 법명을 걸고 바른 말을 하였다. 만일 종단의 소임을 맡고 있는 스님들이나 학계의 교수들, 그리고 언론계의 기자들이 이런 글을 썼다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겠다는 각오로 썼을 것이다. 그래서 기존 주류 제도권에서는 문제를 알면서도 비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성스님은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과감히 지적하였다. 왜 실체도 없는 깨달음에 함몰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참나, 주인공, 본마음 같은 실체, 즉 나를 찾는 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나를 찾는 수행은 번뇌만 증장시킨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은 나를 철저히 부정하였다. 그래서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나만 인정하였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한국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팔만사천리나 동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신성함에 종사하는 것 자체가 사회에 기여한다고?

 

이어서 마성스님인 다음과 같은 문구로 글을 끝맺는다.

 

 

어떤 사람은 정신활동, 종교의 신성함에 종사하는 것 자체가 사회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바라문 바라드바자가 붓다께 당신도 농사를 지어 밥을 먹으라고 했다. 그때 붓다는 나도 밭을 갈고 농사지은 후에 먹는다고 말했다. 붓다기 말한 진정한 의미의 밭갈이를 하고 밥을 먹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마성스님, 불교발전이란 무엇인가, 2012-08-07)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스님이 사람 사는 곳에 있는 것 자체만 해도 불자들에게는 큰 위안이 될 것이다. 더구나 청정비구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비록 한마디의 설법도 하지 않고 청정함만 보여주기만 해도 그 것 자체가 설법이기 때문으로 본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사람들과 접촉 하는 것이다. 비록 오염된 자들일지라라도 자비의 마음을 내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자비심이 없다면 시정잡배들을 접촉할 수 없을 것이다. 자비심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되거나 많이 약화 되었을 때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어는 법사는 탐욕의 자리에 관용이, 성냄의 자리에 자애가, 어리석음의 자리에 지혜가 자리잡게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말해서 깨달은 사람을 뜻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깨달은 사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대표되는 번뇌가 소멸된 자라 하였다. 그렇다면 깨달은자는 관용자애지혜가 넘쳐 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볼 때 자비의 마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본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사람이 사는 곳에서, 저자거리에서 오염된 자들과 함께 하는 자라면 깨달은 자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깨달은 자만이 자비심이 우러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깊은 산중에서 내려 올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깨달았다면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생겨 저자거리로 내려 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마음의 밭이 갈아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본다.

 

마음의 밭갈기

 

마성스님은 글에서 바라드바자와 부처님의 대화에서 밭갈기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숫따니빠따 까시 바라드와자경(Sn1.4)’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까씨]

“그대는 밭을 가는 자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대가 밭을 가는 것을 보지 못했네.

밭을 가는 자라면 묻건대 대답하시오.

어떻게 우리는 그대가 경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세존]

“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부끄러움이 자루이고, 정신이 끈입니다.

그리고 새김이 나의 쟁기 날과 몰이막대입니다.

 

(까시 바라드와자경-Kasībhāradvāja Sutta- The farmer Bhāradvāja, 숫따니빠따 Sn1.4, 전재성박사역)

 

  까시 바라드와자경(Sn1.4).docx

 

 

 

Ploughing

 

 

 

농부는 쟁기등을 이용하여 육체적 노동으로 밭을 갈고 있지만, 부처님은 수행을 통한 마음의 밭을 가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이어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의 밭을 갈기 위한 정신적 요소

No

정신적 요소

농사

   

1

믿음

씨앗

믿음은 확신에 가까운 말

첫째, 진리에 대한 완전하고 확고한 확신.

둘째, 확신에 대한 희열.

셋째, 목표를 성취하고자 하는 열망.

2

감관의 수호

감각 능력의 수호의 은혜를 받아 믿음과 믿음의 뿌리가 되는 계행 등의 선법이 성장하여 시들지 않는 완성을 향해서 감을 말함

3

지혜

멍에와 쟁기

-지혜는 올바른 견해( 正見)와 올바른 사유(正思惟)를 말함

-지혜란 자비로운 통찰을 의미함.

-멍에와 쟁기는 세간적 지혜와 출세간적 지혜의 두 종류를 말함.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나 올바른 사유가 되면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八正道)의 출발점으로서 세간적인 지혜에 해당.

-궁극적으로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를 증득하게 되면 궁극적인 지혜에 해당.

4

부끄러움

자루

-부끄러움이 없이 철면피하고 무례하고 대담하고 죄악에 오염된 사람의 생활은 쉬움.

-부끄러움이 있고 항상 청정을 구하고 집착없이 겸손하여 천정한 생활을 영위하는 식견있는 사람의 생활은 어려움.

5

정신

-정신은 삼매를 말함.

-끈은 세가지를 말함

1) 쟁기를 멍에에 연결하는 끈.

2) 멍에를 소에 연결하는 끈.

3) 수레를 소에 연결하는 끈.

6

새김

쟁기 날과 몰이막대

-올바른 노력은 올바른 새김의 기반이 되는 것으로 거기에 필요한 힘을 제공하며, 올바른 새김은 주의력을 위한 안정된 기반을 제공하고 올바른 집중을 가능하게 함.

-쟁기날은 통찰과 연결된 새김을 말함.

-몰이막대는 길 (magga)과 연결된 새김을 말함.

7

진실

-진실은 사성제를 말함

8

정진

황소

정진에 네 가지가 있음

1) 제어에 의한 노력 (律儀勤)

-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의 발생을 방지하는 것을 말함.

2) 버림의 노력 (斷勤)

-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극복하였더라도 과거의 업으로부터 유래된 불건전한 사유가 남아있는데 그것을 버리는 것을 말함.

3) 수행의 노력 (修勤)

- 아직 생겨나지 않은 착하고 건전한 상태를 계발하는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키고 하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진함을 말함.

4) 수호의 노력 (守護勤)

-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수호의 노력.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증가시키고 성만하게 하며 충만하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진함.

 

 

 

위 표를 보면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정신적 요소들이 나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정신적 요소들은 팔정도, 칠각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37조도품에서도 볼 수 있다.

 

37조도품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정신적 요소는 정진(viriya)’새김(sati, 알아차림)’이다. 정진은 9, 새김은 8번 등장하기 때문이다. 까시 바라드와자 경에서도 역시 정진과 새김이 강조 되고 있다. 특히 정진에 대해서는 황소로 묘사 되고 있고, 새김에 대해서는 쟁기날과 몰이 막대로 묘사된 것이 독특하다. 밭을 가는데 있어서 황소와 쟁기와 몰이 막대가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의 밭을 갈고자 한 목적은

 

이렇게 마음의 밭을 갈아 이루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부처님은 이어지는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Evamesā kasīkaṭṭhā sā hoti amatapphalā

에와메사 까시깟타 사 호띠 아마땁팔라
Eta
kasi kayītvāna sabbadukkhā pamuccatīti.

에땅 까싱 까이뜨와나 삽바둑카 빠뭇짜띠띠

 

이와 같이 밭을 갈면 불사의 열매를 거두며,

이렇게 밭을 갈고 나면 모든 고통에서 해탈합니다. 

 

Ploughing in this manner,

results in the fruits of deathlessness,

Ploughing thus you are released from all unpleasantness.

 

(까시 바라드와자경-Kasībhāradvāja Sutta- The farmer Bhāradvāja, 숫따니빠따 Sn1.4, 전재성박사역)

 

 

부처님은 마음의 밭을 가는 목적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해탈열반을 실현함이 목적이다.

 

이런 가르침을 부처님이 설하셨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고통과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말씀 하신 것이다. 이는 매우 현실적인 가르침이다. 또 누구나 당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가르침을 알려 주어야 감명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에서는 수행자들이 깊은 산속에서  를 찾는 수행으로 평생을 보내고 있다면 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성스님은 용기 있게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하여 블로그를 통하여 지적한 것이다.

 

왜 이슈에 민감한 글을 쓰는가

 

블로그에 글쓰기를 하면서 격려도 많이 받지만 비판도 많이 받는다. 비판을 받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바로 잡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오해에서 생긴 경우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런 경우가 불교관련 이외의 것을 주제로 하였을 때이다. 이를 테면 정치이야기 같은 것이다.

 

불교관련 글쓰기라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불교관련 이야기만 쓰다보면 불자들에게만 한정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는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도 대상으로 하여야 한다. 그러다 보니 때로 글쓰기의 주제가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 요즘 세간에 회자 되고 있는 정치인등 민감한 이슈에 대한 것이다. 또 청소년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에 대한 것들이다.

 

이렇게 실시간 검색어로 떠 오른 것을 키워드로 하여 글을 쓰면 조회수가 늘어 나게 되어 있다. 이번에 런던올림픽과 대통령 전용기 관련 글 역시 조회수를 늘리기 위한 방편이었다. 조회수가 늘어 나면 블로그에 머물게 되는 시간도 늘어 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단 들어 오게 되면 관심을 끄는 타이틀을 열어 보게 될 것이다. 대부분 불교관련 이야기이고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시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는 페이지 뷰를 보면 알 수 있다. 페이지 뷰가 방문자의 배이상이라는 것은 한 번 이상 다른 글도 읽어 보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 의미로 이슈에 민감한 글을 종종 쓴다.

 

이렇게 인터넷에 글을 쓴다고 해서 인터넷포교사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단지 보통불자의 입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글이 어떤 형식을 갖춘 것도 아닌 보통불자의 일상적인 글쓰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소롭게여길 것이고,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글 같지 않게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게으치 않는다. 내방식대로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이런 글쓰기는 형식과 틀에 벗어난 것이고 또 주류 제도권 불교에도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게 글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주류 제도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글쓰기의 방식은 3 B, 잡것이나 쓰는 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2012-08-09

진흙속의연꽃

 

까시 바라드와자경(Sn1.4).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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