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기독교인들의 천박(淺薄)한 불교인식

담마다사 이병욱 2012. 8. 15. 10:32

기독교인들의 천박(淺薄)한 불교인식

 

 

 

우리나라는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한다. 남과 북이 서로 이념이 다르고, 남측에서는 종교가 다름으로 인하여 때로 남남 갈등을 빗기도 한다.  

 

댓글을 하나 받았는데

 

최근 댓글을 하나 받았다. 어느 미션스쿨에서 벌어지고 있는 강제종교교육의 현실을 고발한 글을 하나 썼는데, 어느 기독교인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댓글이다.

 

 

석가모니는 신이아니잖아요??

사람을 믿는게 어떻게 종교예요?

석가모니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학문이지 어째서
종교로 인정받고있는지 나는 이해가 안가요.

 

(어느 네티즌의 댓글)

 

 

부처님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불교를 종교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입으로 말한 것은 단지 학문에 불과할 뿐인데 왜 종교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종교관은 철저하게 신본주의에 기인한다. 종교라는 것은 창조주가 있어야만 성립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종교, 인간을 숭배하는 종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유일신교와 양립할 수 없는 불교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왜 이러한 종교관을 가지게 되었을까. 아마도 인간을 불완전한 존재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인간을 숭배하는 현상에 대하여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배경에는 철저하게 몸과 마음에 대하여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아 또는 영혼이 있다고 믿는 한 그 존재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풀 수 없는 문제가 생기고, 더구나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신을 찾게 되고 신에게 모든 것을 떠 넘겨 버린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자아를 부정한다. 오로지 조건지워져 발생하는 연기적 나만 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모든 현상에 대하여 연기적 으로 본다면 존재의 근원이니 궁극적 실재이니 창조조 이니 하는 것들은 단지 명칭에 지나지 않고 실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연기법으로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 오늘날 유일신교와 유사한 브라만교를 비판하였다. 존재의 근원이라 불리우는 브라만과 영혼과 같은 개념의 아뜨만을 비판하고 성립한 것이 불교이다. 따라서 불교는 오늘날 유일신교와 대척점에 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불교는 최고의 가르침이다. 이는 종교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인류가 출현한 이래 종교는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 발전하여 왔다. 신들의 전쟁에서 가장 강력한 신이 승리하여 패권을 확립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야훼 또는 여호와로 대표 되는 유일신과 고대인도의 브라만으로 대표되는 유일신이 좋은 예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와 같은 유일신은 모두 허구라고 밝혔다. 유일신이라는 것이 불완전한 인간이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개념일 뿐 실체도 없고 실재하지도 않는다고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논파 한 것이다. 그래서 불교가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뜻의 종교(宗敎)’라는 것이다.

 

신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준 부처님

 

하지만 동서양의 종교가 병존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국민들의 불교에 대한 인식을 매우 천박(淺薄)하다. 특히 유일신교에서 보는 불교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이다. 그들은 불교라는 종교가 미신행위나 하고 우상숭배나 하는 종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1차적으로 그들의 종교지도자들이 그렇게 교육을 하는 것도 요인이 될 수 있지만, 2차적으로 우리나라 불교가 처한 문제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불교가 17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만 현실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이미지는 미신행위와 우상숭배의 범주를 크게 넘지 못한다. 입시철만 되면 갓바위등에서 비는 장면 등이 이를 잘 설명한다. 그래서 불교라는 종교는 단지 돌에다 비는 미신행위에 지나지 않고 더구나 인간형상을 만들어 놓고 비는 것에 대하여 우상숭배라고 볼 것임에 틀림 없다. 이것이 유일신교에서 보는 불교와 불교인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이는 큰 오해이다.

 

 

 

 

 

불교인들이 불상에 절한다고 하여 불상 그 자체에 절한다면 미신행위나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돌에 절하는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인들이 불상에 절하는 것은 불상 그 자체 또는 돌덩이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Dhamma)’에 절하는 것이다. 그런 가르침은 인류역사상 최고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다신교로부터 시작하여 유일신교에 이르기까지 신의 속박에 묶여 있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해방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들 베다에 능통한 많은 스승들 중에

브라흐마를 직접 만나본 사람이 있다더냐.

 

없다면 그들의 스승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더냐.

 

그도 없다면 그들의 스승의 스승,

7대()로 소급해 올라가면서

그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브라흐마를 목격한 사람이 있다더냐.

 

그 또한 아니라면 옛 성구(聖句)를 모아

베다서를 편집한 초기의 성자들 중에

 

‘우리는 안다. 우리는 본다.

언제 어떻게 어디서 브라흐마가 출현했는지를.’

 

하고 말한 사람이 있다더냐.

 

그 모두가 아니라면 그들이 선언하는 진리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이냐.

 

그들은 앞 못 보는 장님들의 행렬이나 마찬가지로

맨 앞에 선 사람도 중간에 선 사람도 맨 뒤에 선 사람도

그 누구도 아무것도 본 것이 없는 것이나 뭐가 다른가.”

(떼윗자경, 디가니까야 D13)

 

 

 

2012-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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