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그들은 비겁했다” 아쇼카선언에 대한 학자들과 스님들의 이해 할 수 없는 침묵

담마다사 이병욱 2012. 8. 17. 14:29

 

그들은 비겁했다아쇼카선언에 대한 학자들과 스님들의 이해 할 수 없는 침묵

 

 

 

또 한바탕 회오리 바람이 불까

 

또 다시 한국불교에 한바탕 회오리 바람이 불까. 그런 조짐을 최근 느꼈다. 법응스님이 기고한 글에서이다.

 

최근 불교관련 신문사이트에서 법응스님의 글이 발표 되었다. ‘總務院長스님께 드리는 盡言’이라는 글이다. 글에서 스님은 현재 한국불교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를 지적하고 총무원장스님의 용퇴를 촉구 하였다. 하루 빨리 물러나는 것 만이 어지럽혀지고 혼란에 빠진 불교를 수습하는데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한 배경에는 총무원장스님의 개인적인 의혹이 크게 작용한다. 이미 세간에 알려질 대로 알려진 총무원장스님의 은처의혹과 도박의혹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부도덕한 스님이 불교계를 대표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한 한국불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한편 법응스님은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선언문제도 거론 하였다.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이라 불리우는 이 선언이 또 다시 꿈틀 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스님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근자 제2기 화쟁위원으로 위촉 된 모 인사가 언론을 통해 재추진을 주장하니 참담하기 그지없으며, 총무원장스님에게 저의 결단과 그 결단을 피력하는 이 편지를 작성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임을 말씀드립니다.

 

(법응스님, 總務院長스님께 드리는 盡言(불기2556(2012) 8 6), 미디어붓다

 

  總務院長스님께 드리는 盡言.docx

 

 

 

스님이 글을 작성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2기 화쟁위가 출범하면서 새로 구성된 집행부가 아쇼카선언을 재추진할 것이라는 말에 자극 받았다고 하였다. 이런 말을 총무원장 스님의 용퇴를 촉구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망령(亡靈)과도 같은 아쇼카선언

 

정법을 신봉하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아쇼카선언은 망령(亡靈)과도 같은 것이다. 지난해 8.23 초안이 발표된 이래 불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로 한국불교에 대한 정체성 논란을 일으켰던 선언이 잊을 만 하면 또 다시 수면 위에 떠오르곤 하기 때문이다.

 

일부 극소수의 스님들과 학자들과 심지어 기독교 목사까지 위원이 되어 만들어진 아쇼카선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기독교에 교리에 부응하는 듯한 내용으로 되어 있어서 뜻 있는 스님들과 학자들과 불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켜 왔다.

 

이와 같은 아쇼카선언의 부당성에 대하여 블로그를 통하여 수십차례 글을 올린 바 있다. 뜻 있는 스님들이나 언론인, 네티즌 들의 활동이 있어서 일까 선언은 유보 되었다. 이는 전 조계종 종정스님인 법전스님의 선언유보지시가 결정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하극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아쇼카선언을 추진하였던 조계종 화쟁위원장 도법스님은 도를 넘는 반발을 한 였기 때문이다. 도법스님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최고 어른 스님에 대하여 능멸하는 듯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또 아쇼카선언문 작성을 주도한 고려대 조성택 교수 역시 주권방송에 출연하여 특유의 비꼬는 투의 말로 뜻있는 불자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이것이 지난해 12월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잠잠 하였다. 그러다 최근 법응스님의 피를 토하는 듯한 글을 보니 마치 망령과도 같은 아쇼카선언이 이제 슬슬 모습을 나타내려 하는 것 같다.

 

아쇼카선언은 재토론 되어야

 

이제 몇 일만 지나만 8.23 아쇼카 선언 초안이 발표된 지 만 일년이 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초안이 발표 되었으니 마무리를 지어야 될 것이다. 신문과 방송등 각종 매스컴을 불러 놓고 불교계의 동의 없이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 어느 날 전격적으로 발표한 아쇼카 선언에 대한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불교포커스에서 조신이라는 필명을 가진 어느 스님은 정법정론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기고 하였다.

 

 

종교평화선언은 다종교 사회에서의 실천윤리, 불교의 진리관과 기독교의 진리관, 다름과 차이속에서 나타나는 공존과 조화, 공동선,행복등 다양한 사안들이 중첩되어있다. 종교평화와 사회통합이라는 좋은 뜻을 가지고 종단 차원에서 추진했던 일이니 만큼 종교평화선언이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면 한다.

 

애초에 불교교리에 맞지 않는 다는 지적으로 제동이 걸린 만큼 무엇이 불교이고 불교적인 표현인지를 정리해내는 작업을 시작하여야 한다. 토론이 다시 시작된다면 한국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이 될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현재 불교를 공부한 스님과 학자들이 서로 다른 불교를 말하고 있는 것이 이 사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종교평화선언을 만들거나 용인한 도법스님, 지홍스님, 법안스님,명법스님,성태용교수,박경준교수,조성택교수등의 불교관과 선언문을 비판하고 있는 법응스님, 마성스님, 이학종기자, 블로거 진흙속의 연꽃님등의 불교관이 다르다는 것이 이 문제의 핵심이다.

 

(조신, 깨어나라 종교평화선언, 불교포커스 2012년 08월 13일)

 

 

이유야 어쨌든 21세기 아쇼카선언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초안이 전국민들을 대상으로 발표 되었기 때문에 마무리는 지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소수의 스님과 학자들 심지어 기독교목사까지 가세하여 만들어져 전격적으로 발표된 선언문의 내용에 대한 검증작업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승불교나 선불교적 교리에는 문제가 없어 보일지라도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도저히 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에 본인의 필명이 들어 있는 것에 대하여 부끄럽고 창피하게 생각한다. 스님이나 교수, 언론인 등 이 땅의 불교를 이끌고 가는 유명인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통불자로서 일개 블로거에 지나지 않는 필명을 거론 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기 때문이다.

 

대답이 없으면 긍정으로 간주 한다

 

조신이라는 필명을 가진 스님의 글에서 일개 불로그의 필명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부끄럽고 창피하게 본다. 그러나 더 부끄럽고 창피하게 생각해야 되는 사람들은 아마도 초기불교를 한다는 스님들이나 학자들 또는 불교단체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부처님의 정법을 늘 가까이 하며, 연구하고, 번역하고, 전법활동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 아쇼카선언에 따른 극심한 교리 논쟁이 벌어 졌을 때 이들 대부분은 침묵하고 있었다. 오직 글에 거론된 일부 스님과 언론인 등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왜 그들은 부처님의 정법을 연구하고, 번역하고, 가르치고 있다는데 침묵하였을까.

 

대답이 없으면 긍정으로 간주 한다는 말이 있다. 상사가 자신의 주장을 말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아무론 반론을 펼치지 않고 침묵한다면 이는 무언의 대답으로 간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침묵은 부정한다라기 보다 긍정한다라는 뜻이 강해서 대답이 없으면 긍정으로 간주한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반대로 부하가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 하였는데 상사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을 경우 어떨까. 독재자의 입맛에 맞추기 위한 모종의 거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을 때 설령 독재자가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지라도 침묵한다면 이는 무언의 답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비겁한처신

 

이처럼 침묵한다는 것은 대체로 긍정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진다. 그렇다면 작년 격렬한 아쇼카선언에 대한 적법성 논쟁이 있었을 때 극소수의 스님과 언론인, 일부 네티즌만이 반론을 펼쳤을 때, 이 땅에서 정법을 주장하고 초기불교를 한다는 의 내노라 하는 학자들과 스님들은 왜 침묵 하였을까.

 

더구나 초기불교를 전법한다고 전국을 무대로 열정적으로 강연을 하고 있는 스님은 왜 한마디고 하지 않는 것일까. 또 그 스님은 우리나라 초기불교의 최대 온오프라인 모임을 이끌고 있다고 하는데, 그 모임에서는 왜 성명하나 나오지 않는 것일까. 침묵은 긍정을 의미한다는 말과 같이 아쇼카선언문의 내용에 동조한다는 뜻일까.

 

한 마디로 매우 비겁한처신이라 보여진다. 정법이 훼손되는 것을 뻔히 지켜 보면서 침묵한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에 동조하는 것과 같다.

 

옥스퍼드 나 하바드 등 유학을 가서 초기불교를 공부하여 학위를 받아 전법활동을 하는 학자나 스님들, 태국이나 미얀마에 가서 위빠사나 수행을 배워 한국에 수행방법을 알리고 있는 법사님들, 인도유학을 가서 산스크리트어와 빠알리어를 배워 역경불사에 여념이 없는 스님들, 이렇게 수 없이 많은 유학파 스님들이나 학자들은 왜 한마디 언급도 없이 침묵하는 것일까.

 

아쇼카선언의 내용이 명백히 반불교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침묵하는 것은 혹시자리때문이 아닐까. 기득권을 놓기 싫어 침묵하는 것은 아닐까. 무언의 카르텔에 동조하는 것일까. 더구나 초기불교를 하였다는 스님들이 침묵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다.

 

대체 무엇이 아쉬운 것일까. 부모형제와 인연을 끊고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은 채 출가한 스님들이 무엇이 그리 두려운 것일까. 아쇼카선언을 추진하고 있는 위원들과의 인연 때문일까. 그런 스님들의 침묵과 이들 스님을 따르는 네티즌들의 침묵을 이해할 수 없다.

 

 

 

 

 

끝까지 이 선언의 발표를 저지할 것이다.”

 

이와 같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학자들, 스님들과 달리 정법을 지키고자 하는 스님들이나 언론인 네티즌들은 ‘결사적인’ 자세로 아쇼카 선언을 저지 하였다. 그 중에 M스님은 아쇼카선언과 관련된 기사의 댓글에서 “끝까지 이 선언의 발표를 저지할 것이다.”(‘종교평화선언 종정 추대식에서 공표키로’기사의 댓글에서)라고 밝힌 바 있다.

 

이렇게 결사적인 자세를 보인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훌륭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목숨을 건 포교

 

만일 부처님의 가르침이 모든 진리는 정상에서 만난다는 식의 그렇고 그런 것이라면 목숨을 걸 이유가 있을까. “우리들의 여래에 견줄 만한 것은 없습니다라는 라따나경(Sn2.1)에서의 가르침과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견줄만한 것이 없기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그런 예를 초기경에서도 볼 수 있다.  뿐나(Puṇṇa)비구의 목숨을 건 포교가 이를 잘 말해 준다.

 

뿐나는 10대 제자중의 하나이다. 한역으로 부르나 존자로 알려져 있다. ‘설법제일(說法第一, dhammakathakanam aggam)’의 제자라 한다. 그런 뿐나가 우안거 기간 동안 부처님의 간략한 설법을 듣고 환희 한다. 그리고 열심히 정진하게 된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너무 좋아서일까 뿐나 비구는 이를 알리지 않고는 베길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안거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 주고자 한다. 이를 부처님에게 말씀 드렸더니 부처님은 매우 우려스런 마음으로 질문한다.

 

부처님은 먼저 전법하러 가는 곳이 어떤 지방인지 물어 본다. 이에 대하여 뿐나비구는 쑤나빠란따까(sunāparantakā)’라는 지방이라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쑤나빠란따까지방은 인도 서부해안 지역으로 현대의 뭄바이 근처 탄나지방의 소파라 한다.

 

경에 따르면 쑤나빠란따까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잔인한 습성을 지닌 사람들이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지 않았으므로 이교도들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전법과정에서 그들이 욕하고 때리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식으로 부처님이 물어 본다. 마지막으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세존]

"뿐나여,

그러나 만약 쑤나빠란따까의 사람들이 그대에게 날카로운 칼로 목숨을 빼앗으면 뿐나여,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뿐나]

"세존이시여,

만약에 쑤나빠란따까의 사람들이 저에게 날카로운 칼로 목숨을 빼앗으면, 그때 저는 이와 같이 '세존의 제자는 육체적 관점이나 생명적 관점에서 오히려 괴로워하고 참괴하고 혐오하여 칼을 들길 원한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도 칼을 든다' 라고 말하겠습니다. 세상에 존경받는 분이시여, 그때는 이와 같이 말할 것입니다. 바른 길로 잘 가신 분이시여, 그때는 이와 같이 말할 것입니다."

 

(뿐나경-Puṇṇasutta- Venerable Puṇṇa, 상윳따니까야 S34.9.5, 전재성님역)

 

  뿐나경(S34.9.5).docx

 

 

 

만약 그들이 칼로 목숨을 빼았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전혀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비구의 기개를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질문과 답변 과정을 보면

 

이렇게 부처님과 제자의 질문과 답변 과정에 대한 것을 표로 만들어 보았다.

 

 

No

부처님의 질문

뿐나비구의 대답

1

그대를 비난하고 욕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를 손으로 때리지 않으니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2

손으로 때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흙덩이를 던지지 않으므로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3

흙덩이를 던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몽둥이로 때리지 않으니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4

몽둥이로 때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칼로 베지 않으니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5

칼로 벤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칼로 목숨을 빼앗지 않으니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6

칼로 목숨을 빼앗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세존의 제자는 육체적 관점이나 생명적 관점에서 오히려 괴로워하고 참괴하고 혐오하여 칼을 들길 원한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도 칼을 든다' 라고 말하겠습니다.

 

 

부처님의 질문의 긴장강도가 점차 높아져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는 잔인한 자들과 이교도의 포교에 있어서 최악의 경우 목숨마저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뿐나비구는 전혀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들이 칼을 들고 목숨을 빼앗으려 한다면 오히려 더 잘 되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그렇다면 뿐나비구는 왜 그와 같은 인식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는 초기경에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Ta kissa hetu? Anamataggoya bhikkhave, sasāro, pubbā koi na paññāyati avijjānīvaraāna sattānā tahāsayojanāna sandhāvata sasarata.

 

Eva dīgharatta bhikkhave, dukkha paccanubhūta, tibba paccanubhūta, vyasana paccanubhūta, vyasana paccanubhūta, kaasi vaḍḍhitā.

 

Yāvañcida bhikkhave, alameva sabbasakhāresu nibbinditu, ala virajjitu, ala vimuccitunti.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두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What is the reason? Monks, without an end is the train of existence, a beginning cannot be pointed out of beings enveloped in ignorance and bound

by craving, running from one existence to another.

 

“Thus, monks, you have suffered sharp unpleasantness, severe destruction a

nd filled up cemeteries.

 

“Monks, it is suitable that you should turn away from all determinations, fade and be released from them.”

 

(띠나깟타경-Tiakaṭṭha - Grass and Sticks- 풀과 나무경,상윳따니까야 S14.1.1, 전재성님역)

 

  띠나깟타경(풀과 나무경-S14.1.1).docx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형성된 모든 것들이 무상함을 안다면 염오하고 이욕하는 마음이 일어 날 것이다. 마침내 해탈하여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되는데, 그런 부처님의 제자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이교도들이 칼로 자신을 벤다고 해도 오히려 잘 되었다는 식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뿐나비구는 부처님으로부터 간단한 가르침을 받고 자제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음과 함께  이교도가 있는 자신의 고향에 가서 목숨을 건 전법을 한 결과 우기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500백명의 재가신도를 교화 시켰다고 경에서 전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은 전법하는 것을 장려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평화적인 것이다. 때리면 맞는 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칼로 베면 베일 각오로 전법에 임하는 것이다.

 

전법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다?

 

만일 부처님 법이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이처럼 목숨을 건 전법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을 보면

 

 

-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초안)

 

- 전법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 뭇 생명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것입니다.(수정안)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docx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수정본.docx

 

 

 

라고 표현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보편적인 최상의 가르침이라면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설령 그가 타종교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인 것을 안다면 누구든지 예외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단 뿐나 비구처럼 평화적인 전법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는 유일신교의 한손에 코란 또 한손에 칼을 든 종교제국주의 방식의 선교와 다른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온 세상에 퍼졌을 때 그 때의 세상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싸움과 전쟁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평화와 행복이 가득 할 것이다. 이는 유일신교와 대비 된다.

 

사실상 전법포기 선언

 

이제까지 인류역사를 보면 유일신교가 발을 들여다 놓는 곳은 어디에서나 긴장갈등의 연속이었다. 이는 우리나라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이 땅에 유일신교가 들어 온 이래 평안한 날이 없다. 길거리에서는 예천불지를 부르짓고, 축구경기에서 기도세레모니를 하는가 하면 연말 방송시상식에서는 하나님 운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공적인 장소에서 공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선교를 하는 것은 국민들과 타종교인을 ‘얕잡아’ 보기 때문이다. 즉, 모든 국민들은 선교의 대상일 뿐이며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하여 전혀 게의치 않는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그들은 ‘무례’하기 때문에 그렇다.

 

유일신교는 도무지 국민과 타종교인에 대한 예의란 찾아 볼 수 있다. 그런 무례함은 국가기관 같이 공적인 영역에서 자행 되고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폭력과도 같다. 지금 이순간에도 강제종교 교육으로 인하여 정신적 고통을 당하고 있는 미션스쿨의 학생이 있다면 선교를 가장 한 폭력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비록 유일신교도들이 개별적으로 보아 선하고 성실하고 모범적으로 보일지라도 집단화 되었을 때 대체적으로 폭력적으로 변한다. 이런 유일신교와 함께 살고 있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전법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고 한다. 만약 그런 논리를 가졌다면 조계종은 포교원을 해체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선에서 포교활동을 중단해야 할 것이다. 전법이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뭇 생명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런데 뭇 생명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 하는 것은 반드시 불교가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다. 타종교에서도 실현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쇼카 선언 발표대로 따른다면 사실상 전법을 포기 하는 것과 같다.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전법포기 선언과 함께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열린진리관이다. 선언문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 불교는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초안)

 

-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오직 불교를 통해서만 평화와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수정안)

 

이는 불교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라는 것이다. 마치 산에 올라 갈 때 길은 여러 갈래이지만 오르다 보면 정상에서 만나듯이 하나의 진리만 있다는 논리이다. 그럴경우 불교나 타종교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같은 것이 된다. 그래서 선언문에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를 삽입한 것이다. 또 수정문을 보면 오직 불교를 통해서만 평화와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겠습니다라 하였다.

 

 

이와 같은 문구를 곧이 곧대로 믿는다면 불자들은 지금 이 순간부터 불교를 믿을 필요가 없다. 진리는 모든 같은 것이라는 뜻인데 굳이 먼 산길을 힘겹게 걸어 올라가 절을 찾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대신 바로 집 옆에 있는 교회에 가면 될 것이다.

 

그들의 침묵이 비겁하다

 

이와 같은 아쇼카선언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고 동시에 전법을 포기하는 선언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명백히 반불교적 선언문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불자들은 이런 선언이 발표된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이런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들 조차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초기불교를 연구한다는 학자들이나 스님들, 초기불교 경전을 역경하는 하는 학자들이나 스님들, 초기불교를 전법하는 법사들, 그리고 이를 알고 있는 온오프라인의 불자들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왜 그들은 침묵할까. 암묵적으로 동의 하는 것일까. 그들의 침묵이 비겁하다.

 

 

 

2012-08-1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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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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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나경(S34.9.5).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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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務院長스님께 드리는 盡言.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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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수정본.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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