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이 고뇌의 강을 건너서 ‘진흙속의연꽃’으로

담마다사 이병욱 2012. 9. 14. 12:14

 

이 고뇌의 강을 건너서 ‘진흙속의연꽃’으로

 

 

 

블로그이름 변경 제안을 받고

 

지난 번 블로그 개설 7주년을 맞아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 때 댓글을 받은 것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이 블로그의 상호는 이 고뇌의 강을 건너이지만 사실 누구나 진흙속의연꽃 블로그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상호를 진흙속의연꽃으로 바꾸면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전해 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게 훨씬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7년동안의 훌륭한 결실을 축하드리고 8주년에는 더 큰 공덕을 지으실 것이라 더욱 기대합니다_()_

 

(D법우님)

 

 

 

 

 

평소 많은 조언과 아낌 없는 지원을 해 주고 있는 D법우님이 블로그 이름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 한 것이다. 블로그 이름을 현재의 이 고뇌의 강을 건너에서 진흙속의연꽃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다. 이 제안을 받고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답글을 한 바 있다.

 

블로그 대승의 바다

 

블로그를 만든 것은 2005년도 8 2일이다. 그 때 당시 블로그 만들기가 유행이어서 한 번 만들어 본 것이다. 그 이전에 시험용으로 한 번 만들었다가 두 달만에 부수고 다시 만든 것이다. 그 때 당시 블로그 이름은 대승의 바다이었다. 오래 전부터 블로그를 보아 온 법우님들이라면 기억 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은 필명 진흙속의연꽃이다.

 

대승의 바다이니 진흙속의 연꽃이니 하는 말은 명상음악 제목에서 가져 온 것이다. 그 때 당시 불교명상음악이 인터넷에 소개 되어 있었는데, ‘대승의 바다’, ‘진흙속의 연꽃’, ‘태양의 후예등 참으로 듣기만 하여도 신심이 절로 나는 제목이 많았다. 그래서 그 제목중의 일부를 가져와 블로그 이름과 필명으로 삼은 것이다.

 

블로그 이름을 바꾼 이유

 

이렇게 ‘대승의 바다’라는 블로그 이름으로 활동을 하던 중에 초기불교를 접하였다. 특히 마하시사야도의 ‘빠띳짜사뭅빠다(Paticca-samuppada, 12연기)’ 법문집을 접하고 초기불교 가르침의 진수를 경험하였다. 20091년간 한국위빠사나선원(현 한국명상원)에서 묘원법사로부터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에 대한 강의를 들은 것이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12연기법문-마하시사야도.hwp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은 철저하게 니까야와 주석서에 근거 한 것이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수시로 청정도론아비담마 길라잡이를 열어 보았다. 그리고 글을 공부한 내용을 글로서 정리하여 블로그에 올렸다. 그러다 보니 온통 초기불교 가르침에 대한 것만 올려지게 되어 블로그의 이름인 대승의 바다와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블로그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이 고뇌의 강을 건너이름의 유래

 

바뀐 블로그 타이틀은 ‘이 고뇌의 강을 건너’이다. 2009년에 바뀌었으니 지금까지 햇수로 4년 째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변경에 대하여 아쉬워 하는 분도 있었다. 남겨 주신 글에 따르면 대승의 바다라는 타이틀이 더 좋았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블로그 타이틀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고뇌의 강을 건너라는 약간은 염세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타이틀로 바뀌었는데, 이는 법구경의 한 구절에서 따 온 것이다.

 

석지현스님의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깨달은 이,

그리고 그 가르침대로 살려는 사람들을,

저 마라(악마)의 군단을 격파해 버린 이들을,

그리고 이 고뇌의 강을 이미 건너가 버린 이들을,

우리는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석지현스님 번역, Dhp195)

 

 

법구경 195번 게송에 대한 것이다. 이 게송에서 ‘이 고뇌의 강을 이미 건너’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을 보고 블로그 이름을 정한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와 같은 석지현스님의 번역스타일을 시적 번역이라 한다. 주석 없이 시적인 언어로 번역한 것이 특징이라 한다. 그러다 보니 빠알리 원문과 차이가 나는 것이다.

 

번역어를 비교해 보면

 

이 게송에 대한 전재성박사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공양할 가치 있는 님들,

희론을 여의고

슬픔과 비탄을 건넌

깨달은 님들이나 그 제자들을 공양하는 자가 있으니.

 

(전재성박사 번역, Dhp195)

 

 

차이를 보면 ‘이 고뇌의 강을 이미 건너가 버린 이들(석지현)’과 ‘슬픔과 비탄을 건넌 깨달은 님들(전재성)’이다. 압축하면 ‘고뇌의 강’과 ‘슬픔과 비탄’이다. 이 부분에 대한 빠알리어는 어떤 것일까. 우선 빠알리어 게송과 함께 여러 번역어를 비교 하면 다음과 같다.

 

 

법구경 195번 게송

빠알리 원문

석지현스님

전재성박사

거해스님

Pūjārahe pūjayato,

~ Buddhe yadi va sāvake,

Papañcasamatikkante,

~ tiṇṇasokapariddave.

 

(뿌자라헤 뿌자야또

붓데 야디 와사와께,

빠빤짜사마띡깐떼,

띤나소까빠릿다웨)

깨달은 이,

그리고 그 가르침대로 살려는 사람들을,

저 마라(악마)의 군단을 격파해 버린 이들을,

그리고 이 고뇌의 강을 이미 건너가 버린 이들을,

우리는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양할 가치 있는 님들,

희론을 여의고

슬픔과 비탄을 건넌

깨달은 님들이나 그 제자들을 공양하는 자가 있으니.

 

존경할 만한 대상을 찾아 예배하라.

그들은 바로 붓다이거나 붓다의 성 제자들,

갈망과 욕망을 제거하고 장애를 다스린 이들,

모든 슬픔과 비탄의 바다를 건넌 이들이다.

 

 

 

 

법구의석의 인연담을 보면

 

위 법구경 195번 게송은 단독게송이라기 보다 이어지는 196번 게송과 연관되어 있다. 196번  게송은 다음과 같다.

 

 

 

열반에 드신 님들, 두려움을 여윈 님들

그러한 님들을 공양하는 자의

공덕을 두고 누군가가 ‘이만하다’라고

조금이라도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Dhp196, 전재성님역)

 

 

이렇게 195번 게송은 196번 게송과 함께 보아야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는 인연담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195번과 196번 게송에 대한 법구의석의 인연담은 다음과 같다.

 

 

Dhp A. III. 250-251에 따르면, 부처님 께서 싸밧티 시에서 바라나씨 시로 유행하실 때, 과거불인 깟싸빠 부처님의 황금탑묘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한때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를 출발해서 점차로 바라나씨로 유행하다가 도중에 많은 수행승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또데이야(Tpdeyya) 마을의 한 신사에 도착했다. 거기서 부처님께서는 가르침의 창고지기인 아난다를 보내서 머지 않은 곳에 밭을 갈던 바라문을 불렀다.

 

그 바라문은 와서 여래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신사에 참배했다. 부처님께서는 그 에게 ‘바라문이여, 이곳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존자 고따마여, 저는 오랜 전통을 가진 탑묘에 참배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라문이여, 여기에 참배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라고 칭찬했다.

 

그들의 의심을 없애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수행승들에게 <<맛지마니까야>>의 가띠까라의 경(Ghatikarasuttanta: MN. III. 25-253)을 설했다. 그리고 나서 신통의 힘으로 과거불인 깟싸빠 부처님의 탑묘를 한 요자나 높이의 황금산처럼 공중에 만들어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바라문이여, 이러한 공양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 공양하는 것이 더욱 훌륭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대반열반경(Mahaparinibbanasuttanta)에서 설해진 바대로,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을 비롯한 네 분, 즉 부처님, 연각불, 거룩한 제자들, 전륜왕의 탑묘의 가치가 있음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세 가지 종류의 탑묘 즉, 신체의 탑묘(sariracetiya), 기념의 탑묘(uddissacetiya), 유품의 탑묘(paribhogacetiya)가 있음을 설했다.

 

그리고 이어서 시로써

 

 

‘공양할 가치 있는 님들,

희론을 여의고

슬픔과 비탄을 건넌

깨달은 님들이나 그 제자들을 공양하는 자가 있으니,

 

열반에 드신 님들, 두려움을 여윈 님들

그러한 님들을 공양하는 자의

공덕을 두고 누군가가 ‘이만하다’라고

조금이라도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바라문은 흐름에 든 님이 되었다.

 

(법구의석, Dhp196-196, 전재성님역)

 

 

법구의석의 인연담을 보면 195번과 196번 게송을 한 꺼번에 묶었기 때문에 두 개의 게송이 같은 맥락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게송과 인연담을 보면 공양대상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인습과 관습이라는 전통 에 묶여서 공양하는 것 보다 공양할 가치가 있는 자에게 공양하는 것이 가장 수승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왜 미소를 지었을까

 

이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을 말한다. 그래서 법구의석에 따르면 부처님은 두 가지 경전의 근거를 들어 설명하였다. 하나는 가띠까라의 경이고 또 하나는 마하빠리닙바나경(대반열반경)이다,

 

이 중 ‘가띠까라의 경’은 어떤 내용일까. 맛지마니까야를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볼 수 있다.

 

 

4.

“아난다여,

예전에 이 장소에 번영하고 융성하고 사람이 많고 사람이 붐비는 베바링가라는 이름의 상업도시가 있었다. 아난다여, 베바링가라는 이름의 상업도시의 근처에는 거룩한 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분인 깟싸빠 세존께서 살고 계셨다.

 

아난다여,

이 장소에 거룩한 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분인 깟싸빠 세존의 승원이 있었다. 아난다여,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분인 깟싸빠 세존은 이 장소에 앉아서 수행승의 무리에게 가르침을 설했다.”

 

(가띠까라경-Ghaīkārasutta- The Potter Ghatikara, 맛지마니까야 M81, 전재성님역)

 

  가띠까라경(M81).docx

 

 

 

가띠따라경에 따라면 어느 날 부처님이 꼬살라국에서 수행승들과 함께 유행하다가 어떤 장소에서 ‘미소를 지었다’고 하였다. 이런 미소를 본 아난다 존자는 “어떠한 원인, 어떠한 조건 때문에 세존께서는 미소를 보이셨을까? 여래는 이유 없이 미소를 보이시지 않는다.”라고 경에 표현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은 의미 없이 미소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가 물어 보자 부처님이 답하신 것이 위 내용이다.

 

이 경은 부처님의 과거 전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처님이 미소를 지은 것은 과거 깟사빠 부처님 당시 그 장소 그 자리에 대한 기억이 떠 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난다에게 전생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 준다.

 

깟사빠 부처님당시  시자이었던 가띠까라라는 도공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의 친구 조띠빨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조띠빨라가 깟싸빠 부처님 당시 바로 자신이었다고 말하였다. 

 

부처님은 인습과 관습 그리고 전통을 부정하지 않았다

 

법구의석에 따르면 존자 고따마여, 저는 오랜 전통을 가진 탑묘에 참배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여기에 참배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라고 칭찬해 주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렇게 칭찬해주는 것에 대한 이유가 바로 가띠따라경에 근거 한다. 바라문 농부는 이유를 모르고 인습과 관습과 전통에 따라 탑묘에 참배하고 공양하고 있지만 부처님의 지혜의 눈으로 보았을 때 과거 깟싸빠 부처님 당시 공양받을 만한 선행이 있었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인습과 관습 그리고 전통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수승한 공양은 깨달은 자에 대한 공양이라고 강조하는 것이 법구경 게송이다.

 

원문과 차이 나는 번역을 보면

 

게송 중에 희론을 여의고 (Papañcasamatikkante, 빠빤짜사마띡깐떼) 슬픔과 비탄을 건넌 깨달은 님들 (tiṇṇasokapariddave, 띤나소까빠릿다웨)”이라 는 구절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석지현 스님은 저 마라(악마)의 군단을 격파해 버린 이들을, 그리고 이 고뇌의 강을 이미 건너가 버린 이들이라고 매우 시적으로 번역하였다.

 

거해스님의 경우 갈망과 욕망을 제거하고 장애를 다스린 이들, 모든 슬픔과 비탄의 바다를 건넌 이들이라고 번역하였다.

 

하지만 이런 번역은 원문과 크게 차이가 난다. 원문에서 빠빤짜사마띡깐떼(Papañcasamatikkante)을 보면 빠빤짜(Papañca)라는 말이 나온다. 빠빤짜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희론(戱論)이라 번역된다. ‘잡념이나 망상등으로도 번역된다고 한다. 이와 같은 빠빤짜는 주석에 따르면 갈애-견해-자만의 희론이 있다고 한다.

 

빠빤짜(Papañca, 戱論)란 무엇인가?

 

이들 희론은 모두 느낌-지각-사유에서 생겨 나는데, 이론 희론이 생겨나는 원인에 대한 것이 마두삔디까경(M18)’에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7.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해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

 

(마두삔디까경-Madhupiṇḑikasutta- 꿀과자의 경, 맛지마니까야 M18, 전재성님역)

 

  마두삔디까경(꿀과자의 경-M18).docx

 

 

 

희론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하여 삼사화합에 따른 느낌-지각-사유에 따른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에 대하여 빠빤짜산냐상카라(papañcasaññāsakhā)’라 하는데, 이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papañcasaññāsakhā :

사유( : vitakka)는 사고의 도입단계에 적용되는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이며, 경전상에서 보다 섬세한 반성적 사유인 숙고( : vicāra)와 늘 함께 쓰인다. 그런데 사유와 숙고는 정신적 영역에서 어떤 질서와 관계되지만 희론(戲論 : papañca)은 카오스적인 혼돈을 암시해서 한역경전에서는 망상(妄想)이라고도 번역된다. 희론을 의미하는 빠빤짜(papañca)라는 말은 원래 ‘확장(擴張), 발산(發散), 다양화(多樣化)’의 의미를 가지며,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이율배반적인(二律背反的)인 사유의 개념적 확장(槪念的 擴張)이다.

 

(마두삔디까경 주석)

 

 

빠빤짜는 개념이 확장된 것이라 한다. 이런 개념적 확장이 일어나는 원인은 접촉을 조건으로 해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한 것을 말한다.

 

이렇게 느낌-지각-사유의 단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느낌의 단계에서 갈애로 넘어가는 12연기와 다르다. 느낌의 단계에서 곧바로 지각-사유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희론인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 195번 게송에서 빠빤짜사마띡깐떼(Papañcasamatikkante)’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희론을 여의고라고 번역하였으나 석지현스님은 저 마라(악마)의 군단을 격파해 버린 이들이라 하였고, 거해스님은 갈망과 욕망을 제거하고 장애를 다스린 이들이들이라고 시적 또는 주석적 번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소까(asoka)’라는 뜻은

 

이어지는 다음 구절인 ‘띤나소까빠릿다웨 (tiṇṇasokapariddave)’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슬픔과 비탄을 건넌 깨달은 님들”이라 번역 하였는데, 특히 ‘슬픔과 비탄을 건넌’이라는 뜻은 ‘아소까(asoka)’때문일 것이다.

 

아소까대왕무우왕(無憂王)’이라고 한역하는데, 이는 근심 없는 왕이라는 뜻이다. 빠알리어 아소까(asoka)근심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띤나소까빠릿다웨 (tiṇṇasokapariddave)’는 근심 또는 슬픔이 없다라는 뜻이 들어간 번역어이어야 한다.

 

하지만 석지현스님은 이 고뇌의 강을 이미 건너가 버린 이들이라고 의역하였다. 거해스님의 경우 모든 슬픔과 비탄의 바다를 건넌 이들이라고 하여 비교적 원문의 의미를 잘 살린 것으로 본다.

 

이 고뇌의 강을 건너서진흙속의연꽃으로

 

이와 같이 석지현 스님의 번역어 이 고뇌의 강을 이미 건너가 버린 이들를 근거로 하여 블로그 타이틀이 대승의 바다에서 이 고뇌의 강을 건너로 변경 되었다. 그런데 너무 염세적 이미지를 풍길 수 있어서 부제로서 닙바나 저 이지의 나라에 가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D 법우님의 제안에 따라 블로그 타이틀과 필명을 같게 하려 한다. 그래서 블로그 이름을 진흙속의연꽃으로 할 작정이다.

 

 

 

2012-09-14

진흙속의연꽃

 

마두삔디까경(꿀과자의 경-M18).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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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띠까라경(M81).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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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연기법문-마하시사야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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