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다” 넷상에서 글쓰기를 하다보니
무명이 대죄라는 말이 있다. 모르기 때문에 큰죄를 짓는다는 뜻이다. 그런 경험을 하였다. 마성스님의 글에 대한 반론에서이다.
학술 논문에서는
마성스님의 글 ‘번역의 중요성과 어려움’에 대하여 ‘빠알리원전과 주석적 번역’이라는 제목으로 반론을 하였다. 결과는 무명이 대죄라는 말을 뼈저리게 느꼈다.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다섯째, 위에서 지적한 존칭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하면, 학술 논문에서는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직책이나 직위를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제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종교적인 교주나 성자의 이름까지도 존칭을 붙여서는 안 됩니다. 종교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교주이신 스승을 '부처님'이라고 부르지만, 논문에서는 '붓다' 혹은 '석존'으로만 표기해야 합니다. 다른 종교의 '예수님', '공자님', '마호메트님' 등으로 존칭되지 않습니다. 오직 붓다, 예수, 공자, 소크라테 등으로만 표기합니다.
(마성스님의 댓글)
스님의 글에 따르면 학문적인 글과 비학문적인 글의 글쓰기 원칙이 다른 것이라 한다. 논문과 비논문의 차이를 말한다. 그래서 논문의 경우 여러가지 규칙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것이라 한다. 그런 규칙 중의 하나가 ‘존칭’에 대한 것이라 한다.
살아 있는 종교인일 경우
논문에서는 존칭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부처님일지라도 ‘붓다’로 표기 하는 것이 원칙이고, 과거 유명 고승이었다고 할지라도 이름만 표기 한다는 것이다. 원효스님의 경우 그냥 ‘원효’라고 하고, 붓다고사 장로는 ‘붓다고사’라고만 표시 하는 것은 커다란 실례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일 경우라 한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곱째, 다만 현재 종교에 몸담고 있는 살아 있는 종교인일 경우, 세속 사람과 다른 신분의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이름 앞에 표시를 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스님일 경우 이름 앞에 Venerable의 약자인 'Ven.'을 표기하고, 목사나 신부일 경우, Reverend의 약자인 'Rev.'를 표기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남방 상좌부의 스님들은 이러한 규정에 대해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리랑카의 스님들은 자신의 이름 뒤에 승려 신분인 비구라는 뜻의 Thera(장로)를 삽입하여 고유 명사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태국의 스님들은 스님이라는 'Phra'를 삽입하여 자신의 고유 이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를테면 미국 출신의 보디(Bodhi) 스님은 자신의 고유 이름을 'Bhikkhu Bodhi’로 지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미국 출신 스님은 자신의 이름을 'Thanissaro Bhikkhu'로 지었습니다. 이때의 비구는 이름 뒤에 붙이는 존칭인 '스님'이 아닙니다. 이들은 논문에서도 자신이 스님임을 인정해 달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논문에서는 그러한 신분 조차 삭제해 버립니다.
(마성스님의 댓글)
살아 있는 사람중에 종교인이라면 이를 표시하는 명칭을 붙여 준다고 한다. 불교의 경우 Venerable의 약자인 ‘Ven.’을 표기 한다고 한다. Venerable의 뜻은 ‘존경할 만한’이라는 뜻이다. 만일 ‘타닛사로(Thanissaro)’ 비구에 대하여 언급한다면 Ven.Thanissaro라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스님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언급해야 할까.
마하테라(Maha Thera)와 시(Shì ,釋) 그리고 큰스님
영어 단어 ‘Venerable’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The Venerable’이라는 말은 여러 기독교 전통에 있어서 하나의 호칭 또는 별칭이라 한다. 또 이는 불교도의 직함을 표시하는 일반적인 영문번역어라 한다. 불교도에게도 지칭되는 영어 ‘The Venerable’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In Buddhism, the Western style of Venerable (also abbreviated as Ven.) is entitled to ordained Buddhist monks and nuns and also to novices (shramaneras). The title of Master may be followed for senior members of the Sangha. Venerable, along with ""Reverend"" (Rev.) is used as a western alternative to Maha Thera in the Theravada branch and Shì (釋, as in "Sakya") in Chinese Mahayana branch.
불교에서 Venerable(축약하여 Ven.)이라는 서양식 호칭은 불교의 승려와 수행녀 그리고 행자에게 적용된다. Master라는 호칭은 상가의 나이 든 세대에게 불리워지고 있다. “Reverend” (Rev.) 와 함께 Venerable이라는 호칭은 테라와다 불교에서의 마하테라(Maha Thera)와 대승불교전통의 중국불교에서 시(Shì , 사꺄로서의 釋 ) 에 대한 서양식 대안이다.
(Venerable, 위키피디아)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테라와다 전통에서는 존경하는 스님에 대하여 ‘마하테라(Maha Thera)’라고 하고, 중국불교 전통에서는 ‘시(Shì)’를 붙여 준다고 한다. ‘시’는 부처님을 뜻하는 샤카의 ‘석(釋)’자의 의미라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존경하는 스님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럴 경우‘큰스님’이라는 말이 떠 올려 지지 않을 수 없다. 스님중에서도 나이가 많고 도력이 높거나 유명한 스님에 대하여 ‘큰스님’이라는 호칭을 붙여 주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 불교전통마다 존경받는 스님에 대한 호칭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영문으로 된 논문에서는 스님을 지칭할 때 Venerable(Ven.)이라는 호칭을 써야 된다는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는 아예 ‘테라’나 ‘빅쿠’라는 말이 들어간 이름을 쓰기도 한다고 한다.
제행은 무상한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나라 논문에서는 어떻게 호칭해야 할까. 마성스님의 글에 따르면 살아 있는 스님에 대하여 법명뒤에 ‘스님’자를 붙여 주는 것이 원칙이라 한다. 그 외 스님이 아닌 경우 모두 이름만 명기하는 것이 원칙이라 한다. 직책등을 표기할 경우 세월이 지났을 경우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경우 하나의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스님들에 한하여 스님이라는 명칭을 붙여 준다고 하였으나 제행은 무상한 것이라 스님들 역시 무상함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환속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의문을 든다면 박사에 대한 호칭이다. 논문에서 아무개교수라 하였을 때 그가 10년 후에 교수일지 아닐지 알 수 없다. 제행무상의 법칙에 따라 언젠가는 교수자리를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취득한 박사타이틀은 그렇지 않다. 한번 취득한 박사타이틀은 죽을 때 까지 유지 되기 때문이다.
매우 드믄 경우이지만 논문 조작등으로 인하여 박사타이틀이 박탈당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비구가 환속하는 경우 보다 더 드믄 일이라 보여 진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에 대하여 이름뒤에 ‘아무개박사’라고 호칭 해 주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일반적으로 박사라고 하면 그 분야에서 전문가이고 또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성스님의 글에 따르면 논문에서는 스님 외에 그 어떤 누구도 직함이나 타이틀이 붙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살아 있는 스님에 대해서는 스님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주는 것이 원칙이라 한다.
그렇다면 입적한 스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불러야 할까. 예를 들어 성철스님에 대하여 논문을 썼을 때 성철 스님이 입적하였으므로 논문작성 원칙에 따른다면 ‘성철’이라고 법명만 표시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성철스님과 살아 있는 스님을 비교한 논문이 발표된다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성철스님은 입적하였으므로 ‘성철’이라고 하고, 현재 살아 있는 스님에 대해서는 ‘OO스님’이라고 표기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모순이다. 이와 같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스님이나 입적하신 스님 모두에게 ‘스님’자를 붙여 주든가 아니면 모두 삭제해야 한다. 이와 같은 논리를 적용한다면 스님이나 비스님에 대한 것 역시 양자택일이 되어야 한다. 모두 직함이나 타이틀을 붙여 주든지 아니면 모두 생략하는 것이다.
개가 웃을 일을 저지르고
모두에 무명이 대죄라 하였다. 이는 모르고 짓는 죄가 알고 짓는 죄 보다 크다는 말이다. 공학도 출신으로서 한번도 인문학 관련 학술논문이라는 것을 써 본적이 없기 때문에 국제규칙을 알리 없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개가 웃을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알게 해준 스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런 스님은 넷상에서 몇 분 되지 않는 의지처이다.
넷상에서 글쓰기를 하다보니
넷상에서 글쓰기를 한지 수년 되었다. 글이라는 것을 써 본적도 없는 엔지니어 출신이 글을 썼을 때 오늘날과 같은 반응을 보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상황을 가정하여 글쓰기를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매일 글을 쓰다 보니 보아 주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러다 보니 넷상에서 좀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내세울것이 없는 보통불자일 뿐이다. 만나보면 100%실망하게 될 그런 스타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방문한다. 그러나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하는 경우는 극소수이다. 아마도 1-3%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글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다”
적극적인 의사표현을 해 는 부류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한 부류는 긍정적인 것이고 또 한부류는 부정적이다. 긍정적 부류는 대체로 격려글이 많고 부정적 부류는 비판내지 비난 또는 비아냥 글이 많다. 모두 관심있기 때문에 의사 표현 한 것이라 본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해 주시는 분들에게 답글을 주어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글쓰기에 몰두 하다 보면 하루 일과 중의 반이 지나가고 나머지 반 동안 생계를 위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문의 글을 주시는 법우님들을 보면 모두 훌륭한 분들 같다. 글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익명으로 통하는 사이버세상에서 상대방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글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넷상에서 글쓰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다.
“글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다”
의사표현에 감사를
이렇게 수 많은 사람들이 매일 지켜 보고 있고 그 중 극소수는 적극적인 의사표현을 해 주고 있다. 대부분 보통불자들이다. 같은 처지의 평범한 불자들이다.
그러나 방문하시는 분들 중에는 세상에 잘 알려져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스님이나 학자, 언론인, 문학인 등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유명인들이 의사표현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일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낮추어 보는 것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표시를 해주시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중의 하나가 마성스님이다. 이는 관심의 표시라 보여진다. 관심이 있기 때문에 지켜 보는 것이고, 관심이 있기 때문에 댓글을 주시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애정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 관심이 없다면 일언반구도 없을 것이다.
마성스님으로부터 장문의 댓글을 받으면서 올린 글에 대하여 부끄럽고 창피함도 느꼈지만 또 한편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보통불자의 글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여 주고 잘못을 바로 잡아 주는 것이 고마운 것이다. 더욱 더 잘 하라는 뜻으로 받아 들인다.
지금 이대로
그런데 스님은 “이제 아마추어씩 글쓰기에서 벗어나 전문적인 아카데미컬한 글쓰기로 전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글쓰기에 대한 방법을 바꾸어 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럴 생각을 갖지 못한다. 학술적인 글을 쓸만한 처지가 못 되기 때문이다. 논문을 발표할 만한 입장이 못된다는 것이다. 또 오로지 학문에 매진할 만한 환경도 되어 있지 않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 그래서 한국불교에 대하여 항상 비제도권과 비주류 입장에 서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 널리 퍼지는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글이 ‘아마추어식 글쓰기’ 또는 ‘삼류 B급 잡것’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그만이다. 오늘도 내일도 그저 쓸 뿐이다.
2012-09-0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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