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한국불교개혁은 가사입기 생활화부터

담마다사 이병욱 2012. 8. 24. 12:14

 

한국불교개혁은 가사입기 생활화부터

 

 

스님들 이야기

 

불자들을 포함하여 국민들은 스님들의 생활에 대하여 궁금해 한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아가는 스님들의 수행과 일상에 대한 호기심이다. 그래서 스님 이야기에 대한 칼럼이나 책에 대하여 매우 관심을 갖는다.

 

칼럼이나 책에서 본 스님들의 이야기는 매우 긍정적이다. 보통사람들과 다른 생활을 하는 스님들만의 이야기를 볼 때 불자들과 국민들의 스님상은 이슬만  먹고 살고, 화장실도 가지 않는 존재로 각인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스님도박사건을 접하면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이 사건은 불자들 뿐만 아니라 이제 모든 국민들이 알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스님에 대한 인식이 낮아 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더구나 도박사건에 대한 해명 과정에서 화투나 카드를 치는 것이 스님들의 소일거리 중의 하나라는 발언은 충격을 주었다. 열심히 수행정진에 몰두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스님상을 여지 없이 무너뜨려 버린 것이다.

 

이렇게 신문과 방송 등 미디어를 통하여 모든 것이 낱낱이 알려진 요즘 출가자들의 일탈행위는 끝이 없는 것 같다. 최근 불교관련 인터넷신문 사이트를 통하여 접하게 백양사에서 벌어진 종정스님 유시 조작사건도 그 중 하나이다.

 

도박사건의 진원지에서 다시 유시조작사건 까지 벌어진 백양사를 보면 점입가경이다. 사찰이 이해집단의 이전투구장으로 변모 하였기 때문이다.

 

스킨스쿠버 하는 스님

 

이런 와중에 스킨스쿠버를 한 어느 원로스님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공개석상에서 정신수양을 위해 필리핀에서 자주 스킨스쿠버를 했다고 발언 하였기 때문이다.

 

스님과 스킨스쿠버,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수행정진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는 스님이 스킨수쿠버를 한다니 어리둥절할 뿐이다. 그것도 필리핀으로 해외원정 하였다니 도무지 불자들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

 

 만일 이 사실이 신문과 방송을 탄 다면 어떻게 될까. 주지선거 돈봉투사건, 도박사건 등에 있어서 또 하나의 웃음거리가 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런 원로 스님은 또 한편으로 원로회의 위상 강화를 위하여 애쓰고 있다. 호계원장과 법규위원장, 교육원장은 원로회의의 인준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종헌을 개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경우 조계종의 종권은 이원화 체제가 될 것이다. 그로 인한 혼란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다. 이는 과거 70년대 종권다툼이 이를 증명한다.

 

종정과 총무원장의 종권다툼

 

그때 당시 어떤 일이 있었을까. 불교신문에 따르면 1975년에 커다란 사건이 있었다고 전한다. 법적권한은 종정에 있고, 실질운영 책임은 총무원장으로 이원화 되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문공부가 1975년 4월 각 종교단체에 대해 그 단체의 의사를 대외에 표시할 때는 반드시 대표자 명의로 해야 한다는 공문을 발송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조계종 총무원은 문공부에 조계종만은 총무원장 이름으로 공문을 수발하는 것을 양해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규정상 예외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총무원장으로 종정의 대표권을 대행하던 조계종의 관례는 정부로부터 부정당한 것이다.

 

(통합종단에서 개혁종단까지, 1970년대 종단분규 - 강력한 종정 중심제와 후유증, 불교신문 2011.05.25  )

 

 

1975년 당시 조계종의 법적권한은 종정에 있고, 실질운영 책임은 총무원장으로 이원화 되어 있었는데, 공문 수발에 있어서 종정스님 이름으로 하겠다는 문공부의 발표가 문제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 때 당시 종정스님은 종정중심제로 종헌을 개정한다. 이렇게되자 종정과 총무원장이 종권을 놓고 극한 갈등이 수년간 계속 되었다.

 

이와 같은 과거의 불미스런 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의원 스님은 원로회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종헌 개정을 시도 하고 있는 것이다.

 

서광스님의 글에서

 

이런 시도에 대하여 어느 비판 칼럼에 눈에 확 띄는 댓글이 보였다. 그것은 서광스님의 글이다. 자신의 법명을 걸고 댓글을 올리는 스님인데 스님의 글은 다음과 같다.

 

 

원로스님들이 타락종단의 구원투수가 된 까닭

10여년 전부터 조계종단을 걱정하는 큰스님들이 늘기 시작했다. 원로스님급 아래단계의 개혁적인 스님들과 원로스님들 일부는 타락해 가는 종단승려들의 행태를 보고만 있는 처지가 괴로웠다. 이들은 계속 교류하면서 다시 종단을 정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이기간 동안 쏟아지는 범계행위는 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내용이 많다.

조계종단의 최근 10년을 복기해 보시라.
총무원장과 종회의원 스님들 선거에 돈을 얼마나 뿌려대는지를, 각종 본사 주지들 선거 역시 총무원장 선거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총무원장이 되기 위해, 종회의원이 되기 위해, 본사주지가 되기 위해
승려들끼리 상대후보를 모함하고(도박몰카는 아무것도 아니다) 상대후보를 함정에 빠트리고
각종 민,형사상 고소고발을 남발하고
시줏돈 가지고 도박,성매수등 유흥에 빠지질 않나
은처와 처자식 소문이 종단에 파다하질 않나, 수억원씩 횡령하지를 않나.....

이 글을 보고 있는 불자들 대부분이 잘 알고 있는 범계행위들이다.
종단 불자들이 스님들의 이런 행태에 질려서 사찰에 나오지 않고 심지어 개종까지 하고 있다.
당신이 수십년 수행한 원로나 원로이하 비교적 양심있는 승려라면 무슨 생각을 먼저 할까.
그건 당연하게도 불교개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심각한 문제로 멸빈됐던 승려들이 복권되어 버젓이 종단승려로 살고 있다.
횡령으로 멸빈됐던 승려가 다시 복권되었으니 또 횡령할 것 아닌가.
이번엔 허술하게 횡령하지 않고 좀 더 완벽하게 할터...왜 이런 자들까지 복권시켰는지
총무원,종회의원, 호계원,,,,어디 입있는 자들 말해 보시라.

하지만 이전의 종단 개혁처럼(조계사 사태) 했다간 세간의 질타는 물론
불자들한테도 지지받지 못할 것은 불문가지.
여법하게 차근차근 공감을 얻어가면서 개혁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다.

자승원장 들어서선 어땠나.
종교편향,훼불,불교방송미디어렙,불교지명삭제,범어사법주사 돈봉투,은해사결혼주지,백양사......자성과 쇄신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종단에서 끊임없이 범계행위가 터지고 있다.
여기에다가 굴욕적인 화쟁위 아쇼카선언과 정치권과 결탁한 종단지도부들...

원로스님들은 그동안 당신들이 지켜본 결과 더이상 이대로 내버려 두어선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한지 이미 오래였다. 자승원장 체제의 무능은 원로스님들을 행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고 본다. 이는 세상의 어느 집단과 조직이나 마찬가지다. 현역들이 중심도 못잡고 일도 못하여 조직이 망가지면 전직들이 복귀해서 바로잡아 주게된다.

원로스님들이 권력욕에 쩔어 노망이 났다고? 그전에 따져야할 문제가 있다.
총무원,중앙종회등... 젊은 것들은 왜 이렇게 타락하여 불교망신살만 뻗치고 있나?
젊은 것들이 총무원,종회등 종단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천인공노할 짓거리는
무욕적인 행위인가? 젊은 승려들은 권력욕은 아름다운 짓인가?
재가불자들도 못하고, 젊은 승려들은 자기들 스스로를 정화하지도 못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이런 시궁창같은 종단은 누가 뜯어 고쳐야 하나?
상징적 존재인 종정스님이 하면 젊은 것들이 예~하고 따라주나?
종정스님이 나서면 종단이 공중분해될 것이다.
최소한 젊은 승려들의 타락을 법적으로라도 견제해 놓을 필요가 있다.
이건 안전장치에 불과하다. 이런 조치가 범계행위를 막지는 못하지만
젊은 것들이 무한 추구하는 권력욕을 약화시킬 수는 있다.

난 원로스님들이 좀더 세게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행은 고사하고 낫살(법랍) 먹었다는 이유로 돈봉투 뿌리고 온갖 더러운 정치짓거리 해가며
원장되고 종회의원되고,주지되려는 욕심만 넘치니 종단이 이꼬라지가 된것이다.
원로스님은 그런 짓거리 안했냐고? 원로스님들 하는짓 보고 다 배운것라고?
원로스님들은 젊은 것들처럼 대놓고는 안했고 규모도 작았다
또 흠결이 있다손 치더라도 수행한 내력도 있고 원로스님들은 교상판석정도는 한다.

요즘 총무원이나 중앙종회 승려들 중 자기만의 교상판석할 수 있는 자들 있나.
내세울 수행이나 법력도 없고 오직 간판(직책)만 있다.
더 높은 직책가지려고만 혈안이 돼 있지 종단과 불교가 어찌되고 있는지 관심도 없는 자들이다.

원로스님들한테는 배울 것이라도 있다, 최소한 그분들은 가난한 가운데 지독하게 공부했고, 지독하게 수행한 시절이 있다. 젊은 것들 입만 살았지 뭘 했고 뭘 보여줄 수 있나? 적어도 현재 총무원과 종회승려들 중 퇴출시켜 마땅한 인간들 수두룩하다. 할일 안하는 밥버러지들. 이런 자들 양상하지 않으려면 종헌종법은 개정돼야만 한다.

원로스님들 뜻대로 종헌종법이 개정됐다 치자,
그래봤자 원로스님들은 삶이 얼마 안남았다.
젊은 것들 곧 원로스님 된다, 그러니 권력뺏겼다고 징징짜지 말라 쪽팔

 

(서광스님 댓글, , 원로스님, 잘 모시고 싶습니다)

 

 

서광스님은 원로스님이 좀 더 세개 나와야 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현재 집행부를 구성하고 있는 스님들이 문제가 많기 때문이라 한다. 총무원, 중앙종회 구성원들의 탐욕에 대한 견제 장치로 보는 것이다. 제역할을 하지 못하는 종단의 구성원들은 한마디로 타락되었다는 것이다.

 

스님의 눈으로 본 승가사회의 문제점 지적은 정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종단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전투구현상에 대하여 불자들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거리를 활보하지 못하게 될지도

 

스님들은 이슬을 먹고 살고, 화장실에도 가지 않는 고귀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불자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들도 재가자들과 마찬가지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찌들여 사는 똑 같은 범부중생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땅에 떨어진 승가의 권위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스님도박사건, 종정유시 조작, 스킨스쿠버 스님, 골프치는 스님, 외제차타는 스님, 은처의혹 등 온 갖 부정적인 용어들이 승가사회는 물론 전불교계에 난무한다. 이럴 때 마다 제도개혁을 외친다. 그러나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스님들 도박사건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한다. 매우 고질적인 병이라 한다. 수 년전에도 도박사건으로 인하여 세상이 떠들썩 하였고, 특히 1998년도 조계종 종권싸움의 경우 도박사건이 시발이었다고 한다. 그때 마다 대책을 수립하고 법을 만들고 다짐을 하지만 그때 뿐이다. 잊을만 하면 사건이 터지는 것이다. 그럴 때 마다 스님들의 권위는 무너져 내린다. 언제까지 내려 갈지 알 수 없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앞으로 스님들이 거리를 활보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저는 한국에서도 탁발을 나가야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스님의 권위를 회복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법을 만들어도 되지 않고 제도개혁으로 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명쾌한 솔루션을 들었다. 각묵스님의 음성강의를 통해서이다.

 

각묵스님은 초기불교이해 음성 파일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저는 한국에서도 탁발을 나가야 된다는 주장입니다. 중노릇 성행을 일으키는데 있잖아요 탁발이 제일이라고 봅니다. 그렇잖아요. 죽 서서 나가면 신도들이 보면 신심이 절로 생길 것이 아닙니까? 안그렇습니까? 우리가 출가자로서 어떻게 위의를 갖추고 살아야 하느냐 하면 제일 기본이 딱 다져 지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억수로 좋아 합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29: , 제17장 37보리분법, 제18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 전반부)

 

 

각묵스님은 음성강의 도중에 탁발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스님들의 권위를 회복 하기 위하여 탁발 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도 테라와다 불교국가처럼 탁발을 하자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다름 아닌 부처님 법대로살자고 주장하는 말과 같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산다면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탁발을 하는 이유

 

현재 한국 승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낯뜨거운 현상은 모두 부처님 법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 법대로 살기 위한 가장 첫 번째 실천덕목을 탁발로 보는 것이다.

 

그럻다면 탁발이 왜 중요할까.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탁발이라는 것은 삶의 끝이다. 이 세상에서 '그대는 바루를 들고 유행한다' 는 것은 저주이다.

 

수행승들이여,

훌륭한 아들들은

 

'결코 왕이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고 강도가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다. 빚을 졌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나는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에 떨어졌다. 괴로움에 떨어져 괴로움에 둘러싸여 있다. 적어도 괴로움의 다발들이 종식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라는 타당하고 합목적적인 이유가 있어 그러한 삶을 영위한다.

 

(삔돌야경-Piṇḍolya sutta- one Going For Alms Food-걸식경, 상윳따니까야 S21.2.3.8, 전재성님역)

 

  삔돌야경(걸식경-S21.2.3.8).docx

 

 

 

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까삘라왓뚜 니그로다 승원에 계실 때 법문한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이 어떤 일인지 수행승들을 꾸짖고 법문 한 것이다.

 

고통과 윤회의 종식을 위하여

 

부처님은 수행자가 된 목적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비구가 된 자들은 누가 강요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한다. 빚 때문에 출가한 것도 아니고 단지 직업으로서  출가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고통과 윤회의 종식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출가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합리적인 목적을 가지고 출가하였다면 모든 욕망은 당연히 극복 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상징적 행위를 탁발로 본다. 빌어 먹는 것이다. 빌어 먹는 사람의 태도는 어떠할까. 한 없이 자세를 낮추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탁발을 할 때는 소의 멍에 길이 만큼 앞을 보고 항상 알아차림(sati)’를 유지하면서 걸을 것을 말씀 하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탁발하는 것에 대하여 삶의 끝이고, 바루를 들고 다니는 것에 대하여 저주라고 하였다.

 

조계사에서 시범적으로라도

 

그렇다면 한국적인 불교현실에 있어서 탁발은 가능할까.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한다.

 

 

이것이 다 안되면 적어도 서울 조계사에서는,  매일 못하면요 일주일에 매주 일요일날,  이건 사실 실행가능하거든요. 서울에 있는 신도들 열명 스무명만 담합하면 됩니다. 그렇잖아요. 그래가지고 나는 밥지어 오고 니는 무슨 반찬 이래 가지고 반찬 대여섯가지 준비해 가지고 책상 쭉 갔다 놓고, 우리 부페 하는 것 생각하면 됩니다. 스님들이 지나가면 신도들이 반찬하고 밥하고.. 스님들도 맨발로 가면.. 참 보기 좋습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29: , 제17장 37보리분법, 제18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 전반부)

 

 

스님은 우선 조계사에서 부터라도 해 보자고 한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사에서 시범 운영해 보자는 것이다. 신도들이 밥과 반찬을 준비하고 스님들이 탁발 하는 형식을 취하면 된다고 한다.

 

노스님이나 큰스님도 예외 없이 맨발로

 

스님은 이어서 남방 테라와다불교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지금도 남방에는 신발을 다 신는데, 그런데 탁발할 때 만은 반드시 맨발로 가야 합니다. 부처님 법이잖아요. 부처님 당시부터 맨발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탁발갈 때만큼은 십리를 가든 이십리를 가든 한 시간 걸리든 두 시간 걸리든 반드시 맨발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비가 올 때 도 맨발로 가야합니다. 제일 큰 스님부터, 노스님부터 해서 스님들이 탁발을 나가면 신도들이 어떻게 되겠어요? 꾸뻑 죽을겁니다. 신심이 저절로 날 것 아닙니까?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29: , 제17장 37보리분법, 제18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 전반부)

 

 

 

 

 

religious mendicancy

 

 

 

지금도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는 탁발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는 부처님의 법대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살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탁발을 하게 되면 노스님이나 큰스님도 예외 없이 맨발로 탁발에 나선 다는 것이다. 그런 비구의 모습을 보고 신도들이 감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스님들의 권위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스님들의 권위는 어떻게 생겨 나는 것일까.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으면 자동적으로 권위가 생겨 나는 것일까. 높은 법상에 앉아 알아 들을 수 없는 게송을 읊거나 할과 방을 쓴다고 하여 권위가 생겨나는 것일까.  성과 속을 엄격히 구분하여 화장실도 따로 만들어 놓는 식으로 한다고 하여 없는 권위가 발생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니까 상좌부 쪽에서는 그 사람들이 절에 와서 기도를 합니까, 스님들이 목탁을 쳐 줍니까, 아무 것도 안하잖아요. 스님들이 그런 것 일절 안하거든요. 그래도 뭡니까. 북방신도들 보다 상좌부 저쪽에는요, 신도들이 스님들 한테 꼬박 죽어버립니다. 저는요 어쩔때는 너무 권위적인 같아 싫을 때도 있는데, 그만큼 절대적입니다. 왜그럴까요. 탁발 하는 모습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말입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29: , 제17장 37보리분법, 제18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 전반부)

 

 

한마디로 남방 테라와다불교 비구들의 권위는 탁발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탁발하는 모습이 모든 것을 다 말해 주고 있다고 한다. 테라와다 비구들이 탁발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신심이 저절로 생기고 자연스럽게 권위도 생긴다는 것이다.

 

택도 없는 소리라고

 

이렇게 각묵스님은 탁발하자고 주장한다. 현실적으로 어려우면 조계사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해 보자고 제안을 하였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큰스님들 께 말씀 드렸다고 하였다. 결과는 어땟을까.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서 우리 조계사에서도 스님들이 맨발로 하고 신도들도 맨발로 이레하고..같이 공양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게 몇 달 일이년 정착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저는 한국에서 불교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몇 스님들 한테 이런 말씀을 드렸더니 피익하고 비웃어 버리더라고요. ‘저 스님 남방불교, 소승불교 물좀 먹드니만..’이런 식이라요. 처음에는 그런 말을 했지만 요새는 이런 말 안합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29: , 제17장 37보리분법, 제18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 전반부)

 

 

 한국불교에서 시범적으로라도 탁발을 시행하면 한국불교의 위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노스님, 큰스님부터 시작하여 여러 명의 스님들이 바루를 들고 맨발로 소의 멍에 길이 만큼 앞을 바라 보면서 탁발하는 장면을 보면 신심이 절로 나고 그로 인하여 스님들을 존경하고 되고 그 결과 스님들의 권위도 올라 갈 것임에 틀림 없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불교 현실에서 택도 없는 소리이었다고 말한다.

 

탁발을 하지 않는 요인

 

한국불교에서 탁발정신은 완전히 실종 되었다. 탁발흉내를 내는 것 조차 거부 당하는 것 또한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빌어 먹는 것이 탁발인데, 한국불교의 큰스님들이 신도들에게 얻어 먹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다. 빌어 먹으면 권위에 손상이라도 가는 것일까.

 

한국불교의 스님들이 탁발을 하지 않는 요인에 대하여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 중의 하나를 들라면 승복이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삼배승복

 

재가불자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승복이다. 수백년전부터 내려 오는 전통복장 양식으로 된 승복은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 삼배옷이 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삼배승복을 말한다.

 

그런데 풀먹인 삼베옷은 단점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스님들은 비를 맞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한다고 한다. 왜 그럴까.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린다라는 말이 있다. 왜 이런 말이 생겨 났을까. 스님들의 옷은 대부분 풀을 해서 다림질 하는 옷이다. 특히 빳빳하게 풀먹인 삼배옷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런 옷을 입고 가다 비를 만났다면 어떻게 될까. 비를 만나면 풀도 죽고, 쉰냄새도 나고 볼품 없이 구겨져 버릴 것이다. 그래서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린다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삶 따로 수행 따로

 

이는 무엇을 말할까. 승복은 권위의 상징과도 같다는 말이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삼배옷, 긴소매를 특징으로 하는 승복은 오로지 스님들만 입는 것으로서 권위를 상징한다.

 

그런데 또 하나의 권위를 상징하는 옷이 있다. 그것은 가사이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 가사는 특별한 경우에만 걸친다는 것이다. 그런 가사는 보통 붉은 색 계통의 괴색으로서 오른 쪽 어깨를 드러낸 겉옷이다. 그래서 예불 등 의식을 행 할 때만 걸칠 뿐 평소에는 입지 않는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스님들의 살아가는 방식이 삶 따로 수행 따로이기 때문이다. 가사 입는 것 하나만 보아도 삶과 수행이 일치 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삶 따로 수행 따로가 되다 보니 가사는 법당용이고, 법당을 떠나서는 일반승복이다.

 

그래서 일반승복차림으로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림을 그린다든지 노래를 한다든지 심지어 골프를 치고 스킨스쿠버까지 못하는 것이 없다. 만약 항상 붉은 색 가사를 걸치고 있다면 신변잡기와 취미생활이 가능할까.

 

하루 종일 가사를 입고 생활하는 테라와다불교

 

이에 반하여 테라와다불교권의 비구들은 가사는 일상적인 것이다. 하루 종일 가사를 입고 생활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세 벌 밖에 되지 않는 가사를 입고 자고, 좌선을 하고, 탁발을 나가기도 한다. 한마디로 삶과 수행이 일치하는 것이다.

 

 

 

 

아랫가사(antaravāsaka, 안따라와사까)

 

 

 

 

 

 

 

 

 

윗가사 (uttarāsaga, 웃따라상가)

 

 

 

 

 

 

 

중복가사 (saghāi, 상가띠)

 

 

 

 

 

 

 

가사를 입고 산다는 것은 부처님의 방식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림을 그린다든지 노래를 한다든지 골프, 스킨스쿠버 등은 꿈 도 꿀 수 없는 것이다.

 

각 불교전통의 승복

 

참고로 붓다네트(http://www.buddhanet.net/ )에서 본 각 불교전통의 승복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승불교권 승복

 

 

 

중국(Chinese Monk's Robes)

 

 

 

 

 

일본(Japanese Monks' Robes)

 

 

 

 

 

티벳(Tibetan Monk's Robes)

 

 

 

 

한국(Korean Monk's Robes)

 

 

 

 

 

베트남(Vietnamese Monk's Robes)

 

 

 

 

 

 

 

몽고(Mongolian Monk's Robes)

 

 

 

 

 

테라와다 불교권 승복

 

 

 

미얀마(Burmese Monk's Robes ,Myanmar)

 

 

 

 

스리랑카(Sri Lankan Monk's Robes)

 

 

 

 

태국(Thai Monk's Robes)

 

 

 

한국불교개혁은 가사입기 생활화부터

 

시범적으로라도 탁발을 도입하자는 각묵스님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현실에서 전혀 먹혀 들어 가지 않는 것 같다. 이는 한국불교에 탁발전통도 없을 뿐만 아니라 탁발정신이 완전히 실종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설령 시범적으로 탁발을 한다고 하여도 스님들의 권위가 손상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더 실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 법대로 산다면 탁발은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발을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를 들라면 승복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삶 따로 수행따로 승복이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에 있어서 가사는 오로지 예불 등 의식용에 지나지 않는다. 평상시에는 걸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가사를 걸치고 있다면 부처님의 제자로 볼 수 있다.  

 

항상 가사를 입고 있다면 온갖 승풍실추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불교가 변모 하려면 스님들이 가사를 생활화 해야 한다. 한국불교의 개혁은 가사입기 운동에서부터 시작 되는 것은 아닐까.

 

 

 

2012-08-24

진흙속의연꽃

삔돌야경(걸식경-S21.2.3.8).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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