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밥상
2012 봉녕사 사찰음식 대향연
불교TV사이트에서 사찰음식과 관련된 프로를 보았다. 봉녕사에서 매년 개최하는 ‘2012 봉녕사 사찰음식 대향연’에 대한 것이다.
프로그램 소개에 따르면 “불교의 기본정신을 바탕으로 가장 간소하고 겸허한 자세로 제작되 무엇을 먹는가 보다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더 큰 의미를 둔 사찰음식”이라 한다. 나레이션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소박한 밥상이라도 주위와 함께 나누는 자비의 음식이다. 자연의 맛을 닮아 보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낮아 지는 마음을 갖게 하는 사찰음식이 사람들 곁으로 다가서고 있다.
( <특집>2012 수원 봉녕사 사찰음식 대향연, 불교TV 2012-10-29)
사찰음식에 대한 소개를 보면 가장 간소한 음식, 소박한 밥상임을 강조 한다. 그런 밥상은 가장 낮은 자세의 마음을 줄 것이라 한다. 그런 사찰음식은 어떤 것일까. 불교TV 화면에서 디카로 촬영한 사찰음식은 다음과 같다.
사찰음식을 보면 나레이션의 설명과 달리 화려하고 다양하고 푸짐함을 알 수 있다. 마치 잔칫집 음식을 보는 듯하고 웰빙부페에 와 있는 듯하다. 승가의 스님들은 이와 같은 진수성찬을 매일 먹는 것일까.
사찰에서 먹는 비빔밥
팀을 이루어 사찰순례를 다니다 보면 사찰 공양간에서 점심공양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 제공되는 사찰음식은 어떤 것일까. 위 그림에서 같이 이름을 알 수 없는 진귀한 음식들일까. 사찰 공양간에서 신도들에게 제공 되는 사찰음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강원 고성 H사
충북 제천 D사
전남 해남 M사
충북 영동 Y사
조계사
경북 봉화 C사
이것이 신도들이 절에서 먹는 사찰음식이다. 그리고 쟁반차림의 경우 스님들도 함께 먹는 메뉴이다. 단체로 공양 하였을 때 보시금을 내고 먹는다. 그런데 사찰음식대향연을 보면 스님들은 별도로 먹는 것 같아 보인다. 공양도 스님의 빕상과 신도의 밥상이 따로 있는 것일까?
사진을 보면 비빔밥 아니면 쟁반차림이다. 특히 비빔밥은 부처님오신날과 같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양을 베풀 때 효과적이다. 그래서 영문판 위키피디아를 보면 한국을 대표하는 사찰음식이 ‘비빔밥’이라고 명기 되어 있다.
사찰음식 전문 비구니스님
이렇게 비빔밥이나 쟁반차림이 전부인 사찰음식이 어떻게 호화진수성찬으로 바뀌었을까. 이에 대하여 사찰음식전문가로 알려진 비구니 S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전에 보면 모든 음식은 약과 의약재로 다루셨거든요. 그래서 사람들 한테 약과 의약이 될려면 제철의 음식이어야 되고, 약이 되지 않는 재료를 빼고 약이 되는 음식으로 만들어서 먹을 사람을 맞추어서 해 주어야 되는데, 이건 음식이니까 부처님 말씀 하신 자연의 음식, 제철의 음식, 약이 되는 음식과 거기에 기준을 맞추어 심사를 했습니다.
( <특집>2012 수원 봉녕사 사찰음식 대향연, 불교TV 2012-10-29)
스님의 설명을 들으면 사찰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어도 되는 것 처럼 보인다. 더구나 경전적 근거까지 이야기 하고 있는데, 어떤 경전에 근거한 것일까.
경전적 근거를 보면
인터넷 검색사이트에서 ‘사찰음식’과 ‘S 스님의 이름’을 키워드로 하여 조회 하여 보았다. 검색결과 다음과 같은 자료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경전 <사분율>에서 부처님께서는 일상의 식품 모두가 약이라며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식생활을 권하셨다.
때에 맞는 음식을 먹어라
부처님께서 권장하신 식생활은 아침은 죽식, 점심은 딱딱한 음식, 저녁은 과일즙 등이다. 아침에는 뇌가 활동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가볍게 먹기 위해 죽식을 권장하셨다. 이는 소식(小食)을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낮에는 딱딱한 음식(시약)을 권하셨는데 활동량이 많을 뿐 아니라 위장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식을 하거나 잠자기 두시간 전에 먹는 음식은 독약과 같다’며, 저녁에는 과일즙을 먹으라 하셨다. 이는 저녁 늦게 먹는 음식이 신장이나 간을 상하게 하기 때문일 뿐 아니라, 과일즙을 마심으로써 그 안의 섬유질이 아침에 먹는 죽과 낮에 먹는 딱딱한 음식의 배설을 돕도록 하기 위함이다.
(경전에 나타난 불교의 식생활, S스님)
스님은 사분율을 근거로 하고 있다. 사분율에 따르면 “부처님은 일상의 식품 모두가 약이라며 네 가지 식생활을 권하셨다”다고 한다. 즉, 1)때에 맞는 음식을 먹어라, 2)제철의 음식을 먹어라, 3)골고루 섭생하라, 4)과식은 금하고, 육식은 절제하라 , 이렇게 네 가지라 한다.
하지만 이는 음식을 섭취하는데 있어서 자세와 방법등 일반적인 사항이다. 음식을 만들어 먹으라는 말은 경전 그 어디에도 없다. 다만 불교가 각 지역으로 전파 되면서 사찰 내에 후원을 두고, 식재료를 보관하고, 음식을 조리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특히 중국 등 동아시아로 불교가 전파 되면서 조리가 허용된 것이다.
로히니가 사문을 좋아하는 이유
초기경전에 따르면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 로히니경이 있다. 수행녀가 되기 이전 로히니가 아버지와 나눈 대화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재물을 창고나, 단지나, 바구니에 저장하지 않으며
완전히 조리된 음식만 탁발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3)
그들은 동전이나 금과 은을 지니지 않습니다.
그날그날 탁발한 것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4)
(테리가타, 로히니 비구니,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로히니가 사문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완전히 조리된 음식만 탁발한다는 것이다. 이는 식재료를 거처에 쌓아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날 그날 탁발에 의존하여 삶을 영위해 가며 살아가는 출가수행자에 대한 찬탄이다.
지금도 남방 테라와다불교전통에서는 탁발정신이 살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오전에 탁발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사찰에 부엌이 없다고 한다. 걸식이나 청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찰음식의 진수를 보여 주는 듯
이와 같은 남방전통과 달리 북방불교의 경우 기후등 환경적 요인으로 인하여 식재료를 저장하여 놓고 취식을 하고 있다. 그런데 사찰음식을 보면 너무 호화롭다는 것이다.
불교tv에서 한상 잘 차려진 스님의 밥상을 보면 탁발정신이 실종된 듯 하다. 기후등 환경적 요인으로 취식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찰음식이 진화되면 어디까지 발전하는 것인지 ‘사찰음식의 진수’를 보여 주는 것 같다.
감각기관을 수호하지 않았을 때
부처님은 눈, 귀, 코, 혀 등 감각기관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초기경전 도처에서 강조 하였다. 그런 감각기관은 출입문과 같은 것이다.
출입문을 단속을 하지 않았을 때 아무나 들어 올 것이다. 그 중에 도둑놈이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감각대상이 되는 형상, 소리, 맛 등에 대하여 도둑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감각기관을 잘 못 다스렸을 경우 어떤 결과가 벌어질까.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Subhānupassiṃ viharantaṃ
indriyesu asaṃvutaṃ,
Bhojanamhi amattaññuṃ,
kusītaṃ hīnavīriyaṃ,
Taṃ ve pasahati Māro
vāto rukkhaṃ va dubbalaṃ.
아름다움에 탐닉하여
감관을 수호하지 않고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모르고
게을러 정진이 없으면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꺽어 버리듯,
악마가 그를 쓰러뜨리리.
(법구경, Dhp7, 전재성님역)
‘아름다움에 탐닉한다(Subhānupassiṃ viharantaṃ)’라 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원하는 대상을 명상주제로 삼는 것을 말한다. 즉, 아름다운 손톱과 손가락, 손과 발, 다리와 허벅지, 엉덩이와 배, 가슴과 목, 입술과 치아, 입과 코, 눈썹과 이마, 머리카락과 몸털, 피부와 안색과 몸의 윤곽을 말한다.
신체의 특정 부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을 ‘부분상’이라 한다. 그리고 ‘여자다’ ‘아름답다’ 등 개념적으로 관심을 취하는 것을 ‘전체상’이라 한다. 이렇게 부분상과 전체상을 취하면 감각기관의 문을 단속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더구나 먹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게으른 생활을 한다면 악마(Māra)가 쓰러뜨린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악마는 오취온, 오염, 윤회의 지속으로 이끄는 경향, 죽음, 하늘아들로서의 악마 이렇게 다섯가지를 말한다.
맛에 탐착하게 되면
이와 같이 감각기관을 잘 못 다스렸을 때 결국 윤회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됨을 알 수 있다. 특히 맛에 탐착 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이는 먹는 것이 수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삽바사와경(모든번뇌의 경, M2)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미각능력을 잘 다스려서 수호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날 것이지만 미각능력을 잘 다스려서 수호하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삽바사와경-Sabbāsavasuttaṃ -모든 번뇌의 경, 맛지마니까야 M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수호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를 설명하면서 미각을 잘 다스리라고 하였다. 맛에 탐착하면 탐착할수록 번뇌만 증장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음식을 수용한다는 것은
그렇다면 맛에 따른 번뇌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수행승은 성찰에 의해서 이치에 맞게 추위를 막고 더위를 막거나 등에, 모기, 바람, 열기, 뱀과의 접촉을 막거나 수치스러운 곳을 가리기 위하여 의복을 수용한다.
또는 성찰에 의해서 이치에 맞게, 연회를 위하거나 만끽을 위하거나 장식을 위하거나 허례를 위하거나 하지 않고, 단지 이 몸을 지탱하거나 건강을 지키거나 상해를 방지하거나 지나간 고통은 소멸되고 새로운 고통은 일어나지 않고 허물이 없고 안온한, 청정한 삶을 지키기 위하여 음식을 수용한다.
(삽바사와경-Sabbāsavasuttaṃ -모든 번뇌의 경, 맛지마니까야 M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음식을 수용하는 것에 대하여 단지 몸을 지탱하고 건강을 지키는 정도에 의존하라고 한다. 그래야 청정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13가지 두타행
부처님이 말씀하신 청정한 삶이라는 것은 출가정신을 말한다. 좋은 옷 입고 잘 먹기 위하여 출가한 것이 아니라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무소유와 청정한 삶을 강조 하였는데, 이는 두타행이 대표적이다. 13가지 두타행은 다음과 같다.
(1) 분소의(糞掃衣)를 입는 수행
(2) 삼의(三衣)만 수용하는 수행
(3)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수행
(4) 차례대로 탁발하는 수행
(5) 한 자리에서만 먹는 수행
(6) 발우의 탁발음식만 먹는 수행
(7)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 수행
(8) 숲에 머무르는 수행
(9) 나무 아래 머무는 수행
(10) 노천에 머무는 수행
(11) 공동묘지에 머무는 수행
(12) 배정된 대로 머무는 수행
(13) 눕지 않는 수행
두타행을 보면 음식과 관련 된 것이 13가지 4가지나 된다. 그 중 가장 핵심은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것이다. 이는 식재료를 쌓아 놓고 조리해 먹지 않는 것을 말한다.
봉녕사의 탁발행사
초기경전을 보면 도처에 탁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모두 탁발에 의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번 봉녕사 사찰음식 대향연 프로에서도 탁발행사를 볼 수 있었다.
봉녕사의 탁발행사를 보면 비구니스님들이 발우를 들고 봉녕사 경내를 돌아 다닌다. 그러면 행사에 참여한 신도들이 발우에 무언가를 넣는다.
발우안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발우안에 있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돈이었다. 돈봉투가 발우 안에 가득 들어 있는 것이다.
로히니경에서 로히니가 사문을 좋아 하는 것은 그들이 동전이나 금, 은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런데 봉녕사 탁발행사를 보면 돈봉투를 받고 있다. 돈봉투는 부처님 당시 금이나 은과 같은 것이다.
하려면 제대로 하라!
탁발행사를 추진한 목적은 부처님 당시의 수행의 모습을 체험해 보자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1회 때부터 매년 한차레씩 탁발행사를 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당시의 복장을 하고 저자거리로 나가서 탁발하는 것이다. 태국, 미얀마, 라오스등 테라와다 불교국가에서 하는 것처럼 똑같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발우안에는 돈봉투가 아니라 실제로 먹을 수 있는 음식만 받는 것이다.
탁발의 의미는 무엇인가?
탁발의 전통이 없는 한국불교에서 탁발체험을 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그런 탁발은 어떤 의미일까. 상윳따니까에서 부처님은 탁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 탁발이라는 것은 삶의 끝이다. 이 세상에서 '그대는 바루를 들고 유행한다' 는 것은 저주이다. 수행승들이여, 훌륭한 아들들은 '결코 왕이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고 강도가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다. 빚을 졌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나는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에 떨어졌다. 괴로움에 떨어져 괴로움에 둘러싸여 있다. 적어도 괴로움의 다발들이 종식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라는 타당하고 합목적적인 이유가 있어 그러한 삶을 영위한다.
(삔돌야경-Piṇḍolya suttaṃ- one Going For Alms Food-걸식경, 상윳따니까야 S21.2.3.8, 전재성님역)
탁발이라는 것은 ‘삶의 끝’이라 하였다. 그래서 발우를 들고 유행하는데, 이렇게 탁발을 하는 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에 의하여 하는 것이라 한다. 다름 아닌 해탈과 열반을 살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 보는 탁발행사는 일회성 이벤트에 가깝다. 그것도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어긋나는 금과 은 즉, 돈봉투를 받고 있는 것이다.
사찰음식 대향연 부작용 두 가지
사찰음식은 템플스테이와 함께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것으로 자리메김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종단에서는 시범음식점을 여는가 하면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 하고 있다. 더구나 뉴욕, 파리등 고급 레스토랑과 체임점 계약도 추진하고 있어서 템플스테이처럼 한국의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알리고 있다. 그러나 부작용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승가사회가 ‘호의호식’하는 공동체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출가자의 본업이 수행과 포교임에도 불구하고 본업은 멀리 한 채 부업에 매달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한국불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미지를 줄 것임에 틀림 없다.
둘째로 메스컴에 소개 되고 있는 사찰음식은 ‘비불교적’이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사찰에서 조리를 한다는 것은 탁발정신에 어긋 나는 것이고, 더구나 맛을 추구한다는 것은 더욱 더 부처님의 가르침을 멀리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눈, 귀, 코, 혀 등 감각기관의 문을 단속하라고 하였는데, 맛에 탐착하는 것은 미각이라는 도둑놈을 허용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음식을 혐오하는 수행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음식을 혐오하는 수행이 있다. 마하시사야도 법문집의 주석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음식을 혐오하는 인식(āhāre-paṭikkūla-saññā)
음식을 혐오하는 인식(āhāre-paṭikkūla-saññā)은 「청정도론」(Vis.Ⅺ.1)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1) 탁발 가는 것,
(2) 음식 찾는 것,
(3) 먹는 것,
(4) 분비물,
(5) 저장되는 곳,
(6) 소화되기 전,
(7) 소화된 후,
(8) 먹고 난 결과,
(9) 배출하는 것,
(10) 묻은 것
의 열 가지 형태로 음식의 혐오스러움을 반조하는 수행이다. 이러한 수행을 닦으면 수행자는 맛에 대한 갈애 없이 오직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만 음식을 먹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음식이라 번역되는 아하라(āhāra)는 āhārati(가져오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문자적으로 ‘강하게 지탱하는 상태로 떠받쳐 준다’는 의미이다. 이 음식에는 다음의 네 가지가 있다.
(1) 단식(段食, kabaḷīkāra-āhāra):
덩어리로 된 먹는 음식을 말하며 육체적인 몸을 지탱해준다.
(2) 촉식(觸食, phassa-āhāra):
세 가지 느낌을 가져오는 감각접촉의 음식을 말하며 느낌을 지탱해준다.
(3) 의사식(意思食, manosañcetana-āhāra):
삼계에서 재생연결을 가져오는 의도의 음식을 말하며 삼계에 태어나는 것을 지탱해준다. 의도는 업이며 업은 재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4) 식식(識食, viññāṇa-āhāra):
재생연결의 순간에 정신과 물질을 가져오는 식의 음식을 말하며 정신과 물질의 합성체를 지탱해준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단식은 네 가지 원인으로 생기는 물질적인 현상을 지탱해주고, 나머지 셋은 그 각각과 함께 일어나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현상을 지탱해준다. 단식은 물질이므로 무기(無記, avyākata)이고 나머지 세 가지 정신적인 음식은 선(善, kusala), 불선(不善, akusala), 무기(無記, avyākata) 셋에 다 해당된다.
(주해모음, 음식을 혐오하는 인식(āhāre-paṭikkūla-saññā) <위빠사나 수행의 기초> 2. 사마타와 위빠사나 5번 주해)
수행자들에게 있어서 음식이라는 것은 맛에 대한 갈애 없이 오직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만 음식을 먹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음식에 대하여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야 하는데 탁발 가는 것 등 10가지를 반조 해야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음식에 대한 혐오수행을 하였을 때 맛에 대한 갈애와 탐착이 없어질 것이라 한다.
스님의 밥상
한국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가는 듯 하다. 사찰음식 대향연을 보면 온갖 진귀한 음식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님의 밥상에는 듣도 보도 못한 웰빙음식으로 풍성하다.
이런 음식을 먹으면 수행이 더 잘 되는 것일까. TV에서 보는 것처럼 스님들은 호의호식하는 공동체일까. 사찰음식 대향연을 보면서 스님의 밥상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2012-11-0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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