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떨어지는 늦가을에
절정의 도시단풍
단풍이 절정이다. 산에서는 단풍이 끝물일지 모르지만 도시에서 단풍은 지금이 절정이다. 주로 은행나무, 느티나무, 벗나무가 많은 도시의 가로에서 울긋불긋 단풍이 한창인데 동시에 바닥에 떨어진 잎도 수북하다.
늦가을 비가 추적 추적 내리는 아침이다. 비로인하여 바닥에는 잎이 가득하다. 바람까지 분다면 그야말로 추풍낙엽이 된다. 지금 단풍이 절정일지 몰라도 일주일만 지나면 앙상한 가지만 남겨 놓을 것이다.
환상적인 해질녘 단풍
해질녘 황혼에 보는 단풍은 환상적이다. 서서히 지는 햇빛에 반사 된 나뭇잎을 보면 마치 호수물이 햇볕에 반사 되어 출렁이는 것처럼 황홀하기만 하다.
이렇게 아름답고 장엄한 절정의 단풍을 보면서 동시에 서글픔을 느끼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모두 질 것이기에 때문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무상함을 느낀다. 자연에서 보는 무상함을 보면서 동시에 인생도 그와 같은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몇 달 전 까지만 해도 함께 하였던 분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90세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요즘 그 분의 갑작스런 죽음은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보면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Animittamanaññātaṃ 아니밋따마난냐땅
maccānaṃ idha jīvitaṃ, 맛쭈낭 이다 지위땅
Kasirañca parittañca 까시란짜 빠릿딴짜
tañca dukkhena saññātaṃ. 딴짜 둑케나 산냐땅
Nahi so upakkamo atthi 나히 소 우빡까모 앗티
yena jātā na miyare, 예나 자따 나 미라예
Jarampi patvā maraṇaṃ 자람삐 빠뜨와 마라낭
evaṃdhammā hi pāṇino. 에왕담마 히 빠니노
Phalānamiva pakka naṃ 팔라나미와 빡까 낭
pāto patanato bhayaṃ, 빠또 빠따나또 바양
Evaṃ jātānamaccānaṃ 에왕 자따나맛짜낭
niccaṃ maraṇato bhayaṃ. 닛짱 마라나또 바양
이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있습니다.
태어나 죽지 않고자 하나,
그 방도가 결코 없습니다.
늙으면 반드시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뭇 삶의 운명은 이런 것입니다.
결국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야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
(살라경- Salla sutta-화살의 경, 숫따니빠따 Sn3.8, 전재성님역)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사람은 ‘업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몰라 경에서는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 (niccaṃ maraṇato bhayaṃ)”라고 표현 하고 있다.
수명이 다하면 낮은 세계로
이렇게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어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지만 공덕을 많이 쌓아 천상에 태어난 존재들은 수명이 보장 되어 있다. 그래서 천상의 존재들은 ‘수명대로 산다’고 한다.
그런 수명도 천상마다 모두 다 다른데 인간 바로 위에 사대왕천에 사는 존재의 수명은 500천상년이라는 수명이 보장 되어 있다고 한다. 백세를 사는 인간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 무려 9백만년을 수명대로 사는 것이다.
가장 오래 사는 존재는 비상비비상처에 사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무려 8만4천 대겁을 사는데 그 기간 동안 수 없이 성주괴공, 즉 우주가 생겼다가 깨졌다를 반복하는 기간이라 한다.
하지만 수명대로 오래 사는 천상의 존재들도 수명이 다하면 다시 태어 나야 한다. 주석에 따르면 천상의 존재들이 수명을 다하면 ‘낮은 세계로’ 돌아 온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오랜 수명이 보장 되어 있는 세계를 획득한다고 할지라도 삶과 죽음에서 해탈하지 못하고 ‘악마의 덫(maccupāsa)’에 묶이는 것으로 본다.
낙엽을 보는 두 가지 눈
단풍이 절정이라는 것은 이제 떨어질 날만 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무상함을 느끼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며 서글퍼 진다. 특히 인생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절실하리라 본다. 그 때 슬픔 감정은 누가 느끼는 것일까.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우수의 감정을 느꼈다는 그것은 내가 느끼기 쉽상이다. 슬퍼도 내가 슬프고, 기뻐도 내가 기쁘기 때문에 철저하게 나를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낙엽을 보면서 감상적이고 우울해지는 것도 내가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제자들은 무상에다 고와 무아를 추가 하여 무상, 고, 무아를 본다. 이런 점이 보통사람들과 부처님 제자들이 단풍과 낙엽을 보는 다른 눈이라 볼 수 있다.
낙엽에 대하여 무상이 아닌 무상, 고, 무아의 눈으로 본다면 더 이상 감상적이거나 우울해 할 필요가 없다. 단풍이 되어 낙엽이 되는 것이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는 커다란 나뭇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불교방송 ‘BBS초대석’에서
일요일 아침 불교방송 프로에 ‘BBS초대석’이 있다. 스님이나 불교와 인연이 있는 명사들을 초청하여 대담하는 프로이다. 주로 스님들이 많이 출연한다. 그런데 이 프로의 특징중의 하나가 반드시 ‘출가이유’를 물어 본다는 것이다.
출연한 모든 스님들에게 “어떻게 하여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어 보면 스님들마다 갖가지 출가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랏타팔라경에서 “마치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청년이건 노인이건, 몸이 부수어지면 떨어지니 왕이여, 이것을 보고 출가했습니다”와 같이 호연지기 넘치는 출가이유는 드믈다.
또 사회자가 물어 보는 것 중의 하나가 ‘깨달음’에 대한 것이다. 14안거를 했다는 스님에게 사회자가 “한소식 들었습니까?”라고 물어 보았을 때 “노력하고 있습니다”라는 식의 대답을 들을 수 있는데, 이는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 했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구족계의 의미는?
스님들은 구족계를 받아야 정식스님이라 볼 수 있다. 행자와 사미를 거쳐 수백가지나 되는 비구계와 비구니계를 받았을 때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구족계라 한다. 그런데 구족계를 받았다는 것은 깨달았다는 뜻도 된다.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깨달은 자만이 구족계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다섯 수행자를 대상으로 처음으로 담마의 바퀴를 굴릴 때 꼰단냐가 깨달았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진리의 눈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 수다원의 깨달음이라 말한다.
이렇게 진리의 눈이 열리자 꼰단냐는 부처님에게 구족계를 받기 원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오너라 비구여 (Ehi Bhikkhu).!” “법은 잘 설해졌다. 와서 괴로움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 계율 집중, 지혜의 출세간의 수행을 닦도록 하여라.”라고 말씀을 하였는데, 그런 초대 말씀 자체가 구족계를 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구족계는 깨달은 자에게만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깨닫지 못하면 구족계를 받을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이 때 깨달음은 열반으로서 수다원의 열반이나 아라한의 열반은 모두 같은 것이다. 다만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에 번뇌를 소멸시키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초기경에 따르면 구족계를 받고 난 다음 수행을 해야 한다. 그 과정이 사다함과 아나함이다. 그래서 처음 깨달음을 이룬 수다원의 도에 대하여 ‘견도’라 하고, 사다함과 아나함의 도에 대하여 ‘수도’라 하고, 번뇌 다한 아라한의 도에 대하여 ‘무학도’라 한다. 깨달음은 오로지 하나이지만 단계적 수행단계가 필요하다고 하여 이를 일반적으로 ‘돈오점수’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돈오점수에 따른 가르침이다.
개체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풀기 위하여 선사들은 선방에서 보낸다. 일년, 삼년, 십년, 이십년, 삼십년, 평생을 보내기도 하는데 깨달았다는 말을 듣기가 어렵다. 더구나 구족계를 받고 나서도 깨달음을 찾아 선방에서 평생 보낸다고 하는데,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기 때문으로 본다. 나를 찾는 수행을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나를 찾는 수행은 번뇌만 일으킬 뿐이라 하였다. 또 나를 찾는 다는 것은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초기경 도처에서 말씀 하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유신견’ 때문이다.
유신견은 ‘개체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영원한 존재를 상정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개체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타파 해야만 진리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있는데, 수다원이 되는 조건 중의 하나가 유신견 타파이고, 이 유신견이 타파 되지 않으면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꼰단냐의 외침에서 알 수 있다.
수다원의 오도송
초전법륜경에서 꼰단냐는 부처님이 설법을 듣고 진리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수다원이 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짤막한 게송이 이를 말한다.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양 낀찌 사무다야담망
sabbantaṃ nirodhadhammanti 삽반땅 니로다담만띠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수다원이 깨닫고 나서 외친 것은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매우 짤막한 문장이다. 이를 수다원의 깨달음이라 하여 ‘수다원 의 오도송’이라 한다.
수다원의 오도송을 보면 제행무상인 것만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 무상, 고, 무아에 대한 것이다. 형성된 것은 무엇이든지 변하기 마련이고, 변해서 괴로운 것이고, 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최상의 행복은
이렇게 깨달아서 모든 번뇌가 소멸 되었을 때 다시 태어남이 없는데 이를 열반이라 한다. 이와 같은 열반은 수명대로 사는 천상의 존재 보다 더 행복 한 것이라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Tapo ca brahmacariyañca 따뽀 짜 브라흐마짜리얀짜
ariyasaccānadassanaṃ, 아리야삿짜나닷사낭
Nibbānasacchikiriyā ca 닙바나삿치끼리야 짜
etaṃ maṅgalamuttamaṃ. 에땅 망갈라뭇따망
감관을 수호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망갈라경-Maṃgalasuttaṃ-행복경-위대한 축복의 경, 숫타니파타Sn 2.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라 하였다. 그런 열반은 수다원 오도송에서 보는 것과 같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열반이 또 가장 큰 복이라고 말씀 하셨다.
Aniccā sabbe saṅkhārā 아닛짜 삽베 싱카라
uppādavayadhammino, 웁빠다와야담미노
Uppajjitvā nirujjhanti 웁빳지뜨와 니룻잔띠
tesaṃ vūpasamo sukho. 떼상 우빠사모 수코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 현상의 적멸이야말로 지복일세.
諸行無常 제행무상
是生滅法 시생멸법
生滅滅已 생멸멸이
寂滅爲樂 적멸위락
(난다띠경-Nandatisutta-기뻐함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12, 전재성님역)
늦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늦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감상이나 우울한 기분이 든다면 이는 무상만 알 뿐이지 괴로움과 무아인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철저하게 나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무상, 고, 무아임을 안다면 감상에 젖거나 우울한 나는 있을 수 없다. 있다면 그 조건에 따른 일시적인 임시적인 나만 있을 뿐이다.
2012-11-11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음(Daum)의 치졸한 광고정책 (0) | 2012.11.14 |
---|---|
선수행과 자비의 분노, 깨달은 자의 조건은? (0) | 2012.11.13 |
스님의 밥상 (0) | 2012.11.08 |
“이 번 생에서 갚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 같아” 수행포교의 가능성을 보여 준 마가스님 (0) | 2012.10.30 |
고이지도 흘러내리지도 않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용출수 (0) | 2012.1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