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행과 자비의 분노, 깨달은 자의 조건은?
멈춤수행과 관찰 수행
두 가지 수행방법이 있다. 하나는 사마타(samatha)이고 또 하나는 위빠사나(vipassanā)이다. 사마타의 수행은 하나의 대상에 집중된 마음(心一境性, cittassa-ekaggatā)으로 정의한다. 마음이 한끝으로 집중되어서 마음의 떨림이나 동요가 가라앉았고 끝이 났기 때문에 고요함(사마타)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래서 한자어로 지(止)로 표시되며 멈춤수행이라 한다.
반면에 위빠사나수행은 정신과 물질의 변화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바로 들어간다. 이러한 알아차림의 힘과 정확한 겨냥을 얻게 되면 마음은 어떤 법칙을 따라서 항상 변화하는 정신과 물질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집중되는데 이것은 사마타의 근접집중에 필적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한자어로 관(觀)이라 표시되고 관찰 수행이라 한다.
이와 같이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대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수행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두 수행 모두를 다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마타만 닦았을 경우 어떤 문제가 있을까.
사마타만 닦았을 경우
사마타수행만 하였을 경우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다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탐욕(rāg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으로 대표되는 근본 번뇌들을 꿰뚫을 수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마타란, 마음과 대상이 온전히 하나가 된 그런 밝고 맑고 고요함에 억눌려서 이런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잠복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집중의 상태를 풀면 다시 이러한 번뇌의 공격을 받기 때문이다.
대승기신론에서 본 놀라운 문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대표되는 번뇌는 뿌리 뽑지 못하면 언제든지 발현한다. 그럴경우 자신도 모르게 욕심을 내고 화를 내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특히 화를 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대승기신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놀라운 문구가 있다.
復次若人唯修於止 부차약인유수어지
則心沈沒 或起懈怠 즉심침몰 혹기해태
不樂衆善 遠離大悲 불락중선 원리대비
是故修觀 시고수관
다시 다음에 만약 어떤 사람이 오직 지(止)만을 닦는다면
곧 마음이 침몰하여지고 혹은 게으름을 일으키어
뭇 착한 행위를 즐겨 행하지 않으므로 대비심을 멀리 여의게 된다.
그러므로 관(觀)을 닦아야만 한다.
(대승기신론)
대승불교의 사상적기반을 제공하는 대표적인 논서인 대승기신론에서 오직 사마타 수행만 하였을 때의 폐단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다. 오직 사마타 수행만 하였을 경우 자비심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법수행, 즉 위빠사나 수행도 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대승불교에서도 지관쌍수를 강조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선불교에서는 화두선이라는 사마타수행 일색이다. 나를 찾기 위하여 선방에서 3년, 10년, 20년, 30년 심지어 평생 공부하는데, 이런 결과 스님들에게 자비심을 찾아 보기 힘들다고 한다.
큰 스님이라는 분들도 걸핏하면 불 같은 화를 내었다는 말을 스님들의 법문에서 듣기고 하는데,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혹자는 이에 대하여 큰스님의 자비의 가르침이라고 미화 하지만 이에 대하여 비판적인 스님의 이야기는 다르다.
선수행만 하는 스님들의 성정
미디어붓다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동국대정각원 토요법회에서 도정스님은 오로지 선수행만을 하는 스님들의 성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마타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성질이 지랄같아요. 아주 괴팍하고 이기주의적이고. 왜냐하면 자기가 앉아서 수행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뽀시락 거리고 불편하게 하면 고개를 획 처다 보고 ‘아, 그거 인간 못됐네’ 욕설을 하고.. 아주 성질이 굉장히 날카로워져 있고 그러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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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 선방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눈은 맑고 초롱초롱하고 날카롭긴 하지만 자비심이 없어요.(웃음) 조금만 뭐 이야기 하면 벼락호통을 치고..”
(도정스님, 2012년 4월 21일 정각원 토요법회, 초기불교의 수행법, 미디어붓다 2012-05-16)
사마타 수행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말하고 있다. 정신집중을 특징으로 하는 사마타 수행에서 누군가 방해 하는 요인이 생겼을 때 매우 민감하게 반응 한다는 것이다. 이는 회계 관련 계산에 열중하고 있는데, 옆에서 말을 건다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과 같다.
오장애를 억압할 수 있지만
이는 무엇을 말할까. 사마타수행이 대상에 대한 집중을 함으로서 일시적으로 ➀ 감각적 욕망(kāmāchanda), ➁ 악의(vyāpāda), ➂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④ 들뜸과 후회(uddhacca-kukucca), ⑤ 회의적 의심(vicikichā)의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nīvaraṇa, 오장애)를 억압할 수 있지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는 다시 현실로 되돌아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감각적 욕망에 휘둘리고 화를 내는 것이다.
이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대표되는 번뇌가 뿌리 뽑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물질과 정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뿌리 뽑혔을 때 그 마음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특히 성냄과 관련된 반대되는 마음은 무엇일까.
자애의 마음으로
초기경을 보면 부처님이 화를 내었다는 말이 없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부처님이 보살로 수행을 하였을 때 사지를 갈기 갈기 찢었을 때도 결코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성냄이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냄이 소멸된 그 마음 자리에 어떤 마음이 자리잡고 있을까.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네 가지 거룩한 마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정형화 되어 있는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So mettāsahagatena cetasā ekaṃ disaṃ pharitvā viharati. Tathā dutiyaṃ. Tathā tatiyaṃ. Tathā catutthiṃ. Iti uddhamadho tiriyaṃ sabbadhi sabbattatāya sabbāvantaṃ lokaṃ mettāsahagatena cetasā vipulena mahaggatena appamāṇena averena abyāpajjena pharitvā viharati.
그는 자애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서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남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북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 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마음으로 일체의 세계를 가득 채운다.
(왓투빠마경-옷감에 대한 비유의 경- Vatthūpamasuttaṃ- The Simile of the Cloth-, 맛지마니까야 M9, 전재성님역)
자애(mettā)에 대한 정형구이다. 동서남북과 상하등 모든 방향으로 자애의 마음을 가득채우면 ‘악의(byāpajjana)’가 사라질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정형구는 네 가지 거룩한 마음 (四無量心, appamaññā)인 멧타(자애, 慈, mettā)와 함께 까루나(연민, 悲, karuṇā), 무디따(기쁨, 喜, muditā),, 우뻭카(평정, 捨, upekkh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를 사무량심이라 한다.
사무량심을 닦으면
그렇다면 사무량심을 닦으면 어떤 마음이 없어질까. 마하라훌로경(M62)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Mettaṃ rāhula bhāvanaṃ bhāvehi.
Mettaṃ hi te rāhula bhāvanaṃ bhāvayato yo vyāpādo so pahīyissati.
Karuṇaṃ rāhula bhāvanaṃ bhāvehi.
Karuṇaṃ hi te rāhula bhāvanaṃ bhāvayato yā vihesā sā pahīyissati.
Muditaṃ rāhula bhāvanaṃ bhāvehi.
Muditaṃ hi te rāhula bhāvanaṃ bhāvayato yā arati sā pahīyissati.
Upekkhaṃ rāhula bhāvanaṃ bhāvehi.
Upekkhaṃ hi te rāhula bhāvanaṃ bhāvayato yo paṭigho so pahīyissati.
라훌라여,
자애에 대한 명상을 닦아라.
라훌라여,
자애에 대한 명상을 닦으면,
무릇 성냄이 끊어질 것이다.
라훌라여,
연민에 대한 명상을 닦아라.
라훌라여,
연민에 대한 명상을 닦으면,
무릇 적의가 끊어질 것이다.
라훌라여,
기쁨에 대한 명상을 닦아라.
라훌라여,
기쁨에 대한 명상을 닦으면,
무릇 불쾌가 끊어질 것이다.
라훌라여,
평정에 대한 명상을 닦아라.
라훌라여,
평정에 대한 명상을 닦으면,
무릇 혐오가 끊어질 것이다.
(마하라훌로와다경-Mahārāhulovāda sutta- 라훌라를 가르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62, 전재성님역)
경에서 닦아야할것과 닦음에 따라 끊어지는 것이 있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닦아야 할 것 |
끊어지는 것 | ||
Metta |
자애 |
vyāpāda |
성냄 |
Karuṇa |
연민 |
Vihesā |
적의 |
Mudita |
기쁨 |
arati |
불쾌 |
Upekkha |
평정 |
paṭigha |
혐오 |
자애를 닦으면 성냄이 끊어지고, 연민을 닦으면 적의가, 함께 기뻐함을 닦으면 불쾌가, 평정수행을 하면 혐오가 끊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표로 만들어 보면
그렇다면 이와 같은 수행은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할까. 왓투빠마경 (M9)의 주석을 참고 하여 네 가지 거룩한 마음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사무량심 |
설 명 |
비 고 |
자애 (Metta)
|
어머니가 외동아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어떤 차별도 없이 중생을 사랑하는 보편적이며 무한한 사랑을 실천한다. |
까라니야멧따경(Sn 1.8) |
연민 (Karuṇa) |
근심과 번뇌로 괴로워하는 모든 중생에 대한 연민의 태도를 갖는다. |
둑가따경(S15:11) 수키따경(S15:12) |
기쁨 (Mudita) |
다른 사람의 성공, 복지, 행복을 축하하고 그것에 공감한다. |
|
평정 (Upekkha) |
인생의 모든 파란과 곡절에서 침착과 평정을 유지한다. |
쭐라깜마위방가경(M135) |
어머니가 외동아들을 사랑하듯이
자애의 마음을 내려면 어머니가 외동아들을 사랑하듯이 내라고 한다. 이는 숫따니빠따의 까라니야멧따경(자애경, Sn 1.8)에 근거한다. 까라니야멧따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Mātā yathā niyaṃ puttaṃ 마-따- 야타- 니양 뿟땅
āyusā ekaputtam anurakkhe 아-유사- 에까뿟당 아누락케
Evam pi sabbabhūtesu 에왐 삐 삽바부-떼수
mānasam bhāvaye aparimāṇaṃ 마-나삼 바-와예 아빠리마-낭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이와 같이 모든 님들을 위하여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
(까라니야멧따경-Karaniya Metta Sutta- 자애경, 숫따니빠따-Sn 1.8, 전재성님역)
자애의 마음을 낼 때는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한량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낼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런 마음은 자식을 낳아 키워 본 부모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와 같은 마음 가짐을 가지고 “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라는 자애의 마음을 낸다면 자애의 마음을 계발 할 수 있는데, 그결과로서 ‘성내는 마음 (vyāpāda)’이 소멸할 것이라 한다.
연민의 마음이 일어날 때
가난하고 불행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 연민의 마음이 일어난다. 또 지금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그 것이 불법과 탈법등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머지 않아 그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 명약관화 하기 때문에 연민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불행에 처한 사람은 한시바삐 불행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지금 행복한 이들은 이 행복이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이런 바램은 결국 번뇌를 야기 하고 괴로움으로 이끈다.
그렇다면 가난하고 불행에 처한 사람과 부유하고 행복에 가득찬 삶을 보았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 볼 수 있다.
자만심이란?
지금 여기 지하철 입구에 걸인이 앉아 있다고 하였을 때 대부분 동정심을 낸다. 연민의 마음이다. 그러나 연민의 대상이 되는 걸인의 마음은 어떨까. 그다지 좋지 않을 것임에 틀림 없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크게 훼손당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정하는 자는 ‘우월감’을 느끼고, 동정받는 자는 ‘열등감’을 느낀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월감 뿐만 아니라 열등감도 ‘자만심’이라 하였다. 잘난자는 잘 났기 때문에 우월감이라는 자만심이 있고, 못난자는 잘난자를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열등감이라는 자만심이 있다고 한다. 그런 자만심은 동등감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우월감, 열등감, 동등감은 모두 자만심으로 보는 것이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렇다면 가난하고 불행에 처한 사람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해야할까.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Yaṃ bhikkhave, passeyyātha duggataṃ durupetaṃ, niṭṭhamettha gantabbaṃ:
'amhehipi evarūpaṃ paccanubhūtaṃ iminā dīghena addhunāti'.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
라고 관찰해야 한다.
(둑가따경-Duggatasutta-불행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11(2-1),전재성님역)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았을 때 “한 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반조 하라고 한다. 기나긴 윤회의 과정에서 그와 같은 사람이었던 때가 반드시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조하면 연민을 보내는 자의 우월감과 연민을 받는 자의 열등감이 없을 것이라 한다.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들을 보았을 때
부유 하고 행복한 사람들을 보았을 때 시기하고 질투하기 쉽상이다. 그런 마음 은 열등감으로서 자만심에 해당된다. 이는 상대방을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aṃ bhikkhave, passeyyātha sukhitaṃ sajjitaṃ, niṭṭhamettha gantabbaṃ
"amhehipi evarūpaṃ paccanubhūtaṃ iminā dīghena addhunā"ti.
수행승들이여,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
라고 관찰해야 한다.
(수키따경-Sukhitasutta-행복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12(2-2),전재성님역)
‘우리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반조하는 것이다. 한량 없는 세월을 윤회하면서 분명히 부유하고 행복하던 때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민수행의 실패와 성공
이와 같이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면 가난한 자, 불행한 자를 보아도 연민의 마음은 낼 지언정, 그 사람의 앞일에 대하여 근심 걱정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연민수행이 실패 하는 요인이 연민을 넘어 근심과 걱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관조 하면 연민의 마음은 유지하지만 근심과 걱정을 하지 않는다. 또 나보다 더 나은 자에게 대해서도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관조 하면 적대감이 없어진다. 그래서 연민수행을 하면 ‘적의(Vihesā )’가 끊어진다고 하였다.
“훌륭한 일 하셨습니다”
‘함께 기뻐하는 마음(Mudita)’을 내는 것은 다른 사람의 성공, 복지, 행복을 축하하고 그것에 공감하는 것이라 하였다.
만일 누군가 보시를 하였을 때, 이 이야기를 듣고 반응하는 것은 두 가지로 갈릴 것이다. 하나는 칭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다.
“훌륭한 일 하셨습니다”라고 칭찬하였을 경우 보시자의 보시금액에 해당 되는 공덕을 쌓게 된다고 한다. 이를 한자어로 ‘수희공덕’이라 한다. 그러나 “무엇하러 그렇게 많이 보시하였습니까?”라고 깍아 내린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보시자의 보시행위에 대하여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보시에 의해서도 수행에 의해서도 계행을 지키더라도 진실을 말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한 공덕이란 없으며 또한 그 공덕의 과보도 없다”라고 말하는 유물론자의 견해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내면 타인의 성공과 복지와 행복에 대하여 ‘불쾌한 마음이 끊어지는 것이라 한다.
살다 보면 별 일을 다 겪게 되는데
평정 (Upekkha)의 마음을 내는 것은 인생의 모든 파란과 곡절에서 침착과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슨말일까.
살다 보면 별 일을 다 겪게 된다. 영화나 드라마 또는 다큐프로의 한 장면 같은 상황이 나에게도 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몹시 당황스러워 하고 어찌 할 바를 모른다. 더구나 그런 일이 자신의 능력 밖이라고 생각하였을 경우 자포자기 하거나 신에게 모든 것을 떠 넘겨 버릴 수 있다. 이럴 때 부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초기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마음을 내라고 하였다.
Kammasakkā māṇava, 깜마삭까 마나와
sattā kammadāyādā 삿따 깜마다야다
kammayoni 깜마요니
kammabandhu 깜마반두
kammapaṭisaraṇā. 깜마빠띠사라나
Kammaṃ satte vibhajati 깜망 삿떼 위바자띠
yadidaṃ hīnappaṇītatāyāti. 야디당 히납빠니따따야띠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쭐라깜마위방가경-Cūḷakammavibhaṅga suttaṃ-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5,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이 세속에서 바른 견해라고 부처님이 말씀 하셨다. 이를 ‘업자성정견’이라 한다.
업을 의지처로 하면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몹시 당황스런 일이 일어 나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마음의 평화는 깨지고 허둥거리게 된다.
그렇다면 업을 의지처로 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경의 주석을 보면 “육체적으로 몸이 아플 때 의사를 의지처로 삼듯, 선한 업을 쌓지 못해 저열한 세계에 태어 났을 때 고통은 심각하므로 진정한 질병의 치료는 자신의 치유력이듯 우리의 진정한 귀의처는 선업에 관해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비의 분노?
흔히 불교에 대하여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 한다. 이는 무슨 뜻일까. 지혜는 어리석음과 반대 되는 말이다. 자비는 자애와 연민의 복합어이다. 그런 자비는 성냄과 반대 되는 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독 즉, 탐욕, 성냄, 어리석음 중에 성냄이 소멸하면 그 자리에 자비가,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 자리에 지혜가 자리 잡는다. 남는 것은 탐욕이다. 탐욕이 소멸하면 그 자리에 관용이 자리 잡는 다고 한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깨달은 자라 하여 관용과 자비와 지혜가 넘쳐 난다고 본다.
그렇다면 지혜와 자비의 종교는 깨달은 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라 볼 수 있다. 깨달은 자라면 당연히 지혜와 자비가 넘쳐 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큰스님이 벌컥 화를 내었다면 어떻게 볼까. 이를 ‘자비의 분노’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자비와 성냄은 상극이므로 맞지 않는 말이다. 화를 내었다는 사실 자체는 성냄을 소멸하지 못하였다는 것이고, 또 다른 말로 자비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깨달은 자는
무언가 열중하고 있는데 누군가 깐죽거리며 방해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부분 성을 버럭 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참선에 열중하고 있는데 누군가 부스럭 거린다면 신경이 거스릴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럴 경우 화를 낸다고 한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에 따르면 선정수행만 해 가지고는 자비심을 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관법수행도 함께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지관쌍수를 말한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마타수행이 아니라 위빠사나 수행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마타수행의 바탕위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깨달은 자는 지혜롭기도 하지만 자비롭기도 하기 때문이라 한다.
201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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