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보다 사랑스런 것은 없다” 삐야(piya,사랑)가 아니라 멧따(metta, 자애)
한자어 법명(法名)
법명(法名)이 있다. 계를 받으면 법명을 받게 되는데, 남자재가신자의 경우 법진, 성공 등과 같이 두 글자이고, 여자재가신자의 경우 법보행, 법성화 등과 같이 세 글자가 보통이다. 그런데 수계인원이 많을 경우 비슷한 이름의 법명이 많다. 심지어 전 기수에 주었던 법명을 부여 받게 됨에 따라 동명이인의 법명도 수두룩 하다. 또 어느 법우님은 법명이 두 개, 세 개 되는 경우도 있다. 이 곳, 저곳 에서 수계를 받다 보니 법명이 많아 진 것이다.
이렇게 두 글자 또는 세 글자의 한지식 법명을 가진 불자들은 어떻게 호칭할까. 법명을 부르는 경우도 있고 실명을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여자 법우님들의 경우 법명을 부르는 경우가 많고, 남자법우님들의 경우 실명을 부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빠알리어 이름
초기불교가 소개 됨에 따라 초기경전을 읽는 불자들이 점점 늘어 나고 있다. 카페나 블로그 등 인터넷 공간에서 활동하는 불자들도 있고, 오프라인 모임을 만들어 공부하는 불자들도 있다. 이는 빠알리니까야의 번역에 따른 영향이 크다. 이렇게 초기불교에 대하여 공부하는 불자들 중에 빠알리어 이름을 가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빠알리어 이름이 유행하는 것은 초기불교의 확산과도 매우 밀접하다. 이는 빠알리니까야 속에 등장하는 수 많은 빠알리어 용어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공덕을 뜻 하는 뿐냐, 과거불 중의 하나인 수마나, 경전속의 재가불자의 이름인 위사까 등인데, 이런 용어나 이름을 스스로 자신의 필명으로 삼기도 하고 수계로 인하여 부여 받기도 한다.
빠알리 경전속에 수 많은 이름이 있다. 그 중에 잘 알려져 있는 여성 이름이 있다. 향내를 내는 꽃 이름인 ‘재스민(Jasmine)’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말리까(mālika)’가 그것이다. 말리까는 빠세나디 왕비의 이름이기도 하다. 동시에 지혜로운 여성불자의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여성불자들에게 빠알리어 법명으로 인기가 높은 것 같다.
재스민(영어: jasmine ← 페르시아어: yasmin, "신의 선물"이라는 뜻)은 재스민속(Jasminum)에 속하는 식물의 총칭이다. 한자로 말리(茉莉)라고 하며, 산스크리트 의 말리카(mallikā)가 어원으로, 원래는 말리화(茉莉花)라고 불렀다.(위키 백과)
“자신보다 사랑스런 것은 없다”
상윳따니까야에 말리까경(mālikasutta,S3:8)이 있다. 제 3상윳따인 꼬살라상윳따에 실려 있는데, 꼬살라국의 빠세나디 왕과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꼬살라국의 국왕 빠세나디는 다음과 같이 왕비 말리까에게 묻는다.
[빠쎄나디]
“말리까여,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이 있소?”
[말리까]
“대왕이시여,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런데 전하께서는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말리까경- mālikasutta, 상윳따니까야 S3:8(1-8),전재성님역)
경에서 말리까 왕비는 자주 나온다. 주석에 따르면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자따까에 실려 있다. 자따까에 따르면, 그녀는 꽃다발을 만들어 파는 가난한 집의 딸이었다. 16세 때에 부처님을 만나 부처님께 유미죽 공양을 드렸다고 한다. 부처님은 그녀가 왕비가 될 것을 예견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부처님과의 인연이 있는 말리까가 현세에 빠세나디를 만나는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빠세나디가 전쟁에서 패하여 도망다니다가 그녀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져 그녀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제일의 왕비가 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말리까가 왕비가 되었기 때문에 빠세나디 왕은 자신이 가난한 소녀를 왕비로 만들어 준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나보다 사랑스럽소”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물어 본 것이다.
그러나 말리까의 대답은 예상을 빗나가는 것이었다. 말리까는 현명하였기 때문에 정직하게 “자신보다 사랑스런 것은 없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물어 본 빠세나디 왕 역시 “말리까여, 나에게도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은 없소.(S3:8)”라고 말한 것이다.
삐야경(S3:4)과 삐야자띠까경(M87)
말리까경에서 왕과 왕비의 대화를 보면, 왕비가 더 지혜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신은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왕비가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왕비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고 믿고 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남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될까.
이는 두 가지의 케이스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는 상윳따니까야에서 빠세나디왕과 부처님의 대화를 담은 삐야경(Piyasutta, 사랑스런 이의 경, S3:4)이고, 또 하나는 빠세나디왕과 말리까왕비의 대화에 대화를 담은 삐야자띠까경(Piyajatikasutta, M87)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먼저 삐야경(S3:4)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대왕이여, 그렇습니다. 대왕이여,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이든 신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언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며 정신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가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겠습니까? 그들은 미워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든 신체적으로 착한 행위를 하고 언어적으로 착한 행위를 하며 정신적으로 착한 행위를 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가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겠습니까?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삐야경-Piyasutta-사랑스런 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4(1-4), 전재성님역)
빠세나디왕과 부처님과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빠세나디왕이 남보다 자신을 더 사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말하자 부처님이 추인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경에서 ‘자기 자신(atta)’은 절대적 자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업에 의하여 형성되는 자신을 말한다. 관습적 의미로서의 자아로서 오온의 복합체로서의 개인을 말한다.
경에서는 두 가지 반대되는 개념이 등장한다. 삐야(piya, 사랑하는)와 아삐야(apiya,사랑하지 않는)이다. 이 두 용어는 능동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수동적 의미(사랑받는, 사랑받지 않는) 의미 모두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신구의 삼업을 짓지 않을 것이라 하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면 신구의 삼업을 짓는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를 것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악한 자는 자신이 믿지 않더라도 자기가 자신의 적이다. 선한 자는 반대로 자신의 친구이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자신을 친구로 할 것인가 적으로 할 것인가
이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 (piyo atta) |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 (apiyo atta) |
신구의 삼업으로 선업을 짓는 자 |
신구의 삼업으로 악업을 짓는 자 |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의 친구 |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 의 적 |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선업을 짓는 자로서, 자기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반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악업을 일삼기 때문이며, 이는 자신을 ‘적’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신구의 삼업이 청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사랑하는 자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말리까 부인이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실행하고 있다는 말이다. 나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도 사랑할 수 있어서, 빠세나디 왕도 사랑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상대방을 더 사랑하였을 때
하지만 나 자신 보다 상대방만을 더 사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맛지마니까야 삐야자띠까경(Piyajatikasutta, M87)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말리까]
“대왕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빠쎄나디]
“말리까여,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말리까]
“대왕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나에게 변고가 생기고 이변이 생기면, 당신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이 생겨납니까?”
[빠쎄나디]
“말리까여, 그렇습니다. 만약에 당신에게 변고가 생기고 이변이 생기면, 나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이 생겨납니다.”
[말리까]
“대왕이여, 아는 님, 보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는 그것에 대하여 이와 같이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일어나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생겨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삐야자띠까경-Piyajatikasutta-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생겨나는 것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87, 전재성님역)
이 번에는 말리까왕비가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빠세나디왕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는 삐야경에서 말리까왕비의 대답과는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말리까왕비가 빠세나디왕 보다 더 지혜로운 것을 알 수 있다. 말리까왕비는 빠세나디왕 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많이 배우고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비는 나 자신 보다 타인을 더 사랑하였을 때 닥칠 재난을 이야기 한다. 필연적으로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을 불러 올 것이라 한다.
“내 외아들아, 어디에 있느냐?”
초전법륜경의 고성제에 따르면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piyehi vippayogo)’도 괴로움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가진 것에서 기인한다. 헤어지고 난 다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데 이를 경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때 어떤 장자의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외아들이 죽었다. 그 죽음으로 그는 일할 것도 생각하지 않고 음식을 먹을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묘지로 가고 또 가서 ‘내 외아들아, 어디에 있느냐? 내 외아들아, 어디에 있느냐?’라고 비통하게 울었다.
(삐야자띠까경-Piyajatikasutta-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생겨나는 것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87, 전재성님역)
장자의 외동아들이 죽자 장자는 마음의 통제를 벗어나 거의 착란지경에 이르렀다. 죽은 자식을 찾는 장자의 비통함을 보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장자여, 그것은 이와 같다.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일어나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생겨난다.”
(삐야자띠까경-Piyajatikasutta-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생겨나는 것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87, 전재성님역)
이렇게 부처님은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라고 말씀 하셨다. 그래서 괴로움은 사랑하는 사람으로 부터 생겨 난다고 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기쁨이 일어난다고?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
“장자여, 그것은 그렇습니다. 장자여, 그것은 그렇습니다. 환희와 쾌락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일어나고, 환희와 쾌락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생겨납니다.”
(삐야자띠까경-Piyajatikasutta-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생겨나는 것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87, 전재성님역)
부처님으로부터 만족한 답을 얻지 못한 장자는 비웃었다. 그리고 도박꾼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 갔다. 그곳에서 부처님의 하신 말씀을 이야기 하자, 도박꾼들은 부처님과 정반대의 말을 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환희와 쾌락이 일어난 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기쁨과 환희와 즐거움을 느낀다. 애인이 생기거나 자식이 생기거나 무언가 사랑스런 대상이 생길 때 보고, 듣고,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전도된 인식이다.
욕구의 대상으로 하였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은 괴로움의 씨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과는 언젠가 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죽었을 때, 남편이 죽었을 때, 자식 등이 죽었을 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말리까왕비는 빠세나디왕에게, 사랑하게 됨에 따라 일어나는 재난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상대방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집착’을 경계한 것이다. 상대방을 자신의 소유물이나 욕구의 대상으로 또는 신체의 일부만을 사랑하였을 때일 것이다. 특히 애정관계에 사이에 더욱 더 그렇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 보다 상대방을 더 사랑하는 것은 집착이다. 신구의 삼업에 따른 불건전한 사랑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사랑은 필연적으로 변고나 이변의 발생으로 인하여 괴로움과 절망을 야기할 수 밖에 없다.
사랑하는 자와 오욕락
그래서 법구경 삐야왁가(Piyavagga, 사랑하는 자의 품)에서도 다음과 같이 노래 하였다.
Mā piyehi samāgañchī 마삐예히 사마간치
appiyehi kudācanaṃ, 압뻐예히 꾸다짜낭
Piyānaṃ adassanaṃ dukkhaṃ, 삐야낭 아닷사낭 둑캉
appiyānañ-ca dassanaṃ. 압삐야난짜 닷사낭
사랑하는 자도 갖지 말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자는 만나지 못함이 괴로움이요,
사랑하지 않는 자는 만남이 괴로움이다.
(법구경, Dhp210, 전재성님역)
법구경에서 말하는 ‘사랑하는 자’는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사랑하는 자(piyaggahi)는 뭇삶과 관계된 것이기도 하고 형성된 것과 관계된 것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오욕락’을 말한다.
삐야(piya)와 멧따(metta)
빠알리어 삐야(piya)는 ‘사랑’으로 번역되었다. 이는 자애(loving-kindness), 우정(friendly)을 뜻하는 멧따(metta) 와 다른 것이다. 삐야는 육체적이고도 세속적인 사랑에 대한 것으로 ‘dear; amiable; beloved. (m.) the husband. (nt.) a dear thing.’로 영역된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에서 삐야경(S3:4)이라 하여 ‘사랑스런 이의 경’ 으로 이름 지어 졌고, 맛지마니까야에서 삐야자띠까경(M87)이라 하여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생겨나는 것에 대한 경’이라는 긴 이름으로 명명 되었고, 법구경에서는 삐야왁가라 하여 ‘사랑하는 자의 품’으로 이름 지어 졌다.
안보면 보고 싶고 보면 시큰둥하고
게송에서 “사랑하는 자도 갖지 말라 (Mā piyehi samāgañchī). 사랑하지 않는 자도 갖지 말라 (appiyehi kudācanaṃ).”라 하였다. 이는 한 순간이라도 그것이 뭇삶이건 형성된 것이건 사랑스러운 것과 사랑스럽지 않은 것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다음 문장을 보면 “사랑하는 자는 만나지 못함이 괴로움이요(Piyānaṃ adassanaṃ dukkhaṃ), 사랑하지 않는 자는 만남이 괴로움이다(appiyānañ-ca dassanaṃ)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DhpA.III.275에 따르면 사랑스런 자(뭇삶)나 사랑스런 것(형성된 것)과 헤어져, 보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스럽지 않은 자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을 가까이 있어서, 보아야 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Dhp210 각주)
사랑하는 사람이건 무엇이든 간에 한 번 인연을 맺어 놓으면 괴로움의 뿌리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안보면 보고 싶고, 보면 시큰둥하거나 화나는 그런 대상을 말한다. 애증의 관계를 말한다.
탐욕과 분노를 여의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 게송이 이를 잘 말해 준다.
Tasmā piyaṃ na kayirātha, 따스마 삐양 나 까이라타
piyāpāyo hi pāpako, 삐야빠요 히 빠빠꼬
Ganthā tesaṃ na vijjanti 간타 떼상 나 윗잔띠
yesaṃ natthi piyāppiyaṃ. 예상 낫티 삐얍삐양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를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자와 헤어지는 것은 참으로 불행이다.
사랑하는 자도 사랑하지 않는 자도 없는
그 님들에게는 참으로 속박이 없다.
(법구경, Dhp211, 전재성님역)
사랑하는 자를 만들었을 때 필연적으로 헤어져야 한다. 연인이 되었건, 부부가 되었건,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되었던 간에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 마치 사랑하는 외동아들을 잃은 장자처럼 묘지로 가고 또 가서 “내 외아들아, 어디에 있느냐? 내 외아들아, 어디에 있느냐?”라고 비통하게 울 것과 같다는 것이다. 좋아 하는 물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귀하게 여기는 골동품이 깨졌을 때 아까운 마음 이루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사랑는 자를 만들지 말라 (Tasmā piyaṃ na kayirātha)”라고 하였다. 자신에게 사랑스런 자나 사랑스런 그 무엇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때 속박이 없을 것이라 한다. 그 속박은 탐욕에 매인 신체적 속박과 분노에 매인 신체적 속박을 말한다. 탐욕과 분노를 여의면 나머지 속박도 버려질 것이라는 말이다.
삐야(piya,사랑)가 아니라 멧따(metta, 자애)
삐야(piya)라는 말은 사랑으로 번역되고, 세속적이고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욕망 추구에 대한 것이다. 이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스런 것들에 대한 집착을 말하는데, 반드시 헤어짐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초전법륜경의 고성제에서 언급된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piyehi vippayogo , 愛別離苦)'이 이에 해당된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필연적으로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모든 고통과 절망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일어나고 발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말리까왕비는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하였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탐욕과 성냄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운명적 파탄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랑이라는 말 대신 자애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사랑이라는 말은 오욕락을 바탕으로 하는 삐야(piaya, 사랑)의 번역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애라는 말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과 다르다. 뭇삶들의 행복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까라니야멧따경(자애경, Sn1.8)에 따르면,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모든 님들을 위하여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로 표현되어 있다.
자애명상에서 남녀간의 애정관계나 죽은 자에 대한 것은 제외 된다. 따라서 자애의 마음은 아무리 많이 방사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량없이 무한하게 방사할 수 있는데, 반드시 자기자신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남들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말리까왕비가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남들도 사랑할 수 있는데 그 사랑이라는 것이 ‘삐야(사랑)’가 아니라 ‘멧따(자애)’라는 것이다.
2012-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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