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우리말 디가니까야를 구입하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2. 3. 17:09

 

우리말 디가니까야를 구입하고

 

 

 

디가니까야을 구입하였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박사가 역주한 책이다. 1500여페이지 달하고 한권으로 되어 있다. 사부니까야 중에 가장 늦게 번역된 이 책은 2011년 출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불과 1년전에 출간 된 책이다. 상윳따니까야가 1999년에 최초로 출간된 것과 비교 하면 무려 12년만이다. 맛지마니까야가 2003년 출간 되었고, 앙굿따라니까야가 2008년에 출간됨에 따라 사부니까야를 한사람의 힘으로 완역한 것이다.

 

 

 

 

 

 

 

 

 

 

 

혼자 번역해서는 안된다고?

 

이는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고 최초라 한다. 그렇다면 한사람의 힘으로 완역된 경전의 권위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어느 법우님이 댓글을 남겨 주셨다.

 

 

혼자 해서는 안 된다. 공동작업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넘 피상적으로 들리네요. 가령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라틴어 성경 불가타는 히에로니무스가 혼자서 번역한 것입니다. 물론 오류가 꽤 있지만, 지금까지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지요. 저는 독일에서 전재성 박사를 지근에서 뵌 사람으로 그 분의 학문적 깊이를 잘 알고 있기에 감히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N법우님, 2012.11.19 08:41, 탄광의 광부가 석탄을 캐는 심정으로…”전재성박사가 번역한 책들)

 

 

니까야 공동번역의 필요성에 대한 반론글이라 볼 수 있다. 가톨릭의 경우 라틴어 바이블을 히에로니무스가 혼자서 번역하였다고 한다. 공동번역이 아닌 홀로 번역한 것일지라도 현재 라틴어 정경으로 인정되고 있다고 한다.

 

히에로니무스는 누구인가

 

히에로니무스에 대하여 검색하여 보았다. 위키백과에 다음과 같이 소개 되어 있다.

 

 

에우세비우스 소프로니우스 히에로니무스(라틴어: 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348 - 420 9월 30)또는 예로니모(Jeronimo), 제롬(영어: Jerome) 4세기 수도원 운동이 낳은 위대한 성직자이다.[1]. 제1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초대교회 신학자이자 서방 교회의 4교부 중 한 사람으로서 성경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은 라틴어로 ‘신성한 사람’을 뜻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인으로 추대하고 있다. 교회박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축일은 9월 30. 흔히 상체를 벗은 은수자로서 펜을 들고 저술에 몰두하거나 돌로 가슴을 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상징물은 십자가·해골·모래시계·책·두루마리이며, 학자·학생·고고학자·서적상·순례자·사서·번역가·수덕생활을 하는 사람의 수호 성인이다.

 

(히에로니무스, 위키백과)

 

 

히에로니무스는 로마제국 당시 국경부근의  달마티아(구 유고연방)근처에서 태어 났다고 한다.  373년 예루살렘을 순례한뒤 헬라어를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랍비로부터 히브리어를 배워 라틴어 바이블을 번역하는데 매진 하였다고 한다. 그 때 당시 여러 종의 라틴어 바이블이 있었지만 뛰어난 외국어 학식에 바탕을 둔 그의 번역이  인정됨에 따라 교황 다마소 1세의 후원을 받아 교회에서 인정된  유일한 라틴어 바이블이 되었다고 한다. 이를 불가타역 바이블이라 한다.

 

공동작업이 아니더라도 한 사람의 뛰어난 번역 능력으로 인하여 정전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례는 중국에서도 볼 수 있다.

 

구마라즙과 현장법사

 

현재 금강경, 법화경등 주요 대승불교 경전은 서역승 구마라즙(鳩摩羅什, Kumarajiv, 344-413)이 번역한 것이다. 또 삼장법사로 잘 알려져 있는 현장법사(602-664) 역시 자신이 인도에서 가지고 온 경장, 율장, 논장 삼장을 번역하는데 일생을 보내게 된다.

 

이렇게 주요 대승경전의 경우 번역자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이는 홀로 번역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혼자 번역한 경우 용어와 문체 등 역자만의 독특한 번역방식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왜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였을까

 

빠알리니까야의 경우 아직까지 한역되지 않은 것으로서 우리말로 바로 번역 된 것은 전재성박사의 쌍윳따니까야가 최초이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말로 풀어져 있다는 것이다. 가급적 한자용어를 배제하고 우리말로 풀어 쓴 것은 누구나 볼 수 있게 하자는 취지라 한다. 이에 대하여 해제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역자는 학창시절 고아원야학 선생을 하다가 버려진 고아들에게도 이해가 가능한 불경을 번역해야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경전 자체가 주는 문맥상의 의미를 정확히 읽어야 하고 일상용어를 사용하여 번역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역자의 주관적인 선입견이 반영되었겠지만, 그러한 것을 최소한 줄이기 위해 역자는 영국, 독일, 일본 등 세계적인 번역본을 모두 참고했습니다. 그러나 빠알리어를 서구적인 번역어가 깊이 침투해 있는 우리의 일상용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번역에서 어느 정도 왜곡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왜곡을 치유하려면, 독자들은 빠알리 원전을 직접 읽는 수밖에 없습니다.

 

빠알리어 자체는 철학적으로 고도로 정밀화된 추상적 사유체계와 개념적 연결관계를 갖고 있어 번역에서 그러한 사항을 제대로 반영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역자는 번역된 우리말 문맥 속에서 난해한 의미가 저절로 드러나도록 가능한 한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고 개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쌍윳따니까야 해제, 전재성박사)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에 따르면 전재성박사는 이미 대학시절부터 번역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때 당시 야학교사로 있었는데 어려운 한문경전을 아이들이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라 보여진다.

 

불교교양대학에서 배우는 반야심경, 천수경, 금강경 모두 한문경전으로 되어 있는데, 비록 한글로 번역되어 있을지라도 강사의 설명이 없다면 한 줄도 나아 갈 수 없다. 하물며 청소년들이 한문경전을 이해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에 틀림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빠알리 니까야 역시 매우 심오한 내용의 경우 우리말로 번역 되어 있더라고 번역 방식에 따라 읽기가 난해 할 수 있다. 더구나 오래 된 한자용어까지 곁들여 있다면 먼저 한자용어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더 읽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런 예에 대한 것을 디가니까야 해제에서 보았다.

 

영역과 독역, 그리고 일역

 

디가니까야의 경우 영어와 독일어, 일본어로 번역 되어 출간 되었다. 로마나이즈화된 빠알리 원전은 리스 데이비스(T. W. Rhys Davids)와 카펜터(J. Estin Carpenter)에 따른다. 스리랑카와 미얀마, 태국의 원전을 비교하여 교열이 이루어진 로마자 빠알리 원전의 첫권이 1890년에 나온 이래 번역이 이루어 진 것이다.

 

영역의 경우 1886년 리스 데이비스에 의하여 최초로 나온 후 45년후 완간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번역한 것이라서 적지 않은 번역상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독역의 경우 칼 오이겐 노이만(K. E. Neumann)에 의하여 번역 되었다. 빠알리 문법학적으로 탁월한 번역으로 평가 받고 있으나 흐름에 든 자를 뜻하는 예류자(Sotapanna)’에 대하여 경청하는 이등으로 번역하여 많은 오역이 발견 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 우이 하쿠쥬(宇井伯壽), 기무라다이켄등 유명한 학자들이 각각 경전의 일부를 맡아 번역하였다고 한다. 1935년과 1936년에 세권이 장부경전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고어(古語)사전이 없으면 읽을 수 없는 번역

 

그런데 번역을 보면 언어선택에 있어서 현대적 일상언어가 아닌 고어(古語)’를 채택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고어사전이 없으면 읽을 수가 없을 지경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일본에서 최근에 디가니까야신역이 나왔다. 남전대장경 안에 포함되어 있는

우이 하쿠쥬(宇井伯壽) 등이 번역한 장부경전이 현대적 일상어가 아닌 고어로 번역되어 오늘날 고어사전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경전의 종교적 권위를 보전하려고 했던 대정신수대장경간행회의 의도였지만, 진정한 권위는 가르침 자체가 갖는 진리성에서 나오며, 그를 위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경전에 접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었다.

 

(디가니까야 해제, 전재성박사)

 

 

일본에서 디가니까야 신역이 나온 것은 2006년이라 한다. 1936년에 번역된 우이 하쿠쥬(宇井伯壽)의 번역이 매우 어렵고 난해한 한문투의 용어를 사용함에 따라 읽기 힘든 단점을 보완한 것이라 한다.

 

어렵고 난해하게 번역한 이유는 그 때 당시 대정신수대장경간행회의 의도 때문이었다고 한다. 종교경전이 어렵고 난해해 보어야 종교적 권위가 살아나는 것으로 본 그 때 당시 종교기득권층의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라 보여진다.

 

바이블 구역을 보면

 

기독교인들의 바이블을 보면 옛날에 번역된 구역이 있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은 구한말의 언어와 한자용어 투성이로 되어 있어서 읽기가 매우 난해하다. 신역이 있지만 지금도 교회에서는 구역이 많이 사용된다고 한다. 그렇게 어려운 구역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종교적 권위 때문이다. 종교경전은 내용이 어려워야 종교적 권위도 살고 성직자의 권위도 높아 질 것이다. 이는 한문경전도 마찬가지이다.

 

한문으로 독송해야 맛이 난다고

 

불자들이 많이 보는 경전이 금강경이다. 대부분 한문으로 된 경전을 본다. 5,249자로 이루어진 한문금강경 그 자체를 이해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독송용으로는 활용되지 않는다. 한글로 된 금강경을 읽으면 독송하는 맛이 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문으로 된 금강경을 독송해야 맛이 나고, 비록 뜻은 모를지라도 더 신심이 나고 더 공덕을 쌓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도들이 무지 할수록

 

이렇게 이 세상의 어느 종교이든지 대부분의 경전의 내용은 읽기가 어렵다. 이를 다루는 성직자들만이 알 수 있는 언어로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신도들이 많이 알고 이해 하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자신들의 권위가 더 올라 가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고, 알 수 없는 게송을 읊고, 알 수 없는 방언을 함으로써 종교적 권위를 세워 나간다. 신도들이 무지 할수록 자신들의 권위는 커지고 또한 먹고 사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문장을 통하여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일본에서 1930년대 번역된 디가니까야의 일역에 한문투의 번역이 많다는 것도 종교적 권위 때문이라 한다. 기존 대승불교경전에서 사용되었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지금은 쓰이지 않는  1000년 전 죽은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종교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의도적 번역으로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재성 박사는 해제글에서 가장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번역하였다고 한다. ‘브라흐마(brahma)’를 종래대로 범천(梵天)’이라 번역하지 않고 하느님으로 번역한 것이 좋은 예라 볼 수 있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로 번역한 것은 한글만 보아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여래십호에서 아라한을 거룩한 님이라든가, 정등각자를 위없이 높으신 님’, ()깨달은 님등으로 번역한 것을 보면 달리 불교용어 사전을 찾아 보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가급적 순수 우리말로 풀어 번역한 것은 경전자체가 주는 문맥상의 의미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경전의 문장을 통하여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어려운 한자 용어를 써 놓고 이에 대하여 주석을 통하여 상세하게 해설하는 방식 보다, 문맥속에서 난해한 의미가 저절로 드러나도록 하자는데 목적이 있다고 한다.

 

승복의 권위

 

종교적 권위를 높이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에 승복의 권위가 있다. 성직자들의 승복을 보면 가운형식으로 된 것이 많다. 대학졸업식에서 총장이나 교수들이 입는 가운은 권위를 상징한다. 이런 가운은 법정에서도 볼 수 있다. 판사들이 입는 가운 자체가 법에 대한 권위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교회에서도 가운을 볼 수 있다. 목사들이 설교할 때 가운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매가 넓고 발끝까지 닿는 긴 가운과 모자는 종교적 권위를 상징한다. 이는 불교에서도 볼 수 있다.

 

불교TV에서 어느 종단의 창종행사에 대한 특집 프로를 보았다. 신규종단 창종식에서 종정은 금빛 가사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역시 금빛으로 빛나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렇게 긴 소매와 긴 가운을 특징으로 하는 성직자의 복장은 보통 사람들과 다름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종교적 권위이자 승복의 권위라 볼 수 있다.

 

경전의 진정한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가

 

마찬가지로 경전 역시 어렵고 난해하고 이해 하기 어려운 글씨로 가득하다. 그렇게 쓰여 져야만 심오한 내용처럼 보이고 여 경전의 권위가 올라가 보여서 일 것이다. 그래서 신도들이 내용을 모르면 모를수록 성직자의 권위는 올라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일부러 어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급적 쉬운 우리말로 번역된 빠알리 니까야를 보면 누구나 읽을 수 있고, 문장을 읽는 과정에서 문맥의 난해한 의미가 드러날 수 있다면 경전의 권위, 승복의 권위, 종교의 권위는 사라질 것이다. 진정한 권위는 어려운 한자용어가 잔뜩 들어가 있는 경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한글로 된 경전일지라도 가르침 자체가 갖는 진리성에서나오기 때문이다.

 

 

 

2012-12-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