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예수님 믿으세요”길거리 전도사 퇴치법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1. 21. 11:27

 

 

예수님 믿으세요길거리 전도사 퇴치법

 

 

 

늘 궁금한 것 하나

 

늘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길거리에서 예수님 믿으세요라고 툭 던지며 사라지는 것에 대한 것인데, 그 중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걸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파트와 주택이 골고루 섞여 있는 동네에서 종종 예수 믿으세요라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 마다 그들은 어떻게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은 사람인지 알았을까 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들에게 보는 눈이 있는 것일까. 이처럼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전형적인 선교행태이다. 그러나 대상이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일반적으로 교회에 가는 사람들은 잘 차려 입는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정장차림이 보통이다. 그런 그들이 예배가 끝나고 바이블을 옆구리에 끼고 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의 일부는 지나가는 사람을 향하여 예수님 믿으세요라고 툭 던지며 지나간다.

 

 

 

 

 

 

 

이 때 선교의 대상은 불특정다수라기 보다 허름한 옷차림이 되기 쉽고, 또한 자신 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 만만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대상이 되기 쉬운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쪽집게 처럼 집어 내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 느낌을 실제로 받았다.

 

처음 한 두번 들었을 때 그러려니 하였다. 그러나 자주 반복되니 짜증이 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동일한 사람으로부터 그런 소리를 연이어 들었을 때 더욱 그러 하였다.

 

예수님 믿으십시요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꼭 물어 보고 싶은 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의 경우도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마침 기회가 왔다. 두 번이나 예수님 믿으세요라고 툭 던지며 지나가던 초로의 신사와 마주친 것이다. 지난 번과 같이 힐끗쳐다 보며 기습적으로 예수님 믿으세요라고 툭 던지며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그 사람을 뒤쫒아 갔다.

 

뒤쫒아가서 만일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걸리면 어떻게 하겠어요?”라고 물어 보았다. 그런데 그사람의 대답은 의외이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걸렸을 경우 아니면 말고식 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의외로 그 답은 복 받는 것이지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복 받는 것이지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여 예수님 믿으세요를 남발하는 기독교인 들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복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다니지 않은 사람들은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이는 크리스천 친구와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적 믿음에 기인 한다.

 

크리스천 친구의 말에 따르면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말하였고 실제로 기독교인들은 그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있다고 한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길거리에서 예수님 믿으세요라고 툭 던지며 사라지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들은 모두 지옥에 가게 될 불쌍한 존재로 벌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면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것이기 때문에 복 받는 것으로 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유치원 동화를 보는 듯

 

유일신교도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은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불쌍하게 본다. 지옥에 갈 것이 뻔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쌍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열심히 선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일신교도들을 바라보는 불자들은 그들의 행태를 이해 하지 못한다. 오히려 어리석게 보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호진스님의 글 불교인인 본 기독교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만약 불교인들에게 신과 인간의 창조문제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신이 인간을 만든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불교인들에게는 신이 존재하는가 않는가라는 것은 아예 문제로 제기조차 되지 않는다.

 

(호진스님, 불교인인 본 기독교)

 

  불교인이_보는_기독교_호진스님.doc

 

 

 

유일신교에서는 창조주가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믿고 있으나 이는 그들의 믿을 일 뿐 불자들은 그런 말을 믿지 않는다. 불자들은 이를 일체유심조라 하여 마음이 만들어낸 것으로 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실체도 없고 실재하지도 않은 개념 또는 관념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창조주에 대하여 허구로 보기 때문에 창조론, 원죄론, 종말론, 구원론 등에 대하여 일종의 신화 또는 동화정도로 취급하는 것이다.

 

유일신교의 기적이란

 

호진스님은 신의 창조문제, 구세주로서의 예수, 기독교의 사랑, 예수의 기적과 부활 등 불자들의 시각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비판 하였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인터넷시대에 안티 사이트에 들어 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신교들이 더욱 더 번성하고 득세하는 것을 보면 이해 할 수 없다. 그래서 호진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되풀이해서 말하자면, 불교인이 놀라는 일은 예수가 일으킨 기적이나 부활과 같은 일들이 아니라, 이와같은 보잘것 없고 허황한 사건들이 어떻게 이렇게 거창한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 낼 수 있었고, 인류문화와 세계역사에 그렇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기독교의 기적을 말하라고 한다면, 예수가 행했다는 그런 것이 기적이 아니라, 위에 말한 바로 이점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호진스님, 불교인인 본 기독교)

 

 

기독교인들의 기적에 대한 것이다. 바이블을 보면 예수가 여러가지 기적을 연출하였지만 진짜 기적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인들이 보기에 보잘 것 없는 교리 즉, 창조론, 원죄론, 종말론, 구원론 등과 같은 동화 같은 교리로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였고 전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종교가 된 것을 말한다. 특히 한국에서 갈수록 교세가 확장되고 사회 전분야에 있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 하는 종교가 된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이다.

 

깟짜나곳따경(S12:15)에서

 

불교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일신교의 교리는 동화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유일신교의 창조론 등의 교리의 허구성에 대한 예를 낱낱이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교리가 왜 허구인 것인가에 대하여 불교 교리로 논파할 수 있는 불자들은 드믈다. 이는 대승불교의 한계이다.

 

그러나 초기경에 따르면 창조주를 특징으로 하는 유일신교가 왜 허구인가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도처에 있다. 이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창조주를 특징으로 하는 영원주의 종교를 논파 하였을까.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잘 말해 준다.

 

 

Dvayanissito kho'ya kaccāna loko

yebhuyyena atthitañceva natthitañca.

 

Lokasamudayañca kho kaccāna yathābhūta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natthitā, sā na hoti.

 

Lokanirodha kho kaccāna yathābhūta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natthitā, sā na hoti

 

[세존]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나 비존재[] 두 가지에 의존한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 상윳따니까야 S12:15(2-5), 전재성님역)

 

  깟짜나곳따경(S12.2.5).docx

 

 

 

이 경의 실려 있는 짤막한 문구가 창조론으로 대표되는 영원주의와 단멸론으로 대표되는 허무주의를 논파 한 것이다. 그 내용은 무엇일까.

 

영원주의 논파

 

영원주의 논파에 대한 문구가 세상의 소멸 (Lokanirodha) 을 지혜로서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모든 현상은 원인과 조건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모든 형성된 존재들이 조건없이 스스로 일어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여기 마음이 있다. 그런데 마음은 날씨가 매일 변하듯이 매번 변한다. 즐거운 마음이 들다가도 어느 순간 어두운 마음이 되기도 한다. 이는 보는 것, 듣는 것 또는 갑자기 생각나는 것 등에 따라 마음이 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음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진다. 사라지면서 조건을 남기기 때문에 또 다음 마음이 연이어 일어난다. 그런 마음은 통제가 안된다. 내마음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내 마음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무아라고 한다. 그런데 영원론자들은 마음이 내마음이라고 한다. 또 그런 마음은 영원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죽어 천국에 태어나면 영원히 살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마음이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듯이 영원한 마음, 영원한 나, 영원한 세상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경에서 부처님이 말힌 세계의 소멸은 역관적 조건형태를 말한다. 그래서 올바른 지혜(sammappaññā) , , 올바른 통찰의 지혜(觀智, vipassanapaññā)와 올바른 길의 지혜(maggapaññā)로써 모든 형성되어진 존재들이 끊임없이 무상하게 소멸해 가는 것을 관찰하면 모든 존재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상주론)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허무주의 논파

 

허무주의 논파에 대한 문구는 세상의 발생 (Lokasamudayañca)’을 지혜로서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조건의 소멸 없이 스스로 단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본다.

 

경에 따르면 세계의 발생은 순관적 조건형태를 말한다. 그래서 올바른 지혜(sammappaññā) , , 올바른 통찰의 지혜(觀智, vipassanapaññā)와 올바른 길의 지혜(maggapaññā)로써 모든 형성되어진 존재들이 모든 형성되어진 존재들이 업(kamma),무명(avijja), 갈애(tanha) 때문에 끊임 없이 생겨나는 사실을 통찰한다면, 현세의 존재에게 더 이상 내생이 없다는 허무주의(단멸론)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를 마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마음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조건이 없어지지 않는 한 마음은 뒤이어 일어 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내생이 없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 아라한이 되어 번뇌가 다 소멸 되어 더 이상 업을 짓지 않은 이상,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로 인하여 재생의 마음이 일어 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단멸론이 논파 되는 것이다.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이렇게 부처님은 연기법으로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가 거짓임을 논리적으로 논파 하였는데 그 중심에 조건이 있다. 따라서 연기법은 조건법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조건에 따라 법이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절대유나 절대무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Sabbamatthī'ti kho kaccāna,

ayameko anto. Sabba natthī'ti aya dutiyo anto.

Ete te kaccāna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 deseti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깟짜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 상윳따니까야 S12:15(2-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절대유(atthita, 영원주의)와 절대무(natthita, 허무주의) 양극단을 연기법으로 배제하였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도라 하는데, 그런 중도가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시작 하여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라고 끝나는 12연기법을 설하였다.

 

이렇게 부처님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보는 영원주의와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몸이 파괴되고 단멸하고 소실하여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보는 허무주의를 연기법으로 논파하여 거짓임을 증명한 것이다.

 

길거리 전도사 퇴치법

 

길거리에서 전도사들이 극성이다. 특히 서울과 수도권에서 심하다. 그런 전도사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믿으세요라고 툭 던지며 지나간다. 이와 같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던지는 말은 불쾌를 유발한다.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내 뱉는 것이다. 대부분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무시 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길거리에서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전도하는 행위는 대단히 무례하다. 단지 사람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들의 종교가 가장 좋다는 우월감의 발로로 본다. 그런 유일신교의 전도사들의 행태에 대하여 단지 마음속으로 동화 같은 교리정도로 무시하는 것이 불자들의 일반적인 행태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의 교리가 허구임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장 먼저 불교교리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한다. 그것도 초기불교 교리를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논파하였다. 따라서 길거리 전도사를 퇴치 하기 위해서는 연기법으로 논파하여야 한다. 단지 그들의 교리가 동화에 불과하고 일체유심조에 지나지 않다고 여기기 보다 연기법으로 그들의 교리가 허구인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알려 주고 그들을 신의 족쇄로부터 해방 시켜 주어야 한다.

 

 

 

2012-11-2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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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이_보는_기독교_호진스님.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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