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하하하하! 월호스님의 힐링선(healing禪)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방송에 불교강좌시간이 있다. 매일 아침 6시부터 40분간 인천 Y선원의 S선사의 법문이 방송되고 있다.
선사의 법문은 전형적인 간화선에 대한 것이다. 산중에서 스님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간화선을 시민들에게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선사의 법문을 듣고 있으면 현재 한국의 주류 수행법인 간화선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대략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런 스님의 간화선은 어떤 것일까. 녹취한 것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이 무엇이냐? 이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있어. 마치 차가 혼자 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운전사가 있어 가지고 운전을 함으로 해서 차가 목적지를 향해서 가듯이, 이 육체도 이 주인공이 있는 것이여. 전부가 주인공의 지시에 의해서 가는 것이지 이 몸이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가는 것이 아닌 것이여.
그 주인공, 그 주인공은 분명히 있는데 우리 눈으로는 볼 수가 없어. “아무게야” 하고 부르면 “예”하고 대답할 줄도 알고, 욕하면 성낼줄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할 줄도 알고, 희로애락의 생각도 주인공이 일으키는 감정의 표현이다 그말이여. 진여불성이라고도 하고, 자성이라고도 하고, 심성이라고도 하고, 참나라고도 하고 여러가지 이름은 많지만 그것을 가리켜 이것이라 하고, 대관절 이것이 무엇인고 하며 항상 참구를 하는 것이여.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이론을 사용하지 않고 ‘이뭐꼬~’ 그렇게만 해 나가는 것이여. 교리적으로 따지거나 철학적으로 따지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앞뒤도 없이 거두절미하고 ‘이뭐꼬~’아~알 쑤 없는 의심으로 그 주인공을 찾는거여.
보통 의심을 한다고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상식, 이론을 총동원 해가지고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따져보고 “아하, 이런 것이 아닌가?” 하며 차츰차츰 알아들어 가는 것인데, 이 화두는 참선공부는 이론으로 따져 가면 잘못한 거여. 그런 것은 참다운 참선도 아니고 30년을 따지고 100년을 따지다 하더라도 이론적으로 따져들어가가지고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구는 이치길이 끊어지고, 말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 가는 것이 아니야. 꽈~앙 막혀서 아~알 쑤 없는 의단으로 ‘이-뭐꼬~’ 해갈수록 알 수가 없어져야지, 해감으로서 무엇이 보인다거나 알아지는 거나 얻어지는 것이 있으면 그사람은 참선을 잘못하는 것이여.
조사어록이나 전등록이나 또는 염송 같은 것, 요새 화두를 의리로 따져서 나오는 책도 나와서 읽어 보면 재미도 있고 공안에 대해서 간암이 가기도 하고 그래서 자기도 소견이 난 것처럼 착각을 하기도 하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참선을 하려면 바르게 해야 돼. 책나부래기 읽어가지고 공안을 따져서 알아 보았자 그것을 어디다 쓸것이냐 말이여.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것이여. 생사윤회에 빠져 지옥에 가는데 보탬이 될는지 모르지만,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고 불법까지 망하게 하는데 보탬이 될는지 모르지만, 아무소용이 없는 것이여.
10년, 20년, 참선을 해도 암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고, 나타나는 것도 없고, 알아지는 것도 없다고 해서 그것을 고민할 것은 없습니다. 원래 바른 참선은 바른 깨달음을 얻을 때 까지는 얻은 것이 없습니다. 공안을 타파하여 확철대오를 해서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지 알아지고, 얻어지고, 보이는 것능 부러워 할 필요 없어. ‘이-뭐꼬~’ 아~알 쑤 없는 의심으로‘이-뭐꼬~’.
마지막 죽을 때 까지도 확철대오도 못하고 암것도 얻은 바가 없다고 해도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숨을 몰아쉬면서 깔딱깔딱 넘어 갈라고 할 때도 늘 화두를 들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정진을 잘 한 사람이고, 그 사람이 숨이 끊어지자 마자 도솔천 내원궁에 가서 태어나거나 또는 좋은 곳에 인도환생을 해가지고 다시 이 정법을 만나서 내생에는 일찌감치 젊어서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수십년을 해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해서 한탄하고 후회하고 ‘진즉 딴 공부를 했으면 내가 꽤 얻어진 것이 있고 아는 것이 있을 텐데 괜히 참선을 했다’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활구참선에 대하여 잘못 아신 겁니다. 여기 참석하신 도반 여러 형제자매들은 그런 분이 안계시겠지만 전혀 그런 염려는 하실것이 없습니다.
(S선사, 인천Y선원, BBS불교방송 불교강좌 ‘S스님의 알기 쉬운 불교이야기’2012-11-20일자)
S선사의 방송법문은 교재를 이용하여 강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Y선원의 법회에서 녹음된 테이프를 들려 주는 것이다. 그것도 오래 전의 것이다. 그런데 법문을 듣다 보면 매번 똑 같은 법문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말씀이 반복학습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보았지만, 선사의 법문 역시 매번 같은 이야기의 반복이다. 위 녹취한 선사의 법문은 어느 날자 것이든지 거의 유사하여 법문이 정형화 되어 있다. 그런 법문의 주된 이야기는 이뭐꼬 화두에 대한 것이다.
“책나부래기 읽어가지고”
선사는 이뭐꼬 화두를 드는데 있어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뭐꼬 하라고 한다. 참선이라는 것이 이치를 알아 따져 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꽉 막혔을 때, 그 상태가 공부가 잘 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교리나 이치에 대한 경전 등을 보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다고 말한다. 오히려 “책나부래기 읽어가지고” 이치를 따진다면 생사윤회에 빠져 지옥가는데 보탬이 될 것이라 한다.
선사는 또 10년, 20년 공부를 해도 성과가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죽는 그 순간까지 이뭐꼬 화두를 놓지 않고 있으면 죽어서 도솔천 내원궁이나 좋은 곳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렇게 이뭐꼬 화두에 설명을 하고 난 다음 선사는 갑자기 한문 게송을 구성지게 읊는다.
선사의 법문에서 또 빠짐 없이 등장하는 문구가 ‘정법문중’과 ‘최상승법’이라는 말이다. 조실스님으로부터 전승된 가르침이 정법이고 이를 이어 받은 Y선원이 정법문중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뭐꼬 화두로 대표되는 간화선 수행만이 최상승법이라고 늘 말한다. 그래서 간화선은 소승이나 대승 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수승한 최상승법임을 항상 강조한다. 그런 간화선은 과연 최상승법일까?
간화선은 최상법일까?
지난 10월 19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조계종단 50주년 기념 교수아사리 세미나가 있었다. 이 세미나에서 ‘선불교의 눈으로 본 오늘의 한국불교’라는 제목으로 월호스님이 발제한 논문이 발표 되었다. 논문에서 월호스님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오로지 간화선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런 일이라 하였고 공감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간화선이 한국불교사상의 일부가 될지언정 전부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에서 왜 간화선에 대하여 최상습법이라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 때문이라 한다.
“간화선은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자리에서 사작하는 선법이기에 어떠한 체제도 거치지 않고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수승한 수행법이다.”
간화선에 대하여 최상승법이라고 하는 이유가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는 본래 부처의 성품을 보아 버리기만 하면 깨달아 버리고 성불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에 대하여 월호스님은 의문을 제기 한다. 간화선은 화두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이미 ‘차제’를 거치는 것이고, 이는 조사선의 전통에서 벗어난 것이라 한다.
월호스님은 회산계현의 말을 빌어 오히려 조사선에서 퇴보한 것이 간화선이라 고 하였다. 간화선 이전의 조사선에서는 차제를 설정하는 것 없이 한마디 말이나 방편으로 즉각적인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으나, 간화선의 경우 화두라는 차제를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퇴보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간화선은 조사선의 발전된 형태로 보기 보다 시대적 변용에 불과하고 오히려 조사선에서 퇴보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래서 간화선에 대하여 최상승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마음을 가져오너라. 편안케 해주리라.”
월호스님은 세미나에서 간화선이라는 것이 최상승법도 아니고 최하승법도 아니라고 하였다. 단지 시대적 흐름에 맞추어 잘 살려진 하나의 수행방법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비록 선불교의 전통이 한국불교를 지탱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는 제행무상의 이치에 입각하여 급격하게 변하는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월호스님에 따르면 선의 본래기능은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한다. 이는 선의 초조인 보리달마와 2조 혜가사이의 대화에서 유래 한다. 다음과 같은 문답이다.
달마대사에게 혜가가 물었다.
“부처님의 법인(法印)을 들려주십시요.”
달마가 대답하였다.
“부처님의 법인은 남에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혜가가 다시 물었다.
“저의 마음이 편치 않으니, 스님께서 편안하게 해주소서.”
대사가 답하였다.
“마음을 가져오너라. 편안케 해주리라.”
혜가가 답하였다.
“마음을 찾아도 끝내 얻을 수 없습니다.”
달마가 답하였다.
“그대의 마음을 벌써 편안하게 해주었느니라.”
혜가는 이곳저곳 가르침을 찾아 다녔지만 궁극적으로 불안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달마대사의 “마음을 가져오너라”라는 말 한마디에 마음의 실체가 없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리고 크게 깨달았다. 다만 불안하다고 생각하였을 뿐, 실제로 불안한 마음은 아무리 찾아 보아도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보리달마의 가르침을 ‘대승안심지법(大乘安心之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보리달마의 가르침을 보면 마치 위빠사나 수행에서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림(sati)하는 것과 같다. 원인과 조건에 따른 마음만 있을 뿐인데, 별도의 불안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처럼 마음을 찾는 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와 같은 것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보리달마의 안심법문은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알아차림과도 같은 것이다.
번뇌를 야기하고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이와 같이 초기불교적 성격의 안심법문으로 대표되는 참선은 보리달마 이후 육조혜능을 거쳐 간화선 이전까지 조사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면서 발전되었다. 그러나 간화선이 등장하면서 이전의 조사선과 구별이 되었는데, 이는 화두라는 차제를 둔 것이다.
화두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즉각적인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하기 때문에 최상승법이라 하는데, 화두를 참구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의심이 생기고 10년, 20년 평생을 해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것임에 틀림 없다.
더구나 삽바사와경(모든 번뇌의 경, M2)에 따르면 나를 찾는 수행이라는 것이 번뇌을 일으키는 요인이라 하였고, 또 상가라바경(S46:55)에 따르면 의심이라는 것이 마치 흙탕물처럼 마음을 혼탁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화두라는 차제를 이용하여 주인공, 진여불성, 참나를 찾는 나를 찾는 수행이 번뇌를 야기할 수 밖에 없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인하여 마음이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보리달마의 안심법문에서 한참 비켜 난 것이다. 그래서 월호스님은 간화선이 최상의 수행, 최상법이 될 수 없다고 말하였고, 그 대신 보리달마의 안심법문을 특징으로 하는 조사선에 더 방점을 둔 것이다.
월호스님의 힐링선(healing禪)
월호스님에 따르면 안심법문은 마음을 지금 여기에 두는 것이라 한다. 먼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안심 즉, 마음을 편한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참선이라 한다. 그래서 참선은 ‘안심법문’이고, 이를 지도하는 선사는 ‘심성치료사’라고 말한다. 그래서 월호스님은 힐링선(healing禪)을 주창하였다.
월호스님의 주장은 참으로 신선하고 놀라운 것이다. 아니 지극히 당연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보리달마의 안심법문이라는 선의 본래의 모습에 대하여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시대가 요청한 것이고 또 조사선의 장점을 잘 살린 것이라 한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힐링선의 제창자인 월호스님은 다음과 같은 호쾌한 게송으로 논문을 마무리 하였다.
돌 咄!
휘영청 달이 밝아 강산은 고요한데
한바탕 웃음소리 천지가 놀라겠네.
우하하하하!
2012-11-2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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