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마음의 거울이 있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2. 25. 16:15

 

 

마음의 거울이 있다면

 

 

 

사람들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생활을 한다. 특히 스마트폰 보급이 일반화 되어 있는 현시점에서 언제 어디서나 접속이 가능하다.

 

수 많은 글을 받는데

 

인터넷활용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는 시대에 수 많은 글을 보게 된다. 거의 대부분 익명을 전제로 활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성이 무엇인지, 나이가 몇 살인지,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다.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남겨 진 글밖에 없다.

 

종종 댓글을 받는다. 모두 답을 하여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기만 하다. 글을 쓰는 행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큰 마음 먹고 글을 쓴 이들에게 답신을 제 때에 그리고 모두에게 못하는 것에 대하여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글쓴이들을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한 부류는 공감한다는 긍정적인 이야기이고, 또 한 부류는 공감하지 않는다는 부류이다. 그경우 분노의 글쓰기로 보여진다. 거친 말과 정제 되지 않는 표현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충격적인 말씀?

 

최근 어떤 이가 글을 남겨 주었다. 올린 글에 대하여 동의 할 수 없다는 취지로 작성된 글이다. 아마도 상대방의 글쓰는 행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의 발로라 보여진다. 다음과 같이 마성스님의 글을 이용하여 남겨 놓은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붓다는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에서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말씀을 하고 있다.

난다여, 너는 나를 믿지 말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따르지 말라. 나의 말을 의지하지 말고 나의 형상을 보지 말라. 사문이 소유한 견해를 따르지도 말며, 사문에게 공경심을 내지도 말라. ‘사문 고타마가 나의 위대하신 스승이다’라고 말하지도 말라. 그러나 다만 내가 스스로 증득한 법에 대하여 홀로 조용한 곳에서 사량 관조 성찰하고, 항상 많이 수습(修習)하여 용심(用心)의 관찰한바 법을 따라 바로 법의 관상(觀想)에서 정념(正念)을 성취해 머물러 있음이 옳은 일이다.

이와 같이 붓다는 자신조차도 맹신하거나 맹종하지 말고 각자 스스로 진리를 수행해 가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자신은 예경의 대상도 아니며, 승단의 지도자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붓다가 기회 있을 때마다 제자들에게 강조한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팔리삼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정형구이다.

이 정형구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비구들이여, 자기의 섬에 머물고 자기에게 귀의하라.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법의 섬[法洲]에 머물고 법에 귀의[하라.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라는 것이다. 이 정형구는 불교의 특질을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Y님 댓글에서)

 

 

마성스님의 원글을 보면 나를 믿지 말며~”로 시작 되는 글은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의 글이라 한다. 마성스님의 견해에 따르면,  부처님의 말씀도 맹신하면 안된다는 취지로 적성된 글이다.

 

하지만 마성스님은 이어지는 글에서 자귀의 법귀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른 것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가르침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눈에 보아도 두 가지 경전적 근거는 모순이다. 한편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맹신하면 안된다고 해 놓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에 의지해야 된다고 말한다.

 

왜 이런 모순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북방전승경전의 모델이 되는 설일체유부의 경전과 남방테라와다 불교의 빠알리니까야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참고로 마성스님이 언급한 설일체유부의 경전에 나오는 나를 믿지 말며~”로 시작 되는 경은 빠알리니까야에서 찾을 수 없다. 그대신 빠알리니까야에서는 초지일관 가르침(담마)에 의존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야 일관성이 있다.

 

만일 부처님이 이 경전에서는 이런 말 하고, 다른 경전에서는 반대로 말한다면 불자들은 커다란 혼란을 겪을 것임에 틀림 없다.

 

와서 보라!

 

그래서 부처님은 빠알리니까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스왁캇또 바가와따 담모

sandiṭṭhiko                       산딧티꼬

akāliko                           아깔리꼬

ehipassiko                       에히빳시꼬

opanayiko                        오빠나이꼬

paccatta veditabbo viññūhī   빳짯땅 왜디땁보 윈뉴히

 

 “세존께서 잘 설하신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작가경-깃발경-Dhajaggasutta- The Flag on Top, 상윳따니까야 S11:3.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부처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와서 보라는 것이고,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라 하였다. 그 어디 빠알리니까야에도 너는 나를 믿지 말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따르지 말라. 나의 말을 의지하지 말고~”와 같은 충격적인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잘 설해진 것으로 현세의 삶에 유익한 것이라 하였다. 이것이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다. 빠알리니까야 그 어디에도 충격적인 나를 믿지 말며~”라고 말하신적이 없는 것이다.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은 부처님

 

부처님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으셨다. 이와 관련하여 금강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須菩提              수보리

如來是眞語者        여래시진어자

實語者              실어자

如語者              여어자

不誑語者            불광어자

不異語者            불이어자

 

여래라는 것은 진실된 말을 하는 사람이며,

실다운 말을 하는 사람이며,

변하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이며,

남을 속이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이며,

진리와 다르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금강경 제14 이상적멸분)

 

 

부처님의 말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초지일관 진리만을 설하였지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불광어자(不誑語者)의 경우 속일 광()자를 써서 속이는 말을 하지 않는 자라 하였다. 이쪽에서 이런 말하고, 저쪽에 가서 또 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설일체유부에서 인용된 나를 믿지 말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따르지 말라. 나의 말을 의지하지 말고~”라는 문구는 빠알리니까야에 없는 말이므로 부처님의 부처님의 말씀으로 볼 수 없다.

 

일반적으로 빠알리니까야 외 다른 경전은 정전으로 보지 않는다. 산스크리트로 옮기는 과정에서 왜곡되었고, 또 서역을 거쳐 한역하는 과정에서 왜곡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의 경우 구전 된대로 원형의 훼손 없이 유지되어 온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래서 설일체유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충격적인 이야기는 없고, 한결같이 어느 니까야에서나 도처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설일체유부의 문구를 이용하여 비판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구를 이용하여 비판하는 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

 

깔라마경에서

 

회의론자들이 또 하나 근거로 삼는 경이 있다. 그것은 깔라마경이다. 깔라마경에 쓰여 있는 내용을 근거로 하여 누구의 말을 들으실 이유가 없이 스스로 공부하고 체험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훈계조로 말한다.

 

그렇다면 깔라마경에서 부처님은 어떤 이야기를 하셨을까. 깔라마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소문으로 들었다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우리의]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 해서, 혹은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스스로가이러한 법들은 해로운 것이고, 이러한 법들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이런 법들은 지자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고, 이러한 법들을 많이 받들어 행하면 손해와 괴로움이 있게 된다.’라고 알게 되면 그때 그것들을 버리도록 하라.”

 

(깔라마경, 앙굿따라니까야 A3:65, 대림스님역)

 

 

깔라마경에 실려 있는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외도의 스승에 대한 이야기이다.

 

빠알리니까야 그 어디에도 설일체유부의 경전에 있는 나를 믿지 말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따르지 말라. 나의 말을 의지하지 말고~”같은 내용이 없다. 마찬가지로 깔라마경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맹신하지 말자는 내용이 전혀 없다.

 

인정하려 하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론자들은 깔라마경의 예를 들어 누구의 말을 들으실 이유가 없이 스스로 공부하고 체험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명백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다. ‘누구의 말을 들을 필요 없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도 듣지 않겠다는 것으로도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경전보다  오로지 자신의 판단에 따라 스스로 공부하고 체험 한 것만 받아 들이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너무 경전에 의존하지 말자는 이야기이다.

 

불자들이 경전에 의존하지 않으면 어디에 의존해야 할까. 부처님은 빠알리니까야에서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고 자기자신과 가르침에 의지하라고 하였다. ‘자귀의 법귀의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회의론자들은 경전에 의존하는 것 조차 맹목적인 믿음으로 치부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경전도 가려서 보라고 한다. 과연 경전을 보고서 한말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빠알리니까야의 경우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을 빼고 더하고 볼 것이 없다. 모두 다 중요한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런 가르침은 맹신이 아니라 합리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일체유부의 경전을 근거로 하여 경전을 맹신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빠알리 경전에 근거한 글쓰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고약한 심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음의 거울이 있다면

 

익명을 전제로 한 인터넷 공간에서 상대방을 알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필명과 남겨진 글로 밖에 판단이 서지 않는다. 따라서 남겨진 글이 그 사람의 얼굴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음에도 얼굴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오로지 글로서만 소통하는 인터넷 공간에서 판단할 수 있는 근거자료는 글 밖에 없는데, 글을 통하여 어느 정도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런 마음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사람들의 생긴 모습은 모두 다 다르다. 성향 또한 천차만별이다. 글을 통해서 본 마음을 보면 마음에도 등급이 있다. 예의 바르고 품위와 격조 넘치는 글은 아름답고 잘생긴 미인형의 얼굴이라 볼 수 있다. 반면 무례하고 거친 말을 쓰며 근거 없는 비방을 일삼는 자의 글을 보면 아귀나 아수라만큼이나 추해 보일 것임에 틀림 없다. 글을 통해서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는지 추한 마음을 가졌는지 누구나 판단할 수 있다.

 

 

 

2012-12-25

진흙속의연꽃